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은퇴목회자 주일예배설교
주제 : <죽음 – 제 3의 이민>
오늘의 본문 : 사도행전 4장 32절 – 5장 11절
오늘의 제목 : (36)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 초대교회의 분깃점이 되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 초대교회의 분깃점이 되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이야기는 한국교회에서 헌금설교를 강조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본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 젊은날 어떤 부흥사한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보셨지요!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헌금이나 십일조를 떼어먹고 속이는 자는 꼭 이 사람들 처럼 즉상즉벌을 받아 죽을 줄로 아세요!> 어렸을 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베드로 앞에서 거짓말을 하다가 즉상즉벌을 받아 현장에서 죽은 이 이야기를 읽거나 듣을 때는 정말 많이 무서운 마음이 들곤 했습니다. 순진한 마음에 나도 하나님 앞이나 목사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면 꼭 죽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후 차츰 어른이 되어가면서는 그 이야기가 하나도 겁이 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교회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보다 훨씬 더한 사람들도 죽지 않고 멀쩡하게 잘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큰 거짓말과 속임수를 써 가면서도 교권을 잡고 큰 소리 치며 사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님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진보적 성서신학자들 중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임당한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이제 막 출발된 초대교회에서 초장부터 성도들에게 일종의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지어낸 스토리라는 가설을 제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모든 것이 부족하던 초대교회에서 헌금을 않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부동산 까지 팔아서 헌금을 드린 독실한 성도였고, 단지 그렇게 큰 헌금을 하려다보니 약간은 좀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조금 떼어놓고 헌금한 것 뿐인데, 그 정도라면 그냥 꾸짓거나 타이르면 될 일을 가지고 극단적으로 죽게 까지 한 것은 너무 지나친 과잉 처벌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습니다. 또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이야기는 특별한 케이스 스토리이거나, 아니면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꼭 한번만 일어났던 랜덤 테스트 (Random Test)로써 전체적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실 중세 암흑시대의 타락했던 교회의 모습들 – 성직 매매를 위시하여 교회헌금의 착복과 유용 등을 포함하여 지난날 교회 역사에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수천 수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들이 등장하여 성령님과 교회를 속여왔지만 즉상즉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별로 전해지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도 착하고 순진한 교우들 중에는 큰 사고를 당했거나, 중병을 앓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후에는 지난날 헌금과 십일조를 제대로, 정직하게 받치지 않고 떼어먹어서 벌받은 것이라고 자책하고 회개하면서 그동안의 밀린 헌금을 다 드리는 분들도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은 소위 <온전한 헌금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면서도 이런 핑계, 저런 구실을 갖다 대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성령님과 교회를 속이고 있는대도 멀쩡하게 잘만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36번째로 <성서에 나타난 죽음>의 문제를 다루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을 좀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기본적으로 본문은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을 처리하여 헌금으로 드리는 과정에서 거짓말을 한 것이 문제가 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판매한 땅값 중 일부를 따로 감추어두고서도 마치 그것이 전부인양 거짓말을 했습니다. 사실 이 경우, 아나니아는 하나도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베드로나 교회가 헌금을 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땅판 돈 전부를 내라고 말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냥 솔직히 <이번에 저희가 갖인 부동산 하나를 팔았는데 일부는 저희가 좀 쓸데가 있어서 따로 떼어놓고 그 중 얼마를 헌금으로 가져왔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나이아는 진실을 호도했습니다. 거짓을 참인양 속였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 <감추었다>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노스피조>라는 단어로 표기되고 있는데, 이 말은 본래 <감추다>라는 뜻도 있지만, <훔치다, 도둑질하다>는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마치 여호수아 7장에서 아간이 여리고성이 무너졌을 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 몇 가지 물건들을 훔치고 도적질 했을 때, 70인역에서 쓴 단어가 <노스피조>였습니다. 그러니 아나니아는 땅값 얼마를 감춘 것이 아니라 실은 하나님의 소유를 훔치고 도둑질한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이를 간파한 사도 베드로는 무섭게 선언합니다. <너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다> 그러자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서 즉시 땅에 엎드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3시간 쯤 지난 후 그의 아내 삽비라는 남편에게 이런 끔찍한 변고가 생긴 줄도 모르고 베드로 앞에 나타났습니다. 베드로는 삽비라에게 물었습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이 전부요?> 사실 이 질문은 삽비라에게 진실을 고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화를 준 것이었습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이 전부냐?> 베드로가 질문을 던졌던 바로 그 순간, <아니예요. 그 돈은 땅값 중 일부입니다. 