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 목회자인문학, ‘신앙 (신학)의 보수와 진보’ 주제로 모임 가져 … 모임후 교회투어도
다음모임은 11월 7일(화) 오전 10:30, 호주미래대학 파라마타캠퍼스에서 [10월 3일 토론자료 전문포함]
홍길복 목사와 함께하는 화요 목회자인문학에서는 지난 10월 3일 오전 10시 30분 시드니조은교회 (전현구 목사 시무)에서 ‘신앙 (신학)의 보수와 진보’란 주제로 토론모임을 가졌다.
이날 토론모임은 근본주의, 복음주의, 정통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진보주의, 급진주의 신학 등을 논한 후 현대신학의 방향 및 한국교회의 신학사조 등을 나눴다.
특히 각론으로 현대 교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동성애, 여성안수 등에 대해서도 토론했다.
모임후에는 시드니조은교회당을 둘러보며 파라마타 중심지에 위치한 예배당의 역사 등을 전현구 목사의 소개로 투어했다.
한편 화요 목회자인문학 다음모임은 11월 7일(화) 오전 10:30, 호주미래대학 파라마타캠퍼스에서 모인다.
홍길복 목사와 함께 하는 ‘목회자 인문학’ 11월 모임 안내
– 다음모임: 2023년 11월 7일(화) 오전 10:30
– 장소: 호주미래대학 파라마타캠퍼스
– 주소: L1 / 239 Church St Parramatta NSW 2150 Australia
– 대상: 목회자, 신학공부 하신 분, 신학생
– 문의: 임운규 목사
.전화: 0425 050 013 (문자 문의 환영)
.이메일: [email protected]
*영상제작 및 업로드 봉사자 연락바랍니다.
목회자인문학 : 신앙 (신학)의 보수와 진보 [10월 3일 토론자료 전문]
근본주의, 복음주의, 정통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사조는 개혁운동을 바탕으로 한 복음주의 (Evangelical), 신정통주의 (Neo-Orthodox), 진보주의 (Liberal, 주로 자유주의라고 하는데 자유주의보다는 진보주의가 더 용이한 개념인 것 같다), 급진주의 (Radical), 포스트모던 등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1. 근본주의
근본주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기본들 즉 그것 없이는 기독교인이 될 수없는 삭감할 수 없는 최소한의 믿음을 말하는데 근본주의의 관심은 구원에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독생자를 보내셨고 이것을 우리에게 은혜라고 말한다. 이러한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차이는 고등비평에서 볼 수가 있다. 이에 비해 보수주의는 기독교안의 이성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들은 근본주의자들의 비이성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합리적 신앙을 중요시 한다. 이 보수주의는 이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 오히려 비지성적이라고 말한다. 보수주의와 근본주의를 비이성적이라고 불리우는 한 요소는 진화론을 반대하는 그들의 입장에 근거한다.
2. 복음주의
복음주의 (福音主義, evangelicalism, 독: evangelikalismus)는 개신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의 핵심 사상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현재도 모든 개신교 교단은 복음주의를 지향한다.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도 기독교의 핵심용어이다. 그러나 서방교회의 개혁을 주장한 16세기 종교개혁의 찬성파인 전통적인 종교개혁 세력을 지칭하는 용어에서 활용되어, 16세기 종교개혁 운동가들과 참여 교회들은 이 용어를 수용하였다. 개신교는 복음주의 교회로, 개신교 신자는 복음주의자로 종교개혁 시기부터 불리기 시작했다.
복음주의는 초기 종교개혁 시절부터 현재까지 개신교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개신교 내부의 진보, 중도, 보수 및 극좌 극우 성향 교단 모두 복음주의를 주장하므로 그 의미 폭이 넓은 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보편교회를 따르는 기독교 교단은 모두 복음, 복음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므로 복음을 표현한다고 해서 반드시 개신교회만 의미하지 않는다. 동방정교회도 천주교회도 스스로 복음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복음주의는 16세기부터 개신교회의 사상으로 정의되었고, 복음주의는 서방기독교의 새로운 전통으로 형성되어 개신교 신학의 뿌리가 되는 사상이다. 따라서 개신교회 교파는 모두 복음, 복음주의를 강조하는 교파들이다. 그러나 현재는 사용하는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되었으며 사용과 의미 확인에 주의해야 하는 단어가 되었다.
