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잡기장

이동파 예수
지난해 말 한국에 갔을 때 인천에서 <기독교미술연구소>를 꾸려서 이끌어 가고 있는 최광열 목사께서 2025년 새해 달력을 선물로 주셨다. <2025 – 세상을 살리는 미술, 이동파> 라는 표제에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 (Ilya Repin)의 작품인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을 표지에 담은 벽걸이 달력이었다. 1년 열두 달, 열두 폭의 러시아 이동파 화가들이 그린 대표 작품들을 엮어서 만든 달력으로 아주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는 귀중한 그림들이었고 보관적 가치도 크다고 생각되었다.
최목사와 나는 한국과 호주이라는 다른 삶의 자리에 있지만 피차 생각과 뜻을 함께 나누어 온 오랜 인문학 친구사이다. 그는 고등하교 때, 미술을 공부해 보려는 뜻과 재능이 있었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그 길로 가질 못하고 신학도가 되었고 그후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뒤늦게이지만 숭실대 대학원에서 <바로크 미술 – 신학으로 읽기>라는 우수한 논문을 써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우리 시대를 향한 몇가지 귀한 책들도 출판해 냈지만 특별히 그가 쓴 <기독교 미술 1 – 그리스에서 바로크까지>와 <기독교 미술 2 – 클래식에서 이동파까지>는 한글로 쓰여진 기독교 미술 개론으로는 여러 분들이 추천하는 아주 뛰어난 역작이다.
<이동파, 移動派, 러시아어로는 Peredvizhniki>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서양미술사에 등장해 온 여러가지 미술의 형태와 경향성에 따른 파들, 이를테면 바로크니, 고전주의니, 신고전주의니, 사실주의니, 인상주의니, 추상파와 같은 화풍이나 유파를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아시다싶이 중세 이후 서양 미술은 정치적 및 종교적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다. 화가들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기회와 장소, 그리고 여러가지 화구들과 돈을 주며 또 그들이 그린 그림을 전시하고 또 그 그림들을 판매 할수 있는 힘은 모두 다 권력자들과 부자들에게만 주어져 있었다. 따라서 화가들이 그린 작품을 직접 찿아가서 보고 감상하고 평가하는 공간 역시도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마련해 주지 아니하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성당과 수도원과 미술관들은 모두 다 교회와 왕들과 제후들의 소유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중세시대 그림들 중에도 문맹자들을 위한 계몽적 성격의 그림들이 많이 있긴 했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 수준 높은 그림들은 거의가 교황과 왕들과 제후들을 비롯한 갖인 자들을 위해서 그려진 것들이었다. 이런 역사적 흐름 끝에 생겨난 것이 <이동파>다. 이동파란 19세기 후반 부터 러시아에서 일어난 <새롭고 놀라운 방식>의 미술 전람회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레핀을 비롯한 일련의 러시아 화가들이 그들이 그린 작품들을 직접 손에 들거나 마차에 싣고 이 마을, 저 동네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움직이는 이동 미술관>을 열어 전시회를 연 것으로 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이동파>란 글짜 그대로 <이동하며 열리는 미술 전시회>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아직 교통 수단과 도로 사정은 열악했고 러시아의 혹독하게 추운 날씨와 종잡을수 없던 기후 변화와 혹독한 상황 속에서도 이들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들은 <브나로드> 즉 <우리가 민중을 찿아서 간다> 이라는 기치를 걸고 미술계를 뒤집어 놓는 또 다른 형태의 시민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라 할수 있겠다. 그들은 아무리 <와서 보라>고 외쳐도 도저히 와서 볼 수 있는 형편이 못되는 민중들을 향하여 그럼 <우리가 가서 보여 주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이동파 미술 전람회>란 바로 이렇게 찿아가서 보여주는 미술관이라 할 수 있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멀고 멀어서, 도저히 거기, 대도시의 미술관 까지는 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 시골 사람들, 일생에 단 한번만이라도 화가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보면서 즐겁고 행복할 기회를 전혀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럼 우리들이 가마!>라고 팔을 걷어붙인 사람들이 바로 이동파 화가들이었다.
예술이란 무엇일까? 도대체 우리가 그림을 그리는 목표는 무엇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림을 보라고 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 미술은 아름다움을 넘어서서 인간들에게 진정한 희망을 주고 아픔을 치유하고 병든 사회를 고쳐 나가야 하는 윤리 도덕적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동파
화가들은 이런 물음에 대하여 <그렇습니다. 미술은 아픈 개인과 병든 사회를 고치는 힘입니다. 우리에게는 도덕적 책임과 윤리적 사명이 있습니다>라고 외쳤던 것이다. <무릇 그림이란 황제와 귀족들을 위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다. 미술은 그들만을 즐겁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전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림은 가난한 사람들, 농민들, 그리고 노예들도 보고, 감상하고, 평가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그려지고 전시되어야한다> 이것이 이동파 화가들의 목표였다.
