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복음서에 나타난 비유 공부 (2)

본문 : 마가복음서 4장 13-20절
제목 : (2) 이 수수께끼를 풀어보십시오!
이 수수께끼를 풀어보십시오! (마가복음서 4:13~20)
사순절 넷째 주일 아침,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 부터는 예수님께서 직접 들려주신 비유들을 하나씩 묵상하고자 합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함께 읽은 ‘씨뿌리는 비유’ 는 모든 비유들 중에서 가장 핵심적 비유요, 따라서 제일 중요한 비유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흔히 이 비유를 가르쳐서 ‘비유의 모델’ (Master Parable, Model Parable) 혹은 ‘비유의 본보기’ (Example Parable)라고 합니다. 여기 13절에서도 아주 드러내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이는 비유 중에 비유라고 불리우는 이 비유가 차지하는 위치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뛰어난 ‘역사적 예수’ 연구가이며 드폴대학의 명예교수인 존 도미닉 크로산 (John D. Crossan)의 비유 분류법에 따르면 오늘 읽은 이 비유는 일종의 ‘수수께끼 비유’ (Riddle Parable)입니다. 그분은 예수님의 비유를 수수께끼 비유, 본보기 비유, 도전하는 비유, 맞서거나 부딪치는 비유같은 형태로 분류합니다. 크로산의 수수께끼 비유는 우선 ‘수수께끼 질문’ (Riddle Question)에서 시작하여 ‘수수께끼 이야기’ (Riddle Narrative)를 거쳐 ‘수수께끼 비유’ (Riddle Parable)에 이르게 되는데 그 부분은 퍽 전문적인 것이어서 좀 더 공부하려는 분들에게는 그분의 책 ‘비유의 위력’ (The Power of Parable 한국기독교연구소, 2012년)을 추천해 드립니다.
우리 주변에는수수께끼라고는 할 수 없는 속담, 윗트, 유머 처럼 좀 유치하여 흥미만 돗으는 난센스 퀴즈들이 적지 않습니다. ‘개가 사람을 가르친다를 4자로 줄이면?’ – 개인지도 / 육영수여사와 박정희가 싸우면 ?’ – 육박전 / ‘이심전심의 뜻은?’ – 이순자가 심심하면 전두환도 심심하다. / ‘물고기 중에서 제일 학벌이 높은 물고기는?’ –고등어 / ‘구명 보트에는 몇 명까지 탈 수 있나?’ – 아홉명 /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타는 자동차는?’ – 중고차 / ‘1천만 서울 시민 모두가 외치면 무슨 말이 될까?’ – 천만의 말씀 / ‘목수도 못 고치는 집은?’ – 고집 / ‘책은 책인데 읽을 수 없는 책은?’ – 주책 / ‘청소하는 여자를 3자로 줄이면?’ – 청소년 / ‘꽃이 제일 좋아하는 벌은 ?’ – 재벌 / ‘사람들에게는 다 때가 있다’는 말은 누가 한 말일까? – 목욕탕 주인 / 명품 핸드빽 들고 있는 여자를 세마디로 줄이면? – 빽쎈 년 / 영어 ‘유머’는 라틴어 ‘후모르 (Humor)에서 온 단어인데 후모르란 단어의 본래 뜻은 ‘호르몬’ 즉 몸에서 나오는 체액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이런 스타일의 유머나 윗트들을 뭉뚱거려서 모두 수수께끼라고 합니다.