18세기 들어서면서, 개신교 내부에서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한 근대 신학이 등장하였다. 개신교 신학의 주류 신학적 흐름으로 근대 신학과 이를 대적한 반동적 보수 신학 계열에서는 자신들만이 복음주의 신학이라고 주장하며, 신학 계열의 구분을 위해 18세기 이전과 다른 용례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세기부터 ‘광의적 (廣義的) 복음주의’ (전통적 복음주의, 근대 신학과 현대 신학 계열을 포함)와 ‘협의적 (狹義的) 복음주의’ (반동적 복음주의로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로 구분됨, 근대 신학에 반동적인 보수신학 계열)가 구분되었다. 16세기 등장한 ‘전통적 복음주의’는 광의적 복음주의 의미로 모든 개신교 전체의 신학사상을 지칭한다. 19세기 이후 영미 지역에서 흔히 사용되는 반동적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의 협의적 복음주의 로 영어권의 보수적 신학사상을 지칭한다.
보수적 신학 계열에서 자신을 ‘복음주의’로 칭하고, 전통적 복음주의인 진보 및 온건 신학 계열을 ‘자유주의’로 칭하는 과정에서 보수적 신학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이러한 보수적 신학을 흔히 ‘근본주의’나 ‘신복음주의’라고 부르며 포괄하는 용어로는 반동적 복음주의라고 한다.
21세기 현재, ‘복음주의’ 단어는 광의적 의미인지 협의적 의미인지 구분해야 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러한 신학 흐름은 20세기 들어서면서 전통적 복음주의인 광의적 복음주의를 따르는 에큐메니칼 지지자들과 개신교 보수주의인 협의적 복음주의 (신복음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를 따르는 로잔 언약 지지자들로 구분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3. 정통주의
일반적으로 정통적인 기독교는 전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고 거의 공식적인 선언들과 기독교 단체들의 신조에 의해 표현된 기독교의 형태를 말하는데 정통주의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신약 성경을 가지고 시작하며 여러 교파로 갈려진 기독교들이 동의하는 정통적 입장의 주요 윤곽들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부활에 관해서이다. 이 부활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하였다. 부활은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메시야라는 증거이다. 또 이 부활은 예수의 영이 악의 영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함축성이 많은 것이며, 예수의 영이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였다는 것 이외에도 하나님이 예수와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율법과 은혜에 관한 부분이다. 예수와 바울은 그 당시 또는 지금까지 우리 가운데 있는 율법주의와 대치하였다. 대신에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말하였다. 이 은혜는 단순한 하나님의 호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며, 우리를 공포와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세 번째는 예수의 인성에 관한 부분이다. 예수는 참 사람이며 참 신이다.
네 번째는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은 세 인격이지만 한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으로써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책임 있었던 분은 하나님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기에 중요한 것이다. 그밖에 우리는 원죄의 교리와 속죄론에 관한 부분을 들수가 있다. 정통주의는 여러 시련과 이단의 도전을 받으면서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하는 데에 필요한 교리를 세우고 지키는 것으로 부터 시작한다.
정통주의에 대한 위협은 세속적 사상의 도전과 교회 안의 사상의 진전의 두 가지의 요소가 있을 수 있겠다. 종교 개혁의 당시에는 문예 부흥이라고 하는 강력한 사상의 흐름이 있었는데 이 문예 부흥은 이성에 신념을 두기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오는 계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아니하였다는데서 문제가 있다. 이어서 18세기에는 합리주의와 계몽주의가 정통주의에 큰 타격을 준다. 이러한 이성주의는 자연 과학을 일으키고 과학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없었던 그 시기에 종교는 과학적으로 불합리하게 보이며 신임을 잃게 만든다. Karl Marx는 보다 나은 지상사회를 만들려는 희망에서 종교를 방해물로 보았으며 현대의 심리학자 Freud는 종교가 세계관에 있어서 뒤떨어지며 과학과 진보의 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니이체는 아예 신은 죽었다고 선언함으로써 정통적 기독교에 타격을 준다. 또 정통주의를 위협한 교회안의 도전은 소위 분리파들이라고 불리우는 재세례파, 조합교회, 퀘이커교, 메노나이트 등을 들수 있다. 이들은 생활실천을 강조하기 때문에 은혜에 의한 구원의 교리에 의심을 가졌으며 궁극적인 권위를 성경에서가 아니라 내적인 빛에 있다고 주장하며 성서와 정통에 대해서 강력한 비평을 한다. 또 소시아니즘의 삼위일체 교리 거부, 원죄의 교리 거부가 있다. 그밖에 자연신교의 하나님에 대한 교리 변질이 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성서 비평이 등장하는데 이 성서 비평의 목적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정확히 알고자하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그들의 결론을 위해서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이유를 찾으려는 것에 있다는 것이 정통주의의 위협의 요소가 되었다. 그밖에 슐라이어마허, 릿츨 등은 과학과 철학을 종교와 독립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기독교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였다.
