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성지 답사기 중에서 (10)
<시드니 인문학교실 제 2차 인문학여행팀> 여러분! 모두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홍길복입니다. 저는 아주 오래전 부터 어디 여행을 하게 되면 그때 그때 마다 여행일기를 쓰는 것이 하나의 습관 처럼 되어 왔습니다. 정확하게 세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썻던 여행일기가 아마도 한 200일 분은 될 것 같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더해 가는지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여행일기를 쓸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올리는 글은 16년전에 썻던 글 중 일부입니다. 부족한 사람이 2007년 1월 15일 부터 약 3주에 걸쳐 서울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 <성지 답사팀>과 더불어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이집트 등 5개국을 방문했을 때 썻던 <여행 일기> 중 한 부분입니다. 저는 그 때, 여행 중에 썻던 일기를 당시 시드니에서 발행되던 주간지의 요청에 따라 주 1회 씩 59회에 걸쳐 1년이 넘게 연재했었습니다. 물론 그 일기는 전문성을 지닌 글은 아닙니다. 전문가들이 읽으시면 잘못된 것들도 적지 않게 지적해 내시리라 생각되어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2023년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 준비하고 있는 <제 2차 인문학여행>의 참가자들과 함께 오래 전에 경험하고 생각했던 보잘 것 없는 이런 작은 여행 이야기 이지만 나누고 싶어서 우리가 방문하게 될 <이집트> 부분만을 추수려서 1주일에 한번 정도씩 몇번에 걸쳐 올려드릴려고 합니다. 이 글이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가 서로 더 가깝게 사귈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룩소르 (Luxor)에서 – 카르낙 신전과 네크로폴리스 이야기
1월 30일, 화요일 밤 10시 30분, 우리는 카이로의 중앙역에서 <룩소르, Luxor>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원래는 침대칸을 예약했었는데 차질이 빚어져 1등칸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공간도 비교적 넓직하고 히팅도 잘 되어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경제 상황에 비하면 럭서리한 편이었습니다.
룩소르는 카이로에서 나일강을 따라 상류쪽으로 약 730킬로미터 쯤 떨어진 <上이집트>의 대표적 유적지입니다. 기차로는 약 10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룩소르는 이집트의 제 18왕조와 19왕조 시대의 수도였으며, 당시로써는 전 이집트의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시대는 대강 기원전 1500년 부터 1100년 사이가 되는데, 지금부터로 치면 약 3500년 전입니다. 그 시대의 이름난 왕들로는 <투트모세 Thutmose, 1, 2, 3세>를 포함하여 소년왕 <투탕카멘 Tutankhamun>과 <라암세스 Ramses 1, 2세>가 포함되는 이집트 역사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 시절입니다.
<룩소르>는 한때 <테베 Thebes>라고도 불리웠는데, <테베>란 <룩소르>의 그리스식 이름입니다.
전성기에는 인구가 백만이나 되었으며 <上이집트>의 제 1 도시로써 수도를 멤피스로 옮기기 까지 오랜 기간 동안 엄청난 영화를 누렸습니다. 오늘날 룩소르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유적지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일강변에 있는 기차 정거장에 도착한 후 버스를 타고 주변을 둘러보니 강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는 수 많은 고대의 유물들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나일강 동쪽에는 룩소르신전과 카르낙 신전을 비롯하여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강 서쪽으로는 유명한 <왕들의 골짜기>와 <왕비들의 골짜기>를 비롯하여 여러 신전들이 즐비합니다. 룩소르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이후 부터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은 세계 고고학계의 최대 관심 지역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이집트 관광의 <하이라이트>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B.B.C.가 펴낸 <평생 잊을수 없는 여행지 40, Unforgettable Places to See Before You Die>에는 카이로의 피라미드 대신에 이곳 룩소르의 <카르낙 신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만큼 룩소르와 이곳에 있는 카르낙 신전은 인류의 중요한 문화유산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카르낙 신전 Karnak Temple>은 이집트의 제 12왕조 때 부터 시작된 <아문, Amun>신을 섬기는
신전입니다. <아문신>은 이집트에서 <라, Ra>신에 버금가는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이 큰 태양신 중 하나입니다. 처음 이 신전은 <파라오>의 불멸을 위하여 왕에게 봉헌된 것이었습니다. 기자의 피라미드도 물론 어마어마한 규모이기는 하지만,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는 오히려 1300년 동안이나 무서운 영향력을 발휘해 온 이 카르낙 신전이 더 엄청나게 한 시대와 역사를 이끌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날 이집트의 왕들은 神들의 이름으로, 혹은 神들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지배했습니다. 왕들은 신처럼 행세했고 백성들은 왕을 보면서는 <나타난 신, 顯人神>을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문>이 주신으로 있는 <카르낙 신전>은
동서남북의 길이가 각각 50미터 씩인데, 거기에다 남쪽과 북쪽으로는 <무트, Mut> 신과 <몬트, Mont> 신의 두 신전들이 연결되어 있어서 그 길이는 모두 1.5 킬로미터에 이릅니다. 중심이 되는 <아문신전> 만해도 그 넓이가 총 6천 평방미터나 됩니다. 이 신전 안에는 엄청나게 큰 돌기둥 136개가 줄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대열대주 홀, The Great Hypostyle Hall>이라고 부릅니다. 돌기둥 하나의 높이는 23미터 씩이고, 그 둘레는 각기 15미터나 됩니다. 돌기둥 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여러가지 신들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어떤 기둥들은 채색이 되어 있는데, 3500년 전의 흔적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옛날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이 신전에 들어 서서 도열해 있었을 제사장들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파라오의 위엄이 과연 어떠했을까 상상해 보니, 인간이란 진정 얼마나 미련하고 미약하고 동시에 위대한 상상력을 지닌 존재인지를 새삼 깨달을수 있을 듯 했습니다.
