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설교 : 성서 속에 던져진 질문들 (1)
주제 : <성서 속에 던져진 위대한 질문들, The Great Questions in the Bible>
오늘의 본문 : 누가복음 2장 41-47절 / 요한복음 1장 38절
오늘의 제목 : (1)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시니 – 질문은 왜 중요한가?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시니 – 질문은 왜 중요한가? (눅 2:41-47 / 요1:38)
저를 포함하여 많은 설교자들은 교우들에게 <의심하지 말고 믿으세요. 의심하면 믿음이 생길 수도 없고 신앙이 자랄 수도 없습니다. 의심은 죄입니다. 무조건 믿어야 합니다. 질문을 하거나 따지기만 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때 주로 많이 인용하는 성경 귀절은 이런 말씀들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마태 14:31> 풍랑이는 갈릴리 바다에서 무서워 소리지르는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예수 다시 사셨다>고 하는 말에 반신반의 하면서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이렇게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마음에 의심하느냐, 누가 24:38> 이런 성경 귀절들은 모두 다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옳습니다. 우리는 의심하지 말고 확실하고 분명하게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의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인줄을 알겠는데 <질문하는 것도 죄가 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물론 의심이 생겨서 하는 질문도 있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질문을 통하여 한 단계 더 나은 답을 얻고, 더욱 더 확실한 믿음으로 나가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질문 자체를 의심이라고 단정하면서 질문을 가로 막거나 차단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질문을 던진다고해서 믿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믿음이 굳센 사람이라고 해서 마음속에 아무런 질문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정직한 질문은 질문자로 하여금 구원과 영생에 이르는 믿음과 확신을 더 분명하게 만들어 주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질문은 우리의 믿음을 더욱 더 성장, 성숙시켜 주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사실 성경에도 수많은 질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질문을 아주 많이 던지셨습니다. 신앙의 사람들인 선지자들과 제자들이 던진 질문도 대단히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속에는 도대체 어떤 질문들이 나타나 있는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부터 우리 은목회 예배 시간에 저의 차례가 되면 <성경에 나타난 여러가지 질문들>을 추려서 함께 묵상해 보고저 합니다. 주제는 <성서속에 던져진 위대한 질문들>이라고 정해 보았습니다. 지난 몇달 동안 이곳 저곳에서 자료를 검색하고 책들을 뒤적거려 보다가 성경에서 약 40여개의 질문들을 추려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설교문들을 다 작성하고 또 여러분들과 함께 나눌려면 한 4-5년은 족히 걸릴텐데 죽기전에 다 마무리 할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우선 그 첫 시간으로 질문이 지니고 있는 의미와 질문의 중요성에 대한 말씀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처음 읽은 성경은 누가복음서에만 나오는 누가의 특수자료입니다. 예수님이 12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가 그곳에서 선생들, 즉 율법학자들과 서로 토론했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한 귀절은 46절입니다.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이제 막 청소년기에 들어선 소년 예수가 유대의 최고 율법학자들로 부터 말씀을 듣기도 했지만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는 귀절이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물론 당시 유대나라에선 12살 부터는 성인으로 취급되였습니다만,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대의 전통사회에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아랫 사람은 윗 사람이 말씀하실 때는 조용히 듣기만 했지 질문은 금지되어 있던 시대였는데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듣기도 했지만 묻기도 한 예수> – 여기서 우리가 발견해 낸 것은 <질문하는 예수상> 입니다. <애들은 어른이 말씀하실 때는 그냥 조용히 듣기만 해라. 선생님이나 부모님이나 어른들에게 이렇고 저렇고 하면서 자기 의견을 말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질문을 던지는 것은 버릇없는 태도> 라고 꾸지람을 받을수 있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예수는 질문하고 토론하고 대화하는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인간 예수님은 어렸을 때는 물론이고 그의 일생을 통해서 질문하는 것을 머뭇거리지 아니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읽은 요한복음서 1장 38절은 서른 살이 되어 드디어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께서 처음으로 던지신 질문입니다. 