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종려주일설교

본문 : 누가복음서 12장 57-59절 (참고, 마태복음서 5장 25-26절)
제목 : 주여,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주여,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누가복음서 12:57-59)
오늘은 예수님께서 평화의 상징인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신 종려주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가에 펴놓고 평화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잎새를 흔들면서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그래서 오늘 종려주일은 오랫동안 우리 교회가 평화의 주일로 지켜온 뜻깊은 날입니다. 평화를 노래하고, 평화의 행진을 하면서, 온 누리에 하늘의 평화가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오늘은 화해와 평화를 위하여 힘쓰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비유 하나를 나눌려고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분쟁이 생겼습니다. 그럴 경우 잘못한 사람은 상대방으로부터 고발을 당하여 재판을 받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 때는 법정에 가기 전에 미리 화해하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송사에 이르기 전에 사과나 손해 배상 같은 절차를 통하여 평화로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인생의 지혜라는 말씀입니다. 잘못이 분명한 일을 가지고서 끝내 재판석까지 가게되면 결국 당신은 감옥에 가게 될 것이고 마침내는 작은 푼돈 하나 까지 모두 다 내놓지 아니하면 절대로 출옥이 안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싸우지 마라! 다투지마라! 만약 싸웠거나 그로 인하여 시비가 생겨났다면 한시라도 빨리 화해하는 것이 최고의 상책이다!’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인간 삶에서의 갈등 조절과 평화 실현의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문맥으로 보자면 누가는 지금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노중에서 이 말씀을 하시는데 마태는 이를 그의 어록 모음인 산상수훈에다 배치해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텍스트의 내용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누가는 이 비유 앞에다 ‘시대를 분별하라’는 말씀을 하심으로 때가 오기 전에, 곧 역사의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라. 하나님께 회개하여 심판을 면하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있는데, 마태는 <예물을 드리다가 혹시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 나거든 먼저 가서 그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는 말씀을 하심으로 인간 상호간의 화해와 평화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두 본문은 다 같이 화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마태는 형제와 형제 사이, 곧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와 평화에 방점을 찍고 있고, 누가는 하나님과 화해하라는 데 더 큰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주석적 검토 부터 해봅시다. 먼저 57절은 이 비유의 핵심 메시지 입니다. ‘스스로 판단해 보아라!’ 이는 사리분별만 할 줄 알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고 신앙 생활하는 것은 꼭 머리가 좋아야만 되는 것도 아니고 성경은 I.Q.가 높은 사람만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 생활이나 인생 살이는 그져 우리가 상식적으로만 생각해 보아도 알수 있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싸우지마라. 싸웠으면 빨리 화해해라. 인생 살이든 신앙 생활이든 정말 중요한 것은 서로 용서해주고 사랑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 이게 욧점입니다. ‘길에서’ 혹은 ‘길에 있을 때’란 표현은 ‘살아가는 동안’ ‘죽기 전에 인생살아가는 동안 화목하게 지내라’ 라는 말씀입니다. 58절에는 ‘고소자’ ‘고발자’가 나옵니다. 마태에서의 고발자는 서로 싸운 형제입니다. 모든 화해의 기초는 인간 상호 간의 화해가 먼저입니다. 마태는 하나님께 대한 제사나 예배 등 종교의식 보다 인간 사이의 용서, 이해, 화목, 사랑, 평화가 우선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누가에서는 하나님이 고소자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누가가 ‘화해하기를 힘쓰라’고 하는 말씀은 ‘최후의 심판 날이 오기 전에’ ‘회개 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도록 힘쓰라’는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마태는 ‘관예’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누가는 ‘관속’이라는 표현을 씁니다만 별 차이는 없습니다. 59절을 예전에는 마태나 누가 모두 ‘호리라도 갚기 전에는’이라고 했는데 개역개정판에서는 ‘한푼’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마지막 동전 한잎 까지 다 갚아야한다’는 뜻일 겁니다. 텍스트에 나오는 재판관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은 역사의 마지막 심판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누가는 개인적 죽음과 우주의 종말이 오기 전에 빨리, 서둘러서, 인생 살이에서 지난 날 잘못했던 일들을 먼저 하나님께 고하고 용서를 빌고 그 분의 자비와 은총으로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잃어버렸던 평화를 되찾으라는 데 핵심이 있습니다. 마태에서도 재판장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우리가 예배드리려 하나님 앞에 나가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 상호간에 용서와 사랑,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것임을 강조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온갖 전쟁이나 다툼, 오해나 미움을 멈추고 온 땅에 평화를 이루고 ‘인간 세상에 평화로운 관계를 회복하려면 서로 사랑해라 서로 용서해라 서로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살아라’ – 이것이 인생과 신앙의 기본이며 본질이라는 것이 마태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주제는 ‘화해와 평화’입니다.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단어가 여러가지 디른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화평, 화목, 용서, 평화, 평강, 평안, 평온 같은 단어들은 대체로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히브리 말로는 ‘샬롬’ 그리스 말로는 ‘에이레네’ 영어로는 Peace라고 씁니다. 