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설교 : 성서 속에 던져진 질문들 (2)

주제 : <성서속에 던져진 위대한 질문들, The Great Questions in the Bible>
오늘의 본문 : 창세기 3장 1–11절
오늘의 제목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 인간에 대해 물으시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 인간에 대해 물으시다 (창세기 3:1~11)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물음은 성서에 나오는 수 많은 질문들 중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던지신 <최초의 질문>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물음>입니다. 흔히 원시복음이라고 불리우는 이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에덴 동산에서 살게하셨고 그들에게 그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들을 다 먹도록 허락하셨습니다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만은 먹지 말라고 금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뱀으로 상징이 된 사탄의 꼬임에 빠져서 그만 하나님께서 금지한 그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눈이 밝아져서 자신들의 벌거벗은 모습, 즉 범죄자가 된 자아의 실상을 깨닫게 되어 동산 나무 숲 사이에 숨었는데 그 때 하나님이 그들을 찿아와서 이름을 부르면서 물으신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물음은 하나님께서 지금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그 장소, 그 place, 그 위치를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의 본질은 <아담아, 너 지금 무슨 짓을 했느냐? 너 왜 숨어 있는 것이냐?>하는 물음입니다. 이는 <아담아, 너는 인간의 본질, 인간의 현존, 인간의 실상,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보통 검사들이 하는 식으로 범죄 행위의 원인추궁식 질문을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선악과를 먼저 따먹은 사람은 하와였으니까 “하와야,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하와의 이름이 아니라 아담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Adam>이란 말은 히브리어 <Adama>에서 온 말인데 그 뜻은 <흙>입니다. <아담이란, 인간이란 흙으로 지어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 3:19> <아담>이란 에덴동산에 있던 고유명사로써의 그 아담이 아니라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 모두를 통칭하는 보통명사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장소와 세대를 넘어서 저와 우리 모두를 포함하여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 모두에게 던지신 질문입니다. <아담아, 인간들아, 너희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너희들은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느냐? 너희 인간의 상태, 처지, 실상, 본질,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이냐? 도대체 너희 인간이란 어떤 존재냐?>하는 질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질문은 성경만이 아니라 생물학, 심리학, 정치학, 경제학을 포함한 인문학과 철학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취급하는 핵심적 물음입니다. 라틴어로 인간을 Homo라고 하는데 여기에 덧붙여진 인간에 대한 정의는 참 많습니다. <Homo habilis –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Homo erectus – 두발로 걷는 인간> <Homo ludens – 놀이하는 인간> <Homo movens – 이동하는 인간 > <Homo artex – 예술적 인간> <Homo economicus – 경제적 인간> <Homo politicus – 정치적 인간> <Homo nomad –떠돌아 다니는 인간> <Homo religious – 종교적 인간> <<Homo sapiens – 생각할 줄 아는 인간> 등을 넘어서 최근에는 <Homo hundred – 100세 인간>에 이르기 까지 인간에 대한 정의는 100여 가지도 더 됩니다. 