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성지 답사기 중에서 (7)
<시드니 인문학교실 제 2차 인문학여행팀> 여러분! 모두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홍길복입니다. 저는 아주 오래전 부터 어디 여행을 하게 되면 그때 그때 마다 여행일기를 쓰는 것이 하나의 습관 처럼 되어 왔습니다. 정확하게 세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썻던 여행일기가 아마도 한 200일 분은 될 것 같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더해 가는지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여행일기를 쓸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올리는 글은 16년전에 썻던 글 중 일부입니다. 부족한 사람이 2007년 1월 15일 부터 약 3주에 걸쳐 서울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 <성지 답사팀>과 더불어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이집트 등 5개국을 방문했을 때 썻던 <여행 일기> 중 한 부분입니다. 저는 그 때, 여행 중에 썻던 일기를 당시 시드니에서 발행되던 주간지의 요청에 따라 주 1회 씩 59회에 걸쳐 1년이 넘게 연재했었습니다. 물론 그 일기는 전문성을 지닌 글은 아닙니다. 전문가들이 읽으시면 잘못된 것들도 적지 않게 지적해 내시리라 생각되어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2023년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 준비하고 있는 <제 2차 인문학여행>의 참가자들과 함께 오래 전에 경험하고 생각했던 보잘 것 없는 이런 작은 여행 이야기 이지만 나누고 싶어서 우리가 방문하게 될 <이집트> 부분만을 추수려서 1주일에 한번 정도씩 몇번에 걸쳐 올려드릴려고 합니다. 이 글이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가 서로 더 가깝게 사귈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콥틱교회 (The Coptic Church)
고대 이집트는 태양신을 중심으로 한 다신교 숭배의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다양한 신화와 설화들 중에는 사후 세계에 대한 여러가지 형태의 신전, 사제, 축제, 신탁, 제의와 문화들이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집트에서 주로 찿아가는 이집트의 문명과 문화의 흔적이란 거이가 이런 전통적 제의종교의 사적들을 둘러보는 것입니다. 이집트는 기원후 7-8세기에 들어 이슬람이 들어오면서 부터는 이슬람이 국교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현재 이집트는 무슬림이 전체 인구의 약 90% 정도이고 그 숫자도 1억 이상이나 됩니다. 물론 이집트의 표준어도 아랍어입니다. 하지만 이집트에서는 기독교도 정식 종교로 인정 받고 있습니다. 초창기 이슬람과 기독교는 서로 공존과 대립과 갈등을 반복해 왔고, 한때 이슬람 세력이 강력해졌을 때는 기독교를 많이 핍박하기도 했습니다만 오늘날 이집트에서는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 별다른 마찰이나 갈등이 없이 비교적 잘 공존하고 있는 편입니다.
이집트에서 기독교와 그 배경이 되는 유대교는 퍽 긴 역사적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찌기 아브라함과 그 후손 때 부터 두 민족 사이에는 빈번한 교류와 왕래가 있었고 요셉 시대에 와서는 이주와 정착을 통하여 밀접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곳도 이집트 땅이고 바벨론 유수 이후 유대인들이 대거 망명한 땅도 이집트입니다. 헤롯왕 치하에서 아기 예수와 그 부모가 난민으로 피난처를 삼은 지역도 이집트였습니다.