배경은 세례요한의 제자들 중에서 안드레와 이름을 모르는 제자 하나가 예수님을 따라 오자 그들을 향하여 물으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왜 나를 따라 오느냐?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들이 나한테서 얻으려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들이 요한을 떠나서 나를 따라나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냐?> 여기에서 우리는 공생애의 첫출발에서 부터 질문으로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12살 때 만이 아니라 서른 살이 되었을 때도 예수님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안드레와 그의 친구를 향해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똑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들이 나를 믿는 이유가 무엇이냐?> <너희들이 내 제자가 된 이유가 무엇이냐?> <너희들은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무슨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고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하는 것이냐?>
듣는 것- 아주 중요합니다. 귀담아 잘 들어야 합니다. 모든 지식은 듣는데서 부터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듣는 것 못지 않게 물어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고, 깨닫지 못한 것이 있으면 질문을 해야 불분명한 지식은 보다 확실해지고 의혹에 잠겨있던 믿음은 더욱 확고해지게 됩니다. 질문은 나쁜 것도 아니고 죄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 질문도 하지않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척하고 질문 없이 그냥 넘어가는 사람은 더 높은 지식이나 더 확고한 신앙을 갖기가 어려울 뿐만이 아니라 자칫하다가는 위선자가 될 가능성 까지도 높아집니다. 질문은 발명의 어머니요, 질문을 통해서 사람은 지적으로 성장한다고 하면서 학교 다닐 때는 제법 질문을 잘 하던 친구들도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질문도 졸업합니다. 도로시 리즈는 <질문의 7가지 힘>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시대는 질문을 못하게 가로막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질문을 잃어 버렸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에게서 질문을 앗아간 최대의 주범은 스마트 폰이다. 스마트 폰은 인간들을 질문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어 버렸다.> 스마트 폰은 그 옛날 서른권 짜리 Encyclopedia Britannica를 넘어선지 오래 되었습니다. 인간이란 무릇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질문을 던져야만, 지식은 증대되고, 생각은 깊어지고, 마음은 열려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바뀌어지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데, 요즘 우리들은 내 생각이나 내 질문이 아니라 스마트폰이나 구글, AI나 챗 GPT, 유투브나 카톡방이 제공해 주는 일방적 지식과 정보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들여다 보는 유투브의 종이 되어 일방적 확증 평향성에 빠져 온 세상을 두 편으로 딱 갈라놓고 말았습니다.
질문은 왜 중요한가? 무엇 보다도 질문은 역사를 발전 시키고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뉴우톤은 사과나무 밑에서 <왜 사과는 하늘 위로 올라가지 않고 땅 아래로 떨어질까?>라는 질문을 던짐으로 <만유인력의 법칙>을 비롯한 고전 물리학의 터전을 놓았습니다. 막스 프랑크 연구소는 <빛은 파동인가, 아니면 입자인가?>를 물음으로 <불확정설>을 비롯한 현대 물리학의 발전을 촉구하게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문답법>을 통하여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이끌어 주었습니다. <선생님, 왜 이렇게 급히 가십니까?> <직장에 늦으면 않되니까요?> <부지런히 출근하여 직장 생활을 성실하게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래야 월급도 많이 받고 승진도 되지요!> <월급 많이 받고 높은 자리 까지 올라가면 뭐가 좋은가요?> <아, 그래야 강남에 집도 마련하고, 아이들 좋은 학교에도 보낼수 있지요?> <아, 그렇군요? 그럼 그 다음엔 무얼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아마 저도 은퇴할 때가 되지 않을까요?> <은퇴 후에는 무슨 계획이 있으십니까?> <은퇴 후에는 세계일주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요? 그럼 그 다음엔 무얼 하실 작정이십니까?> <아마도 그 때, 그 나이가 되면 저도 죽을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선생님, 그럼 우리 수학에서 중간 과정은 다 생략하고 끝에 가서 그냥 답만 말하듯이, 제가 처음에 “선생님, 왜 이렇게 급히 가십니까?”라고 물었는데, 중간 이야기는 다 빼버리고 결론만 말하면 뭐가 될까요?> <하하하, 죽을 준비 하느라 이렇게 빨리 가는 것이 되는군요!> 끊임 없이 묻고 또 묻는 것은 자연과학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추구하게 만들어 줍니다.
