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잡기장
곰브리치 세계사
에른스트 H. 곰브리치 (Ernst H. Gombrich)가 청소년들을 위해서 쓴 <세계사, Eine Kurze Weltgeschichte Fur Junge Leser>는 1935년에 처음 발간한 책인데, 2011년 Yale 대학에서 사진과 도표들을 첨가하여 재판한 간추린 서양역사책이다. 한국어판은 2019년 박민수 번역으로 비룡소에서 출간되였다
곰브리치는 오스트리아 빈 출생으로(1909년), 빈대학에서 얘술사와 고고학을 전공하고 1936년 이후 런던대학의 <바르부르크 문화학 연구소>에서 1976년 까지 40년간 교수로 일했다. 그는 이 연구소 외에도 옥스포드, 켐브리지, 하바드 등 여러 곳에서 강의했으며 많은 작위와 훈장과 상을 받았다. 이 책 이외에도 그가 남긴 저서로는 <서양 미술사> <예술과 환생> <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 주는 것> 등이 있다.
다음은 그의 <세계사>를 읽다가 약간의 내 생각을 덧붙여서 남겨놓은 잡기장이다.
- 아테네인들은 편하고 안락한 삶 보다는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추구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의 기본은 <진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데 있다.
- <안다는 것>에는 여러가지 다른 영역과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알았다, Eureka !> 라고 외친 것과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거리에서 <너 자신을 알라, Gnothi seauton>라고 일러준 말과 불교에서 <깨달아 아는 것>으로써의 <해탈>을 그 종교의 기본으로 삼는 것은 제각기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 모든 괴로움에서 구원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다스릴수 있어야한다. 고통이나 괴로움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인간 세상에서 생겨나는 모든 고통, 괴로움, 아픔은 다 욕심에서 생겨난다.
-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렇게도 원하고 추구하는 평화나 사랑이나 행복 까지도 실은 다 우리 속에 있는 또다른 욕심들이다. 무엇인가 원하거나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모두가 탐심으로 부터 비롯된다. 욕심을 줄이거나 없이하면 반드시 고통도 줄어들고 없어지게 된다. 평화, 사랑, 행복 – 참 멋지고 아름다운 이상 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인간의 탐욕이다. 세상에선 평화도 사랑도 행복도 결코 얻을수가 없다. 그것들은 신기루와 같은 것들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해탈>이다. 해탈이란 이런 깨달음이요, 부처란 이런 깨달음에 이른 사람을 일컷는 말이다.
-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 다른 사람들에게 그 어떠한 것도 요구하거나 기대하거나 바라지 않는 사람 – 오직 그런 사람만이 진실된 내면의 평온을 얻게된다.
- 기대는 접어두고, 욕망은 버리고, 일체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무(無)의 경지를 불교에서는 <열반>이라고한다.
- 욕망은 채워서 얻을수 있는 것이 아니라 버림으로써만 이길수 있는 것이다.
- 예절이나 좋은 습관은 사람을 선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사람을 더 악하게 되는 것을 막는데는 도움이 된다.
- 사람들은 흔히 알렉산드로스는 무력으로 인도까지 점령한 세계 최고, 최초의 군사적 영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알렉산드로스는 알렉사드리아에 세계 최초로 가장 큰 도서관을 세웠다. 그는 그곳에 당시에 70만권에 이르는 두루마리 서적을 비치하였다. 사실 이 두루마리 책들이 세계를 정복한 알렉사드로스의 병사들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武將이 아니라 智將이었다.
- 귀족이나 군인이나 성직자가 아니라, 오직 학자들이 수백년 동안 니라를 통치한 곳은 세상에서 중국이 유일한 국가였다.
- 로마 황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화간 난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명령도 내리지 않았고, 그 어떠한 결정도 하지 않는 사려 깊고 자제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 예수의 가르침은 별로 어렵거나 복잡하거나 심오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부자나 가나한 사람,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주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 뛰어난 학자와 철없는 어린아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해 주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똑같다. 똑같이 죄인이며 똑같이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대해 주어라. 원수도 사랑해라.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기도해 주어라. 오른편 빰을 때리는 자에게는 왼편 뺨도 돌려주어라. 속옷을 갖고져 하는 자에게는 겉옷 까지도 주어라. 무엇이든지 꾸려고 하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아라> 그리고 그는 그렇게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렇게 몸소 실천한 사람이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다.
이 예수의 가르침을 풀어서 가장 잘 기록한 것이 사도 바울이 쓴 코린토 전서 13장이다.
