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복음서에 나타난 비유 공부 (1)

본문 : 마가복음서 4장 10~13절 (참고 : 마태복음서 13장 10~15절)
제목 : (1) 비유 이야기 – 쉬운 이야기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비유 이야기 : 쉬운 이야기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마가복음서 4:10~13)
교회의 전통적 절기인 사순절 둘째 주일 아침, 주님의 십자가와 죽으심을 깊이 묵상하며, 동시에 부활과 승리의 아침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모든 믿음의 형제자매들 위에 주께서 내려 주시는 은총과 평강을 기원합니다. 특별히 이런 은혜와 평화가 지난 12년 동안 정성을 다하여 명성교회를 섬겨오시다가 최근 사임하신 우리 후배 최종세 목사님 내외분과 또 새로운 사역자의 청빙을 앞에 두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를 간곡히 기도하는 명성의 모든 성도들 위에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더불어 이런 뜻깊은 시즌에 우리는 두고온 조국 대한민국이 겪고있는 정치, 사회적 갈등과 자국제일주의적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인간의 탐욕과 끊임없는 전쟁과 갈등이 이어지는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등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과 다툼 가운데 우리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사랑, 이해, 관용, 용서, 평화가 더해 지시길 간절히 간구합니다. 목회자의 공백기에 여러분들께서는 늙고 부족하기 이를데 없는 이 사람을 청하여 함께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앞으로 한달에 두 번 정도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복음서에 나타난 비유’ 이야기를 공부하며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소설이나 드라마나 영화에는 반듯이 주인공, 혹은 주연배우가 있습니다. 주인공 외에 등장인물들은 모두 조연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류역사가 펼치어지는 하나의 거대한 대하드라마입니다. 창조로 부터 심판에 이르는 웅장한 서사시요, 인류구원의 거대한 파노라마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분명히 주연배우, 곧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면서도 동시에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입니다. 유대교의 주인공은 유태인이고, 불교에서의 주인공은 부처님이고,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를 그들 종교의 주인공으로 삼습니다만 우리 기독교에서는 당연히 예수님이 주인공이십니다. 예수님 이 외에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조연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성경의 주인공인 예수님은 제쳐놓고 늘 조연배우들만 따라다니면서 조연들의 이야기에만 열을 올리곤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베드로, 야고보, 요한, 바울, 디모데 등등 … 수많은 분들에 대하여 아무리 그럴싸하게 설교를 하고 성경공부를 한다고해도 사실 그이들은 모두 다 조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생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인공 공부는 제대로하지 않고 조연들만 좇아다니지는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많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의 얼굴이나 인상을 먼저 보게됩니다. 눈, 코, 귀, 입, 그리고 머리와 키 같은 그 사람의 생김새가 제일 먼저 보여집니다. 그외에 입은 옷이나 신고있는 구두나 매고있는 넥타이나 들고있는 핸드백이 눈에 띱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것들은 모두 다 2차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넥타이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거나 핸드백을 가지고 사람 점수를 매기면 후에 크게 후회 할 날이 옵니다. 우리가 성경을 펼쳤을 때 제일 처음 대하게 되는 얼굴이 바로 ‘예수님’ 입니다. 예수님이 성경의 얼굴이요, 주인공이요, 주연입니다.
