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복음서에 나타난 비유공부 (4)

본문 : 마태복음서 20장 1 – 16절
제목 : 내가 잘못한 것이냐? 네 생각이 틀린 것이냐?
내가 잘못한 것이냐? 네 생각이 틀린 것이냐? (마태복음서 20장 1~16절)
오늘의 비유는 흔히 ‘포도원 품꾼의 비유’라고도 하지만 의미상으로는 ‘위대한 반전 스토리’라고도 부릅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서에만 나오는 마태의 특수자료 중 하나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않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는 유대인들이 모여서 만든 유대인 공동체로 부터 이 비유를 수집했고 또 그 유대인 공동체를 위하여 이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는 유대사람인 마태의 신학적 성격과 특징들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른 비유와 마찬가지로 이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도 그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천국’ 즉 ‘하늘나라’ 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천국’이란 단어가 33번이나 나오는데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는 5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마가나 누가는 주권이나 통치적 성격이 강한 ‘하나님 나라’ 즉 ‘신국’(神國) – Kingdom of God – 이라고 쓴 것을 마태는 공간적 의미가 강한 ‘하늘나라’ 즉 ‘천국’(天國) – Kingdom of Heaven -이라고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대적 전통에 의하면 ‘하나님’이라는 이름이나 단어는 가능한한 직접부르지않는 것이 불문율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말라’는 십계명 제 3계명에 충실하기 위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하’자도 함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라고 하든 ‘하늘 나라’라고 부르던 그 본래의 뜻은 비슷합니다. 즉 ‘우리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 곧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나라’ 라는 의미에서 복음서는 ‘하늘나라’ 혹은 ‘하나님 나라’ 라는 말을 섞어서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데나리온’이란 로마의 화폐단위 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 화폐인 므나, 드라크마, 렙돈과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 앗사리온, 고드란트가 함께 혼용되고 있습니다. 흔히 ‘한 데나리온’은 날품을 파는 일일 노동자들에게 주는 하루 품삯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월 좋을 때의 이야기이고 경기가 나쁠 때는 반 데나리온이나 심지어는 4분지 1 데나리온까지 내려갔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한글판 번역인 ‘메시지’에서는 아예 ‘5만원’ 이라고 했습니다.
‘장터’라는 말로 번역된 ‘쉼포네오’란 ‘소리를 지른다’는 말입니다. 이른 새벽부터 인력시장에서 날품을 사려는 사람들과 품삯을 놓고 흥정하느라 시끌버끌 하게 떠드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제 3시는 오늘날로 치면 아침 9시이고, 제 6시는 낯 12시이고, 제 9시는 오후 3시입니다. 그리고 제 11시는 해질 무렵인 저녁 5시입니다.
‘상당하게 주리라’에서 ‘상당하게’란 ‘디카이오스’란 말로 쓰는데 그 뜻은 ‘정당하게’ 혹은 ‘공의롭고 바르게’ 쳐주겠다는 말입니다.
7절에 ‘너희들도 포도원에 들어가라’는 주인의 말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 이념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해는 저물어 가는데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 절망 속에서 ‘오늘은 우리 식구들이 뭘 먹어야하나’ 하며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 까지 차별없이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잘 그려집니다.
8절은 맨 마지막 저녁 5시경에 들어와서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부터 시작하여 아침 9시 부터 종일토록 뼈빠지게 일한 사람까지 꺼꾸로 일당을 주는 모습입니다. 물론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은 은근히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우리는 더 주실 거야’ 라고 기대했을 수는 있습니다. 해질 무렵에 들어와서 겨우 한시간만 일한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씩 받는 것을 보니 그런 기대감이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사실 아침에 포도원에 들어올 때 주인이 했던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닙니다. 주인은 약속한대로 처음이나 나중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고 공정하게 대했습니다. 지금 포도원 주인으로 상징이 된 하나님께서는 우리네 보통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전통적인 생각이나 사고방식을 여지없이 무너뜨리십니다. 먼저 믿기 시작했다고해서 더 받는 것도 아니고 늦게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고해서 덜 받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홍길복이 50년 목회했다고해서 다섯 데나리온을 받거나 이은숙이 목사된지 5년도 않되었다고해서 반데나리온을 받게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단언하건데 한경직이나 김삼환이나 조용기는 장차 천국에서 다섯 데나리온을 받게되고 ***이나 ***이나 ***은 한 데나리온을 받게되는 사고는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시고 균등하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믿은시간이나 신앙생활의 길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면류관은 하나씩이면 충분합니다. 순교자나 성자라고해서 면류관 두개를 받는 것이 아니며 십자가의 강도라고해서 반쪽짜리 면류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원리로 이해하시면 않됩니다.
