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은퇴목사 주일예배설교(39)
주제 : <죽음 – 제 3의 이민>
오늘의 본문 : 사도행전 12장 1절 – 5절 / 24절
오늘의 제목 : (39) 야고보의 죽음 – 기독교 순교의 역사
야고보의 죽음 : 기독교 순교의 역사 (사도행전 12장 1절 – 5절 / 24절)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 <헤롯이 야고보를 죽였다>는 사실 보도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명의 동명이인들이 나옵니다. 우선 여기 등장하는 헤롯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실때 베들레헴 근처에 있던 두살 이하의 모든 남자 아이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던 그 헤롯왕이 아니라, 그의 손자 헤롯입니다. 여기 성경에서는 그냥 해롯왕이라고 쓰여 있습니다만 역사학자들은 이 헤롯을 <헤롯 아그립바 1세>라고 불러 그의 할아버지 헤롯과는 구별합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그의 할아버지 헤롯을 닮아 아주 포악한 왕으로써 12제자 중 처음으로 야고보를 칼로 죽였습니다. 처음엔 유대 북부지역의 분봉왕이었으나 AD 41년 부터는 유대 전역을 통치했는데 여기 사도행전 12장 뒷 부분에 보면 그는 벌레에 먹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은 야고보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그 유명한 이삭의 아들 야곱에다 어원을 두고있는 야고보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은 신약에만 해도 4명이나 나옵니다. 첫째는 <세베대의 아들이며 요한의 형> 야고보입니다. 흔히 <큰 야고보>라고 부릅니다. 두번째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로써 <작은 야고보>라고 부릅니다. 셋째는 <주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의 바로 밑 동생으로 야고보서의 저자이며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초대교회 의회에서 리더쉽을 발휘한 예루살렘교회의 감독이요 기둥과 같은 지도자였습니다. 마지막 네번째는 <유다의 아버지> 야고보입니다 누가복음서 6장에 나오는 12제자 명단에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는 제자가 나오는데 그는 예수님을 판 가롯유다와는 다른 유다로써 그의 아버지가 야고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여러 명의 야고보 중에서 오늘 본문에서 헤롯왕이 칼로 쳐 죽인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이며 요한의 형>야고보입니다. <우리 말로는 야고보 – 영어로는 Jacob, 혹은 James, 라틴어로는 Jacobus 라고 이름합니다. 복음서에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따로 데리고 갈새>라고 할 때의 그 야고보인데, 이 세 제자들은 예수님의 최측근으로써,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실 때(마가 1:29),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마가 5:37),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마태 17:1),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마가 14:3)를 할 때 등등 여러 곳에서 특별히 구별되었던 애제자들로써, 야고보는 바로 그 중 하나였습니다. 본래 야고보의 아버지 세베대는 갈릴리 호수에서 베드로와 함께 고기를 잡던 어부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좀 자세히 읽어보면 세베대는 베드로나 다른 어부들과는 달리 삯군들 까지 두며 크게 고기를 잡던 수산업자로써 꾀 잘사는 집안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삯군들과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마태 4:21-22>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시니 그 때 부터 그 제자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시니라> 한 것으로 보아서 그들은 예루살렘에도 자기 집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재산이 있었다고 보는 겁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다혈질에다 성격이 불과 같아서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일행과 더불어 사마리아 땅을 통과 하던중 사람들이 받아드리지 않자 <주여 우리가 하늘에 명하여 불을 내려 저들을 멸하게 하리이까, 누가 9:54>라고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그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님께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주옵소서, 마태 20:21>라고 간청하는 스타일의 과잉보호 속에서 키운 아들로써 요즘 유행하는 <금쪽같은 새끼들>이라고 할수 있을 겝니다.