이집트에는 로마 카톨릭도 아니고, 그리스 정교회도 아니며, 그렇다고 개신교도 아닌, 아주 특별한 이름을 지닌 기독교가 있습니다. <콥틱교회, The Coptic Church>라고 부르는 교회입니다. 교인도 적지 않아 약 900만 정도나 됩니다. 이는 다른 나라에는 전파되지 아니한, 이집트에만 있는, 이집트교회입니다. 영국의 <성공회, The Anglican Church, Chur of England>는 영국에서 시작되었지만 다른 나라에도 퍼져 나갔는데 이집트의 콥틱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 Eusebius>에 의하면 이집트에 처음 기독교를 전파한 사람은 <마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로 사도 바울을 따라 소아시아와 그리스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마가는 바울이 순교한 후엔 이집트로 건너와 이 곳에서 선교하며 교회를 세우다가 순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서의 저자로 전해지는 마가는 이곳 카이로에서 북쪽으로 약 300킬로미터 쯤 떨어진 해안도시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에 정착하여 그곳에 최초로 교회를 세웠고 여기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 집니다. 처음 그의 시신은 여기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성 마가 교회>에 안치되었으나 9세기 베네치아의 무역상들이 마가의 유해를 훔쳐가 베네치아 도심에 비잔틴 양식의 웅장한 <산 마르코 성당>을 짖고 거기에 마가의 유해를 봉안했다고 알려졌습니다. 로마에는 베드로가 순교했다고 하는 <성 베드로 성당>이 있는 것 처럼 알렉산드리아에는 마가가 순교한 <성 마가교회>가 있어서 지금도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예루살렘의 함락되고 나라는 완전히 초토화 되었으며, 모든 백성들은 산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물론 그 때 수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 역사상 최초의 <디아스포라>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당시 이집트 땅으로 피난온 유대인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들 이집트로 망명온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가장 많이 정착한 지역이 바로 <알렉산드리아> 였습니다. 이곳에 정착한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2세, 3세들이 차츰 히브리어를 잊어감에 따라 <히브리어 성서>를 당시 국제 통용어인 그리스 말로 번역해 냈습니다. 이것을 가르쳐 우리는 흔히 <70인 역, Septuagint>이라고 부릅니다. 알렉산드리아에 뿌리를 내린 유대인들은 헬라어를 쓰는 개방적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편협한 유대주의나 율법의식에 매이질 않았고, 정치나 경제에서 만이 아니라, 사상과 종교에 있어서 까지도 진보적이었고 개화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를 접하고 수용하는데 있어서도 별로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엇 보다도 이들 진보적 지식인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살면서 이루어낸 가장 뛰어난 업적은 헬라어 자모를 이두식으로 옮겨 놓아 이집트식으로 표기한 <콥틱어, The Coptic Language>를 창안해 낸 것입니다. 이는 당시 이집트 사람들이 오랫동안 사용해 온 이집트어를 당시 국제 언어랄 수 있었던 그리스 말로 표기 할수 있도록 해 낸 것입니다. 이는 이집트 사람들이 사용하는 이집트 말을 그리스 문자로 표기 할수 있도록 했다는 뜻입니다. 이 어문일치(語文一致)의 그리스식 이집트어 표기법은, 마치 중국의 한자를 우리나라의 자모와 결합시켜 발음하게 했던 이두문자와 같은 것입니다.
하여튼 <콥틱교회>란 이런 과정을 통하여 유대교로 부터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크리스챤들이 창안해 낸 <콥틱어>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는 오늘날 까지도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마가에 의해서 시작된 이집트의 콥틱교회는 그후 로마의 통치와 이슬람의 지배 아래에서 엄청난 박해를 받으면서도 오늘날 까지 그 생명을 유지해 왔습니다. 콥틱교회는 주후 63년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순교한 성 마가를 초대 주교로 모시고 있으며 그의 시신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마가 기념교회 제단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루에 7번씩 기도하며 그 때 마다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반복해서 기도를 바칩니다.
콥틱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수도원 운동의 확장과 보존입니다.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3시간을 달리면 4세기 경에 지어진 수도원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성 안토니우스 수도원>입니다. 현존하는 수도원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사막 수도원으로 지금도 수도사들이 영성 훈련을 이어가고 있는 곳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회는 기도원 운동이 퍽 활발합니다만, 본래 서양 기독교가 주도해 온 수도원 운동은 그 출발이 이집트의 콥틱교회입니다. 지금도 이집트에는 2천년 동안이나 유지되어 온 오래된 수도원들이 적지 않게 많이 있습니다. 처음 사막 가운데 세워진 이들 <사막 수도원>들은 환란과 박해를 피해 신앙과 교회의 존립을 위한 도피성으로 출발되었고, 더 나아가 생존을 위한 노동과 묵상을 중히 여겼으나, 오늘날은 영성운동에 그 촛점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교단과 국가를 초월하여 거이 모든 수도원운동의 본류는 바로 이곳 이집트 콥틱교회가 낳아 준 유산이며 전통이랄 수 있습니다.
콥틱교회에서는 그리스 정교회와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가 1월 7일이고, 부활 주일은 4월 13일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콥틱교회는 다양한 사회참여 운동에도 동참하고 있습니다. 정치 운동 뿐만 아니라 각종 아동보호운동과 여권신장운동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전 유엔 사무총장 부트로스 갈리(Boutros- Ghali)도 콥틱교 교인으로 이집트에선 총리와 외무장관도 역임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콥틱교회는 불행하게도 세계교회의 흐름과 함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콥틱교회가 초기 기독교 교리를 다듬어 가는 과정에서 잘못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후 451년 칼케톤 공의회에서 예수의 신성만 인정하고 그의 인성은 받아드리지 않음으로 이단으로 정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예수의 <神人兩性>을 믿고 고백하는데 콥틱교회는 처음부터 예수의 신성만을 고집함으로 기독론에서 영지주의자들과 같은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계속)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