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은퇴목회자 주일예배설교
2016.4.24
주제 : 죽음 앞에서의 삶
착각
본문 : 누가복음서 12장 13-21절
언젠가는 변동이 있겠습니다만 현재로써는 우리 7가정이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니까 아마도 두 달에 한번 정도는 말씀을 전하는 차례가 오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을 전할 때는 일정한 주제를 하나 정해서 말씀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텍스트는 달라지겠습니다만 전체적 주제는 ‘죽음을 앞에둔 인생’으로 정했습니다. 지금 까지 살아온 날 보다는 앞으로 남은 날수가 더 적으리라고 여겨지는 은퇴 목사부부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에서 ‘죽음’이란 주제를 가지고 묵상해보는 것은 퍽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죽을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삽니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앞에두고 삽니다. 좀 가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오늘 태어난 애기 까지도 ‘죽음을 앞에두고’ 인생을 출발합니다. 이미 우리가 겪은 쓰라린 경험대로, 오는 데는 순서가 있어도 가는데는 순서가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우리는 모두 은퇴자들이니까 다른 사람들 보다 훨씬 더 죽음을 가까이 두고 죽음을 의식하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갑자기 죽었다’고들 말하지만 본래 갑작스런 죽음이란 없습니다. 준비된 죽음이냐 아니냐 하는 것만 있을 뿐이지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 날 때 부터 이미 ‘너희들은 모두 다 죽는다’는 것을 충분히 고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누가의 특수자료 중 하나인 본문은 흔히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차분히 본문을 들여다보면 여기 등장하는 이 부자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Business Mind가 있는 이 만석꾼은 크게 풍년이 들자 창고를 증축하려고 합니다. 미래형 경영계획이라 할수 있습니다. 17절에 쓰여진대로 그는 ‘심중에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합리적인 사업가입니다. 풍년이 들었다고해서 농산물을 헐값에 내다 팔게되면 결국 시중의 곡가만 하락되어 손해를 보게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농산물의 보관과 관리를 통한 창고업과유통업을 구상하게 됩니다. 너나 나나 누구든지 ‘문제는 경제야!’라고 외치는 시대에서 이 사람은 신자본주의 시장경제에 가장 충실한 사업가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성공한 부자요, 머리 좋은 사업가로 보이는 이 사람을 향하여 주님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20절)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모든 면에서 그 보는 눈과 판단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내 생각과 너희 생각은 다르며 내 길과 너희 길은 다르니라 하늘이 땅 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 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 보다 높으니라’(이사야 55:8-9절)
하나님은 공부 잘하고 IQ높고 일류대학 가고 대 기업에 취직하고 재텍크 잘해서 돈 많이 벌고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을 지혜롭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HSC성적 잘 받아서 의대, 법대 가고 그 후엔 돈 많이 벌어 이름 날리고 ‘자식 잘 키웠다’는 말 듣는 것을 인생의 성공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큰 교회당 짖고 사람 많이 모이고 헌금 많이 나오고 총회장하는 목사를 성공한 목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규정하신 인간을 우리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기며 추앙 하는 시대 속에서 살아갑니다. 에맄 프롬(Eric Fromm)이 그렇게도 간절히 ‘소유 지향적으로 살지 말고 존재 지향적으로 살아야만 한다’고 부르짖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생의 행복과 성공은 그의 소유가 결정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대통령부터 온 나라가 눈만 뜨면 계속해서 쏟아내는 이야기는 경제, 경제, 경제 이야기 뿐입니다. 실업, 일자리, 수출, 제조업, 창조경제, GDP, GNP, G7, G12, G20, 경제강국이 우리시대 국가의 이상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신 말씀은 그야말로 ‘설교 하시네’라고 조롱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배부른 돼지를 칭찬하는 시대 속에서 부끄러움을 잃어버린지 오래되었습니다. 인권이 존중되고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는’ 진정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는 기대 할수 없게 되었습니다. 돈이 모든 것의 최종적 가치를 결정하고 점수를 매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국가나 기업이나 세상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까지도 이미 상업주의에 물들었습니다.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논리 위에 세워진 신학과 목회와 신앙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장신학에 기초한 초대형 Mega Church가 우리 시대 교회의 최고 목표가 되었습니다. ‘많으면 행복하고 적으면 불행한 세상’에다 ‘크면 성공이고 작으면 실패한’ 집단이 오늘 교회의 모습입니다. 미국 플로리다 대학의 제임스 트위첼 교수가 한 말입니다 ‘오늘날 21세기에는 기독교인이나 유대교인이나 이슬람이나 심지어는 불교인들 까지도 과거 그들의 종교가 가르쳤던 가치관에 따라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은 과거 그들의 종교가 무엇이었든간에 하나의 새로운 종교로 통합이 되었다. 이 새로 통합된 종교의 하나님은 물신이다. 물질의 신, 곧 맘몬의 신이다. 돈이 세계종교의 새로운 유일신이다’ 당황되고 슬프고 절망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평생 예수를 믿어온 우리들은 어떠한가 입니다. 평생 목회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좋은 말이란 말은 다 해온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착각은 자유라고들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여전히 착각 속에 빠져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살아갑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한계를 뛰어 넘질 못하고 있습니다. 남 말 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저는 말로는 하나님 중심이라고 하지만 실은 물질 중심적 세계관과 인생관을 지니고 사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와 저는 똑같은 사람입니다. 오히려 좀더 어리석은 부자가 못되어 속으로 부러워하고 흡모합니다. 모든 설교의 제 1차적 청중은 언제나 설교자 자신이라고 합니다. 제가 저에게 설교합니다. ‘착각하지 마라 홍길복!’