그런데 11절 이하에서 드디어 먼저 온 사람들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공귀조’ 라는 헬라말은 뒤에서 부시럭거리며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는 모습을 그려줍니다. 그런데 보십시요. 지금 이 사람들은 왜 볼멘 소리를 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어디 정당한 임금을 못 받았습니까? 아니면 주인이 약속을 어겼습니까? 아닙니다. 그들도 약속한 대로 정당한 일당을 다 받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공평한 대우를 못 받아서가 아니라 자기들 보다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사람들이 자기들과 똑같이 대우받는 것이 배가 아팠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포도원 주인의 관용과 자비, 사랑과 긍휼이 속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이란 남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존재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한테 못해주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한테 잘해주는 것을 ‘불공평하다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까지도 자기에게 만은 특별한 혜택을 베풀어 주셔야 공의로운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디어 13절 이하에서 포도원 주인은 ‘친구여! 나는 그대에게 잘못한 것이 없네!’ 라고 선언합니다. ‘불과 한시간 만 일한 그 사람에게도 자네한테 약속했던 것과 똑같이 주는 것이 바로 내뜻일세. 내 것을 가지고서 내가 내 마음대로 베풀고 쓰는 것이 자네한테는 악하게 보이는가!’ 14절과 15절 말씀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내 뜻이다! 내 마음이다 !’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고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9)
이 비유는 두가지 핵심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는 하루하루, 겨우겨우 살아가는 날품팔이 같은 우리 인생 모두를 향하신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사랑에는 절대로 차별이 없다는 점입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한데나리온 씩 주시는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는 인간적 능력이나 헌신, 봉사에 따른 일체의 차별이 없습니다. 본문에는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햇볕을 비추어 주시고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사랑의 속성이 잘 나타납니다.(마태 5:45)
둘째는 하나님의 이처럼 공평하면서도무조건적인 사랑을 헐뜯고 시비하고 미워하는 인간의 못된 죄성을 깨우칩니다. 인간성 속에 도사리고 있는 오만과 불평불만에 대한 경고 입니다. ‘제발 좀 선한 마음을 가져라! 제발 좀 남들보다 더 받고 더 잘살려고하지 말아라! 내가 불러주지않았다면 사실 너희들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장터에서 빈둥거리면서 불쌍하게 하루해를 보낼수 밖에없던 신세가 아니었더냐!’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공평하심과 자비로우심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남과 자신을 비교해 보면서 툴툴거리는 자들에게 ‘그럼 않된다’고 타일러주십니다. ‘그 사람들한테 좀 적게 주든지 아니면 우리에게 좀 더 많이 주시든지 하시오! 그게 공평입니다 !’ 하면서 함부로 떠드는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과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과 저같은 모태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착각하지마라. 나는 너같은 인간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이다. 내 뜻과 너희 뜻은 다르고 내 생각과 너희 생각은 다르다!’
포두원 품꾼의 비유는 전통적으로 아침 9시부터 일한 사람들이란 유대인들이요, 바리세인과 서기관과 율법학자들이라고 보고, 저녁5시에 포도원에 들어온 사람들은 뒤늦게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우리 같은 이방인들이라고 설명해왔습니다. 아무리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을 믿어왔고 선민(選民)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않고 받아드리지 않는 유대인들은 처음 된자가 나중 되듯이 끝으로 밀려 날 것이며, 반대로 설혹 개처럼 취급받아온 이방인들이라 할찌라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받아드린 사람들은 나중되었다 하더라도 처음되는 역전극이 벌어질 것이라고 해석입니다. 선민이라고해서 앞서는 것이 아니요, 이방인이라고 해서 뒤쳐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나온 교리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인간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포도원에서 일했느냐, 즉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얼마나 크냐하는 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역사에 대해서는 감히 그 어느누구도 이의를 제기 할수 없고 또 이의를 제기해서도 않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요,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인간의 공로는 비집고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대한 우리 개신교회의 오래된 해석입니다.