하지만 서양 문학사에서의 ‘수수께끼 이야기’ (Riddle Narrative)는 퍽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Turandot) 이야기 입니다. 투란도트 공주는 자기와 결혼하길 원하는 남자는 그 누구든지 반듯이 그가 내는 3가지 수수께끼를 풀어야만 한다고 공포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할 땐 그의 목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페라는 슬프게도 처음 등장하는 페르시아의 왕자가 그 녀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함으로 형장으로 끌려가는데 투란도트는 얼음처럼 차거운 미소를 짖습니다. 드디어 두 번째로 타타리의 왕자가 등장합니다. 투란도트는 소프라노로 질문을 던집니다. ‘매일 같이 밤마다 태어나고 아침마다 다시 죽는 것은 무엇인가?’ 왕자는 테너로 노래 합니다. ‘그것은 희망입니다’ 투란도트의 소프라노가 이어집니다 ‘맞다. 그럼 붉게 흔들리면서 불길처럼 따뜻한데도 불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다시 왕자가 노래 합니다. ‘아 그것은 피, 피 (blood) 입니다’ 공주는 노래합니다. ‘그것도 맞다. 그럼 마지막 질문이다. 얼음처럼 차거운데 불 길 같이 타오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무엇이냐?’ 왕자의 테너 소리는 한층 고조 됩니다. ‘예 그것은 바로 투란도트 공주님, 당신입니다’ 드디어 3가지 수수께끼를 다 푼 타타리의 왕자는 투란도트 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타타리의 왕자는 공주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공주님, 공주님, 공주님은 내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만약 내 이름이 무엇인지 아시면 나는 공주님과 결혼을 하겠지만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 이름을 모르신다면 나는 떠날 것입니다’ 투란도트 공주는 아름다운 소프라노로 노래합니다. ‘아 오늘 밤은 아무도 잠들지 못하리라, 진실로 이 밤엔 아무도 잠들지 못하리라’ 연이어서 노래하던 투란도트 공주의 소프라노는 한껏 고조됩니다. ‘오 타타리의 왕자여 그대의 이름은, 그대의 이름은, 사랑 사랑 사랑이로다’
그리스 문학에서 예로 들 수 있는 두 번째 수수께끼는 소포클레스의 작품인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Oedipus and The Sphinx) 이야기 입니다. 이 작품의 줄거리나 내용은 우리들 대부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토리는 생략하고 수수께끼만 던지겠습니다. 테베의 성문 앞에서 머리는 사람이요, 몸은 사자인 스핑크스가 모든 오가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그의 수수께끼를 알아 맞히면 성문으로 들어가게 하지만 못맞히는 순간엔 잡아먹힙니다. ‘아침에는 네 발로 걷다가 오후에는 두 발로 걷고 저녁이 오면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이냐 ?’ 그런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을 할 수 밖에 없도록 운명적 신탁을 받은 이 비극적 왕 오이디푸스는 그만 이 수수께끼를 알아맞이고 맙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
이 두 수수께끼가 지닌 공통점과 특색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목숨을 건 것’이라는 점입니다. 만약 제시한 수수께끼를 알아마치면 질문자가 죽고, 못 알아마치면 응답자가 죽는 게임입니다. 이 경우 수수께끼는 단순히 어떤 질문에 대한 재치있는 대답이나 흥미거리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면 좋고 못 마쳐도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의 수수께끼는 생사를 건 전쟁이요, 운명을 결정하는 한판의 승부수 입니다.
구약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 이야기도 이와 비슷한 문학적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삼손은 들리라와 그의 친척, 친구들에게 수수께끼를 냅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 그것은 무엇이냐?’ ‘무엇이 꿀보다 더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 보다 더 강하겠느냐’ 그들이 맞힌 이 수수께끼의 정답 한마디가 마침내 아스글론의 수 많은 주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냈습니다.
