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은퇴목사 주일예배설교
주제 : 죽음 앞에서의 삶 – (2) 죽음
본문 : 히브리서 9장 27절, 전도서 12장 7절
죽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있으리라’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여라’
지난 시간에는 누가복음서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읽고 우리 인생이 지니고 있는 착각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의 화두는 ‘죽음’입니다. 아침부터 죽음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약간은 불편하게 생각 하실 분도 계시리라고 봅니다만 그러나 사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에도 저녁을 생각하고 낯에도 밤을 준비하고 살아있을 때 부터 자주 죽음을 묵상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도 언젠가는 이 설교 시간에 꼭 해보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예전 중세 시대 수도원에서는 일년에 한차례씩 자신의 장례식 예행 연습을 하는 프로그램도 있었습니다. 또 요즘 인문학에서는 ‘데스 에듀케이션’(Death Education)을 아주 많이 하고 있습니다. 먼저 ‘죽음에 대한 성서적 이해’에 앞서서 죽는 것에 대한 일반적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세익스피어는 ‘Hamlet’ 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To Be or Not To Be?’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진짜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 이것은 인생 최대의 크고 심각한 문제 입니다. 같은 세익스피어의 말입니다. ‘겁쟁이는 일생동안 여러번 죽지만 용감한 사람은 오직 한번만 죽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죽음에 대한 명언들은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자 이제는 우리 서로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나는 죽으러 가고 너희들은 살러 간다. 허지만 어느 길이 더 좋을지는 오직 신 만이 아신다’ 사약을 들면서 소크라테스가 남긴 말입니다. ‘무덤에 들어가기 전 까지는 아무도 행복하게 살았노라고 말 할수 없다’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말 입니다. ‘잘 보낸 하루가 평안히 잠들수 있듯이 잘 살아온 일생이 평안히 죽을 수 있다’ 레오나르드 다 빈치가 한 말이라고 알려집니다. ‘죽은 황제 보다는 살아있는 거지가 더 낫다’는 말은 프랑스의 작가 라 퐁테느의 말입니다. 동양에서도 ‘호랑이는 죽은 후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은 다음 이름을 남긴다’는 중국의 구양수의 말이나 ‘새는 죽을 때가 되면 그 소리가 구슬퍼지고 사람은 죽을 때가 가까이 오면 그 말이 착해진다’는 증자의 말도 있습니다. ‘공수래 공수거’ – ‘빈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미루면 미룰수록 더 좋은 것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이다’ ‘죽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신이 되는 길 뿐이다’ 모두 누가 한 말인지 기억 할 수는 없지만 참 사려 깊은 명언들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죽음’을 표현하는 단어들은 대단히 많습니다. 우리가 사람이니까 무엇이든지 다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해서 그렇지 사실 죽음이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은 다 죽습니다. 풀이나 나무가 죽을 때는 ‘고사’라고 합니다. 가축이나 짐승이나 어패류가 죽을 때는 주로 ‘폐사’라는 말을 씁니다. 또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을 죽일 때는 ‘살인’ 혹은 ‘사형’ 이라 하고 동물의 경우에는 ‘도살’ 혹은 ‘도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이 죽는 것을 가르쳐서 ‘숨을 거두었다’ ‘숨이 끊어졌다’ 혹은 ‘숨이 다했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눈을 감았다’ ‘잠이 들었다’ 혹은 좀 높임 말로는 ‘영면하셨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은 숨을 않쉬거나 눈을 않뜨는 것을 보아온 경험 때문일 것 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 임종 여부를 확인하는 어른들은 아주 얇은 창호지 같은 것을 코구멍에 대고 종이가 움직이나 않 움직이나 하는 것으로 사망여부를 확정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또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이 제일 마지막으로 작은 손전등을 가지고 환자의 안구를 비쳐보고나서 마침내 침통한 음성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을 들은 경우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쓰는 말은 사망, 임종, 작고, 타계, 사거, 절명 같은 단어들 입니다. 