그외의 인물들은 옷이나 신발, 가방이나 넥타이 같은 악세사리요, 소품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오래된 성도들은 물론 많은 목사님들 까지도 성서 속에 나타난 주인공이요, 핵심 인물인 예수님에 대해서는 크게 주의를 집중하지않고 그냥 악세사리, 소품, 변두리, 주변적인 일들 만 가지고 씨름을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마치 어떤 사람의 얼굴이나 심성이나 인격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의 옷이나 신발, 가방이나 넥타이를 가지고 그 사람을 평가하려는 것처럼 성경에서도 예수님은 빼놓고 지극히 지엽적인 일들 – 예컨데, 예수님은 별로 관심도 없으셨던 교회부흥이나 건축, 교회의 교리, 재정, 직분, 행정, 정치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자기 생각에 따른 성경귀절을 들이대며 열을 내곤 합니다. 마틴 루터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겁니다. 그의 ‘마굿간 이론’ 입니다.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찾아간 사람들을 향하여 ‘이 아기를 보라!’고 소리를 쳤더니 사람들은 예수님은 쳐다보지도 않고 구유와 짚프라기, 어린양과 송아지, 강보와 기져기 만 바라보고서 ‘나는 예수를 만났다고한다’고 한탄한 적이 있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핵심은 예수님입니다. 말구유나 짚프라기는 소품일 뿐입니다. 사순절이 계속되는 이 아침 우리는 십자기에 달리신 예수님, 사망권세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만을 뚫어지게 쳐다보십시다! 성경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 (히브리서 12:2)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의 핵심이 되시는 이 예수님을 충분히 알고 또 제대로 알려고 한다면 예수님에게서 두 가지를 보시면 됩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나’하는 것을 들어보면 되고요, 둘째는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나’ 하는 것을 찾아보면 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The Sayings of Jesus 과 ‘예수님이 하신 행동’ The works of Jesus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우리는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하기야 누구를 막론하고 어떤 인물을 제대로 파악하려고 하면 그의 말과 그의 행동거지를 보면 모든 것이 다 들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알려고 하면 성경의 주인공이요, 주연 배우인 예수님에게 주목해야 하고, 더 나아가 이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그 분이 무슨 말씀을 했고, 또 무슨 일들을 했는지를 꼼꼼히 살펴보면 됩니다.
복음서는 요약하면 크게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삶입니다.
우리들이 지금부터 살펴보려고 하는 ‘예수님의 비유’란 예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지나칠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교훈,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분량으로만 보아도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스토리 중에서 1/3이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만 주의해서 잘 살펴보아도,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의 생각이나 사상, 교훈이나 목표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초월적 존재로써의 하나님의 이야기를 아주 많은 경우에 상징, 비유, 이야기, 격언, 속담, 예화, 우화, 동화 같은 방법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또 스토리를 전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글자로 쓰여진 문자 그대로만 가지고 그 뜻을 헤아리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와이프가 있어서 마치 우리가 결혼하여 애기를 낳듯이 하나님도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 이라고 해서 예수님이 실제로 ‘움매 움매’하면서 우는 새끼 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 라고해서 실제로 예수님이 양치는 목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참 포도 나무’라고 했다고해서 예수님의 몸에서 포도 열매를 따겠다고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하나의 상징으로써 ‘하나님은 마치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를 향하여 빛이라고 해서 우리 몸에서 광채가 나는 것도 아니고 또 우리를 보고 소금이라고해서 우리 몸에서 짠맛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성서의 표현들은 깊은 상징성을 지닌 하나의 비유일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국어 사전에 의하면 ‘비유’ (比喩) 란 ‘어떤 심오한 진리나 영적, 정신적, 도덕적 교훈을 이해하기 쉽고 평이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풀어서 하는 풍유적 이야기’입니다. 비유라는 말의 영어단어 ‘패러블 (parable)은 본래 그리스 말 ‘파라볼레’ (parabole)에서 왔습니다.
‘파라볼레’란 말은 ‘파라’ 라는 말과 ‘볼레’라는 단어가 붙어서 만들어졌는데, ‘파라’ 라는 말은 영어의 ‘beside’ 즉 ‘옆에’ ‘곁에’ 라는 뜻이고요 ‘볼레’ 라는 말은 영어의 ‘throw’ 즉 ‘던지다’ ‘가져다 놓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비유’란 ‘옆에다 나란히 가져다 놓아서 서로 쉽게 비교해 볼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 방식’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보이는 것들을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비교, 대조해 주는 이야기 스타일을 비유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라는 방법을 통하여 어려운 이야기도 아주 쉽고 재미있게 풀어서 이야기를 하시는 재주가 있으셨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이란 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저도 그리 짧지 않은 인생길을 걸어왔습니다만 사람 사는게 어디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되는 게 얼마나 됩니까? 신앙생활 역시도 어디 우리가 기도한대로 다 이루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됩니까? 인생도, 신앙도 참 이해하기가 무척이나 힘들고 어렵습니다. 요즘 여러분들의 교회가 경험하는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것이 인생살이고 교회생활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어렵고 힘들고 이해 하기가 어려운 인생과 신앙과 하나님 이야기를 비유라는 스토리 텔링을 통하여 조근조근 잘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컨데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하나님, 하나님 나라, 진리, 사랑, 영원, 자유, 은혜 같은 말들은 대단히 어려운 단어들이잖아요?