크로산은 고대 서구 세계의 수수께끼가 지닌 전통과 그 맥락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 ‘씨뿌리는 비유’의 성격 역시도 알아마치면 살고, 못 알아 마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생사의 문제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복음은, 말씀은, 진리는 받아드리는 사람은 살고, 받아드리지 않는 사람은 죽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이 수수께끼 같은 예수님의 비유를 깨달아 알고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 영혼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생사의 문제 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더불어 장난 삼아, 재미있는 ‘수수께끼 게임’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알아마치면 초코렛이나 타월 같은 선물을 주고 못 마치면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땅에 엔터태이너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농담이나 던지시고 흥미나 유발하시는 ‘개그맨-예수’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잘 들어라 !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너희는 귀가 있으니 듣고 생각해 보아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또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 까지도 빼앗기리라’ 주님은 대단히 심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4장 9절, 24-25절)
이미 지난 번에 읽은 말씀 입니다. ‘이는 너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4:12) 이것은 무슨 뜻 입니까?
예수님이 나쁜 선생님 입니까? 지금 쉬운 비유를 말씀 하시면서 사람들과 장난을 하시는 겁니까? 사실 아무리 선생님이 열심히 잘 알아듣게 가르쳐도 학생들이 못 알아듣는 경우는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선생의 본 마음일 수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학생들이 못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가르치는 선생은 선생도 아닙니다. 선생은 어떻게든지 학생들이 잘 이해 하도록, 쉽고 친절하게 가르치는 것이 그의 사명이요, 책임입니다. 그럼으로 여기서 예수 선생님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않고 깨닫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 하셨다’는 것은 일종의 엄숙하고 신비로운 수수께끼입니다. 크로산은 이 ‘깨닫지 못하도록’이라는 마가의 표현이 바로 ‘예수 수수께끼’의 신비요, 비밀이요, 숨겨진 모티브라고 해석합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수수께끼는 영생과 죽음으로 가는 갈림길 입니다. ‘잘 들어보아라. 잘 듣고 한번 알아맞춰보거라. 알아마치면 살고 복 받고 영생을 얻는다. 그러나 내 말을 우습게 알고 나를 사랑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고 내가 하는 이 비유를, 이 말씀을, 이 수수께끼를, 가볍게 여기면 오직 죽음이 너희를 기다린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이 ‘씨뿌리는 비유’는 이후 7개나 이어지고 있는 set 비유로써 ‘천국 이야기’ ‘하나님 나라의 비유’ 이야기 중에서 첫 번째 것입니다. 그런데 이 7개의 비유를 포함하여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모든 ‘비유’ 이야기들의 총 주제는 ‘천국’입니다. 마태는 ‘천국’ ’하늘나라’ (The Kingdom of Heaven)라고 했고, 마가는 주로 ‘하나님의 나라’ (The Kingdom of God 神國) 라고 했습니다. 마태의 경우는 주로 공간적 이해, 장소적 개념으로 천국을 ‘저 높고 높은 하늘에 있는 나라’를 염두에 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퍽 유대적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통치권’ 이라는 각도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나라’ 라고 하는 주권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 통도 크셨습니다. 그 분은 이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다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펼치어지는 神國을 세우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실현하고자 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직접 간접으로 말씀도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친히 그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보여 주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씨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두 가지 수수께끼를 내셨습니다. 첫째는 ‘씨’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알아마치면 살고 못 마치면 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정답은 생명입니다. 맞습니다. 씨를 밭에다 뿌리면 거기에서는 생명의 싹이 틉니다. 개인과 공동체와 온갖 역사를 통털어서 모든 생명의 근원, 생명의 잠재력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생명의 씨앗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믿지않는 자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간단합니다. – 나는 지금 이 세상과 인간 역사라고 하는 커다란 밭에다가 씨를 뿌린다. 