따로 좀 쓸데가 있어서 다 드리질 못했습니다> 라고 말했드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삽비라, Sapphira> 그 이름은 그렇게도 아름답고 값비싼 보석 <사파이어, Sapphire>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하는데, 그 때 정직하게 사실을 말했더라면 삽비라 까지는 죽지 않았을 것인데 참 안타깝습니다. 모든 경우에 하나님은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만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를 알아채리지 못합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인간됨과 신앙생활의 근본 문제에 맞부딪치게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신앙심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는가? 그들은 사랑이 부족하여 이웃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중심적으로만 산 사람들인가? 도대체 왜 그들은 준엄한 심판을 받고 죽음에 처해졌는가? 사실 본문의 앞뒤를 살펴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 기둥과 같은 역활을 했던 사람들이요, 중직자요,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한 부부였습니다. 그이들은 믿음이 없거나 헌신과 봉사심이 약해서 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인간의 기본과 신앙의 기초를 몰랐거나 그것을 제대로 갖추지 못함으로 스스로 자신들의 인생을 무너트린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초는 흔들리고, 기본은 잘못되어 있는데, 교회만 다니면 다 되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헌금만 많이하면 구원얻고 영생을 얻는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인간의 기초, 신앙의 기본 부터 똑바로 알아야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진실입니다> <정직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말씀드리는 진실과 정직이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의 정직과 진실을 넘어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정직과 진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도 진실하고 정직해야 하지만 그러나 더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아무리 예수 믿고 구원 받고, 교회와 이웃을 섬기고 봉사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여전히 죄인>이요, 설혹 십자가를 지고 순교를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기본적 진실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믿고 영접해드리면 우리를 그냥 <긍휼히 여기시어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죄인된 우리가 변하여 진짜로 의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믿는 것 하나를 보시고 의롭다고 여겨 주시고 그냥 인정해 주시는 것이지, 죄와 악으로 형성된 인간의 본질과 본성이 변하여 새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집을 팔아서 헌금을 드리고, 교회에서 중직을 맡아 섬겼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여전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들은 그걸 몰랐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이 기본적 진리를 모르거나 알아도 간과하고 지나칠 때가 아주 많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죽고 살아남지 못할 죄인들입니다. 그냥 주님께서 그 알량한 믿음 하나 보시고 <의로 여기시사, 모든 허물을 덮어주신 것일 뿐>입니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요, 거짓과 탐욕으로 물든 존재요, 스스로는 결코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고 고백은 하면서도 불의하게 살고, 남을 속이고, 악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열심히 다니고, 직분도 받고, 헌금도 많이 드리고, 봉사도 열심히 하지만 그 심령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인간적 탐욕과 거짓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얻었다고해서 하루 아침에 윤리, 도덕적으로 변하여 새사람이 되는 것, 아닙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고 아무리 죽을 때 까지 기도하고, 노력하고, 힘쓰고, 애써도 절대로 완전해 질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정확하게 들여다 보면서 정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나는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그것은 그냥 값없이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자랑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집을 팔아서 헌금을 드려도 죄인이고, 심지어는 십자가에 꺼꾸러 매달려 죽임을 당한다해도 그래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바로 이 사실과 이 진리를 모르게 되면 헌금 좀 드리고, 선교 좀 하고, 봉사 좀 한 것 가지고 그냥 호들갑을 떨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팩트, 이 사실을 깨닫지못하면 <하나님과 성령님을 속이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요? 그들의 결정적 잘못은 땅을 팔아서 헌금을 드리는 인간의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요, 하나님 앞에서의 의요, 인간들 앞에서의 선행과 자랑이 되는 줄로 착각한 것이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거짓말 자체 보다는 그들 속에 담겨있던 인간과 신앙의 본질을 몰랐던 것이 우리를 많이 안타깝게 만듭니다.
그 다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이야기는 사도행전 2장 부터 시작되는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전체적 모습과 연관해서 보아야 그 본래의 뜻을 옳바로 알 수 있습니다. 앞에 나오는 말씀부터 읽어야 이들의 죽음이 지닌 의미가 제대로 밝혀집니다.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 하신 후, 약 120명 쯤 되는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기도하던 중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방언이 떠졌습니다. 