성경에 나오는 스토리는 아닙니다만 로마 카톨릭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스데반이 처음으로 순교 당한 후 제자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을 때, 야고보는 지금의 에스파니아, 즉 스페인 땅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스페인을 이 세상의 땅끝이라고 믿었기에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행전 1:8>는 주님의 분부를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 야고보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야고보는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바로 그 때 그는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시기는 주후 42년 부터 44년 경이라고 봅니다. 교회 역사상 사도 야고보는 평신도 집사 스데반의 순교 이후 두번째 순교자이며 예수님의 12제자 중에서는 첫 순교자입니다. 주님의 제자 12중에서 순교하지 않은 사람은 둘인데 그중 하나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가롯유다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야고보의 동생 요한으로 그는 밧모섬으로 유배를 가서 직접적으로 순교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요한복음서와 요한 1,2,3서를 비롯하여 요한 계시록까지 기록하면서 교회를 든든하게 세웠습니다. 참 공교롭게도 형제 중 하나는 첫 제자 순교자가 되었고 다른 하나는 끝까지 죽지 않고 교회를 지켜냈습니다.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순교자 야고보의 시신은 처음 예루살렘에 방치되어 있다가 성도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그가 가서 전도했던 땅끝 마을인 스페인 북부지방 <아리아>로 옮겨 거기에 매장했다고 전해집니다. 훗날 스페인교회는 그곳 <아리아>에 성당을 세우고 야고보의 이름을 따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라고 이름붙였습니다. <산티아고>는 <세인트 야고프스>의 스페인식 발음이고, 영어로는 St. James, 우리 말로는 <성 야고보>입니다., <데 콤포스텔라>는 <별빛이 빛나는 들판>이란 뜻으로 <별빛이 빛나는 땅끝 마을에 세워져 있는 성 야고보 성당>을 의미합니다. 카톨릭교회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루살렘과 베드로와 바울 사도가 순교당한 로마와 야고보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이곳 스페인의 산티아고를 기독교 3대 성지라고 합니다.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약 800km에 이르는 이 순례길은 이런 역사 속에서 만들어져 일년에 약 20만명 이상이 순례하는 길로써,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이던, 세속족이던 평생 한번은 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려고 합니다.
앞에서 우리는 성경과 역사 전승에 나오는 이런 저런 단편적 귀절들을 종합해 보면서, 12제자 가운데 예수님의 3총사중 하나로 첫 순교자가 된 야고보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부이며 사업가였던 세베대요, 어머니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친동생 살로메요, 따라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는 4촌 관계였습니다. 젊은 시절, 당시로써는 괜찮게 살았던 집안이었습니다. 성격적 약점으로는 흥분 잘 하고, 자기 감정 조절능력이 약했고, 예수님과 4촌 혈육관계를 믿어서인지 인간관계에서도 우월감과 편견, 경쟁심과 공명심이 컷던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네 보통 사람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야고보가 우리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길을 걸어 갔습니다. 고난과 죽음을 통한 순교의 길이었습니다. 자신의 소유, 가문, 전통, 그리고 생명 까지도 버리고, 주님과 복음, 구원과 참된 생명을 위하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렸습니다. 폭풍같은 기질, 태풍 같은 열정, 불 같은 성격을 지닌 우뢰의 아들이었기에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용기있는 사람으로,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오늘의 성경은 이를 아주 간단하게 기술합니다. 표준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이 무렵에 헤롯왕이 손을 뻐쳐서 교회에 속한 몇몇 사람들을 해하였다. 그는 먼저 요한의 형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우리는 성경의 어떤 한두 귀절만 보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무도 보고 숲도 봅니다. 전체적 맥락 가운데서 부분을 봅니다. 그런 각도에서 12장 전체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해 볼수 있습니다. 