<나는 이제 가장 좋은 길을 당신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 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갖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줄을 모릅니다.>
-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을 쳐들어 올때 동게르만의 여러 부족들을 아우르는 말이 반달족이었다. 반달족은 이탈리아, 시칠리아, 아프리카 까지 쳐들어가서 그들을 점령하고 약탈했다. 오늘날 문화 파괴 행위를 Vandalism 이라고 하는데 이는 반달족의 침략과 약탈과 파괴 행위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카룰루스나 이슬람 정복자들에게는 공통된 생각이 하나있었다. <인간에게는 신앙을 강제해 주면 그것이 진짜로 그들의 신앙이 된다>
- 초창기 <기사, Knight>란 단순히 <말타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으나 차츰 성직자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들은 마치 성직자들 처럼 <기사 임명식>을 <기사 안수식>으로 치루고 <기사도>에 서약을 하게 했는데 그 <기사도>에는 이런 귀절들이 포함되었다.
<기사는 그에게 주어진 힘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 기사는 여자들, 가난한자들, 과부와 고아들을 잘 보호해야 한다. 기사는 오직 정의를 위해서만 칼을 뽑아야 한다. 기사는 하나님께 절대 복종해야 하고, 동시에 영주에게도 복종해야 한다. 기사는 난폭해서도 안되지만 비겁해서도 않된다. 기사는 한명의 적을 두고 두 사람이 달려들어서는 않된다. 패배한 적을 조롱해서는 않된다. 기사는 여인들의 영예를 지켜주어야하고, 그들에게 거슬르게 행동해서는 않된다. 먼저 문을 열어주고, 떨어트린 물건은 대신 집어주어야 한다. 모든 행동에는 품위와 절도가 있어야 하고 욕설이나 더러운 말을 해서는 않된다.>
이런 기사도가 훗날엔 <빨간 천으로 만든 십자가를 양쪽 어깨에 붙여야한다>는 말을 첨가 함으로 <기사는 곧 십자군>이 되었다.
- 프리드리히 대제는 정치와 종교를 포함하여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거이 없다 싶이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는데 오직 한가지만은 몰랐다. <왜 세상 사람들은 싸우기를 좋아하는가? 왜 세상사람들은 싸울수 밖에 없는가?>
- 그 때와 지금, 그 곳과 여기에서 사는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관점을 지닐수 밖에 없다. 때와 장소가 다른데 어떻게 같은 생각을 갖고 동일한 판단을 할소 있겠는가? 정치에 대하여, 종교와 도덕에 대하여,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해서 까지도 사람들은 때와 장소가 달라지면 제각기 다른 관점을 갖게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동일한 시간, 동일한 공간, 동일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진선미성을 포함한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도덕, 예술에 대한 견해들은 제각기 달라진다.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는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똑같으면 이상한 것이다. 똑같으면 잘못된 것이다. 서로 다른 것이 맞다.
르네상스가 시작될 무렵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것은 아름답고, 서로 달라야만 풍성해 지고, 서로 다른 것은 당연한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아직 르네상스 이전에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서로 다른 것을 불편하게 여기고, 서로 다른 것은 위혐하다고 여기는 종교인들과 지성인들이 적지 않다.
- 콜럼버스와 그의 선원들은 무자비한 도둑떼였다. 그들은 황금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고 파괴했으며, 그 어떠한 위험도 피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해할수 없이 용감했고, 동시에 이해할수 없이 비인간적이었다. 그런데 정말 슬픈 것은 그들 모두는 예외 없이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들의 악하고 잔혹한 행동을 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 예수회를 시작했던 이그나티우스 로욜리의 말이다. <남을 지배하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지배할 줄 알아야한다>
- 허영, 사치, 무자비, 권위와 위엄으로 평생을 살았던 루이 14세도 자기 손자에게는 이런 편지를 써서 보낸 적이 있었다.
<아부하는 사람은 절대로 믿지 말아라. 너의 심기를 거스리면서도 선한 일을 하려는 사람을 가까이 두어라. 여흥을 즐기느라 업무를 등한히 해서는 않된다. 너의 모든 주의력은 국정에 쏟아 부어라.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먼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라. 능력있는 사람을 찿아내어 적재적소에 임명하여라.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어라. 누구에게도 모욕적 언사를 해서는 않된다>
가장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가장 호의호식하며 방탕하게 살았던 루이 14세도 에스파니아의 왕위에 오른 자기 손자에게는 이렇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으니 무슨 말을 더 할수 있으랴? 지금도 똑똑하고 말 잘하고 명언을 가지고 장난치는 정치인들과 종교인들과 지성인들이 어디 한 둘이냐?
