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설교 : 성서속에 던져진 질문들(3)

주제 : 성서속에 던져진 위대한 질문들 (The Great Questions in the Bible)
오늘의 본문 : 창세기 4장 1~10절
오늘의 제목 :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세기 4장 1~10절)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셨던 질문에 이어서 오늘 아침 우리는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두 번째 질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자기 동생 아벨을쳐 죽인 살인자 가인을 향하여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이 두번째 물음도 첫 질문과 마찬가지로 아벨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의 거처, 위치, 자리를 묻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던지신 처음 질문이 <아담>이라는 인간, <나>라고 하는 이 인간의 본질과 속성이 무엇인지 추적하신 것이라면, 오늘 읽은 이 두 번째 질문은 <나 이외의 다른 인간>에 대한 질문입니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질문은 관계적 존재로써의 인간은 인간 상호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고 계십니다. 형제와 가족, 이웃과 친구들을 포함하여 우리가 알든 모르든 나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면서 살아가야 할지를 물어보신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 사건은 인류 최초로 인간이 인간을 죽인 <살인 사건>입니다. 그것도 형이 동생을 죽인 형제살인 사건입니다.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이들은 대부분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나?>라고 하는데 촛점을 두면서 동물 제사와 곡물 제사를 비교 하면서 제사에서 피흘림이 없는 속죄문제나 예배에서의 정성문제 등을 말씀하십니다. 또 어떤이들은 이 스토리에서 아벨의 양치는 유목문화와 가인의 농사짓는 농경문화의 기원론을 끌어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스토리의 핵심은 제사나 예전이나 초기 인류 문화사의 기원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역사에서 살인이란 어떻게 시작 되었는가, 어떻게 되어서 인간 세상에는 죽고 죽이는 살생의 역사가 시작 되었는가?> 하는 살인의 기원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스토리의 메시지는 에덴의 동쪽에서 인간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에게 삶의 근본 원칙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제발 서로 싸우지 말아라. 폭력을 휘두루지 말아라.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않된다.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않으셨습니다. 그래서가인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동생을 시기하고 미워하다가 마침내는 죽이는데 까지 이르게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떠나 서로 지지고 볶으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본성과 세상의 실상과 민낯을 적나라하게 들추어 내고 있습니다. <인간 세상이란 서로 싸우고 죽고 죽이는 난장판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인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인간성 속에는 살인자의 유전자가 있습니다. 물고 뜯고 싸우다가 마침내는 죽임으로 끝장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부끄럽기는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인의 후예로써 악인이요, 살인자들이기도 합니다.
네덜란드의 범죄역사학자 피테르 스피렌브르그가 쓴 <살인의 역사>는 지난날 인류의 역사란 <나 살기 위해 너를 죽이는 역사>라고 보고있습니다. 그는 <지금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는 자는 지난날 그 무엇인가를 혹은 그 누군가를 죽임으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슬픔과 부끄러움을 지나 정말 입으로는 말하기도 조차 힘든 역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설교문을 통하여 기록으로라도 남겨 놓아야겠다는 심정으로 말씀드립니다.
스탠나드는 그의 저서 <아메리칸 홀로코스트>에서 말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인류의 역사는 죽고 죽이는 살류사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인류의 역사는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사이의 대결과 전쟁과 살륙을 이어온 피의 역사 그 자체였습니다. 근대이후만 되돌아 보겠습니다. 1609년 부터 1924년 까지 유럽 사람들은 북아메리카에 와서 원주민들, 아메리카 인디안들을 100만명이상 이나 죽였습니다.