첫째는 드디어, 본격적으로 정치권력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차츰 차츰 늘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이들 신흥 종교 집단을 박멸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교회핍박의 중심적이며 핵심적 인물은 같은 유대인 출신의 헤롯 아그립바 1세라는 권력자었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허지만 헤롯왕이 아무리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모든 인간과 역사를 주관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점을 확실히 한 것입니다. 주님의 사자는 헤롯을 쳐서 하찮게 보이는 벌레에 물려 죽게 만드셨습니다. 넷째는 따라서 아무리 세상권력이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인다 하더라도, 그래도 하나님의 나라는 날로 더욱 더 확장되어간다 점을 천명한 것입니다. 12장 24절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이는 사도행전 전체의 주제와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6장 7절>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더라, 9장 31절> 역사의 흐름과 주어진 상황에 따라 일시적 up and down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아주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역사의 마지막 승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사도행전이 말씀하고져 하는 주제이기도 하고 기독교 신앙의 핵심 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칼을 휘둘러서 죽여 보아라. 그렇다고 교회가 살아질줄 아느냐?>
이런 근본적이고 기본적 원칙을 분명히 하면서 오늘 아침 우리는 야고보를 칼로 죽인 사건을 전후하여 우리 기독교가 당해온 순교역사를 되돌아 봅시다. 먼저 세상의 권력자들은 어떤 방법으로 성도들을 죽였는가하는 것 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가장 오래된 사형 방법 중 하나입니다. 많이 끔찍하게 들리시겠지만 고대로 부터 이어져 온 사형의 종류와 방법은 참으로 잔혹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나 스데반을 집단적으로 돌로 때려 죽인 것이나 야고보의 목을 칼로 쳐서 죽인 것은 차라리 점잖은 사형 방법 이라고 할수 있을 정도로 인간이란 참 잔혹하기 그지 없는 존재입니다. 가로테형은 목을 끈으로 묶어 공중에 달아매서 죽이는 것으로 일종의 교수형이라 하겠습니다 거혈형은 소나 말 같은 동물을 이용하여 사지를 찢어서 죽이는 것으로 일종의 능지처참형에 해당됩니다. 저는 그리스 여행중에 메테오라 수도원에 들려 수 믾은 유골들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단 한번에 칼로 목을 쳐서 죽인 것이 아니라 손가락 마디 마디나 발가락 마디 마디를 도끼로 찍어내면서 그 때 그 때 마다 여전히 예수를 믿겠느냐고 묻다가 마지막에는 사람의 전신 살가죽을 벗겨내서 죽이는 방법이었습니다. 고대 페르시아에서도 생리박피형이라 하여 이와 비슷하게 사람의 피부를 벗겨내서 죽이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교수척장 분지형이란 죄수의 목은 나무에 매달아놓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서 불태워 죽이는 방법으로써 역사상 가장 잔인한 사형 방법 중 하나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마차텔로형은 사람의 머리를 서서히 망치로 때려서 죽이는 방법이었습니다. 단두대형은 형틀에다 목만 내놓게하고 목을 짤라서 죽이는 것입니다. 화형은 장작더미 위에 묶어서 불에 태워 죽이는 것이었고, 추락형은 사람을 절벽에서 밀어 떨어트려서 죽이는 것이 었으며, 식형은 산 사람을 통채로 사자나 호랑이, 곰, 뱀, 악어에게 먹이로 주어서 죽이는 방법으로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나 사자와 싸워서 죽게 하는 것도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외에도 사약을 마시게 하여 죽이는 형벌이나 중국 시황제 때 가장 흔히 사용했던 산 사람을 그냥 생매장을 시켜 죽이는 것이나 무거운 돌이나 코끼리 같은 무거운 짐승에게 밟혀 죽게 하는 압사형이나 사람을 물에 빠트려 죽이는 익사형이나 몇날 몇달씩 굶겨서 죽이는 아형 등이 있었습니다. 장살형은 뭉둥이로 때려서 죽이는 것이고 증형은 끓는 가마에 삶아서 죽이는 것이며 화형은 불에 태워서 죽이는 것이고 화살형은 활로 심장을 맞추어서 죽이는 것이고 할복형은 자기 심장과 배를 자기가 스스로 찔러서 죽게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은 사람을 사형에 쳐하는 방법도 많이 개선되어서 가스사를 시키거나 약물을 투입하여 죽게 하거나 전기형, 총살형, 교수형 등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사람을 가능한한 빨리 죽음에 이르도록 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문명의 발달에 따라 사형도 선진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20세기에 들어서서도 홀로코스트에서의 집단 살인을 비롯하여 아프가니스탄, 브루나이, 태국과 몇몇 이슬람 국가들과 북한 같은 공산 독재국가에서는 여전히 공개적으로 사람을 돌로 때려 죽이는 등 잔혹한 사형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순교사학자 David Barrett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님과 예루살렘 성밖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과 헤롯 아그립바 1세의 학정 아래서 칼에 맞아 숨을 거둔 야고보의 뒤를 이어 지난 2천년 교회의 역사 속에는 약 7천만명 이상의 순교자들이 피를 흘렸다고 증언합니다. 