홍길복 목사의 복음서에 나타난 비유공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때를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서 21:29~33)
(참고: 마태복음 24:30-35 / 마가복음 13:28-31)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는 성경에도 제일 자주 등장하는 나무이고 중동지역의 3대 나무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중 무화과나무는 그 역사가 퍽 길어 창세기 3장에서 부터 등장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후 눈이 밝아져 벌거벗은 줄을 알게 된 아담과 이브가 처음으로 치마을 엮어 만든 것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無花果>라는 글자 그대로 <꽃이 피지 않는 나무> 혹은 <꽃이 없는 나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식물학자들에 의하면 무화과나무는 꽃이 아예 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열매 속에서 꽃이 핀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어 Fig tree는 <무화과>라고 번역할 것이 아니라 <은화과 隱花果> -꽃이 속으로 숨겨진 나무 – 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고도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1년에 두번 열매를 맺습니다. 높이 자랄 때는 그 키가 약 12미터 까지 자라나는 무화과나무는 상록수가 아니라 낙엽수입니다. 그래서 봄이 오면 잎을 내기 시작하고 여름이 되면 그 잎이 아주 무성해 지다가 가을에 접어들면 잎이 다 떨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과 중동 사람들은 포도나 사과 보다 무화과를 훨씬 많이 먹습니다. 그냥 생으로 먹기도하고 말려서 먹기도 하지만 빵으로 만들어서 마치 식빵처럼 먹기도 합니다. 또한 무화과는 널리 약용으로도 쓰여저 상처에 바르는 치료제가 되기도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우리나라의 무궁화 처럼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국가나무, 즉 국목이요, 국화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그 잎사귀가 아주 넓어서 사람들이 그 그늘 아래에 모여 쉬기도하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서로 교제하는 등, 마치 오늘날의 카페와 비슷한 역활을 하기도 합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무화과나무는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는데 열왕기상 5장에는 솔로몬 치세에서 이스라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무화과나무는 재난과 심판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호세아는 <그들이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하며 들짐승들에게 먹히게 하리라>(2:12)고 하면서 거칠어지는 무화과나무를 통하여 이스라엘나라가 멸망하게 될 것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멸망과 더 나아가 세상과 역사의 종말을 예고하고 계십니다.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아라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아라> 쉽게 의역된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무화과나무를 보아라. 다른 나무도 다 마찬가지다. 잎이 나기 시작하면, 너희는 한번만 보아도 여름이 가까이 다가온 줄 안다. 이일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로 알아라. 이것은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어느 훗날의 세대에게만 주는 말이 아니라 이 세대에게도 주는 말이다.> 무화과나무를 포함하여 자연계 속에 있는 나무 잎사귀들이 변하는 것을 보거든 세상의 마지막이 점점 가까이 오는 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식물들과 자연계는 인간들에게 역사와 세상의 끝날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현상이 변하는 것을 보거든 시대와 역사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알아야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무화과나무는 자연계의 변화, 생태계의 변화, 환경계의 변화를 감지하게 해 주는 나무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이 무화과 나무의 잎사귀가 피고, 무성해지다 지는 이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이라는 한 특정국가를 포함하여 온 세상이 점점 더 급박하게 역사의 끝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연계, 생태계, 지구촌 모두의 위기를 알게해 주는 상징적 스토리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처음 부터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비유다. 상징이다. 예언이다. 깊은 뜻이 들어있다>는 말씀입니다