가문의 어른이나 왕족, 귀족 등 높은 사람들에 대해서 사용하는 존칭어는 대단히 많습니다. 서거, 영면, 별세, 붕어, 승하를 비롯하여, 유명을 달리하시다, 돌아가시다 같은 말들을 선택해서 쓰곤 합니다. 그런가하면 또 죽음을 비하해서 쓰는 말들도 적지 않습니다. 골로 갔다, 뒈졌다, 황천행이다,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 말은 많이 천박한 언어라 할 수 있습니다. 종교에서는 제각기 다른 말로 죽음을 표현하는데 그것은 그 종교의 신앙이나 교리와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도교에서는 ‘반진’이라 하고 천도교에서는 ‘환원’이라 하며 불교에서는 ‘입적’ 혹은 ‘열반’이라고 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주로 ‘소천’ 혹은 ‘요단강 건넌다’고 말하고 천주교 예전에서는 ‘선종’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영어에서도 보통은 die 를 많이 쓰지만 그 외에도 departed, passed away, gone away, went to the Heaven, Rest in Peace 같은 높임 말들이 있고 의사들은 의학용어로 expired – ‘사용 기간이 만료되었다’는 말을 주로 사용합니다.
‘죽음’을 정의 하는 것은 간단 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보는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과 생각이 있기 때문 입니다. 의사들과 과학자들은 주로 생물학적으로 죽음을 규명하려고 합니다. ‘숨은 쉬는가? 심장은 뛰는가? 뇌는 활동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은 호흡의 정지, 맥박의 정지, 뇌활동의 정지 같은 우리 인체의 중요한 세가지 활동 기능이 완전히 멈추어지고 다시 돌이킬수없다고 판정이 되었을 때를 죽음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요즘은 이미 뇌의 활동은 멈추어져 뇌사상태는 되었지만 인공호흡기를 이용하여 계속 숨을 쉬게함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의학적 기술로 인하여 장기사나 심폐사 혹은 세포사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법의학자들이 보는 죽음의 정의는 훨씬 더 복잡해서 많은 논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WHO –세계보건기구는 ‘소생 할 수 없는 삶의 완전한 종결 상태’를 죽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사회학적으로도 다양하게 설명 되고 문화인류학에서도 보는 눈이 한결같지 않고 심리학이나 철학, 그리고 종교 마다 그 이해하고 설명하는 내용이 제각기 다릅니다. 고대 원시 종교로 부터 시작하여 이집트인들의 신앙과 그리스 철학이나 힌두교, 불교 등 동양종교에서도 죽음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참으로 천차만별 입니다.
2015년 말로 세계인구는 약 73억 입니다. 1년에 출생하는 신생아는 약 4천 7백만 입니다. 그리고 1년에 죽는 사람은 약 2천만 이상입니다. 어림잡아 해마다 한국 인구 만큼 새 애기들이 태어나고 또 해마다 호주 인구 만큼 사람들이 죽습니다 지난 해 호주에서는 약 15만 4천명이 죽었습니다. 호주 전역에서는 1주일에 평균 약 3천 건의 장례식이 거행 됩니다. 통계에 의하면 특히 7월과 8월 두 달 사이, 즉 이 겨울철에 죽는 사람이 전체 사망자의 약 50%가 됩니다. 몸조심 하시기 바랍니다.
한 10여 년 전 우리 한인 사회에서 Civil Celebrant로 일하고 계신 이문철박사께서 ‘호주의 장례 안내서’라는 아주 작은 책을 하나 내신 적이 있는데 그 책 앞부분에 부족한 제가 ‘죽음에 대하여’라는 짧은 글을 하나 쓴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졸고를 구어체로 바꾸어서 다시 한번 더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봄이 있으면 가을이 있고, 여름이 오면 겨울도 오는 것과 똑같은 이치로, 출생이 있으면 죽음도 오고 삶의 기쁨이 있으면 죽음의 슬픔도 있게 마련입니다.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자연의 순리요, 자연계의 질서 중 하나 입니다. 삶과 죽음이 피차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것이냐, 아니면 일직선으로 흘러가는 일회적인 것이냐 하는 데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 할 수 있겠지만 삶이나 죽음 그 자체는 어느 누구도 피하거나 거역 할 수 없는 창조주의 섭리 속에 있음은 확실 합니다.