이런 어려운 말들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 예를 들어가면서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옛 이야기에서 ‘효도’란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심청전’ 이라는 비유적 이야기가 나왔고 ‘착한 사람이 되어야 복을 받는다’ 라는 뜻을 설명하느라 ‘흥부와 놀부’ 같은 스토리가 만들어진 것과 같은 이치 입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비유는 모두 몇개나 될까요? 성경학자들 사이에는 비유를 가늠하는 방식이 똑같질 않아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보통 공관복음서에 공히 나오는 비유는 8개, 마가복음서에만 나오는 비유는 1개,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 같이 나오는 비유는 5개, 마태복음서에만 나오는 비유는 9개, 그리고 누가복음서에만 나오는 비유는 14개, 그래서 합계 37개라고 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서에만 나오는 비유가 별도로 16개가 있어서 4복음서에는 모두 53개의 비유가 있다고 봅니다.
말씀드린바와 같이 비유란 본래부터 어려운 내용을 쉽게 예를 들어서 풀이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들도 참 쉽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들려주신 비유의 소재들이 그 때 당시 이스라엘땅, 특히 갈릴리 지역에 살고있던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생활 주변에서 보고 듣고 겪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신학자도 아니고 목사님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별로 배운 것도 없는 AD 1세기 지중해 연안, 한 식민지 국가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살았던 소시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로 사람들이 지지고 볶으면서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생기는 것들을 소재로 삼으셨습니다. 밭가는 농부 이야기, 씨뿌리는 사람 이야기, 멧돌가는 아줌마 이야기, 물고기 잡는어부 이야기,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노동자 이야기, 양치는 목동 이야기, 포도원 이야기, 돈가지고 이자놀이하는 사람 이야기, 부잣집 이야기,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시집가고 장가가는 이야기, 임금과 신하, 주인과 종, 양과 목자 등등, 예수님은 현실과 동떨어진 딴 세상 이야기를 하신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지금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어서 말씀하신다면 비슷한 스타일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실 것입니다. 탐욕에 찌든 정치인들 이야기나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 이야기를 포함하여, 호주에 와서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네 청소하는 사람들 이야기, 장사하는 이야기, 시간당 웨이지 이야기 같은 것들이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비유의 소재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성경이란 그렇게 단순하게만 읽을수는 없는 책입니다. ‘비유로 이야기하는 것’은 참 쉬운 것 같지만, 동시에 대단히 어렵기도한 스토리 텔링 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에도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한테 비유로 말씀을 하신 이유는 단순히 모든 사람들이 쉽게 알아듣고 이해하도록 하기위해서만 들려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마가 10:11-12) 마가복음의 이 말씀을 훗날 마태는 구약성경 이사야서 까지 인용해 가면서 확인 사살을 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마태 13:14-15)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잘 이해가 않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이유가, 비유의 목적이, 모든 사람들이 다 듣고 쉽게 이해하여 깨달아 알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 곧 가까이 있는 제자들은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해서 한 것이지만 외인들, 즉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는 사람들 한테는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들어서 도무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게 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들에게는 듣고 깨달아 구원을 얻게 하려고 하지만, 반대로 예수님을 믿지않고 거부하며 반대하는 사람들 한테는 그 비유의 의미를 더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믿지 못하게 함으로 구원의 세계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려는 데 비유의 목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것을 가르쳐 어려운 표현이기는 합니다만 예수님의 비유에는 계시적 목적도 있지만 동시에 은폐적 의도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지닌 이중성을 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드러내어서 알게 해 주려는 목적과 숨기어서 은폐시키려는 목적이 동시에 있습니다. 물론 비유의 첫 번째 목적은 계시입니다. 계시란 어떤 숨겨지거나 가리워진 것을 밝히드러내는 것이잖아요?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 진리, 영생, 구원, 이런 말은 참 어렵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쉬운 비유를 써가면서 그 숨겨지고 가리워진 본래의 뜻을 밝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들어내십니다. 그래서 진리를 깨달아 알게 해 주시고 마침내는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비유의 두 번째 목적은 아주 반대 입니다.
