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잡기장

피로사회
<피로사회, Muedigkeitsgesellschaft>는 한병철 교수가 쓴 철학 에세이집다. 2010년 독일에서 처음 출판된 후 학계와 언론으로 부터 크게 주목을 받아왔다. 한국어 번역판은 2012년 김태환 교수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의 번역으로 <문학과 지성사>에서 초판이 나왔다. 한국어 번역판에는 <피로사회>에다 한교수의 강연중 하나인 <우울사회, Gesellschaft der Depression>를 첨가하고 있다. 이 책은 두개의 에세이를 합해도 불과 120여쪽 정도 밖에 안되는 소책자이다. 한병철교수는 이 책에서 오늘날 포스트 모던 사회 (후기근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개인적 삶의 상황과는 상관 없이 모두가 피로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오늘날 인간들이 피로한 사회에서 피로하게 살아가는 원인은 <자기착취>로 부터 기인된다고 본다. 이 에세이에서 그는 이렇듯 자기 착취로 인하여 피로해진 우리 사회와 이 시대를 여러가지 시각에서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저자 한병철교수는 1959년생으로 한국에서는 고려대학교 금속공학과에서 공학을 공부한후 독일로 건너간 후 전공을 바꾸어 독일문학과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철학자요, 인문학자이다. 독일에서는 하이데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후 스위스에서 데리다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얻었으며 현재는 베를린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피로사회> 이외 그가 쓴 저서 중 한글로 번역된 것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투명사회> 문학과 지성사, 2014
<권력이란 무엇인가?> 문학과 지성사, 2016
<선불교의 철학> 이학사, 2017
<타자의 추방> 문학과 지성사, 2017
<불안사회> 다산초당, 2024
<생각의 음조> 디플롯, 2024
<기본적 이해> – 나는 한병철의 <피로사회>에 대한 독후감 혹은 잡기장을 쓰기에 앞서서 오늘 우리 시대에서 <피로사회>라는 개념이 지닌 의미를 먼저 이해해 두어야한다고 본다.
포스트모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대부분 피곤하다. 현대인들은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가리지 않고 강도 높은 노동 때문에 피곤에 찌든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꼭 노동 때문만이 아니라 그냥 늘 피곤하게 살아간다. 우리는 쉬어도 피로하고 놀아도 피곤하다. 휴가를 내어 여행을 다녀와도 여전히 피곤하고 출근을 않하고 집에서 쉬어도 계속 피곤하다. 다시 말하자면 현대인들은 일 때문에 피곤한 것이 아니라 아무 일을 안해도 여전히 피곤하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와 이 역사 자체가 피곤한 사회요, 피곤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피곤한 개인들이 모인 집단은 당연히 피곤한 공동체가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공동체 자체가 이미 피곤해졌다면, 그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여지없이, 그리고 예외 없이 피곤해 질수 밖에 없다.
그래서 <당신이 피곤한 것은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당신은 쉬지 못하고 일만해서 피곤한 것이 아니다. 당신과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 자체가 이미 피로해졌기 때문에 피곤한 것이다. 피곤한 개인은 피곤한 사회를 만들고, 피곤한 사회는 피곤한 개인을 만든다. 피곤은 이제 개인의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집단과 공동체의 문제로 보아야한다> – 이것이 <피로사회>를 읽기에 앞서서 먼저 공유해 보고 싶은 나의 기본적 생각이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 자체가 이미 피곤으로 찌들어져 있는데 당신만 혼자서 “나는 괜찮아! 나는 하나도 피곤하지 않아!”라고 말한다면, 그럼 당신은 어딘가 생각이 좀 짧거나, 감각이 둔하거니, 아니면 어딘가 병든 사람일수가 있다. <피로사회>에 대한 나의 이런 전제를 기초로 하면서 나는 이를 넘어서는 한병철교수의 더 높고 깊은 <피로사회>를 살펴본다. 한교수는 그의 책 <피로사회>를 통하여 후기근대사회가 만들어낸 성과사회, 병든 긍정성으로 차고 넘치는 우리 사회가 지닌 여러가지 시대적 질병을 진단하고 있다.
다음은 <피로사회>를 읽으면서 밑 줄쳤던 부분에다 나의 생각을 약간 첨가하거나 다듬어 본 잡기장이다.
프로이트나 푸코의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19세기 후반 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대는 한마디로 하자면 <금지와 억압의 시대>였다. <이것도 하지말고 저것도 해서는 않된다>면서 대부분의 생각이나 행위를 금지해온 부정적 시대였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모던시대 (저자는 이 포스트모던 시대를 ‘후기근대시대’ 혹은 ‘후기근대사회’라고 번역하고 있다)는 모든 일에 대하여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해보자>는 생각이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이다. 부정성 대신에 긍정성이 우리 시대를 지배하게 되었다.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Yes, you can do everything.> 이제 금지사회는 완전히 해체되었고 긍정사회가 모든 일들을 주도해 나가고 있다.
<긍정사회>가 우리들에게 가져다 준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성과> 혹은 <성취>라고 할수 있다. 그래서 긍정사회란 다른 말로 하자면 <성과사회>이다. 지난날의 금지는 풀어졌다. <해서는 않될 일도 없고, 해보면 못할 일도 없어졌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그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가 되었다.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성공과 출세이다. 우리 사회는 성공과 출세를 최대의 목표로 삼는 사회가 되었다. 성공과 출세의 결과는 무엇과 연계되는가? <성과> 혹은 <성취>다. 그래서 이 시대는 어떻게 해서라도 성과를 만들어내야만 하는 <성과사회> <성과지향사회> <성과목표사회>가 되었다. 이와같은 <성과사회>란 성공사회, 출세사회, 혹은 자본주의사회의 변형된 다른 이름이라 할수 있겠다. 그리고 이 사회의 주인인 현대인들은 드디어 <성과의 주체>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긍정성에 기초한 <성과사회>는 마침내 그 긍정성이 지난친 과잉으로 치닫개 됨으로 인하여 <성과사회>의 주체인 인간들은 어쩔수가 없이 자기 자신을 억압하고 짖누르는 자리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인간들은 이제 걷잡을수 없이 피로해졌다. 성공, 성취, 능력의 확대 재생산을 통한 성과의 연속성을 위하여 몸부림 침으로, 개인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자체가 그만 <피로사회>가 되고 말았다는 말이다. 과잉생산, 과잉가동, 과잉 컴뮤니케이션, 과잉활동과 같은 긍정성의 대량생산이 피로사회를 만든 주범이다.