1530년 이후 스페인과 폴투갈은 잉카제국을포함한 남미를 정복하면서 그곳 인디오들을 약 1천만 이상이나 학살하는 인종 청소를 감행했습니다. 종교개혁 후 유럽에서 벌어진 30년 전쟁은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벌어졌던 <예수전쟁>으로 8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이고 죽인 인류 최대의 종교 전쟁이었습니다. 1788년 영국은 First Fleet 이후 1940년대 까지 호주에서 약 3만 명 이상이나 되는 애보리진들을 학살했습니다. 이들은 모두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새 땅에 대해 감사기도를 드리면서 사람 비슷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아닌 짐승들은 Cleaning을 해야한다고 말하면서 Ethnic Cleansing을 하고 Genocide를 감행했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기간 중 부상자를 제외하고 직접 죽인 사람만해도, 민간인들 포함하여 3200만이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55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의 목숨을 도륙했습니다. 6.25 때는 한국군과 유엔군 18만, 북한군 50만, 중공군 15만, 민간인 100만, 그래서 모두 18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베트남전쟁시 죽임당한 사람들은, 보트피풀들은 빼고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만 해도 베트남, 베트콩, 미군, 한국군, 호주군 모두를 합하면 200만이 넘습니다. 나치는 600만이나 되는 유태인들을 포함하여 소련인들700만, 폴란드인들 180만, 세르비아인들 31만, 장애인들 25만을 포함하여 1600만명의 인간 목슴을 도륙했습니다. 일본은 1937년 난징대학살 때, 불과 두달 동안 20만명의 중국인들을 죽이면서 <참수경쟁, 사람 목베기 시합>을 시키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인 군인들에게 상을 주기도 했습니다. 1945년 일본은 필리핀에서 퇴각하면서 민간인들만해도 10만명 이상을 학살했습니다. 1971년 서파키스탄은 동 파키스탄, 지금의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저지하면서 300만이나 되는 자기 국민들을 학살했습니다. 이는 20세기 최악의 학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캄보디아는 1975년 이후 2천개 이상이나 되는 킬링필드에서 당시 캄보디아 인구의 3분지 1이나 되는 250만의 무고한 양민들을 도륙했습니다. 1992년 보스니아에서의 인종청소, 1994년 르완다에서의 집단학살을 전후한 이라크에서 벌린 크루드족에 대한 인종청소, 미얀마, 코소보, 인도네시아 등 아프리카를 포함하여 세계 도처에서 벌어진 부족전쟁 등은 그 살상자의 숫자를 집계할 수도 없습니다. 요즘도 이어지는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 전쟁에서의 살상 숫자는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보니 10만, 100만, 1000만이란 숫자가 어디 죽임당한 사람들의 숫자를 말하는 것인지, 아님 무슨 가축의 도살 숫자를 말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이왕 가인으로 부터 시작된 인간 살인사를 이야기하는 자리이니까, 꿈찍하기는 하지만 스피렌브르그의 <살인의 역사>를 좀 더 살펴 보겠습니다.
인간은 살인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보통 짐승들도 피차 물어 뜯고 죽이긴 하지만 그들은 이빨과 팔, 다리로 상대를 제압하고 물어 뜯어서 자신을 보호하거나 먹이감으로 삼는 데 그칩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들은 수없이 많은 살인 도구들을 개발하고 살상 무기들을 발명해 내어 자신을 보호하는 정도를 넘어 상대를 영원히 진멸하고 박살내어 씨를 말려버릴려고 합니다. 돌로 때려서 죽이던 원시적 방법부터 칼과 총을 거쳐 이제는 핵무기와 다양한 생화학무기에 이르기 까지 사람을 죽이는데도 고도화된 여러가지 방법들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살인 무기들은 대부분 미국을 비롯한 소위 말하는 선진국에서 개발하여 제 3세계에 판매하여 엄청난 돈을 법니다. 이렇듯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달리 자신의 이빨과 손과 발이 아닌 여러가지 도구를 사용하여 타자를 죽이는 유일한 동물이 되었습니다.
조르조 아감벤 (Giorgio Agamben)은 이런 발전된 살인자로써의 인간을 <호모 사케르, Homo sacer> 라고 이름하였습니다. 노예들, 나환자들, 포로들, 장애인들, 아프리카나 신대륙에서살던 원주민들, 마녀로 몰린 여인들과 전쟁에서의 살인은 죽여도 살인으로 치지 않고 따라서 죄의식도 느낄 필요가 없다고 하며 살인죄로 처벌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다 한두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지만 수천, 수만 명을 죽이면 영웅으로 높임을 받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인간 세상입니다.
살인의 종류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넓게는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자살과 다른 사람을 죽이는 타살로 나누어서 말합니다. 2년전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하루 평균 36명이 자살하고 있습니다. 2024년 조선일보와 서울대가 함께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들 중 자살을 생각해 본 국민이 전 국민의 22.2%라고 합니다. 한국인 5명 중 한 사람은 자살을 생각해 보았다는 말입니다.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이 1위를 달립니다. 특히 10대 청소년 자살률은 전체 자살자의 10%를 넘고 있습니다.
타살에는 수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가까이는 일가친척이나 지인 같은 이들 –부모, 자식, 애인, 친척, 친구를 죽이는 것으로 부터 시작하여,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그냥 죽이는 묻지마 살인, 영아살해, 촉탁살인, 자살, 자살교사, 집단자살, 집단과 집단, 부족과 부족, 국가와 국가, 동맹과 동맹 사이의 대량학살에 이르기 까지 인간들은 지난 5천년 동안 정말 놀랄만치 많은 살인 도구를 확대 재생산해 내고 살인의 영역을 넓혀왔습니다.