일차적으로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가르치는 문자적 해석은 이런 것입니다. 기원후 70년 경 로마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되어 지구상에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가 완전히 사라지고 없어지게 될 것에 대한 상징적 이야기 입니다. 무화과 나무의 잎사귀가 피고 지듯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한 국가와 민족이 이제는 질 때가 되어온다는 말씀입니다. 성전은 파괴되고 모든 유대인들은 산지 사방으로 흩어져 나라 없는 백성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AD 1세기 유대인이라고 하는 한 민족의 종말,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한 나라의 멸망을 상징하는 이야기라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무화과나무를 대표로하는 자연계의 변화가 주는 의미를 보다 더 넓은 안목에서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등장하는 무화과라는 한 나무, 한 식물의 비유를 통하여 변질되고 파괴되어가는 환경, 생명을 잃어가는 세상, 종말을 재촉하는 인간들의 어리석음 같은 행동들이 역사의 종말을 재촉하고 있다는 이야기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2천년 전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의 종말 이야기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21세기 생태계의 변화가 지구촌 모두에게 멸망을 경고해 주는 스토리로도 볼수있게 해 준다는 말씀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의역대로 무화과 나무의 비유는 <바로 오늘 우리 세대에게도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않되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워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에 새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로 알아라> 오늘 우리 시대에서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자연계에 변화가 눈에 띠게 도드라지면 한번 생각해 보아라! 이러다가 정말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닐까? 이 세상이 점점 더 끝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생태계가 달라지고 환경의 변화가 도드러지게 되면, 기온의 변덕과 양극화가 점점 더 심해져서 지구의 한 쪽은 점점 더 기온이 올라가는데 또 다른 편은 점점 더 추워진다면,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 내리면서 해수면이 급격하게 높아지면, 이산화 탄소의 농도가 높아져 도시 마다 공기가 점점 더 나빠져서 숨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공해가 심각해지면, 계속해서 장마가 이어지거나, 곳곳에서 산불이 나거나, 전에 없던 태풍이 자주 일어나면, 그럼 제발 좀 깨달아 알아라. 지구 멸망의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구나! 역사의 종장이 성큼 다가오는구나! 주님이 재림하실 때가 가까이 오고 있구나! 말세, 말세 했더니 이것이 진정 말세의 징조로구나!> 하면서 좀 심각하게 생각하고 깨달으라는 말씀이라고 보시지 않으십니까?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자연계를 통하여 들려 주시는 하늘의 음성으로 들을 줄 알아야한다는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무화과 나무를 보아라. 그리고 다른 나무들도 좀 쳐다보아라. 자연이 어떻게 망가지고 있는지, 지구는 얼마나 빨리 온난화가 되고 있는지, 지금 인간들이 사는 세상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climate change 와 global warming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거기에는 무슨 의미와 뜻이 담겨 있는지, 좀 생각해 보라>는 경고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이 비유는 그져 나무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스토리는 단순히 그 옛날 이스라엘나라의 멸망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연과 시대의 징조를 제발 좀 깨달아 알고 정신을 차리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우리 인간들이란 똑똑한 것 같애도 기실 미련하기 그지없는 존재입니다.
19세기 말 독일의 생물학자 하인즈만 (Heinzmann)이 했던 <끓는 개구리 실험, Boiling Frog> 이야기는 많이 아실 것입니다. 개구리 한마리를 펄펄 끓는 물 속에다 넣었습니다. 그러자 그 개구리는 곧바로 그 뜨거운 물에서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똑같은 개구리를 미지근한 물 속에다 넣고 서서히 물을 덥혔습니다. 그러자 그 개구리는 거이 물이 팔팔 끓어올라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그냥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다가 죽었습니다. 급하게 닥치는 재난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은 전혀 깨닫질 못하고 둔감한 것이 어찌 개구리뿐이겠습니까?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도 갑자기 다가오는 고통은 알아도 서서히 접근해 오는 죽음은 감지하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인간이란 관성의 법칙에 따라 <서서히 죽어가는 자기>는 알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미국 시카고의 도심에는 <지구시계>라고 하는 아주 특별한 시계 하나가 걸려 있습니다. 