순수 우리 말에서 <사람>이란 <삶>과 <앎>의 합성어 이어서 <사람이란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알아야만 사람이 된다>고 해석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人間을 <닝겐>이라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중국사람들은 인간을 주로 <人類>라고 표기함으로 인간을 세계적이며 우주적인 포괄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어떤 한가지 실체를 두고도 이렇게 말과 해석이 많고 다양하다는 것은 그 만큼 어렵고 복잡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기에 앞서서 철학사에서 말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두 가지 스토리를 통해서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는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중 하나인 소포클레스의 2부작인 <오이디푸스왕> 과 <안티고네> 스토리입니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어느날 아폴론 신에게서 무서운 신탁을 받습니다. <지금 임신 중인 너의 아네가 아들을 낳을텐데 그 아이가 장성하면 너를 죽이고 너의 아내, 즉 자기 어머니를 자기 아내로 맞아드리게 될 것이다> 불안하고 두려워진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아들 오이디푸스가 태어나자마자 그를 즉시 깊은 산속에다 내다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린 애기 오이디푸스는 다행히 죽지 않고 어떤 양치기에 의해서 구출되어 그가 자기 집으로 데려다
잘 길러주었습니다. 어린 오이디푸스는 양치기 아저씨를 따라 아주 건강하게 잘 자라났습니다. 청년이 된 오이디푸스는 어느날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은 한 노인을 만나서 말다툼을 벌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만 우연찮게 그 노인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산속에서 만나 말다툼 끝에 오이디푸스가 죽인 노인은 마침 사냥을 나왔다가 길을 잃고 헤매이던 그의 친아버지 테베의 왕 라이오스였습니다. 오이디푸스는 그런 내막을 알리가 없었습니다. 며칠 후 오이디푸스는 임금이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아 혼란에 빠진 테베성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마침 테베성문 앞에는 그 유명한 스핑크스가 앉아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는 수수꺽기를 알아 맞히면 성안으로 들어 갈 수 있다. 그러나 알아 맞치지 못하면 죽을 것이다.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낮에는 두 발로 걷다가, 저녁이 되면 세 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 오이디푸스는 머뭇거리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것은 인간이다. 인간은 태어나서는 손과 발 넷으로 기어다니다가, 어른이 되면 일어서서 두 발로 걷고, 다시 늙어 저녁이 되면 지팡이를 잡고 세 발로 걷는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테베성 안에 두루 퍼졌습니다. 테베성 사람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그 어려운 수수꺽기를 맞힌 오이디푸스를 환영하여 자기들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테베성의 새로운 임금이 된 오이디푸스는 전례에 따라 선왕의 왕비, 이오카스테를 자기의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당연히 그는 이오카스테가 자기를 낳아준 생모인줄을 몰랐습니다. 테베성은 안정을 찿고 평안해 졌습니다. 그런데 얼마후 갑자기 그 성에는 이상한 전염병이 나돌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아폴론 신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며 그 원인이 무엇인를 물었습니다.
그때 신탁이 나왔습니다. <이 전염병의 원인은 한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 어머니를 아내로 빼뜰어 갖어서 생겨난 것이다. 나는 그 범인을 잡을 때 까지 이 질병을 멈추지 않겠다> 신탁을 받은 오이디푸스는 범인을 잡으려고 예언자와 점쟁이들을 찿아다니면서 무진 애를 썻지만 누가 천하에 그런 몹쓸 죄를 지었는지 그 범인은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염병은 끊이지 않고 더욱 더 기승을 부렸습니다. 그리던 중 마침내 이 모든 숨은 비밀과 내막을 알고 있던 유일한 증인, 전왕 라이오스의 아내이며 자신의 생모인 동시에 지금은 자기의 아내가 된 이오카스테가 모든 전말을 다 털어놓습니다.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 어머니를 아내로 빼뜰어 가진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아니 천하에 내가 내 아버지를 죽였다니! 아니 천하에 내가 나를 낳아준 내 어머니를 내 아내로 삼다니 ! 아니야 ! 아니야 ! 그럴 수는 없어 !> 오이디푸스는 미친듯이 소리 소리 지르다가 스스로 자기의 두 눈을 찔러 실명한 후 어디론가 살아져 버리고 맙니다.