본문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매우 심각한 3가지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저와 여러분들은 여전히 이 착각의 자유 속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첫째 착각 – ‘돈만 있으면 행복 할 것이다’ ‘인간의 행복은 그의 소유와 정비례한다’는 착각입니다. NO!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물질은 경우에 따라 우리의 삶을 약간 편리하게 해 줄수는 있어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돼지는 배만 부르면 만사가 OK일수 있고 짐승들은 배부르고 등 따습고 환경이 안전하면 그것으로 만족해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우리 주변에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잘 살아도 불행하고 못 살아도 행복한’ 사람들과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누아투나 네팔 사람들은 그들의 국민 소득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행복합니다. 마더 테레사나 법정스님이나 한경직 목사님은 저금통장 하나 없었고 집 한 칸 소유한것이 없었지만 참 행복하게 한 평생을 사셨습니다. 아무리 풍년이 들고 곳간을 더 크게 짖고 모든 곡식과 물건들을 겹겹히 쌓아놓아도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아무리 여러해 쓸 것을 준비해 두고 부족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마음에 여유가 없이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창고는 크고 물건은 많이 쌓아놓았는데 남을 생각할 줄은 모르고 자기만 아는 나라나 국민은 불행합니다. 경제학적으로는 정책을 바로 세워야하고 신앙적으로는 마음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창고를 더 크게 지어 거기 쌓아놓으리라고 하는 ‘비축 정책’ ‘자본 축적 정책’은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하는 사람들을 위한 ‘분배정책’ ‘복지정책’으로 어서 전환해야 합니다. 미국은 해마다 잉여농산물 처리 문제로 골치를 썩힙니다. 일정한 경작지를 휴경하게 하면서 곡가를 조절 하느라 진땀을 뺍니다. 미국은 미국에서 생산되는 옥수수와 콩의 70%를 가축 사료로 사용하는 나라 입니다. 이것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포함하여 지구촌 곳곳에서 굶주리는 사람들 14억을 먹일수 있는 분량입니다. 미국, 영국, 일본, 독일, 호주 같은 제 1세계에 속한 나라들이 지금 현재 개인 가정집 냉장고 속에 있는 음식물만 꺼내놓아도 아프리카 사람들 1년 먹을 음식물이 된다는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염치도 뻔뻔하게 우리 집부터 냉장고 속에는 두세 주일도 더 먹을 것들이 가득 차 있는데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 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종교적 위선이 아니고 무엇이라고 할수 있을까요? 지구촌, 지구촌 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이 조그마한 지구 마을의 한쪽에서는 농산물의 과잉 생산으로 골치를 썩히는데 지구촌의 또 다른 쪽에서는 1년에 천만명 씩이나 굶어 죽어가는 것을 방치하고 있는데 이게 도대체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이 하는 짓이라고 할수 있겠습니까? 풍년이 들었다고 좋아하면서 곳간을 더 크게 짖고 먹거리를 더 많이 비축해 놓았던 그 사악한 부자는 오늘 지구촌 곳곳에서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부익부 빈익빈’만 심화 시키는 ‘돈만 많고 배만 부르면 행복 한 줄 아는’ 나쁜 나라, 나쁜 사람들의 현재 진행형 입니다.