4.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자유주의에 있는 두 가지의 요소는 우리가 자유주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요성을 가지게 한다.
하나는 자유주의자들이 도출해내는 상이한 결론에 이르게 하는 자유주의만의 방법이 있으며 이것은 사고방식은 변할 수 있으나 신앙의 본질만은 보존되어야 한다고 하는 근본정신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는 권위에만 근거를 둔 종교적인 신앙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모든 질문은 개연성을 가지고 있으며 개방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하는 데에 근본 취지가 있다. 근본주의가 내재론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으면서 초월신론을 강조하나 자유주의는 초월적 하나님보다는 내재적 하나님을 믿으며 이러한 견지에서 진화론자들의 주장이 진리를 발견할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인 것이며 오히려 이 진화론은 하나님이 내재하신다는 것을 옹호하여 준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는 성서를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호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고 고등비평을 통하여 성경속의 예수의 역할에 관하여도 구원자이신 예수보다는 인류의 윤리 선생이자 모범으로 소개한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세 가지의 사상으로 날카롭게 분열되는데 그중이 첫째는 인본주의로 알려진 사람들이며 둘째는 종교의 경험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 그리고 정통적 기독교와 가까운 자유주의의 목사들이 있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인본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의 속에 있으면서 적응하기 힘들어하는데 이것은 신자유주의 사상을 낳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를 기본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개작하려는 노력을 한다. 이들 신자유주의자들은 죄에 대한 전통적인 교리를 수용하고 나서며 인본주의적인 유토피아의 건설의 희망은 환상이라고 결론지으며, 이러한 인류를 구원하기위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5. 신정통주의
역설로 들리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신정통주의란 말은 신학의 발전 경향을 묘사하기 위해서 도움이 되는 말이다. 이들은 자연신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계시 신학의 주장을 이해하는데 근본주의에 대해서는 비평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중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은 인간 사고의 객체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인간을 만나기 위해 오신 주체라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내용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며 인간의 전 생명을 위임하는 신앙의 도약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참된 하나님은 생활속에서 살아있는 요소로 발견되며 인간은 절망의 상황을 인식할 수밖에 없으며 그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얻게 된다고 생각한다.
부르너는 하나님의 객관성과 인간의 주관성 사이에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고 갈등한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사상의 체계를 비판한다. 그리고 만남으로써의 진리라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은 변증법적인 사고이며 성서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주관성은 성령으로 하나됨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는 이성이 하나님의 계시로 자유로워 질수있으며 이것은 기독교의 정당성을 인정하기 위해 사용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Karl Barth
그의 중심사상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으신다는 것이며 그래서 그는 종교와 신앙을 구별하기를 원한다.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고 신앙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는 것이다. 그는 성서위에서만 신학을 세우기에 몸 바쳤으며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라고 언급한다. 인간에 대해서는 인간은 구제받을 수 없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새 생명을 강조한다.
-Reinhold Niebhur – 미국의 신정통주의
그가 사용하는 신화라는 말은 그의 사상의 단편을 이야기 해준다. 하나님에 관한 진리는 우리가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상징을 사용하여야 하는데 그 것이 속이기는 하지만 다른 어떤 형식으로도 적당하게 설명될 수 없는 진리를 가리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상황에 대한 신화적인 진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윤리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며 자유주의의 실수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믿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낙관론과 같이 절망 또한 그는 복음의 적으로 생각하였다.
-Paul Tilich –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의 경계
그의 체계의 중심은 상관관계의 원리에 있다. 이러한 상관관계의 방법은 그가 사용하는 세가지의 용어들에서 분명하여 지는데 그것은 신율, 타율, 자율이라는 세 가지의 단어이다. 그는 인간의 밖에서 인간을 구속하는 종교적 세속적 모양의 법의 부과인 타율과 자기 주장, 자기 영혼의 주인이 되라고 하는 자율 모두를 거부하고 신율을 주장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근거를 둔 보다 높은 법인 동시에 인간 자신에 대한 가장 깊은 법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개신교의 원리는 생의 접경적 상황에 대한 기독교의 답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존재라는 것은 신뢰의 범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대신 우리는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을 본다고 하며 하나님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케 할 수 있는 능력 즉 존재 자체라고 말한다.