굳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말하지 않아도 인간역사란 전쟁과 평화가 엎치락 뒷치락 하면서 이어져 갑니다. 우리가 한 평생 살아가는 인생 살이에서 간단하고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태어나 살아가는 과정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인생살이란 온통 고해와 같습니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인생 길이란 정말 힘들고 어려운 가시밭길 입니다. 먹고 사는 일이란 그리 간단하질 않습니다. 거기에다 인생이란 혼자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게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부터 시작하여 자연과 사회, 가족과 이웃 속에서 <어떤 관계맺기>를 하면서 살아야 할찌, 그걸 올바로 알고 또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난제 중에 난제라 하겠습니다. 꼭 오늘날 이어지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만이 아니라 크고 작은 우리네 가정사나, 직장생활과 사업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우리가 하는 교회생활, 신앙생활, 작게는 제직회, 당회, 선교회, 교회봉사, 성가대에서 찬양하는 것에 이르기 까지 어떻게 참고, 견디고, 나를 억누르며 서로 이해해 주고 용납해 주고 사랑해 주어야 할찌, 정말 어렵고 어려운 인생 최고의 난제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성가대원들이 찬양하는 것 하나만 예를 들어도 음악적으로 화음을 맟춰서 노래하는 것은 그런대로 잘 할수 있지만 사실 대원들 한사람 한사람이 진정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영혼과 영혼이 하나가 되어 서로를 다둑거려 주며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하나가 된 영>으로 찬양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저 역시도 목사랍시고 이렇게 설교하는 자리에 서 있지만 진정 저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사랑하고 용서하며 평화를 위해서 사역해 온 사람인가,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오늘 종려주일 아침 우리가 함께 읽은 비유는 이 인생 최고의 숙제중 하나인 ‘화해와 평화’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제발 하나님에 대해서든 사람 사이에서든 서로 싸우지 말고 좀 평화스럽게 잘 지내라’는 말씀인데 그게 어디 말 처럼 쉬운 일입니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이고, 화내지 않고 성내지 않고 웃으며 피차 평화롭게 사는 일이라고 봅니다. ‘가화만사성’이고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도 거듭해서 일러주시는 주제가 ‘싸우지마라’ ‘서로 잘 지내라’ ‘평화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흔히 평화 문제를 학문적으로 다루는 이들은 3가지 평화를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팍스 로마나’입니다. 이는 힘과 무력으로 억눌러서 만들어내는 노예적 평화를 말합니다. 속으로는 불만과 분노, 끓어오르는 저주가 있지만 겉으로만 고요한 세상이 되면 그걸 평화라고 말하는 것이 ‘팍스 로마나’ 입니다. ‘팍스 아메리카나’나 ‘세계에서 최고로 평화로운 나라’라고 큰소리치는 북한 같은 사회가 바로 ‘팍스 로마나’입니다. 둘째는 ‘철학적 평화’가 있습니다. 인간과 세상의 외적 상황은 어떠하든지 간에, 전쟁이 일어나든, 자연재난이 발생하든, 질병이 창궐하든, 세상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내 마음은 편하다’는 사람들의 평화관 입니다. 이는 일종의 ‘정신적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해탈’ ‘득도’ ‘깨달음’ 같은 동양적 ‘침잠’이나 에피큐리안들이 주장한 ‘에이레네’ 즉 생사를 초월하는 ‘내적 고요함’ 같은 헬라적 평화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봅니다. 세번째는 ‘종교적 평화’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정한 용서와 사랑, 관용과 나눔, 균형과 조화가 이루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히브리어 ‘샬롬’은 바로 이런 하늘과 땅의 평화, 인간과 인간의 총체적이며 우주적인 평화를 가장 바람직한 ‘이상적 평화’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을 통하여 또 다른 세가지 평화를 말씀드릴려고 합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오늘 누가 복음서가 말씀 하시는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를 말씀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등지거나 싸우면 절대로 않됩니다. 하나님은 신이시고 우리는 인간입니다. 하나님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되게 하시어 하니님과 화목하게 하셨느니라 원수된 것을 소멸하시고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느니라’(엡 2: 11-22) ‘그는 십자가로 화평을 이루사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니’(롬 5:1, 10)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하는 직분을 주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18, 2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읽어드린 이 모든 말씀의 핵심은 우리 인간들은 다 하나님께 죄를 지어 심판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는데 하나님이 값 없이, 무조없이 ‘우리를 용서를 하신다’고 선언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와 화목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죄인인 우리 인간들이 우리들의 잘못을 인정 하거나 사죄를 요청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용서를 선언해 버리고 마신 겁니다. ‘너희들의 잘못은 없는 것으로 쳐줄께!’ 본래부터 하나님은 평화의 본체이시고 모든 평화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로마 15:33 빌 4:7 히브리 13:20)이라고 부릅니다. 그 평화의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평화를 주시마고 약속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하지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요한 14:27)