타키투스, 네로, 트라야누스, 도미티안, 데키우스 등 10명의 포악한 로마 황제들은 앞에서 설명한 잔혹한 방법을 총 동원하여 수많은 성도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또 한분의 순교사학자 W. H. Friend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로마 황제들이 사람을 죽였던 방법이 너무나 잔인해서 우리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서 그렇지, 우리가 상상 하듯이 그 시대에 실제로 순교당한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생각처럼 그리 많지는 않다고 합니다. 그 때의 순교자는 많아야 수천명이고 적게 잡을 때는 수 백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프랜드교수는 AD 313년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 오히려 세계 도처에서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엄청나게 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렸다고 말합니다. 그는 로마시대만이 아니라 기독교 2천년 역사 전체는 테리툴리아누스의 말 그대로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져왔다>고 증언합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런 시대, 그런 땅에서 살질 않어서 모를 뿐이지 1930년대 나치 독일에서 학살당한 기독교인만 해도 100만명 이상입니다. 1907년 부터 스탈린은 쏘련을 포함하여 리투아니아 및 발트 3국과 소련 연방에서만도 KGB를 동원하여 최소 1천 5백만이나 되는 기독교인들을 학살했습니다. 중국에서도 공산화 된 이후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기독교인들을 최소한 70만 이상이나 죽였다고 보고 되었습니다. 우간다의 이디 아멘은 약 30만명의 기독교인들을 죽였습니다. 최근 미국의 Open Door선교회의 보고서에 의하면 특히 전체주의 국가들인 북한을 위시하여 이슬람 극단주의 국가들과 아프리카의 토속 신앙을 결합한 민족주의 국가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나라 1위는 북한이고, 2위는 소말리아이고, 3위는 예멘인데 그 다음 4위로 부터 10위 까지는 거이가 이슬람국가들입니다. 초대교회나 로마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현대에 들어서 소련, 중국, 북한, 이슬람국가에서 죽임당한 순교자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의 천주교회는 조선 시대 말기 부터 거듭된 사화를 통하여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하여 엄청난 순교자들을 만들었습니다. 103위의 성자들을 위시하여 무명의 허다한 성도들이 서소문 밖과 새남터에서 참수를 당했습니다. 우리 개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동강에서 순교당한 토마스목사 이후 조선시대와 구한말과 일제와 공산 통치와 6.25를 거쳐 오는 동안 헤아리기 어려운 많은 성도들이 <오직 예수 맏는다>는 그 한가지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기풍, 조만식, 주기철, 손양원 같은 분들은 그 이름이라도 기억해 주지만 이름도, 얼굴도 잊혀진 순교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만 해도 약 500명의 개신교 목사들과 150여명의 천주교 사제들이 공산당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 그들에 의해서 학살된 평신도 기독교 순교자들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20만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합니다. 저희 가정도 그 때 공산당에 의해서 죽을 뻔 하다가 겨우 살아났다고 부모님들께서는 늘 말씀하시면서 돌아가실 때 까지 마지막 당부의 말씀은 그져 <예수 잘 믿으라>는 말씀 뿐이었습니다.
야고보의 순교 이야기를 통하여 오늘의 본문이 우리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핵심은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우리 기독교가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존재해온 결정적 요소는 끊임없이 이어져 온 순교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확실히 하려는 것이요> 그 둘째는, <그때 거기에서 그들이 그렇게 죽어줌으로, 지금 우리가, 지금 내가, 구원 받았음을 똑똑히 알라>고 깨우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