-Rudolf Bultman – 급진적 보수주의
비신화화라는 말은 그에 의해서 사용되어진 말이다. 그는 예수의 생활에 대해 역사적 진실성을 증명하려는 것은 노력으로 구원 받으려는 것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면서 참 역사의 개념을 등장시키고 복음서의 예수도 그와 같다고 말한다. 신약 성서의 신화의 목적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 이해를 표현하는 것이며 우리는 신화를 통해서 우리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고 한다. 불트만은 신약의 사실성을 취급함에 있어서 그의 급진적인 접근은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부활에 대해서 보수적인 주장을 하는데 이것은 불트만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조화를 이룬다.
-Dietrich Bonhoeffer – 세속적인 기독교
그의 사상 중에 인상적인 문구는 당연히 값싼 은혜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값이 싼 것처럼 여기고 중요시하지 아니하나 은혜는 자신을 그 댓가로 내어 놓아야 할 만큼 비싼 것이라는 사상이다. 아울러 교회의 일은 경건한 생활을 인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활과 행동을 통해서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 자체는 인간을 종교에서 불러내며 세상으로 뛰어들 것을 이야기 한다고 한다. 성서적인 하나님은 인간은 무신의 세상속에 뛰어들며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부르신다는 이야기와 상통한다.
6. 현대 신학의 방향
최근의 신학은 우리 시대의 현실과 직면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신학의 흐름은 세속적 기독교라는 표어로 나타난다. 콕스의 “교회는 원래 기관이 아니며, 교회는 사람들이다. 즉 더 좋은 세상이 되도록 일하기 위해 실천이 있는 곳으로 갈 준비가 된 사람들의 집합이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윌리암스는 기존 교회의 지역적 교구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 교회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으로 갈수 있는 새로운 구조를 개발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세속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다른 신학적 그룹이 있는데 이 그룹은 사신 신학자들이다. 바하니안은 사이비적 신앙이 하나님을 죽였다고 생각하며 그러나 하나님은 무시되어질 수 있어도 죽음을 당할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알티제르는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이 실지로 죽었으며 교회는 그를 다시 하늘로 올리려고 하는 기존의 기독교 사상은 거부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죽음이 성령의 운동을 구체화 시키셨고 이것은 또 계속적인 진보과정이며 이로 인해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밀튼은 하나님의 죽음은 한 사건이며 사람들은 하나님 없는 삶에 매력을 느끼고 다만 정의와 질서를 위해 예수를 발견하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에게 예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트링펠로는 이 세상에서 승리는 제한됨을 알았지만 그리스도안에서 죽음이 패배되었음을 아는 기독교 낙관주의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섬기도록 세상 속으로 부른 것이며 그것들은 우리들 희망의 근거라고 말한다. 부렌은 성서적인 말씀과 세속주의를 조화하는 가운데 기독교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하나님이란 언어는 세속사람에게 뜻이 없으며 예수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문제와 그의 전염적인 사랑의 현상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것을 은혜라고 부르는 전통적인 신학의 사상을 경험적인 언어로 묘사하려고 하였다.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주장을 하였지만 중요한것은 진리에 이르는 길을 찾기까지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신학의 반대되는 입장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지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 관용의 자세만이 창조적인 토의의 선행조건이 되며 신학하는 길이 된다는 말이다.
부록 : 한국교회의 신학사조
한국 기독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한국적 기독교’라 할 수 있다. 이 말은 한국교회의 토착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세계적으로 괄목할만한 교회성장을 이룩하는 데 ‘부흥회 운동’이 견인차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한국교회의 부흥회 운동이 성경적 부흥회라기보다는 카리스마적 부흥회로 특징 지워진다는 점에 있다. 대한민국의 무속신앙의 토양에서 기독교가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무속적 분위기를 띤 부흥회 열기와 무당의 기복기능을 대신한 부흥사의 쇼맨십이 한국인의 무속정서를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국에 근본주의 신앙이 들어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6.25 이전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 근본주의적 사경회 운동과 1970년대 이후의 복음주의 운동이 한국교회의 샤머니즘적 특성을 상당부분 변화시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오순절 운동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샤머니즘의 분위기와 기복신앙의 풍조는 여전히 한국교회의 지배적 흐름이 되고 있다.