또 하나는 오늘의 본문을 이 앞 19장 말씀과 연결해서 읽는 방법입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대답 하셨습니다. ‘계명을 지켜라’ 그러자 그 부자 청년은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온갖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자 그만 그 돈 많은 젊은이는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에피소드가 있은 후에 베드로가 아주 자랑스럽게 이런 말을 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보십시요 선생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무슨 상급이 주어지겠습니까?’ 그때 주님은 이리 말씀하십니다. ‘최후의 심판 때 너희들이 영의정이 될지 좌우정이 될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먼저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많다’
그리고 나서 들려주신 비유가 바로 이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 입니다. 그러니 이 비유는 당연히 베드로와 제자들 보고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를 들어야 할 대상은 오랫동안 자랑스럽게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말씀도 잘 듣고 헌신 봉사 한 주님의 측근 제자들 입니다. ‘이봐라. 저 부자 청년이 결국 물질을 포기하지 못하고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고해서, 그리고 너희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쫓아왔다고해서, 너희들은 아침 9시부터 종일토록 퇴약볓 아래서 수고 봉사 헌신 많이 많이 했다고해서 그래서 너희들은 2 데나리온 3 데나리온 받으리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한데나리온씩 줄것이다.’ 우쭐거리며 자신들의 헌신과 섬김을 뽑내는 베드로에게 주신 주님의 대답이 바로 이것 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 많이 하고 수고 많이 하면 하나님 나라에 가서 더 큰 보상을 받는가? 모든 소유를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면 이 다음 천당에 길때는 더 크고 좋은 집을 주시는가? 예수님은 더 오래 일했다고해서, 아침 9시 부터 수고 했다고 해서 더 높은 지위나 더 많은 보상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포용적’ (inclusive)이지 결코 ‘배타적’(exclusive) 이지 않습니다. 3년을 따라다녔든, 아니면 십자가 위에서 겨우 30초 동안만 ‘나를 좀 기억해 달라’고 하면서 주님을 영접하였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동일하고 포용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끝내시면서 다시 한번 더 리피트(repeat)하십니다. ‘먼저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될 자가 많느니라!’
그런데 보수적인 목사님들과 신자들 중에는 아직도 차등 상급론을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만약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 대하여 균등하게 상급을 주신다면 그 하나님은 불공평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최소한 1차 심판에서, 믿지않는 자들은 지옥에 가고, 믿는 이들은 천국에 가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후 2차 심판에서는 믿음으로 천국에 간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헌신과 봉사, 충성과 희생의 정도에 따라서, 큰상과 작은 상이 나누어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스타일의 ‘상급신학’ 혹은 ‘차등 상급론’은 저도 어렸을 때 부흥회에서 많이 들은 이야기 입니다. ‘어떤 장로는 죽은 후에 천국에 갔는데 천국 입구에서 개털 모자를 받았고 또 어떤 권사는 죽은 후에 천국입구에서 금면류관을 받았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이번에 집팔고 금반지 팔아서 건축헌금하면 반듯이 하나님께서는 다이아몬드가 밖힌 금면류관으로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지금도 한국교회와 목사님들과 성도들의 신앙 수준이 이런 정도라는 사실을 인정하자니 참 많이 서글퍼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비유가 현대 자본주의 시장 경제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비유를 읽을 때 아무 고민도 없나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고민하면 않되나요? 오늘날 우리는 시간당 웨이지(wage)가 정당하다고 여기는 세상에서 살고있습니다. 오늘날은 경영자나 노동조합은 물론 신학자들이나 신자들까지 모두가 10시간 일한 사람과 한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이 일당을 주는 것은 넌센스일 뿐만 아니라 부도덕하고 불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일한 만큼 받아야하고 능력이나 학위를 소유한 사람은 그에 따라 차등 연봉을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능력에 따라 일한만큼 수입을 보장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죽기살기로 경쟁시키고 피터지고 싸우게 만들며 인간을 비인간화하고 세상을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터로 만듭니다. 성경귀절 하나만 끌어와서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면서 어름장을 놓습니다. ‘무노동 무임금’을 외치면서 인간 사회를 양극화하고 극단적 빈부의 격차를 조성하고 사회적 약자들과 장애인들을 학대합니다. 세계 부의 90%를 10%의 개인과 국가가 독점하고 세계의 톱 부자 80명이 이 세계 하위 가난한 사람35억이 가진 재산보다 훨씬 더 많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일반적 경제원리를 깨뜨리신 위험한 인물이라고 봅니다. 이경우 주님은 공산주의자 아니면 환상적 사회주의자요, 이상주의자 라는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노동관계법을 어긴 범법자이며 생산력과 노동시간의 상관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않고 함부로 임금을 줌으로 노동시장의 질서를 교란시킨 무법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세기의 기독교와 21세기의 기독교는 다른 것이고 또 달라도 괜찮다고 보십니까?