한국 카이스트의 김대식 교수가 쓴 <빅 퀘스천>은 우리 시대 인간들이 묻게 되고, 또 물어야만 할 31가지 위대한 질문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억인가?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는데 왜 강아지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하는가? 운명이란 무엇인가? 삶에는 꼭 의미가 있어야 하는가? 인간은 왜 유명해지고 싶어하는가? 소유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사랑하는 것일까?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등등 입니다. 그런데 참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모든 질문의 시작은 매우 단순하게 시작됩니다. <엄마, 초콜렛 먹으면 왜 않되?> <이가 상하게 되니까> <이 상하면 왜 않되?> <이 상하면 음식을 잘 먹을수 없으니까> <음식 잘 못 먹으면 어떻게 되는데?> <그럼 아파서 죽을수도 있어> <죽으면 왜 않되?> <너 죽으면 엄마가 슬프니까> <엄마, 슬프하면 않되는거야?> 어린 아이가 던진 질문이지만 <엄마, 죽으면 왜 않되? 슬퍼하면 왜 않되?>하는 데까지 나가면 이는 굉장히 심각한 신학적, 철학적 질문이 됩니다. 아인슈타인은 말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 똑같은 결과가 나올 때는 물어야 한다. 왜 그렇지?> 보통 우리들은 똑같은 일을 하면 당연히 똑같은 결과가 나와야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그렇질 않았습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얼마든지 다른 결과가 나올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만이 아니라 뉴턴, 에디슨, 소크라테스 같은 이들이 인류역사에 크게 공헌한 것은 당연하게 보이는 것 까지도 계속해서 묻고 또 물어본 사람들입니다.<왜 그렇지? 왜 그렇지?> 물어보는 사람만이 자연과학을 비롯한 인류 역사의 발전에 공헌하게 되고 인간들로 하여금 보다 더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대부분의 질문은 처음엔 모르던 것을 알게 해 주는 단순 지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그후엔 정치나 경제, 사회나 자연, 예술이나 문화에 대한 전문성을 증대 시켜주고, 더 나아가 우리의 지성을 다듬어 주고, 우리의 인격을 성숙 시킵니다. 직업적 질문은 일의 가치를 찿게 해주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에 대한 질문들은 우리 사회를 보다 한 단계씩 엎 그레이드 시키고, 신앙과 종교에 대한 물음들은 인간을 구원에 이르도록 이끌어 줍니다. 모든 질문은 어린이를 어른으로 키워줍니다. 질문은 무식한 사람을 유식한 사람이 되게 해 주고,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 주고, 미숙한 인간은 성숙한 사람으로 키워줍니다. 질문은 훈련이 않된 사람을 성숙한 시민으로 이끌어 주고, 미신에 젖은 사람은 깊이 있는 신앙인으로 자라나게 해줍니다. 처음엔 출근과 일, 월급과 주택, 육아와 여행, 초콜렛과 건강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된 질문들이었지만 어느 때 부턴가는 질문의 본질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마땅한가?>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죽은 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소유란? 진리란? 선이란? 아름다움이란? 사랑이란? 영원이란? 정치란? 민주주의란? 자유란? 사람의 본성은 무엇일까?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이렇듯 근본적 질문, 본질적 물음을 계속하다 보면 우리는 마침내 모든 질문의 핵심에 이르게 됩니다. <진정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참으로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수 있을까?> <이 절망의 땅에서 우리에게 소망이란 있는가?> 이렇게 질문의 중요성은 여기에서 또 한 단계 더 엎 그레이드됩니다. 모든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신하게 만들어 주고, 좀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이끌어 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해 줍니다. 질문은 결코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거나 신앙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질문은 우리의 신앙을 굳게해 주고 성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사이토 다카시는 그의 책 <질문의 힘>에서 <질문 잘 하는 법>을 안내합니다. 그에 의하면 질문에도 종류가 많이 있습니다. 폐쇄형 질문, 개방형 질문, 일반적 질문, 구체적 질문, 유도적 질문, 가정적 질문, 긍정적 질문, 부정적 질문, 타인을 향한 질문, 자기를 향한 질문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질문들은 <잘된 질문>과 <잘못된 질문>, 또 <수준 높은 질문>과 <수준 낮은 질문>으로 분류합니다. 질문은 한 사람의 지적 수준 뿐만이 아니라 영적 수준도 나타내 줍니다. 수준이 낮은 사람은 수준이 닞은 질문을 하고, 수준이 높은 사람은 수준이 높은 질문을 합니다. 질문이 그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게 합니다. 신앙도 비슷합니다. 신앙이 낮은 사람은 유치한 질문을 가지고 쩔쩔 매지만 신앙의 경지가 높은 사람은 보다 근본적 문제를 가지고 밤을 새우게 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주일학교 때 하던 식의 성경 퀴즈 문제를 가지고 정답을 찿느라고 쩔쩔매는 사람은 아직도 그 신앙의 단계가 유치부 수준이랄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를 믿은지도 60년, 70년이 되었으면 적어도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수 있을까? 진정 예수님을 따라 이웃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길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 앞에서 고민하며 기도하며 괴로워 할줄 알아야 그게 그의 영적 나이에 걸맞는 사람의 질문이라고 볼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좋은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하고, 아름다운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거룩한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나 목사님이나 어른들에게 물어보는 것도 좋습니다만 그러나 모든 질문의 최종적 대상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주님만이 모든 인간 질문에 대해 최종적 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질문의 대상 중 제일 마지막으로 한번 더 물어보아야 대상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물어보는 것이 우리의 Final Question이 될 때 모든 질문은 완성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숙제 하나 드리겠습니다. 다음 질문들을 가지고 오늘 저녁이나 내일 쯤 시간을 내시어 자기가 자기에게 한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내 인생에 대해서 100점 만점에 몇 점이나 줄수 있을까?