<이동하며 움직이는 아트 갤러리>인 <2025년 이동파> 달력을 다시 한번 천천히 넘겨 보았다. 거기에는 레핀의 <기다리지 않은 손님> <볼가강에서 배끄는 인부들>, 그레고리 미야소예도프의 <1861년 선언문 읽기>, 니콜라이 게의 <진리가 무엇이요?> 블라드미르 마코프스키의 <만남>, 니콜라이 야로센코의 <합창단> <삶은 어디에나>를 비롯하여, 이삭 레비탄의 <영원의 고요함>, 바실리 페로프의 <차담회>, 바실리 푸기레프의 <불평등한 결혼식>, 바실리 막시모프의 <흘러간 과거>, 이람 코람스코이의 <광야의 그리스도>와 같은 대작들이 고루 담겨 있었다. 그림을 보면서 나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관을 모두 다 다녀온 것 같은 커다란 기쁨을 얻었다.
나는 19세기 러시아의 이동파 화가들의 생각과 활동을 읽어보고 또 그들의 작품을 보면서 <이동파 예수>를 생각해 보았다. 예수님도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떠나 <낮고 천한 인간 세상>으로 이동해 오신 이동파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사실 모든 이동파의 진짜 원조는 예수님이다. 그는 이미 2천년 전에 하늘에서 땅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곳에서 보이는 곳으로, 멀고 먼 곳에서 지극히 가까운 이웃으로 이동해 오신 분이지 않는가? 내가 늘 말해 왔던 <이민자 예수>도 사실은 <이동파 예수>의 다른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이동해 오신 후, 이땅에서도 여러 곳으로 이동에 이동을 거듭하셨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이집트로, 이집트에서 갈리리로,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멈추지 않고 이동하신 이동파였다. Moving Jesus!
그는 한 시도 한 자리에 둥지를 틀고 머물러 계시지 아니하셨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됨을 떠나 지구촌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류의 조상으로 위치를 옮기셨고, 권세 있고 돈 많은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곁을 떠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과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로 자리를 옮기셨다.
<이동파 예수>의 이동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의 이동이 아니라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의 자리 바꿈이다. 예수는 신분 상승을 위해 움직인 분이 아니다. 그는 신분 하강을 위해 자리를 이동하셨다. 그의 이동은 낮아짐과 겸손, 섬김과 희생을 향한 자리바꿈이었다. 여기서 나는 러시아의 이동파 화가들 역시 낮고 낮은 곳을 향하여 몸을 낮추신 예수님을 따라 간 아름답고 거룩한 발걸음이란 생각이 깊어졌다.
러시아의 이동파 미술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나는 바티칸의 씨스티나 채플 (La Cappella Sistina)의 천정과 벽과 복도에 그려진 그림들이 모두 다 훨훨 춤을 추며 어딘가로 이동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 라파엘, 보티첼리, 씨노렐리, 뻬루지노, 로쎌리, 레오나르드 다 빈치, 미켈란제로가 그렸던 찬란하고 위대한 예수님의 모습들이, 위와 아래와 옆으로 꽉 갇혀진 감옥 같은 공간을 떠나, 러시아의 이름 없는 작은 시골 마을로 이동하는 듯한 <이동자 예수님>을 그려 본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고향 땅 마케도니아를 떠나 인도의 빈민굴 콜카타를 찿아 평생을 함께 하다간 마더 테레사, 고국의 성당을 뒤로하고 이태석 신부와 함께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로 이동하는 예수님, 편안한 고향 땅 오스트리아를 떠나 40년이 넘도록 소록도의 천사로 자리를 옮겼던 마가렛 수녀, 100여년전 윌슨 선교사와 그 후 손양원목사님을 따라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여수 애양원으로 이동해 오신 또 다른 예수님의 그림이 내 눈 앞에서 <이동파 예수>의 모습으로 선명하게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이름없이 빛도 없이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찿아가 함께 삶을 나누며, 싸우고 죽이는 전쟁터를 찾아가 약을 바라주고 붕대를 감아주는 숨겨진 <이동파 예수의 진짜 제자들>을 보게 된다.
고국에서는 명문대학을 나왔지만 21세기의 또 다른 갈릴리인 이민자의 땅으로 와 신분을 낮추어 청소도 하고, 택시운전도 하며, 세탁소에서 빨래도 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려고 몸부림 치는 이민 1세대들과 <이동파 예수님>이 오버랩 (overlap) 되기도 한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또 다른 영적, 정신적, 도덕적, 실제적 <이동파 화가들>이 2천년 전 <이동파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따라 끊임없이 그들에게 주어진 자리를 박차고 낮고 낮은 자리로 이동하며 움직이고 있기에 세상은 조금씩이나마 희망이 더해지고 밝아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홍길복 (2025.6.9)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