그 다음 소포클레스의 제2부 <안티고네>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사라진 오이디푸스왕에게는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딸 이름은 이 작품의 제목인 <안티고네>입니다. 오이디푸스가 사라진 후 그의 두 아들들은 왕권을 놓고 치열하게 싸우다가 둘 다 서로가 서로를 찔러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안티고네의 삼촌인 크레온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된 크레온은 죽은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중에서 작은 아들의 장례식은 아주 성대하게 치루어 주고 큰 아들의 시체는 그냥 들에다 버리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안티고네는 죽은 큰 오빠가 너무나 불쌍하여 몰래 그의 시신을 가져다가 잘 매장을 해줍니다. 얼마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삼촌 크레온은 왕명을 어긴 안티고네를 붙잡아 사형에 처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안티고네를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이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애인을 죽일려고 하는 아버지 크레온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이몬은 아버지 크레온을 찾아가 칼로 찔러 죽이고 자기도 스스로를 찔러 자결합니다. 모두가 다 죽고난 후 이 그리스 비극의 마지막 무대 위에서 안티고네와 합창단은 이렇게 노래를 부릅니다. <아, 이 세상에는 정말 알 수 없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로구나! 해가 뜨고 지는 것,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오는 것,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것, 아, 인간 세상에는 신비하고 이상한 것이 정말 너무 너무 많구나! 그런데, 그런데 그 중에서도 제일 알 수 없고 이상하고 신비한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다! 인간이다! 인간이야 말로 정말 알 수 없는 수수꺽기요, mystery이다! 서로 죽고 죽이는 인간들! 인간이란 아무 것도 아니다! 삶도 죽음도, 행복도 불행도 하나의 신기루다! 모든 신기루는 살아져 버린다!>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 스토리에서 두 번째로 나누려는 이야기는 불교의 <佛說比喩經, 불설비유경>에 등장하는 동양적 인간이해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무서운 짐승이 나타나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좇아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당황해진 그는 주변에 있는 한 물없는 깊은 우물을 발견하고 그 안으로 숨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우물속으로는 마른 나무 가지 하나가 길게 드리워 있어서 그 사람은 그 나무가지를 붙잡고 우물 안으로 몸을 낮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풀싸, 아래를 내려다 보니 거기에는 커다란 독사 네 마리가 위를 바라보며 내려오기만 하면 물어 죽일듯이 입을 날름 거리고 있었습니다. 밖에는 맹수가 지키고 있고 아래는 독사가 기다리고 있는 그 틈에서 나그네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자기가 잡고 있는 그 칡넝쿨 가지 위를 올려다보니 거기에는 흰쥐 한 마리와 검은 쥐 한 마리가 번갈아 가면서 야금야금 그 칡넝쿨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있으면 칡넝쿨은 끊어질텐데, 그럼 독사에게 물려 죽을 텐데, 그렇다고 다시 우물위로 올라갈 수도 없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던 순간 칡넝쿨의 잎사귀를 타고 꿀방울이 자기가 잡은 손목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나그네는 이런 아찔하고 위험하고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상황속에서도 자기 손등을 타고 내려오는 꿀을 핥아 먹었습니다. <아 달다!> 뒤쫓아오는 세월, 기다리고 있는 죽음, 하루는 낮, 하루는 밤으로 이어지는 일상, 그리고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떨어지는 꿀 한방울을 향해 입을 벌리는 나그네, 인간이란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인생이란 나그네요, 쫓긴듯이 와서, 대롱대롱 매달려 떨어지는 꿀방울을 먹다가 그렇게 가는 서글픈 존재다>
말씀드린 두 개의 스토리에서 보신 바와 같이 헬레니즘을 기본으로 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인간관과 우리네 동양인들의 인간이해의 밑바탕에는 허무주의와 절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2천 수백년 전 <너 자신을 알라>고 설파했던 소크라테스와 인도의 힌두이즘과 불교철학의 가르침으로부터 <아, 테스형, 정말 세상은 왜 이래?>라며 눈물로 노래하는 나훈아에 이르기 까지 우리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인간, 이해되지 않는 인간, 허무한 인간, 무상한 인간세상>이 깔려 있습니다.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 <아담아, 도대체 너라고 하는 인간은 어떤 존재냐?> 여기서 우리는 비슷한 시기, 고대 헤브라이즘을 근간으로 형성된 기독교적 인간의 본질을 다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과 만은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금지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설마 아담이 그것을 따먹을 줄을 모르셨을까요?