1970년대 이후로 한국교회에 복음주의가 각광을 받게 된 이유는, 오순절적 부흥회 운동에 대한 지성인들의 회의 때문이기도 했지만, 반면 한국교회의 근본주의적 영향이 지나친 율법주의적 성향을 띤데 대한 반발작용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70년대와 80년대에 빌리그래함 전도집회, 엑스플로 74 등 선교회들의 전도운동이 본격화되었고, 지성인들을 중심으로 성경공부운동, 제자운동 등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한국교회의 토양이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여기에다가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세대교체 과정과 미국유학 신진세력들이 교계의 실력자들로 대거 부상하면서 한국교회에 대한 복음주의적 영향이 가일층 가속화되었다. 결국 기독교 샤머니즘의 부흥회적 토양에 복음주의라는 새로운 신학사조가 신진 개혁세력을 중심으로 접목됨으로써 한국교회의 새로운 보수 신학사조로 자리잡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새로운 보수 신학사조로 자리잡고 있는 복음주의란 과연 어떤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미국 복음주의의 뿌리와 한국 신학사조의 뿌리가 만나는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 복음주의가 성경의 무오성 논쟁에 영향을 받아 보수화된 신학사조다. 하지만, 그같은 사실이 아이러니 하게도 한국교계에서는 달리 해석되고 있었다. 이성주의적 신학과 신비주의적 목회의 이원화 현상이 두드러진 한국적 상황에서, 복음주의의 성경에 대한 입장은 신학적으로는 중립주의이면서도 목회현장에선 근본주의적으로 알려져 온 것이다. 더욱이 복음주의란 이름 자체가 마치 가장 복음적인 보수입장인 것처럼 비쳐진 것도 사실이다. 이렇듯 중립적 절충주의 내지 타협주의가 한국에서 성경의 절대무오성을 그대로 믿는 가장 보수적인 사조로 받아들여지게 된 데는 한국 신학사조의 경박성과 인스탄트식 신학교육에 원인이 있기도 하다. 대한민국 신학교육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유럽에서의 유학교육에 의존해 오고 있는데, 문제는 영어권 신학생들도 파악키 어려운 신학사조의 깊은 뿌리를 어학에 약한 한국 유학생들이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자연히 노트 베끼기와 학점 따기로 적당히 학위만 취득한 뒤, 한국에 와서 외국 신학교수들의 여과되지 않은 지식들을 앵무새처럼 전달하는 인스탄트식 교육과정이 반복되면서, 한국 신학계는 뿌리 없는 신학으로 특징 지워지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토착화와 혼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원래의 신학사조와는 전혀 다른 개념의 독특한 한국적 신학사조가 형성되어 왔던 것이다. 특히 칼빈주의 장로교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한국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는 신학자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그나마 다른 신학사조들이 일단 한국에 들어오기만 하면 칼빈주의와 별다른 구분이 없어져 버리는 기현상도 한국적 신학사조의 특징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뿌리 없는 신학사조들이 한국적으로 융합되고 토착화되어 독특한 보수신학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토양에, 오늘날 학문과 지성으로 잘 다듬어진 중도 절충주의 노선의 복음주의 및 개혁주의가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있다. 최근 헤롤드 옥켕가 (풀러신학교 및 고든 콘웰신학교 설립학장) 이후 신복음주의적 노선에 동조하는 거물급 기독교 지도자들의 포용적 태도가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절대적 입장은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가고, 반면 다원주의적 에큐메니즘이 기독교 일반 지성인의 진보적 신 사고로 부상하고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심이 WCC에서 WEF로 이동되고, 복음주의 혹은 신 복음주의가 가장 많은 대중의 지지기반을 확보해 가는 오늘날의 기독교계 현상을 우리는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겠는가? 또한 콘스탄틴 시대의 단일종교 성경이 오늘날 시내사본과 바티칸 사본으로 부활하여, 이 두 사본에서 수많은 번역 성경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성경혼란시대를 가져오고 있고, 성경학자들은 원문비평학의 최후의 목표로서 하나의 에큐메니칼 성경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참고자료
로저 올슨, 현대 신학이란 무엇인가 : 자유주의 신학의 재구성에서 포스트모던 해체까지, IVP, 2021
박만수, 신학사조의 발달과 한국교회의 신학사조, 2019
크리스찬저널, 신학사조를 알아보자, 2007
한국인터넷신학대학, 기독교신학사조
한성기, 현대신학사조, 잠언, 2000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