밤 12시, 자정이 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완전히 멸망하는 것을 알려주는 시계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계의 분침이 10년 전인 2012년에는 6분 전 12시였는데, 금년 2022년에 들어서서는 5분 전 12가 되었다고 합니다. 10년 사이에 1분이 줄어들었습니다. 지구 종말의 시간이 이젠 5분 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푸틴과 김정은을 주축으로 무섭게 드리워진 핵무기와 핵전쟁의 현실적 가능성, 끊임없이 이어지는 각종 국지전들과 죽고 죽이는 살륙전들, 멈출줄 모르는 자연파괴와 지구의 온난화, 미국과 제 1세계가 선도하는 넘쳐나는 이산화탄소의 배출, 나라 마다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각종 쓰레기더미들과 플라스틱들과 일회용 물품들 – 이는 2000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떨어졌지만 우리 시대의 한 정직한 환경운동가 앨 고어가 말한대로, 우리 모두의 인간성 속에 도사리고 있는 편리함과 안일함을 쫓아가는 탐욕들이 빚어내는 <불편한 진실, An Inconvenient Truth>입니다. <설마 그까지 전기 좀 더 쓰고, 자가용 자동차 좀 더 타고, 댐 몇개 더 만들고, 쓰레기 분리 수거 좀 잘 못하고, 재활용 않하고, 실내 온도 좀 높이고, 전기제품 좀 더 활용하고, 전기 플러그 좀 그냥 꽂아놓는다고 해서 진짜로 지구의 종말이 오겠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설마가 사람 죽이는 수가 있습니다> <미지근한 물이라고 생각하고 따뜻해서 참 기분좋다고 했던 것이 어느 순간엔가는 개구리의 목숨을 앚아갑니다> <그러므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 (벧전4:7) 종말을 바라보며 주님의 날을 기다리던 베드로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오늘날 생태계와 환경 파괴에 대해 가장 무거운 책임의식을 갖어야 할 단체는 기독교이고, 따라서 이를 극복해내어 죽어가는 생태계를 되살려 내기 위해서는 그 누구 보다도 기독교인들이 앞장을 서야한다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빌 클린턴이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 –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It’s the economy, stupid !> – 라는 말을 프린스턴대학 교수였던 린 화이트(Lynn White)는 이렇게 패러디했습니다. <바보야, 문제는 기독교야 ! It’s the Christian, stupid !> 사실 우리 기독교는 아주 오랫동안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창조 후 사람을 만드신 다음에 하신 5가지 말씀을 너무 우리 인간 중심적으로, 너무 자의적으로만 해석해 왔습니다. <생육하라 ! 번성하라 ! 충만하라 ! 정복하라 ! 다스리라!>는 창세기 1장 28절 말씀을 지나치게 사람 중심으로만 보고 하나님이 선물로 허락해 주신 이 자연계는 마치 때려 부시고 파괴하고 정복해 버려도 괜찮을 대상인 양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행동해 왔습니다.
특별히 신학자들과 설교자들과 선교사들은 늘 이 세상과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아프리카나 남미나, 아시아나, 남태평양의 섬나라들은 미개하고, 어리석은 땅이요, 따라서 어서 속히 정복해서, 숲은 불태워 길과 도시를 만들고, 물은 막아서 댐과 다리를 놓고, 땅은 철근과 콩크리트로 버물러 흉물로 만들고, 유전을 개발하고 다이아몬드를 찿아내어 부자들과 부자 나라를 잘 살게해 주는 것이 마치 문명의 발전이요,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인 것 처럼 주장해 왔습니다.
특별히 오늘 같이 종교개혁 505주년을 기념하는 주일 아침, 우리는 지난 날, 이처럼 정복주의적이며 식민주의적 역사관이나 신앙관에 근거해서 인간의 탐욕을 부추겼 왔던 우리 교회의 잘못을 철저히 반성하며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됩니다. <모든 생태계와 환경의 위기는 그 원인이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가르치고, 잘못 적용한 데서 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는 상당 부분 기독교 신학의 책임이다> 화이트의 정직한 신학적 반성문을 다시 읽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자연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자연과 더불어 공존하고, 공생공사해야만 합니다. 자연이 살아야 사람도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이 죽으면 사람도 죽습니다. 자연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같이 살아야 할 친구요 한 몸입니다. 지난날 멋도 모르고 정복자의 논리에 따라 자연을 파괴했던 것이 이제는 화가 되어 자연이 인간에 대한 복수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최근 국제환경운동단체인 <오션 클럽, Ocean Club>에서는 하와이로 부터 로스안젤리스 사이의 태평양에서만도 모두 14만 5천 킬로의 플라스틱 쓰레기를 수거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 남한의 16배나 되는 플라스틱 쓰레기섬들이 흩어져 있다는 보고도 들어 있었습니다. 정말 이러다가는 모두 함께 몰살할 날이 곧 올터인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천지 사방에 함부로 쓰레기들을 내다 버리는 우리는 진짜 바보천치아닙니까?