둘째는 ‘나 자신과의 평화’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자기 속에 있는 또 하나의 자기와 싸우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나에 대한 최대의 원수는 나 자신’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콘트럴할 능력이 없습니다. 내 속에 있는 탐욕과 이기심, 교만과 우월감으로 인하여 우리는 스스로 불행한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늘 불안, 초조, 근심, 걱정, 좌절, 긴장, 우울증, 신경쇠약, 그리고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내가 나를 어찌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나는 질병’ 입니다. 레오나르드 다 빈치가 한번은 예수님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소년이 그의 화실로 뛰어들어 왔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그만 그 때 까지 그렸던 그림을 망쳐버렸습니다. 다 빈치는 화가났습니다. 붓을 내던지고 소년의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가! 꺼져버려!’ 그는 소년을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 참이 지난 후 다시 그림을 그리려고 자리를 잡았습니다만 영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은 엉망이 되었고 손은 자꾸만 떨렸습니다. 그의 분노가 그의 영감을 무너뜨렸고 그의 손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소년이 그림을 망친 것이 아니라 실은 다 빈치 자신이 자기 자신의 그림을 망쳤던 것입니다. 다 빈치의 고백에 의하면 그가 훗날 예수상을 다시 그리게 된 것은 그 날 자기가 소리를 질렀던 그 소년을 찿아가서 ‘미안해! 내가 잘 못했어!’ 용서를 빌고 나니 주님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더랍니다. 모든 비극은 밖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생깁니다. 평화와 행복도 내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자기가 자기를 들볶고 자기와 싸우느라 여념이 없는 사람은 평생을 불행하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셋째는 ‘다른 사람들과의 평화’ 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평화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 보다 더 힘든 과제라고 할수 있습니다. 상대가 있고 그 상대가 하나님 처럼 착하신 분이 아니라 나와 똑같이 악하고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인간 상호 간에 평화 구축은 정말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숙제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경은 ‘다른 사람과의 화목’이란 은혜받고 구원받은 사람은 반듯이, 마땅히, 꼭 해야 할 일로 단정하십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말씀대로 하자면 오늘도 우리는 잘못된 예배, 순서가 뒤틀린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오늘의 말씀은 신학적 해석을 크게 요하는 것도 아니고 복잡한 교리도 아니고 논쟁을 불러올 만한 말씀도 아닙니다. 그냥 실천해야 할 현실적 과제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잘 안되고 말 처럼 간단하지 않다는데 우리의 안타까움과 좌절감이 있습니다. 지금도 세상에서 제법 많이 노력하고 돈들이고 회의하고 연구하고 수 많은 사람들이 전력을 다하여 추구하는 것이 ‘평화’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전쟁은 계속되고 핵과 미사일, 테러와 살상, ICBM과 핵잠수함들은 하늘과 땅과 바다 속을 헤집고 다닙니다. 뿐만 입니까? 감히 나열 할 수도 없이 많은 개인적 미움, 복수, 살인, 폭력, 고소, 고발, 체포, 등등 한도 없고 끝도 없는 폭력과 비평화가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세상입니다. 어쩜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온전한 평화를 이루어가는 것은 거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로 보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용서해라, 이해해라, 평화하라, 사랑하라”고 거듭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 잘 믿는 것 별거 아닙니다. 서로 싸우지 않고 사랑하며 잘 지내면 되는 겁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고 거룩함을 이루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 하리라’(히 12:14)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골 3:15)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롬 4:17)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1) ‘만일 너희가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 할까 조심하라’(갈 5:15)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마태 5:9) ‘싸우지 말고 잘 지내라.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거라’ 이것이 오늘 종려주일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저와 우리 모두는 참으로 연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성령의 능력만 의지 할 뿐입니다. 주님 만이 이 질곡의 인류역사, 탐욕과 미움으로 가득찬 내 마음을 변화시킬수 있는 능력을 주실 분이기에, 우리 심령을 추수리며 주님께 간구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저는 오늘 설교 말씀을 전하는 중 모두 20여개의 성경말씀을 읽어드렸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교회 홈 페이지를 찿아서 다시 한번 더 천천히 그 말씀들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인간의 설교가 아니라 기록된 주님의 말씀이 친히 우리 심령을 만져주시길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직접 palm tree 잎사귀를 손에 들고 예루살렘이나 시드니 시내 Hyde Park을 찿아가서 Peace March를 하지는 않지만 이제 우리 다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서 옆에 계신 교우들과 손에 손을 잡고 900년전 성프랜체스코가 주님께 받쳤던 <평화의 기도>를 한마음과 한 목소리로 받침으로 오늘 성령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을 마무리 하시겠습니다.(새번역)
<주님,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 미움이 있는 곳에는 사랑을 /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용서를 / 분열이 있는 곳에는 일치를 / 오류가 있는 곳에는 진리를 밝혀 주시옵소서 / 의혹이 있는 곳에는 믿음을 / 절망이 있는 곳에는 희망을 / 어둠이 있는 곳에는 광명을 / 그리고 슬픔이 있는 곳에는 기쁨을 심게 해 주옵소서 / 주님,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게 해 주시고 /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게 해 주시고 /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해 주시옵소서 / 저를 온전히 내어 주게 해 주시고 / 저를 철저하게 잊어 버리게 해 주시고 / 용서함으로 용서 받고 /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게 해 주시옵소서. 평화의 임금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