이제 까지의 삶에서 가장 잘 한 것, 그래서 가장 감사할 일은 무엇인가?
이제 까지의 삶에서 제일 후회스런 일은 무엇인가?
죽은 후 사람들이 (혹은 식구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해 주기를 원하는가?
‘나’라는 사람으로 인하여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는가? 있다면 누구 누구인까?
지금도 용서하지 못한 사람, 혹은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누구 누구인가?
죽을 때 까지 꼭 가지고 가고 싶은 것이 있다면 3가지만 써보자.
죽기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나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죽을 때에 꼭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유언 써보기)
내 묘비에 새겨주길 원하는 글은 무엇인가? 미리 한번 써두자.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성서속에 던져진 가장 위대한 질문들
<이하는 2025년 부터 은목회 예배시에 홍길복이 전하려고 구상한 설교본문과 제목들입니다.>
듣기도하고 묻기도하니 – 질문은 왜 중요한가? (누가복음 2장 41- 47 / 요한복음 1장8절)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장 1-21절 중에서 8-11절)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세기 4장 1-15절 중에서 8-12절)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창세기 16장 1-16절 중에서 6-8절)
“정의를 행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창세기 18장 22-25절)
“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세기 32장 22-32절 중에서 22-28절)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출애굽기 4장 1-4절)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열왕기상 4장 4-15절 중에서 4-10절)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열왕기상 19장 9-18절 중에서 9-10절)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겠느냐?” (욥기 2장 7-10절)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시편 119편 9-16절)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 6장 6-13절)
“네가 무엇을 보느냐?” (예레미야 1장 11-19절 중에서 11-13절)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경책하여 듣게 할꼬?” (예레미야 6장 9-15절)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에스겔 37장 1-6절)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마태복음 8장 23-27절)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마태복음 11장 15-19절)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태복음 16장 13-20절)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마태복음 18장 21-22절)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 부터 왔느냐?” (마태복음 21장 23-27절)
“내가 이 예수를 어떻게 하랴?” (마태복음 27장 15-26절 중에서 20-23절)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장 45-50절)
“너희 마음이 이리도 둔하냐?” (마가복음 8장 14-21절)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마가복음 8장 34-38절)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마가복음 10장 46-52절)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느냐?” (누가복음 7장 24-35절 중에서 24-26절)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8장 22-25절)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누가복음 10장 25-37절)
“이들이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누가복음 13장 1-5절)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누가복음 13장 18-19절)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누가복음 18장 18-23절)
“늙으면 다시 날수 있습니까?” (요한복은 3장 1-8절)
“어찌 그런 일이 있을수가 있습니까?” (요한복음 3장 9-15절)
“네가 낫고저 하느냐?” (요한복음 5장 2-9절)
“어떻게 이 사람믈을 먹일수 있겠는가?” (요한복음 6장 1-13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장 17-27절)
“네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느냐?” (요한복음 13장 36-38절)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찿느냐?” (요한복음 20장 11-18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 15-19절)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도행전 9장 1-9절)
“내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사도행전 16장 19-34절 중에서 25-32절)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사도행전 19장 1-7절)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로마서 6장 1-4절)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로마서 8장 31-39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베드로후서 3장 8-13절)
참고서적
인간에게 물어 오신 하나님의 10가지 질문, 원형수지음, 대한기독교서회, 2007
하나님의 일곱가지 질문, 최형섭지음, 예수전도단, 2012
하나님의 위대한 질문, 한기채지음, 교회성장연구소, 2012
예수님의 위대한 질문, 한기채지음, 교회성장연구소, 2012
예수님의 모든 질문, 스탠 거쓰리((Stan Guthrie)지음, 유정희옮김, 규장, 2018
하나님의 질문, 최현규지음, 쿰란출판사,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