피로해진 인간들이 다다른 곳은 좌절감과 우울증이다. 현대인들이 좌절감에 젖어들고 거개가 우울증환자들이 된 것은 바로 <긍정사회> <성과사회> <성취사회> <피로사회>가 가져다 준 결과라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피로사회>가 말하는 근대와 후기근대의 특징을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근대 (Modern Society) ——————– 후기근대 (Post-Modern Society)
규율사회 (Disziplinargesellschaft) ——– 자율사회 (Leistungsgesellschaft)
부정사회 (하지마라, 해서는 안된다) ——- 긍정사회 (해라, 할 수 있다)
부정성 (금지, 명령, 통제사회) ————- 긍정성 (자유, 해방, 이니시아티브사회)
타자의 부정 ——————————— 타자의 긍정
이분법과 양극화시대 ———————- 화해, 긍정, 용납, 관용의 시대
양심, 도덕, 신중심 사회 —————— 자유, 쾌락, 자기만족 시대
타자가 던지는 피로사회 ————— 자기가 자기를 피로하게 만드는 사회
자아부정 ——————————- 자아긍정
타자에 의한 폭력 ———————– 자기가 자기를 폭력하고 못살게 군다
포스트모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노예가 되었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노동수용소에 갇혔다. 우리는 포로인 동시에 감독관이 되었고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된 것이다. 우리는 명령자가 없는데도 우리 발로 나치 수용소에 들어갔다. 우리는 지배자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 탈진, 무력, 우울증환자가 되어 무젤만 (나치 수용소에서 영양 실조로 피골이 상접해진 수감자)이 되었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그에게는 스스로, 혼자서는 멈출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후기근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꼭 그러하다. 이제 인간들은 스스로를 억제하거나 멈출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오늘날 우리는 분노하는 법은 잃어버리고, 짜증과 신경질만 더해가고 있다. 분노는 새로운 미래를 열수 있지만 짜증과 신경질은 어떠한 변화도 만들어 낼수가 없다.
힘에는 두가지가 있다. <할 수 있는 힘 – 긍정의 힘>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 부정의 힘>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과시대>를 살아가는 <성과의 주체>인 우리들은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이 치명적 활동 과잉 상태가 인간과 사회를 슬픔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성과사회는 이제 서서히 <도핑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도핑사회란 무엇인가? 아무리 일을 해도 결코 성과가 만들어지지 않는 사회를 말한다. <성과 없는 성과사회>다. 여기에서 만나는 것이 탈진이다. Burn out이다. 피로사회다!
피로는 어디를 향하여 가는가? 폭력을 향하여 간다. 공동체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 까지도 죽이고 파괴하는 것이 피로의 마지막 종착역이다.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 피로사회에 마지막으로 평온을 가져다 줄수 있는 하나의 희망이 있다. 그것은 <무위, 無爲, nicht-zu, doing nothing>다.i <그만 하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접어두기로 하는 것>이다. 안식이다.
<안식,安息이란 무엇인가?> <편인하게 쉬는 것>이다. 유대교에서 안식일 <安息日, Sabbath,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그 안식일을 주일, 혹은 일요일 Sunday로 날자를 변경하였다>은 본래 하나님께서 엿세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후 모든 일을 멈추시고 <편안하게 쉬신 일곱번째 날>로써 인간들에게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편안하게 쉬도록 명령하신 날>이다. 안식일이라고 부르던 주일이라고 부르던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쉬는 것, 無爲하는 것, doing nothing>이 안식일의 원칙이다.
하이데거는 후기근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가 유대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간에 이미 안식을 포기한 사람들이라고 보았다. 오늘날 이 긍정사회와 성취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안식 조차도 <안식하기 위해서 안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든 근심과 걱정과 불안으로 부터 해방되어 자연스럽게 평안을 누려야 할 날을 지키느라 현대인들은 법과 규정, 제도와 교리를 제정하고 그 법을 지키느라 노심초사하며, 근심걱정을 하느라 안식하지 못하고있다. 종교적 법이 그 법의 설립 추지를 상실하여 <안식하지 아니함으로부터 받게 되는 불이익> 때문에 오히려 안식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진단이다. 안식하기 위해서 과도하게 신경쓰고 법을 만들고 설교하는 것은 안식을 방해하는 가장 큰 범인이 되었다. 이제 안식을은 안식일이 아니라 강제로 안식하게 만드는 또 다른 형태의 쉼이 없어진 <안식하느라 노등하는 날>이 되고 말았다.
맺는말 – 한병철교수는 이 책 <피로사회>에서 근세 까지 이어온 서구의 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핍, 거부와 같은 부정적 패러다임을 능력, 성과, 자기주도, 과잉과 같은 긍정적 패러다임으로 바꾸어 놓은 후기근세의 문젯점들을 아주 진지하게 제기하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성공과 성취를 향한 탐욕과 유혹, 끊임없는 이기적 DNA를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겨낼수 있을까?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요청된다.(*) _ 홍길복 (2025.4.2)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