생명의 씨, 사랑의 씨, 진리의 씨, 하나님 나라의 씨를 뿌린다’ – 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 속에서 농부는 ‘씨’를 아무데나 뿌립니다. 좋은 땅에도 뿌리고 좋지 못한 땅에도 뿌립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처음부터 좋은 땅 만 골라서 씨를 뿌리면 종자도 아끼고 수고도 덜텐데 이 농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혀 조심성이 없는 농부 처럼 보입니다. 허지만 이렇듯 아무 곳이나 막 씨를 뿌리는 이 농부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비를 내리시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에게 동일하게 햇빛을 비쳐주십니다. 바로 이 아무데나 구별하지 않고 차별없이 씨를 뿌려주시는 하나님의 우주적 사랑 때문에 저같이, 꼭 길가와같고 돌짝 밭과 같고 가시덤불과 같이 한심하기 그지없는 인간 홍길복도, 이렇듯 생명과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수수께끼입니다. 그럼 ‘밭’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정답을 알면 살려니와 모르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아무데나 제한없이 뿌려지는 씨앗은 나쁜 밭에도 떨어지고 좋은 밭에도 떨어집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씨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비수용적 태도, 즉 받아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통치를 받아드리지 않는 것으로써는 길가, 돌작 밭, 가시 밭 들이 나옵니다. 세상에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무반응, 무감각, 회의적, 방어적,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들려주시는 진리의 음성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인간, 아스팔트 같은 마음 등이 아마도 ‘길가형 인간’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감정적 수용자, 피상적 변화자, 세속적 세계관과 인생관을 그대로 지니고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아마도 ‘돌작 밭’에 속할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욕심에 매여 살며 염려에 억눌려 지내면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온갖 유혹의 지배 속에서 물질의 노예로 살아가는 우리들 대부분은 아마도 ‘가시밭 유형’이라 할 수 있을 겝입니다. 그런데 대칭개념으로써 수용적 인간형에도 역시 3가지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아주 짧게 말씀하고 있지만 설명을 하자면 30배의 열매를 맺는 좋은 땅 (Good character), 60배의 수확을 거두어 드리는 더 좋은 밭 (Better character), 그리고 100 배 씩이나 많은 결실을 가져오는 가장 좋은 밭 (Best character)이 있습니다. 보통 기독교인들은 글쎄 한 30배 쯤 열매를 거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주기철 목사님이나 이태석 신부님 같은 분들은 한 60배가 되고 베드로나 바울은 한 100배쯤 거두어드린 밭이라고 설명해 볼수 있을까요? 하여튼 나쁜 땅도 3개이고, 좋은 땅도 3개씩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수께끼의 핵심은 과연 ‘밭’이란, ‘땅’ 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좋은 밭’ 이든 ‘나쁜 밭’ 이든 / ‘좋은 땅’ 이든 ‘나쁜 땅’ 이든 / ‘옥토’ 라고 부르든 ‘악토’ 라고 부르든, 하여튼 밭 자체를 무엇이라고 보느냐? 씨앗을 받아드리는 밭,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의 바탕은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인격’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사람됨’ 이고 공동체적으로는 ‘근본 바탕’ 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근본이 있습니다. 바탕, 파운데이션 (Foundation)이 있습니다. 기초가 있습니다.
근본이 없는 사람, 바탕이 잘못된 인간, 기본이 흔들리는 사람 (shaking foundation)은 아무리 좋은 씨앗을 심어도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인간성이 제일 중요합니다. 사람 됨됨이가 먼저입니다. 돈만 많으면 뭐합니까? 공부만 많이 하고 좋은 대학 나오고 박사학위 갖고 있으면 뭐합니까? 권력을 움켜쥐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호통만 치면 뭐합니까?
교회 나와서 기도 잘하고 헌금 많이 하고 여기 저기 다니면서 봉사하고 큰 소리로 찬송하면 신앙이 좋은 줄로 아는 것이 우리들 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바로 되지 않으면 다 쓸데 없습니다. 우리는 꼭 앞 못보는 맹인처럼, 생각없는 바보 처럼, 잘 못 생각하고 잘못 판단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겉만 번지르하면 좋은 사람인 줄로 착각합니다. 말만 잘 하고 옷 만 잘 입고 명품 핸드 백들고 차만 근사한 것 타고 다니고 대학만 그럴싸한데 나왔다고 하면 최고인줄 압니다. 성령충만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성숙하고 영을 분별할줄 아는 것입니다. 영을 분별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한 사람이나 한 사회나 그 바탕, 그 근본, 그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기본과 기초를 들여다 볼수 있는 영적능력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우리에게는 정말로 영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한국은 바탕이 흔들리는 나라입니다. 정치나 경제나 교육이나 교회나 그 어디를 보아도 바탕이 위태, 위태하게 보입니다. 참 아슬 아슬 합니다. 겉으로는 <세계적 경제 대국이 되었다. 경제 강국 10위 안에 들었다. 국민 소득 3만 달라를 넘어섰다, 대학 졸업생 수가 국민의 80%를 넘어섰다.