겁쟁이였던 베드로와 시도들은 무리들 앞에 서서 용감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성전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방이를 향하여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하며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하루에 3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하면서 마음을 찢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또한 떡을 떼며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도 제 것을 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때에 한 대표적인 인물이 나타났는데 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구브로 (Cyprus)에서 온 레위족속인 바나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도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이 있었는데 그것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앞에 두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토록 아름답고 우리가 늘 사모하는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출발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크게 어리석음을 범케 됩니다. 그들 부부는 바로 이 바나바가, 지니고 있던 부동산을 팔아 헌금을 드린 것과 그 헌금으로 인하여 사도들과 성도들로 부터 인정받고 칭찬받는 모습을 보고 자기들도 지니고 있던 땅을 팔아서 헌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부부는 바나바가 땅을 팔아 정성으로 헌금하는 그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자신들도 땅을 팔아 헌금을 드린 것이 아니라, 바나바가 사도들과 교회로 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고, 사랑과 존경을 받는 그 모습이 부러워서 헌금을 드렸습니다. 남들이 하는 선행이나 섬김을 본받아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삶의 태도입니다. 하나도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인의 아름답고 귀한 신앙적 행실을 비웃거나 무시하며 하나도 본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 문제는 남들을 따라서 하는 그 행위의 동기입니다. <나도 바나바 처럼 인정 받고 싶다거나 칭찬 받고 싶다>는 마음이 동기가 된다면 그건 옳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허영, 허세, 칭찬, 인정 같은 것을 위해서 하는 선행은, 그 불순한 동기로 인하여 <좋은 일 하고도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비극을 낳게 됩니다.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심보, 마음 상태, 행동의 동기와 목적을 다 아십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겉으로 보기엔 바나바와 똑같이 칭찬받을 만한 아름다운 일을 했지만 그러나 그들 마음 속에는 진실과 정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했을 뿐 하나님 앞에서는 거짓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뼈속 까지도 들여다 보시며 우리 마음 속 비밀 까지도 헤아리시는 하나님을 속일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참된 마음, 정직한 영혼, 진실된 삶의 태도를 요구하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위장된 거룩함과 기도, 위선적 선행과 착한척하는 것들은 사망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수도 있습니다. 본문을 패라디하여 다시 한번 더 말씀드리거니와 이와같은 행위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가 되어 결국은 주님 앞에서 꼬꾸라져 영혼이 떠나가는 비극을 낳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착한 일은 본받고 따라서 해야하지만, 그들 속에 있는 허영과 허세, 인간적 인정과 칭찬을 기대하는 심리적 동기는 절대로 멀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나니아 부부의 사건은 AD 1세기, 이제 막 태동되어 아름답고 활기차게 출발했던 초대 그리스도교회 앞에 빨간 불을 킨 사건이 되었다는 데 그 결정적인 아품과 비극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초대교회의 분깃점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과 5장은 순결하고 거룩하고 아름다웠던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무너지고 다시는 이 땅에서 그와같이 순결한 교회는 찿아 볼 수 없는 분수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중심으로 이상적 초대교회의 모습은 갈라 집니다. 이 사건을 정점으로 주님의 교회는 그 앞과 뒤가 나누어 진다는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사도행전 5장 이후에서는 가이사랴이든, 안디옥이든, 밤빌리아든, 루스드라든, 더베이든, 빌립보이든, 데살로니가이든, 베뢰아든, 에베소든 고린도든, 아덴이든, 드로아든, 밀레도든, 로마이든, 콘스탄티노플이든, 런던, 파리, 뉴욕, 시드니, 서울, 강남, 여의도 그 어디에서도 결코 처음 예루살렘교회 처럼 성령으로 충만하여 말씀과 기도로 뜨겁고, 나눔과 유무상통함으로 사랑이 차고 넘치는 순전한 교회는 생겨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사도행전 5장 이후 오늘날 까지 이 땅에 세워졌던 교회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닮은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거짓과 허영, 허세와 위선, 물질과 탐욕, 그리고 교권으로 덧칠하여, 처음 교회의 본질과 참 모습은 잃어버리고, 문제 많은 교회, 문제만 만들어 내는 교회들이 줄을 이어왔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그들 개인의 비극을 다룬 스토리만이 아닙니다. 이 사건의 본질은 이 땅에 처음으로 세워졌던 가장 이상적인 그리스도교회와 신앙공동체의 모습이, 이 두 사람 때문에 역사에서 사라져 버리고, 그후로는 문제 많고, 모순으로 가득한 교회의 역사로 변질되어 왔음을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기적 집단으로 만들었고, 믿음의 공동체를 갈등과 다툼의 집단으로 만들었고, 성령이 역사하는 공동체를 악령이 주도하는 집단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을 심각하게 받아드리며, 무서운 마음으로 수용하며, 더 나아가 한 개인의 잘못과 그릇된 신앙이 어떻게 공동체 전체를 무너트리고 위협하는지를 자각하게 됩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교우들은 초대교회와 같은 순수한 신앙을 위하여 헌신하고 노력하는데 그만 몇몇 현대판 아나니와 삽비라들이 나타나 주님의 교회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말씀을 매듭지으면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그날 주님은 왜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는 회개할 기회 조차도 한번 주지 않으시고 그냥, 그 자리에서 죽게하신 것일까?> 여러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자문해 봅니다. <주님, 사실 저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이 평생 온전한 헌금 제대로 못드리고 하나님도 속이고 사람들도 속이며 위선적으로 목회한 사람이요, 오히려 저들 보다 더 못된 인간입니다. 그런데 왜, 어째서 그들은 죽이셨는데 저는 죽이지 아니하시고 이제 까지 살려 두시는 겁니까? 아나니아부부는 죽이시고 저는 살려두신 이유는 진정 무엇입니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오늘 까지도 나를 살려주시고 있는 이유는 오직 나를 향한 하나님의 숨겨진 신비요, 한없는 용서요, 거룩한 사랑일 뿐입니다. 사랑, 용서, 기다림, 참으심 – 그것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 감사합니다. 무조건 감사합니다. 죽을 때까지 감사하겠습니다. 아멘.>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