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잡기장
소년이 온다
2025년 새해 들어 첫 책으로 나는 한국의 작가 한강이 쓴 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그녀는 지난해, 2024년 한국인으로써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물론 이 <소년이 온다> 한권으로만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 소설은 그이의 다른 몇몇 작품들과 함께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다.
<소년이 온다>는 지난해 12월 대구에 사는 고정애 사모가 시드니 방문 때 다른 여러권의 책들과 함께 선물해 준 것 중 하나였다. 그후 우리 부부는 한국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여행 중 틈틈히 읽으리라 생각하고 가방에다 챙겨 넣었지만 읽지를 못했다. 아니 읽을 수가 없었다. 이 소설은 여행을 하면서 가볍고 평안한 마음으로는 읽을 수가 없는 작품이었다. 1월 1일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이 한 200여 쪽 쯤 되는 그리 길지 않은 소설을 마치 성서를 읽듯이 마음과 생각을 정돈하고, 천천히, 그리고 무엇 보다도 많이 괴로워 하면서 읽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읽기가 많이 힘들었다. 지난 날 착하고 선한 우리 이웃들이 격었던 비극은 읽어내려가는 나의 눈과 입술, 그리고 생각하게 하는 내 머리와 가슴을 편안하게 두질 않았다.
다음의 잡기장은 이 소설속에 나오는 문장들과 거기에다 나의 별로 다듬어지지 아니한 느낌과 생각들을 덧붙여서 써놓은 것이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6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일어났던 시민들의 항거와 이에 대한 계엄군의 잔혹한 폭력, 살상, 살인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진 여러 개인들과 집단들이 경험한 트라우마를 통하여 우리 민족이 겪은 비극적 현대사를 펼치어 주고 있다. 이 소설은 역사소설은 아니지만 역사에 충실하고 있다.
처음엔 슬펐다. 그 다음은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그 후엔 무서웠다. 이렇게 읽기도 고통스러운 폭력과 살인과 집단학살의 잔인한 장면들을 이 작가는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도 멀쩡하게 써 내려 갈수 있었을까? 참 무서운 여자다. 그런데 이 무서운 여자 뒤에는 소설 보다 더 무서운 인간의 폭력성과 우리네 삶의 현장이 그대로 펼치어지고 있다.
맨 정신이었을까? 너무 떨리고 아파서 읽을수가 없다. 악령에 붙잡힌 사람만이 악령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했다. 인간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는 잔인함 속에서 나는 이 작가를 믿기가 쉽질 않다. 이 소설은 꼭 지옥에 갔다온 사람의 <지옥 여행기>와 같다.
죽은 사람은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배가 고픈 것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표시가 될 것이다.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근본적 물음이다. <진정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라고 하는 이 존재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사람을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작가는 우리를 다시 수천년 동안 반복해 온 인류의 근본적 질문 앞으로 불러낸다.
그녀는 절대로 인간을 믿지 않는다. 아니 인간이란 절대로 믿을수도 없고 믿어서는 않되는 존재다.
당신이 죽은 후 우리는 당신의 장례식을 치루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내가, 그져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당신의 장례식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침묵 – 그 순간 우리가 인간으로써 지킬 수 있었던 마지막 품위는 침묵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만 그래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왜 죽었고, 나는 왜 지금도 살아있는지를….>
나는 이미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보고난 후 <인간 죽음에 대한 심리적 분석>이나,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의학적 연구> 같은 논문을 쓰는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학문적 이론을 펼칠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인간의 실존을 보아야 합니다.
그 때 광주가 보여준 진리는 <인간이란 절대로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강하고 위대한 것도 양심이지만, 동시에 세상에서 제일 악하고 비겁한 것도 양심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도 양심이고, 세상에서 제일 웃기는 것도 양심입니다.
<그날 너희들이 광주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불렀던 것이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이제 우리들이 깨닫게 해 주겠다> 계엄군들은 그렇게 말하며 웃으면서 총을 쏘았습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우고 있습니다. 나의 적은 인간입니다.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날마다 싸우고 있습니다.
모든 살인, 폭력, 학살, 화재, 사고 등 각종 비극이 벌어지는 장면을 볼 때 마다 나는 말합니다. <저건 광주잖아!> 어제도 오늘도 광주는 수없이 거듭하여 등장하고 있음과 동시에, 또 계속해서 거듭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얼마 후엔 다시 재건하지만, 그후엔 또 다시 파괴하는 인간역사는 모두 다 광주의 연속입니다.
기억해 내야합니다.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한 것들을 말하고 쓰면서 증언해야 합니다.
인간은 잔인한 동물입니다. 동물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악한 동물입니다. 인간은 고통을 만들고, 고통을 앵기고,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역사, 인류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입니다.
우리 동생은 참 운이 좋았습니다. 그날 총을 맞고 바로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졌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 그날 그 소년 동호는 광주에서 그렇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옵니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옵니다. 소년은 와서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빛이 비치는 곳 – 빛고을 광주로, 꽃이 피어나는 이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_ 홍길복 (2025. 1. 15)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