허지만 이런 위기 속에서도 깨달아 알고, 지구 종말의 날, 세상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 다행스럽게도, 인류 멸망의 날을 조금이라도 미뤄보고 늦추어 보려고 애쓰는 작은 몸부림들이 우리 주변에서는 적지 않게 펼치어지고 있습니다. 나만 살 것이 아니라, 내 아들 딸들, 손자 손녀들, 증손들도 더불어 함께 지속 가능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되고, 사람도 살고, 땅도 살고, 하늘도 살고, 바다도 살고, 짐승도 살고, 나무도 살고, 너도 살고, 나도 살려고 애쓰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우주와 지구, 인간과 자연을 함께 살리고, 지키자는 운동 입니다. 지난 날의 자연 파괴적이며 자연 정복주의적 논리를 정당화해 주었던 정복주의적 신학 대신, 새로운 신학적 반성과 논문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생태신학적 노력들, 새로운 개념의 영적 설교와 기독교 교육들이 펼치어지고 있습니다.
지구를 지키는 날, 지구를 지키는 행사와 활동들, 지구 지키기 식단, 쓰레기 줄이기, 플라스틱 않쓰기, 재활용 하기 운동들이 아주 빠르게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영어로는 3개의 R자로 요약되는 운동입니다.
첫째는 Rubbish Reduce – 쓰레기 줄이기 운동입니다. 될수 있는 한 어떻게 든지 쓰레기를 좀 덜 만들자는 것입니다. 특히 이점에서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많이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네 한국인들의 음식은 서양 음식에 비해서 버리는 것이 너무 지나치게 많다는 점입니다. 쓰레기 덜 만들기 운동입니다.
둘째는 Rubbish Reuse – 쓰레기 다시쓰기 운동입니다. 한번 썻던 것들 중에는 물로 닦거나 소독약을 약간만 뿌리면 얼마든지 다시 쓸수 있는 것들도 적지 않은데 우리는 무조건 쓰레기통에다 버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옷도, 신발도, 가전제품도, 가구도, 일용품들도, 무조건 쓰레기 통에다 버리기 전에 다시 쓸수 있는 것은 없는지 한번 더 살펴봅시다.
셋째는 Rubbish Recycle – 쓰레기 재생운동입니다. 물론 이것은 국가나 기업체들이 나서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쓰레기 재생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가정에서 부터 철저하게 쓰레기 분리 수거와 분리해서 버리기를 실천해야 합니다. 집에서 분리하여 모아둔 재생쓰레기는, 어느 집이나 어느 아파트에나 다 준비되어 있는 노란통 Recycle Bin에다 버림으로 쓰레기 수거 회사에서는 그걸 따로 모아서 재생 종이, 재생 병, 재생 플라스틱, 재생 박스 등등, 만들수 있는 것이 아주 많습니다.