둘째 착각 – ‘인생이란 내 마음 내 생각 내 계획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NO! 아닙니다. 않됩니다. 인생이란 내 인생 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할수 있는 게 아닙니다. 곳간 크게 짖고 잉여 농산물 많이 비축해 놓으면 만사가 다 순조롭게 내 편이 되고 잘 돌아가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인생이란 절대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골프만 자기 마음대로 쳐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업도, 경제도, 인간관계도, 심지어는 아무리 기도해도 신앙까지도 자기 마음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계획대로 되면 세상에 망할 사람, 성공 못할 사람 하나도 없고 기도 한대로 다 이루어지면 세상에 실퍠할 신자는 하나도 없을 겁니다. 생각 같애서는 내가 낳은 자식 이니까 내 뜻대로 키울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입니다. 세상에 자식 문제에 대해서 큰 소리 칠수 있는 부모는 하나도 없습니다. 자식도 남편도 아내도 절대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제가 금년이 결혼한지 45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내 마음 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은 이길남이다’ 그래도 저는 이 정도면 일찍 정신차린 편에 속합니다. 죽을 때 까지 마누라 이길려고 하는 사람은 아직도 착각 속에 있으면서도 착각한 자신을 전혀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건강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기 몸이니까 자기가 얼마든지 관리 할 것 같애도 실은 내 몸 하나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인간 입니다. 매일 샤워하고 이 딱고 면도해도 피부는 꺼칠해집니다. 매일 화장하고 다듬고 매만져도 그래도 늙어가는 몸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매일 운동하고 음식 조심하며 이 약 저 약 먹어 가면서 ‘늙지 마라 병들지 마라 치매걸리지 마라’ 힘쓰고 애써도 참아도 기억력은 가물가물해지고 설교하라면 한 소리 또하고 더듬거리며 이 곳 저곳 허약해지는 인생 어찌 할수가 없습니다. 인생이란 낳고 살고 죽는 것, 모두가 다 자기 뜻이나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자는 그걸 몰랐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 치며 허세를 부렸습니다. 까불면 않되는데 ‘곳간을 헐어라 다시 지어라 물건을 쟁여라 평안히 쉬어라 먹고 마시고 즐기자’ 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시 127:1-2)
셋째 착각 – ‘최소한 오늘 밤에는 않 죽을 거야!’ 이것은 모든 인간이 지닌 가장 결정적인 착각 입니다. 목사님, 사모님, 오늘 밤에 돌아가실지도 모릅니다. 아니 돌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다가 직접 개인의 이름을 대입 해서 부르면 좀 더 심각해 집니다. 오늘 먹는 점심이 이 땅에서의 마지막 런치가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늘 행여나, 혹시나,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오늘 밤에 우리 영혼을 부르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공갈이나 협박이 아닙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모릅니다. 죽을 날이 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인간 입니다. 사실 부나 부자가 되는 것 자체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고 욥도 거부였고 아리마대 요셉도 잘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죽음이란 멀리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순간마다 인식하고 그가 부르시면 오늘 밤에라도 가리라고 매 순간을 ‘죽은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히 9:27)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런지 네가 알수 없음이라’ (잠 27:1)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 4:13-14)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기도 하시고 거기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낯추기도 하시며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6-7) 어쩌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내 것으로 만들수 있습니다. 집도, 차도, 사업도, 가정도, 직장도, 이웃도, 친구도, 명예도, 권력도, 나라도, 세상도 얻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생명 만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여호와의 것 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니다. 빨리 좀 데려가 달라고 해서 오늘 데려가는 것도 아니고 몇 일만이라도 좀 봐 달라고해서 연장해주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과 싸워서 이기는 의사는 하나도 없다’ 요즘 읽은 아툴 가완디의 책에 나오는 말 입니다.
제 책상머리에는 오래된 액자 하나가 걸려있습니다. 먼저가신 안대식 장로님이라는 분이 주신 것입니다. 액자 한 가운데는 큼직한 한글 한자가 씌어 있습니다. ‘흙’ ‘흙’입니다. – 그리고 작은 글씨로 창세기 2장 7절 말씀이 쓰여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 율도, 그리고 낙관이 찍혀있습니다. 저는 책상머리에 앉을 때마다 중얼거립니다. ‘주님 저는 흙입니다 저는 먼지입니다 저는 실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곤 곧 이어서 그 다음 창세기 3장 19절 말씀을 조아립니다.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그런데 실은 아침마다 드리는 이 고백이 무색 할 정도로 저는 날마다 거듭된 착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이것이 치매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홍길복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