은폐, 즉 숨기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오히려 하늘의 진리를 가리우고 숨겨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믿지 못하게 만들어서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금새 이해 하기가 쉽질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번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쉬운 이야기라 하더라도, 이야기 자체의 쉽고 어려움을 떠나서, 피차 마음에 벽을 쌓고 있는 사람,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인간에 대해 불신하는 사람, 오직 자기 세계에만 몰입되어 있는 사람, 교회에는 나와 있지만 생각은 딴데가 있고,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기독교에 대해 의도적으로 도전하는 사람, 애정을 갖고 사람의 말을 듣거나 받아드릴 태도가 전혀 갇추어져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진리의 세계입니다. 이 경우 ‘진리는 은폐’ 됩니다. 바로 처럼 마음은 완악하고 심령이 완고해진 사람 아무리 쉽게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진리에 대해 귀머거리가 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자인 제가 아무리 진지하게, 쉽게, 말씀을 준비하고 전해도 마음과 생각이 딴데로 가 있는 사람은 볼멘 소리로 말하게 됩니다. <어려워! 먼 소린지 모르겠어! 은혜가 않되!>
그렇게 볼 때 사실 예수님이 하신 비유는 객관적으로 쉽거나 객관적으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받아드리는 사람 자신에 따라 달라집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며, 인간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구원을 소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다 이해되고 깨달아지고 쉽게 받아 드려지지만 종교적 습관과 타성에 젖어있거나, 인간적 편견과 미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오직 자기중심적 생각에만 사로잡혀있는 사람들은 성경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예수님의 비유가 무엇을 말씀하시는건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수가 없습니다. 오늘 여기에서도 이런 사람은 아무리 <주여 3창>을 외치고, 겉으로는 가슴을 두드리며 눈물을 쥐어짜도 그는 어쩔 수 없이 ‘보아도 모르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죄사함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들려주신 비유, 그 쉬운 스토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들어도, 읽어도, 그래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것은 머리가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I.Q가 낮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대학을 않다니고 공부를 많이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고, 이해하지 못하니 미워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 할머니들은 90이 넘으셨고 초등학교 밖에는 못 다니셨지만 그래도 아무리 어려운 성경귀절이나 설교말씀도 다 알아들으십니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 예수 사랑, 이웃 사랑 – 그 사랑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만드는 첩경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쉽게 말해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이 충만한 사람은 아무리 어렵게 말해도 다 알아듣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의 세계이며 오늘 본문에 대한 바른 주석입니다. 그럼으로 ‘이해 하려고 하지마시요, 먼저 사랑하려고 하시요, 그럼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대한 주석입니다.
돈을 사랑하면 하나님과 진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권력을 탐하면 사랑과 정의가 숨겨집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은 아무리 교회 오래 다니고, 목사, 장로, 권사, 집사가 되어도 이 진리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질 못합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은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란 이해하지 못하면 사랑하지 못하게 되고 사랑하지 못하면 반듯이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그런데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좀 나은 사람입니까? ‘나’는 진리의 음성을 잘 듣고 있습니까? 아직도 내가 그 쉬운 성경의 진리를, 예수님의 비유를 잘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 보다, 사랑과 정의 보다, 세상과 물질, 명예와 권세를 더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으십니까? 몸은 예배당에 나와 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사람들, 입술로는 기도도 드리고 찬송도 부르지만 속으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오해, 미움, 대립감정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은폐된 진리의 세계와 한참은 더 싸워야 할 사람들 입니다. 우리 진실로 사랑을 찿아가는 정직한 신앙인들이 됩시다. 사순절이 이어지는 이때, 저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의 영안이 좀더 밝아지어 ‘예수 더 알아서 대속해 주신 사랑 간절히 알기를’ 기도드립니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