꼭 기억 합시다. 3가지입니다. Reduce, Reuse, Recycle – 이것은 단순한 생활운동이 아니라 일종의 신앙운동이랄 수도 있습니다. 꼭 기도운동이나 전도운동만이 신앙운동이 아닙니다. 21세기 생태계의 총체적 위기가 밀려오는 이 지구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쓰레기 덜만들기운동, 쓰레기 다시 쓰기운동, 쓰레기 분리수거 잘 하기 같은 것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솔선수범해 나가야 할 지구살리기 운동이며 환경지키기 운동이며 더 나아가 녹색기독교운동, Green Christianity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기독교의 영성운동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사다가 먹고 마시고 쓰다가, 그냥 생각없이 버리는 빈병이나 플라스틱 용기들과 쓰레기들은 별것 아닌 것 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이 땅과 바다를 오염시키고 쓰레기통으로 만들어 모두를 죽게 만드는 심각한 주범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NSW주에서는 지난 5년 사이 분리 수거와 쓰레기 재활용 운동을 통하여 약 80억개 이상의 컨테이너들을 모았습니다. <돌려주고 돌려받기 운동> 영어로 운동이라고 하는데, 이는 빈병, 빈깡통, 플라스틱 용기같은 것들을 모아서 마트나 클럽이나 쇼핑쎈타로 다시 돌려주어 재활용하도록 하면, 그 돌려준 캔이나 병 하나, 하나에 10쎈트씩 돈을 주는 운동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지난 5년 동안 우리 주에서는 약 80억개의 빈병과 플라스틱용기들이 모아졌고 그것이 돈으로는 8억 달라가 되어 그걸 모아온 사람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이 운동은 단순히 쓰레기 모으기를 통하여 작은 돈을 번다는 취지 이상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St. Vincent나 Vinnies나 여러 지역교회에서는 물론이고 많은 기독교 단체와 기관들이 이 운동에서 큰 역활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시대 기독교가 반드시 해야 할 사회운동이요, 신앙운동 중 하나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이 설교 준비가 가능하도록 저를 부추겨 주시고 또 도움말을 보내주신 우리교회 노명숙집사님의 글을 여기 제 설교문에 첨부하여 기록으로 남겨 놓고, 또 이를 여러 성도들과 함께 공유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날 인류의 역사를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로 구분한다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플라스틱시대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1846년 스위스에서 처음 개발되기 시작한 plastic은 이제 우리 삶 곳곳에서 그 수를 헤아릴수도 없이 많이, 또 다양하게 쓰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플라스틱은 그 편리함 만큼이나 엄청나게 크고 많은 환경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연간 800만톤 이상의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그냥 바다로 버려지고 있습니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비롯하여 5대양에는 현재 한반도 보다 훨씬 더 큰 쓰레기 섬들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고 계시겠지만 바다나 땅 속에 버려진 쓰레기들이 썩는데는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유갑 하나가 썩는 데는 5년, 비닐 봉지 하나가 썩는 데는 20년, 깡통은 50년, 배터리는 100년, 플라스틱 병 하나는 450년, 일회용 기저귀나 스트로폼 하나가 삭는 데는 50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고민하며 생각하던 중 저는 쓰레기 문제에 관심이 더해 지면서 부족하지만 저 나름으로 작게 실천하는 것들 몇가지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 재활용을 할 때는 깨끗히 씻어서 말리자 2) 1회용 제품은 가능한한 사용을 자제하자 3) 비닐 봉지는 씻어서 햇볕에 말려 모아서 수거함에 버리자 4) 플라스틱은 재활용으로 만든 제품을 사자 5) 샤워한 물은 받아서 변기에 버리자 6) 음식물은 남기지 말자 7) 1회용 컵은 사용하지 말자. 특히 교회에 올 때는 내 개인 컵을 가져오자 8) 배터리는 수거함에 버리자 자연재해가 점점 일상이 되어가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자초한 것입니다. 우리 부터라도 불편하고 신경쓰여지는 일이지만 그래도 작은 일 하나라도 실천해 간다면 언젠가는 큰 변화를 경험할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나 하나쯤이야>가 아니라 <나 하나 만이라도>라는 생각으로 다함께 힘을 모아 주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보내주신 노명숙집사님의 아름다운 마음과 신앙의 글을 읽어드리면서 오늘우리에게 주셨던 처음 성경 말씀으로 마무리 하고저 합니다.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 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아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아라> 오늘의 설교제목은 이 말씀에서 추수린 것입니다. –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때를 알아야 합니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