17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줄리아 토파나라는 여성이 비소를 이용하여 약 600여 명을 독살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지난날 한국에서는1982년 경북 의성에서 우범곤이란 순경이 무차별 총기 난사로 자기 마을 주민들 55명이나 사살한 적이 있었습니다. 유영철이라는 인간은 20명이니 되는 사람들을 죽였고, 그 유명한 살인자 김대두는 17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살해 했습니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1년에 평균 800에서 1000건에 이르는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요. 2017년 미국 라스베가스에서는 스티븐 패덕이란 사람이 한 호텔에서 불과 10분 사이에 61명을 죽이고 867명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2016년엔 전직 보안 요원이 올랜도의 한 나이트 클럽에서 49명을 사살했고, 2006년엔 버지니아공대에서 한국계 이민 1.5세인 조승희가 기숙사를 습격하여 32명을 죽이고 17명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미국에서는 하루 평균 약 50건에 이르는 총기 살인사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1년이면 15000명 이상이 누군가의 총에 맞아 죽는 땅이 미국입니다. 세계적으로는 전쟁이나 교통사고나 자연재난을 제외한 직접적 살인 사건만 해도 1년에 약 50만건 이상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만 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가인이후 인류의 역사는 살인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살인은 인간의 본성 중 하나입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가인아, 너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너는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네 아우 아벨을 죽였느냐?>는 물음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람이란 정말 종교적 존재요, 이성적 존재인가? 인간은 짐승 보다 나은 존재인가?> 다시 생각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무우나 배추, 당근이나 오이, 사과나 배, 포도나 귤을 비롯한 여러가지 채소나 과일들을 칼로 다듬과 삶고 끓이며 죽이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 입니다. 그것들은 우리 인간의 생존을 위한 식재료들입니다. 식물을 죽인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소나 돼지, 닭이나 오리, 삼치나 명태, 고등어나 오징어를 잡아먹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옛날에는 동물 사냥이 인간을 위험에서 지키고 공격을 막기 위해서 시작된 측면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 인간들이 동물을 잡아서 기르고 도살하여 식용으로 삼는 것은 인간의 먹거리와 생존을 위한 것으로 문제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동식물들을 죽이는 행위는 인간의 생존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은 자신의 생존이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벌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옛날 원시시대엔 혹시 상대가 달려들어 나를 죽일까봐 선제적으로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곧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너를 죽여야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너도 살고 나도 함께 사는 것이 동물의 왕국과는 다른 인간의 세계>라는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공생공사의 원리>를 깨우친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기 불행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인간 생존의 기본 원리와 진리를 거스린 무지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에덴을 떠나고 나니 인간은 무지하고 어리석고 한심한 존재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꼭 죽이고 없애버려야지 그의 생존이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 가인은 아벨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하고 아벨은 가인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않계신 세상, 인간들 끼리만 사는 세상이 되고 보니> 그만 싸우고 미워하고 죽고 죽이는 동물의 왕국으로 전락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부터 인간의 역사는 변함없이 이 동물의 왕국의 본성에 따라 <살인의 역사>를 꾸려오고 말았습니다.
그날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물었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은 말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성서가 우리들에게 일러주는 무언의 메시지는 아주 분명합니다. <그렇다! 가인아, 너는 네 아우를 지키는 자다!> <그렇다! 맞다! 너는 네 아우를 지키는자다!> 이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힘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강림주일 아침, 꿈인지 생신지도 모르는 애매한 몽상 가운데 빠져서 엉뚱한소리를 가지고 성령의 음성 어쩌구 저쩌구 할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 뚜렷하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맞다, 맞아! 너는 네 아우를 지키는 자다. 너는네 아우를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진짜 성령의 음성입니다.
2004년 버락 오바마는 일리노이주에서 미국 대통령선거 출마 연설을 했습니다. 케냐 흑인 아버지와 미국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이민 2세로 태어난 오바마는 그날 자신의 출생과 성장 이야기로 부터 시작하여 미국 사회가 직면한 여러가지 인종차별, 빈부차별, 문화차별, 언어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쭉 하다가 끝에 가서 이렇게 마무리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제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다. 저는 제 아우 아벨을 지키는 것이 저의 신념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트럼프에게도 물으십니다. <네 아우 멕시칸들은 어디 있느냐? 꼭 그렇게 장벽을 쌓고 그들을 내쫓아야만 하겠느냐?> 트럼프는 말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하나님은 시진핑에게도 물으십니다 <시진핑아, 네 아우 티벧트 사람들은 어디 있느냐?> 시진핑은 말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오늘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도 다시 물으십니다. <이삭의 후손인 유대인들아, 지금 네 형제 이스마엘의 후손인 팔레스타인들은 어디 있는냐?> 그들은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그들을 지키는 자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를 네 몸 처럼 사랑해라, 누가 10장 27절 > <형제에게 노하는자마다 심판을 받으리라, 마태 5장 22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해라, 요한 13장 34절>
말씀하신 대로 정말 형제를 내 몸 처럼 사랑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러나 이는 정말 어렵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 서로 형제 처럼 사랑하지는 못해도, 피차 이해하고, 싸우지 말고, 더불어 함께 살수만 있어도 세상은 한결 아름다워질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아우를 지키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웃과 함께 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 부터 공존하는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거듭 말씀하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Living Together – 같이 먹고, 같이 마시고, 같이 자고, 같이 일하고, 같이 놀며, 같이 눈비를 맞으며, 함께 살아가거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내 아우 아벨을 지켜주는 나라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기도합니다. <주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아멘>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