- <아이들은 매질해서 키워야 합니다. 여자들은 그들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어린 나이에 얼굴도 모르는 남자들과 결혼을 시켜야 합니다. 농부들이란 오직 일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이니 쉴 틈을 주어서는 않됩니다. 거지와 부랑자는 공개적으로 채찍질을 하고, 사슬에 묶어 광장에서 조롱해야 합니다. 도둑들은 교수형에 처하고, 살인자는 능지처참을 해야 합니다. 마녀와 마법사는 화형에 쳐하고 이교도들은 박해 하거나 추방하거나 평생 감옥으로 보내야 합니다. 아프리카 흑인들은 팔아야 하고, 인디안들은 쓸모 없는 존재들이니까 쓸어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위에 적은 이런 글은 무지막지한 악한 인간들이 남긴 글이 아니라, 믿음 좋고 분별력이 뛰어나고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남긴 글입니다. 적어도 16세기 이전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신앙인의 옳바른 자세라고 믿었습니다. 불교와 유교를 바탕으로 했던 고려나 조선 시대도 이러지는 않았습니다.
- 나는 이 책의 317쪽에서 당시 미국의 노예 시장에 흔하게 붙여 놓았던 광고지 한장을 보았습니다. 그 사진을 다시 옮겨오는 방법을 몰라서 거기 쓰여진 광고 문안만 옮겨 보겠습니다.
<건장하고 괜찮은 흑인 노예 94명이 지금 막 도착하여 판매하려고 합니다. 8월 3일, 목요일 Brigantine Dembia 에 있는 노예 시장에서는 남자 노예 39명, 여자 노예 24명, 소년 노예 15명, 소녀 노예 16명을 판매합니다.>
(저희 딸에게 이것을 보여주었더니 비슷한 시기 호주에서도 Aborigine 판매 광고에 이와 비슷한 것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 이성의 영역에서는 근거를 제시하고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신앙의 영역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 생각, 이념, 종교가 다른 사람들 끼리 함께 공존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피차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내 생각, 내 종교, 내 믿음만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타인을 존중하며, 타인의 생각과 의견과 신앙을 인정해 주는 길 밖에는 다른 방법이란 없다.
- 16세기 이후 유럽 계몽주의의 3대 신조는 이런 것이었다. 첫째 – 이성, 둘째 – 관용, 셋째 – 인도주의
- 1948년 한국이란 나라는 정부 수립 이후 거이가 루이 16세 같은 대통령들과, 마리 앙투아네트 같은 영부인들과, 중세의 영주와 귀족들 같은 국회의원들이 주도권을 잡고 백성들 위에 군림해 왔다. 그런대도 한번도 혁명 같은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참 시기하기만 하다.
- <범죄자에게 연민을 베풀자고 주장하는 자는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실은 그 자신도 똑같은 범인이기 때문이다> – 로베스피에르
- 세계사를 읽다보면, 역사상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이 오히려 작가가 상상으로 꾸며낸 이야기 보다 훨씬 더 흥미로워서 저절로 경탄을 자아내게 된다.
- 누가 나폴레옹을 무너트렸는가? 영국? 독일? 러시아? 아니다. 나폴레옹을 쓸어트린 것은 나폴레옹 자신이다. 그의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이 그를 무너트렸다.
- 어린 아이들만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지 못하고, 장난치고, 못되게 말하고 행동하며, 소리지르고, 떠들어대는 것이 아니다. 어른들도 똑같다! 또 예전에만 그랬고 지금은 달라진 것도 아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어린 아이 때나 어른이 된 후나, 인간들이란 거이가 속통은 좁고, 다른 사람들은 못살게 굴고, 떠들고, 소리 지르고, 무리 지어서 데모한다. 요즘은 유투브 까지 나와서 옛날에 하던 짓거리를 똑같이 한다. 모두가 다 히틀러다. 히틀러 처럼 말 잘하고, 연설 잘 하고, 선동 잘 하고, 설득력이 뛰어나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자기 편을 만든다. 정치인도, 지식인도, 종교인도 다 그렇고 그렇다.
- 백성들에게 복종을 요구한 것은 히틀러 개인의 작품이 아니다. 히틀러가 백성들에게 순종과 복종을 요구하고 가르친 것은 순전히 기독교적 순종의 원리와 예수회 수도사들의 복종과 헌신의 전통을 이어받아 실천한 것 뿐이다.
- 독일 사람들은 2차 대전이 끝날 때 까지,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오직 독일 신문만 보고 독일 라디오만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한국 사람들도 조중동이던지, KBS, MBC, 한겨레든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그릅으로 딱 갈라져 있어서 역사의 사실과 진실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
- 선동과 배타성은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든다. 듣고, 읽고, 보고난 후에는 반드시 깊이 생각해 보고, 천천히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한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