사실 죽음이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식물계에도 싹이트고, 자라나고, 꽃이 만발하고, 또다시 잎이지고, 말라지는 출생과 성장과 멸종이 있습니다. 동물의 세계는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산 것은 죽을 때가 있고, 모든 태어난 것은 사라질 때가 오게 마련 입니다. 죽음이란 인간계를 포함한 생물계 전체의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현상 입니다.
죽음은 빈부와 유무식을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죽음이란 지극히 우발적인 것 같이 보이고, 갑작스런 이변인 것 같이들 생각하지만, 사실은 예측 가능한 것이며, 준비하도록 예고된 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란 그가 유신론자냐, 무신론자냐를 가리지 않습니다. 종교적 신앙의 유무나, 신앙 형태의 다양성과도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죽음이란 그냥 생물학적 현상이요, 자연의 흐름을 따라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 입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죽음을 죄의 결과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종교에서는 죽음을 저 세상에서의 탄생이라고 가르칩니다. 죽음은 참된 안식이요, 휴식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철학자들 가운데는 영과 육이 분리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해석 하기도 합니다. 플라톤(Platon)은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와 해방을 얻는 것이라고 말 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죽음이란 인생의 종착역이 아니라, 인간이 진정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게되는 출발역이라고 보았습니다. 하기야 우리는 이미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습니다. 종착역이란 늘 시발역이고, 시발역은 또한 종착역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시도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기물에서 무기물로의 전환이라고 말하고, 뇌의 활동이 중지된 상태니, 심장의 박동이 멈춘 상태니, 등등 여러가지 의학적, 생물학적, 과학적 해석들이 분분 합니다. 그 중에는 아직도 진행 중인 논쟁적 이론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생물학적, 자연적 현상이라고 해서 꼭 그런 각도에서만 볼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정적이고, 사회적이며, 문화적, 종교적 특성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 입니다. 의학이나 생물학에서는 죽음을 삶의 종결이라고 보지만, 대부분의 전통 문화나 종교인들은 죽음을 영원으로의 회기로 봅니다.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든지, 신에게로 돌아가든지, 죽음이란 돌아가는 것이지, 소멸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 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명활동이 정지됨으로 다시 회복이 불가능한 자리에 이르게되면 사람들은 일단 <죽었다>고 말 합니다. 심장의 박동이나 호흡이 영구히 중단되고, 뇌의 기능이 회복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태에 이르러, 기관과 세포와 조직이 완전 정지하게 된 것이 바로 생물학적 죽음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신체의 기관과 조직들을 다른 개체로 이식하는 의학적 기술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심장, 뇌, 신체의 각기관, 줄기세포 등을 다른 이들에게 이식하여 부분적으로 나의 존재를 보존해 나가고, 또 계속적으로 활동하게 함으로 죽음의 정의가 많이 모호해지게 되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전통적 이해와 해석과 태도가 쉬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말 입니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고 있는 ‘사망학’(Thanatology)은 죽음에 대한 학문적 연구로써, 과학적, 심리학적, 종교적, 사회문화적 접근을 시도하여, 죽음을 분석하고, 죽음을 준비 하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설명과 이해와 접근이 한결같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확실한 것은 <죽는다>는 사실 입니다. 사람마다 생사관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떠한 생사관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사람은 다 죽습니다. 수명은 늘어났지만, 그래도 죽습니다. 장기는 이식 되지만 그래도 죽음은 죽음일 뿐입니다. 죽음에 대한 해석은 변하고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문화에는 차이가 있지만 모든 인간은 다 죽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은 개인적으로 경험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간접 경험을 할 뿐이지, 내가 직접 경험하거나 실험을 해 볼수는 없습니다. 