만약 우리가 이 본문을 성실하게 읽고 일체의 선입관을 버리고 진심으로 말씀의 세계를 향하여 심령의 눈을 연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의 법칙’ ‘예수의 원리’는 이 세상의 법과는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세상과는 다릅니다. 성서의 세계는 이 땅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잘못된 질서를 바로 잡는 것입니다. 더 오래 일 했다고해서 더 많은 월급을 받거나, 더 큰 재주와 능력이 있다고해서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옳바른 신앙적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수고한 만큼 주는 세상의 경제적 원칙을 따르는 분이 아니라 수고 할 기회 조차도 없어서 일하지 못한 사람들 까지도 불쌍히 여기시고 품어주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과 은혜로 대하십니다. 사람을 물질의 소유나 능력의 유무로 평가하고 직급을 높여주거나 돈을 더 주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법이 아닙니다. 이런 면에서 굉장히 실험적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도 몇가지 시도해 볼 수있는 일들이 있다고 봅니다.
교역자들의 봉급을 평준화하도록 시도해 보는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천주교의 신부들 처럼 우리 개신교도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적어도 한 교단 안에서 만큼은 교역자들의 사례비를 비슷하거나 동일한 수준으로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서울의 어떤 큰 교회는 담임목사의 은퇴시, 퇴직금을 400억을 드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말세로구나, 정말 말세로구나’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옵니다. 저마다 큰교회를 만들어보겠다고 별의 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는 것은 모두가 다 출세하고 성공해서 잘먹고 잘살려고 하는 자본주의적 탐욕이 그 동기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 교회는 아프리카 밀림에 있는 동물의 왕국처럼 약육강식의 법칙이 판을 치고있습니다. 한 45년전 제가 처음 호주에 왔을 때 호주 연합교회의 교역자 사례비 책정에서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보다 목사가 되신지 15년도 더 되시는 변조은 목사님과 저의 봉급이 같다는 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호주교회에서는 큰 교회의 담임목사님의 봉급이 부목사님과 같기도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부교역자의 사례비가 더 높기도 합니다.
적어도 목회란 돈에 의해서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사명에 따라서 해야 한다고 하는 원리에 맞추어져있습니다. 우리 명성교회가 이런 시도를 한번 해 볼 의향은 없으십니까?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것은 초대교회 이후 우리 그리스도교회의 이상이요, 꿈이요, 하나님 나라의 비젼 중 하나 입니다. 인간 홍길복은 인간 이은숙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공부 좀 더했다고해서 인격이 고상한 것도 아니고 나이 좀 더 먹었다고해서 신앙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다 비슷비슷한 인간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똑같이 한데나리온씩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남보다 더 받으려고 하는 것은 탐욕이요, 하나님 나라의 법과 질서를 파괴하는 범죄 행위 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0).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돈을 사랑하지말라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3:5)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누가 12:15) ‘어리석은 자여 하나님이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찿으리니 그리하면 네 준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누가12: 20) 여기 여러분 모두를 거룩한 고민과 갈등의 자리로 초청합니다. 말씀 따라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의 연약함 앞에서 괴로워 할 줄 아는 것은 성숙한 신앙을 향하여 나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 시대 우리가 진실로 말씀을 따라서 살려고 한다면 갈등, 고민, 괴로움을 동반 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 ‘주여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 주소서’ 기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