카르낙 신전에서는 지나치지 말고 꼭 둘러보아야 할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숫양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는 참 놀랍습니다. 라암세스 2세의 거상과 특히 그 발 부분도 정말 엄청납니다. 아문신의 지성소, 그리고 높이가 무려 43미터나 되는 탑의 문을 비롯하여 많은 것들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 중엔 무엇 보다도 투트모세 3세가 만든 <오벨리스크, Obelisk>가 있습니다. 이 오벨리스크는 높이가 무려 23미터요, 무게는 143톤이나 되는 통돌로 만든 것입니다. 이 오벨리스크는 원래 두개가 하나의 짝을 이루도록 만들어진 것인데 다른 하나는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빼앗아다가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 세워 놓았습니다.
우리는 시간에 쫓기기 시작했습니다. <카르낙 신전>에 인접해 있는 <룩소르 신전, Luxor Temple>은 그야말로 수박 겉핱기 식으로 둘러보았습니다. 호주에서 미리 책을 읽고 공부해 둔 것들도 적지 않았는데, 사진 조차도 제대로 찍을수 없으리 만큼 서둘러야 했습니다. 우리는 나일강 나루터에서 배를 탔습니다. 불과 한 15분 정도였지만 우리는 나일강 상류에 있는 룩소르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건너갔습니다. 강바람이 참 시원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아이들이 떼로 몰려와서 “one dollar, one dollar”하며 옷소매를 잡는데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한두 달라를 나누어 주고 강을 건넜습니다. 대기한 버스를 타고 저 멀리 사하라 사막과 연결된 듯이 보이는 사막길과 산골짜기를 지나 <왕들의 계곡, The Valley of Kings>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에는 지금부터 약 3500년 전, 이집트 제 18, 19, 20 왕조 시대를 살았던 왕들의 무덤이 모여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확인된 왕들의 무덤은 모두 62기인데, 우리는 그 중에서 <투탕카멘>의 무덤 한 곳만 들어가 보았습니다. 원래 이곳은 오랜 세월 동안 산골짜기에 숨겨져 있었고, 또 무덤의 입구를 알아볼 수 없도록 위장해 놓았으며, 지하의 긴 통로를 거쳐서 들어간 다음에야 매장된 자리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어서 도저히 발견할 수가 없었던 <암굴 중 암굴>이었습니다. 이런 숨겨진 자리를 발굴해 낸 영국 고고학자들의 이야기는 따로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투탕카멘은 제 18왕조가 쇠퇴해가던 말기에 왕위에 오른 사람으로써, 불과 8살의 어린나이에 왕 위에 올랐다가 17살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들의 계곡이 발견된 후 여기서 발굴된 유물들이 투탕카멘과 그에게 속한 것들임이 발혀지면서, 동시에 이곳에서는 수많은 부장품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현재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만해도 거의 3500여점이나 됩니다. 카이로에 있는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 2층에는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 황금 마차, 황금 의자, 그리고 황금으로 만든 棺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우리는 이미 이것들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무덤 속에 들어가 보니 무덤 자체가 또 하나의 궁궐이었습니다. 모두 4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제일 끝 방에서는 금박을 입힌 커다란 나무관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나무관을 여니 그 안에는 다시 석관이 나왔습니다. 그 석관은 세겹으로 되어 있었는데, 제일 안쪽에서는 드디어 그유명한 순금 110kg짜리 황금관이 나왔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이 황금관 안에서 투탕카멘의 미이라를 발견했고, 현대 과학자들은 이것이 약 3천년 전의 것임을 밝혀내는데 성공했습니다. 미이라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소년왕 투탕카문은 뇌 부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어 죽은 것이라고 판명하고, 이는 아마도 암살을 당하여 후계자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비극적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룩소르에서의 1월은 겨울철인데도 불구하고 무덤 밖으로 나오니 많이 더웠습니다. 열기가 온 땅에 가득했습니다. 여기 <왕들의 골짜기>에서 한 1.5킬로쯤 떨어진 <왕비들의 골짜기, The Valley of the Queens>는 그냥 겉 모습만 보고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이곳은 꼭 왕비들만이 아니라 왕족들과 귀족들이 함께 매장되어 있는 곳으로써 지금까지 약 80여기의 무덤이 발견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곳 <왕들의 골짜기>와 <왕비들의 골짜기>를 통칭하여 <네크로폴리스, Necropolis>, 즉 <무덤의 도시>라고 부릅니다. <무덤의 도시 !>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모여있는 왕과 왕비와 왕족들과 귀족들의 무덤들은 모두 합하면 150여기나 되니 어찌 여기가 <무덤의 도시>가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발굴된 부장품들은 이집트 뿐만 아니라 인류문화의 보고 (寶庫)라 할 수 있습니다. 무덤 마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벽화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고고학적 식견이 별무한 저도 언젠가 시간이 주어진다면 몇일만이라도 다시 이곳을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와 이야기해 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습니다.
시간에 쫓긴 우리는 3천 5백년 전 상하 이집트를 통일했던 <멤논의 거상, Colossi of Memnon> 앞에서 사진 몇장을 찍고 출국을 위해 서둘러 공항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끝)
(여기 10회에 걸쳐 올린 글은 부족한 사람이 2007년 서울에 있는 장로회 신학대학 학술답사팀과 더불어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그리고 이집트 등 5개국 학술탐사때 썻던 일기 중에서 이집트 부분을 옮긴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여행 일기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이렇듯 보잘 것 없는 글인데도 Christian Life의 발행인이신 임운규 목사님께서 이를 온라인 신문에 올려 공유케해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작은 참고와 더불어 피차 좋은 교제가 되시길 바라는 마음이 오니 혜량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