세계 10대 대형교회 중에서 7개가 한국에 있다> 등등 별의 별소리를 다 하지만 사실 한국은 대단히 위험한 나라요, 한국교회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왜냐? 밭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땅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기초가, 근본이, 기본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정말 진지하게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어떤가? 내 인격, 내 됨됨이, 내 인간성, 나라는 인간의 밭, 토양, 바탕, 기본과 기초는 괜찮은 편인가? 사실 우리 대부분은 별로 좋은 밭이 못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심령과 인격, 우리 바탕과 기초는 별로 자랑할만 하질 못합니다. 우리 심령은 길가와 같고, 돌작밭이나 가시밭과 같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다 하더라도 무신경, 무감각, 무반응한 심보에다 습관과 타성에 젖어 맹숭맹숭하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져 듣고 싶은 말, 축복한다는 말에는 <할렐루야, 아멘> 하며 소리지르지만 쓴소리나 꾸짖는 말씀이나 회개하라는 외침에 대해서는 냉냉하고, 마음을 돌리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양심도 없이, 헌금은 쪼금 드리면서도 찬송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린다>고 노래하는 거짓말쟁이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건 여러분들 이야기가 아니라 제 이야기입니다. 제 속에는 늘 탐심과 교만, 이기심과 위선이 가득차 있습니다. 저는 거의 모든 것을 저 중심으로 말하고 저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도 위선과 거짓 속에서 살아가는 바리새인의 얼굴이 바로 제 얼굴이요, 제 심보요, 제 인격입니다. 아마도 젊은 목회자들은 아직 잘 모를 것입니다. 이제 나이가 좀 들다 보니까, 목회란 교인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평생토록 목사가 자기 자신을 성찰하며 자기 자신을 가꾸어 가는 과정임을 알게 됩니다.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치면서 <모든 설교에서 제일 먼저 들어야 할 사람은 설교하는 그 사람 자신임을 절대로 잊지말라>고 했던 말이 자꾸만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참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길가와 같고, 돌작밭과 가시덤불과 같이, 근본이, 바탕이, 기본이, 사람됨이 한참 멀고 먼 우리들에게도 주님은 가리지 않으시고 그냥 막 씨를 뿌려 주셔서 우리 같은 인간도 구원해 주시고 작은 열매라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주셨으니 말입니다. 그져, 만만 감사할 뿐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르시는 분들은 저를 향해 겸손하다고 하시지만 저는 저를 압니다. 저는 바탕이, 밭이 별로 좋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저를 구원해 주셨고 살려 주셨고 주의 종으로 삼아 주시어 이렇게 말씀을 전하게 해 주시고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살려 두시어, 오늘도 말씀 속에서 저를 돌아보며 자신을 성찰하며 진솔한 고백을 나눌 수 있게 해 주셨으니 그져 모든 것이 다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씨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주님은 우리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셨습니다. <풀면 살고 못풀면 죽는> 인생 최대의 수수께끼를 내셨습니다.
당신의 바탕, 기초, 근본, 인격, 사람됨됨이는 길가나 돌짝밭이나 가시밭입니까? 아니면 정말 옥토요, 좋은 땅입니까? 성전문을 나설 때 한번 스스로에게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