죽음이란 유일회적 사건 입니다. 임상 실험을 해 볼 수 없는 유일한 의학 분야가 바로 죽음 입니다. 보통 동물 실험을 한 다음에는 인체 실험을 하는 것이 순리 인데 사람에게는 이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여전히 신비요, 수수꺽기로 남아 있습니다. 죽음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바로 직접 죽어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없기 때문 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은 후에 이름 석자를 남긴다고 합니다. 육신은 죽어 자연으로 회귀하고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지만, 한 사람의 삶의 흔적은 오랫동안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을 때, 잘 사는 것이 사실은 잘 죽는 것 입니다. 죽음의 준비란 <지금, 여기에서 Here and Now >하루, 하루 사는 삶의 내용이 결정해 줍니다. 요즘은 호스피스 운동을 포함하여 이곳 저 곳에 <죽음을 준비하는 학교>들이 많이 생겨 나고 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학교>는 단순히 묘지를 미리 준비해 두라고 가르치는 데가 아닙니다. 매장, 화장, 수장, 암장, 수목장, 동굴장 등등 장례법이나 절차에 대해 공부를 하거나 유언 작성법을 지도해 주거나 비문을 미리 써두는 곳으로 이해 해서는 않됩니다. 하루, 하루의 삶을 반성하고 남은 여생을 어떻게 하면 좀더 뜻있고 바르게 살수 있을까 생각하게 하는 곳입니다. 죽음에 대한 가장 좋은 준비는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기 때문 입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의 모리 슈워츠(Morrie Schwartz) 할아버지 처럼, 아직 살아 있을 때 사랑하는 친구들과 같이 자신의 장례식 까지도 미리 치뤄두는 여유있는 삶, 생각하는 인생, 그리고 무엇 보다도 모든 사람들, 모든 주어진 것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삶, 이것이 죽음에 대한 가장 확실한 준비가 될 것 입니다.
100살 가까이 된 노인에게 좀 큰 돈이 생겼습니다. ‘할머니 그 돈 어디다 쓰시겠어요?’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모았다가 늙은 다음에 노후 자금으로 써야지’ 우습게 들리는 말이지만 사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지금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노 요코가 쓴 ‘죽는 게 뭐라고’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죽을 때 까지 무대에서 연기를 하다가 죽고 싶다는 배우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날이 여위어가는 모습이었지만 쉬지않고 무대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점점 늙어가는 그의 모습이 안타깝고 또 보기가 싫어졌습니다. 지금 그는 관객을 위해서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무대에 서는 사람일 뿐입니다. 죽는 순간 까지 강대상에서 설교하다가 죽고 싶다는 목사는 하나님을 위한 것일까, 교인들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 어떠한 불경기 속에서도 결코 불황을 타지않는 우주적 보편 현상으로서의 인간죽음에 대해 성서가 들려주시는 몇몇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죽음>에 대한 오늘의 묵상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 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 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그들은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12)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 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런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5-7)
‘누구나 다 볼 수 있다 지혜있는 사람도 죽고 어리석은자와 우둔한 자도 다 죽는다 평생 모은 재산도 모두 남들에게 주고 간다 사람이 땅을 사드리고 제 이름으로 등기를 해두어도 그들의 영원한 집 그들이 영원히 머물 곳은 오직 무덤일 뿐이다 사람이 제 아무리 위대하다고해도 죽음을 피 할수는 없으니 인생이란 실로 멸망할 짐승과 한가지로다’ (시40:10-12)
‘너는 흙으로 돌아갈 때 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누가 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겠고 누가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겠느냐’(시89:48)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사람이나 짐승이 모두 일반이라 짐승이 죽는 것 같이 사람도 죽나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 남이 없도다 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나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땅 아래로 내려가느니라’(전3:19-21)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