만약에 아시면서도 금하셨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죄를 짖고 타락하도록 덫을 쳐놓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지말라고 금지하신 이유, 금지조치의 숨겨진 뜻은 이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고 너는 인간이다. 나는 창조주이고 너는 피조물이다. 이 에덴의 주인은 나다! 나, 하나님이 에덴을 포함한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다. 너라고 하는 인간이란 절대로 하나님이 될 수도 없고, 따라서 우주와 만물의 주인이 아니다. 내가 주인임을 분명히 알아라!> 이 점을 확실히 하시기 위해서 <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사탄이 와서 속삭이며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해도 <인간은 하나님 처럼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행동은 마치 우리들이 어른이나 선생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하는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행동은 <자기가 하나님이 되려고 했던> 역사상 최고 최대의 반역 행동이었습니다.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인간이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인간이 자기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되어 보려고 시도한 신권침탈의 범죄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간관의 가장 큰 핵심은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라는 명제입니다.
인간이 알던 모르던, 이해하던 못하던,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하여튼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하나님은 인간과 우주와 역사의 창조주요 주인이시고, 인간이란 제 아무리 만물의 영장이니, 생각하는 동물이니, 이성적 존재니, 감성적 존재니 등등 떠벌여대도, 그래도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Clear and distinct 하게 밝혀주신 스토리가 바로 에덴 동산에서 벌어졌던 선악과 사건과 그에 이어 말씀해 주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물음이었습니다. 내가 너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한 것은 네가 그 모든 것들의 주인이고 또 주인 행세를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을 섬기고 돌보고 봉사하라는 말이지 착취하고 지배하고 군림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맞다. 내가 너를 우주와 만물의 으뜸이요 영장이요, 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착각하지 말아라. 너는 절대로 우주와 역사의 주인, 중심, 쎈타, 핵심이 아니다. 나다! 나 하나님만이 이 모든 것의 주인이다!> 이 선포를 우리는 <인본주의 혹은 민본주의에서 신본주의로> <인간중심주의에서 하나님 중심주의로> <헬렌니즘에서 헤브라이즘으로> 라는 중심축의 변경, 우주관과 인간관과 역사관의 혁명적 변화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는 이 성서 최초의 질문은 인간의 본질과 실존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것을 자각하고 깨닫게 해준 <핵심절 물음>입니다. <착각하지 말아라. 너희 인간들은 선악과 한개가 아니라 천개, 만개를 먹어도 눈이 밝아지지도 않고 하나님이 될수도 없다. 너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너는 날고 뛰어도 내 손바닥 안에 있다. 너는 동산 숲속이 아니라 하늘 끝까지 가서 거기 숨어도 내가 다 찾아낸다. 너는 숨는다고 해서 숨을 수도 없고 도망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너는 죄인이요, 범죄자요, 한계가 분명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논의와 연구들이 이어져 왔습니다만, 크게는 두가지입니다.
성선설과 성악설입니다. 특정한 사람들 몇몇을 예로 들어가면서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느니 아니면 착하다느니 하면서 피차 논쟁을 벌립니다만 정말로 알기 어려운 것이 사람입니다. 아침에는 천사였다가도 저녁에는 악마로 변하는가 하면, 오늘은 천사 처럼 보이다가도 내일은 악마의 화신으로 변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인간은 늘 두개, 세개, 아니 수십개, 수백개의 가면을 쓰고 삽니다.
인간이란 persona요, 그 뜻은 가면이며 우리 모두다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평생토록 수 많은 배역을 바꿔가며 살아가는 연극배우들입니다. 아무리 우리끼리 누구는 의인이니, 성인이니, 성자니 하면서 칭호를 높여준다 하더라도 인간은 세상에는 의인도 성인도 성자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단 한사람도 예외 없이 죄인이요, 악인이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다시 한번 더 분명하게 확인해 둡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 처럼 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란 영원히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로 철저하게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물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너라고 하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이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나무가지로 우리의 벌거벗은 몸을 가리거나 숲속에 들어가 숨으려고 해서는 않됩니다. 우리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용서하소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옵소서>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