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세 번째 잡기장 (82) 중에서 _ 11월 2일자
황금분할
‘아름답다’는 말은 대단히 폭넓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자연이나 인물, 예술작품이나 예술활동을 넘어서, 한 사람의 삶의 아름다움, 말의 아름다움, 행위와 인격의 아름다움, 내적, 정신적 아름다움, 그리고 더 나아가 영적, 종교적 아름다움 까지, ‘아름답다’는 말은 대단히 넓은 영역에 걸쳐 적용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사람에 따라 달리 판단할 수 있는 정신적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어놓고, 흔히 말하는 외형적 아름다움, 겉으로 들어난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우라가 판단하는 미의 기준이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해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입니다. 그래서 미에는 절대적 기준이 없다고 합니다. 예컨데, 여성의 아름다움만 하더라도 과거에는 하얀 피부색 만을 기준해서, 세계미인대회에서는 늘 백인 여성들만이 진선미를 차지했었지만, 오늘날은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들도 미스 유니버스에서 당당히 1,2,3등을 합니다. 지난날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둥근 얼굴에 넓은 이마, 초승달 같은 눈썹, 둥근 코, 작은 입술에다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몸매의 여성을 아름답고 복스럽다고 했습니다만, 지금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모나리자나 김홍도, 신윤복 시대의 풍속화 속에 담겨있는 미인상은 절대로 절대적 미의 기준이 못됩니다. 헤어 스타일 하나만해도, 짧았다 길었다, 길었다 짧았다 하면서 춤을 춥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미를 인공적 아름다움 보다 높이 쳐주었습니다. 꾸불꾸불한 시골길, 사람이 손대지 아니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아름다움의 원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와 아기자기하게 가꾸어놓은 인공정원과 기기묘묘하게 다듬어 놓은 위험스런 산등성을 더 아름답게 여깁니다. 자연적 아름다움은 거칠고 다듬어지지 아니한 것이어서 인위적으로 만든 아름다움 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 것입니다. ‘곡선 보다는 직선이 더 어름답다’ ‘아니다. 직선 보다는 곡선이 더 아름답다’ 이어지는 싸움입니다.
화가들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숲을 화폭에 담아냅니다. 물론 그것은 인위적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미술이란 사실 자연미를 인공미로 재탄생 시킨 것이라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미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아무리 뛰어난 화가나 사진작가라 하더라도 사실 그들의 작품이란 자연미의 모방이며, 자연미를 개조, 첨가한 것이기에 인위적 아름더움은 결코 자연적 아름다움을 앞설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포스트 모던 사회에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했던 자연미나 균형미를 거부하고, 파격적 아름다움에 더 큰 점수를 주고 있습니다. 기존 질서를 흩어놓고, 안정감을 뒤집어놓고, 불안한 모습으로 건축물을 꺼꾸로 세우며, 이상야릿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을 그리면서, 이제까지의 전통과 역사에 대하여 ‘No!’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전통적 미의 기준을 옹호하는 이들은 이런 스타일의 파격미 역시도 사실, 그 기본틀은 이미 있었던 ‘격에 대한 파격’이라고 봅니다. ‘격이 있기에 파격도 있다. 격이 없다면 무슨 파격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안정과 균형, 조화와 배려가 기본적으로 모든 아름다움의 원형이라고 옹호합니다.
제 딴에는 스스로를 열린 보수요, 퍽 진보적이라고 착각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이, 기성세대요, 보수적 사고를 지닌 사람임이 확실합니다. 그 이유중 하나는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여전히 자연미와 균형미와 안정미에 더 끌려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균형잡힌 것을 아름답게 여깁니다. 그림, 음악, 건축도 균형잡힌 것을 아름답게 보고, 생각, 말, 글, 행동, 신앙도 균형이 잡혀야 아름답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과는 달리 저는 집안도 테이블, 의자, 액자, 가구들이 질서있게 놓여져야 안정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맛도 단맛, 짠맛, 신맛, 쓴맛이 적당히 조화된 것이 좋다고 여기고, 음악도 찢어지게 높은 소리나 음악인지 잡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노래에는 잘 적응하기가 쉽질 않습니다. 음악도 높고 낮은 소리와 길고 짧은 음이 적당히 균형과 조화를 이룬 것을 고전아라고 여깁니다. 그림도 빛과 어두움, 먼 것과 가까운 것이 잘 배치된 것을 편안하게 보게 되지, 꺼꾸로 보나 뒤집어서 보나, 잘 모를 것 같은 추상화는 어딘가 편하질 않습니다.
오늘날은 포스트 모던 시대입니다. 자연미 보다는 인공미를, 균형미 보다는 파격미를 더 좋아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는 늙고 보수적이고 낡은 세대여서 그럴 것입니다만, 자연미와 균형미를 더 좋아합니다.
‘황금분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황금비율’이라고도 합니다. 영어로는 Golden ratio, Golden cut라고 씁니다. 본래는 수학에서 쓰던 말인데 지금은 일상적으로 널리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알맞은 상태, 즉 길고 짧은 것과 높고 낮은 것, 밝고 어두운 것과 크고 작은 것 등이 적당하고 안정적으로 나누어져 자리잡힌 상태를 말합니다. 가정 아름답고 안정감을 주는 황금 비율, 황금분할은 흔히 1 : 1.618 이라고 합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밋을 비롯한 건축물들과 조각품들은 물론이고, 그후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들과 바흐나 헨델,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작품들도 모두 이 황금분할이 낳은 걸작들이라고 합니다. 미술 역시도 고전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등등 여러시대를 거쳐왔지만 그 바탕에는 늘 황금분할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건축, 음악, 미술 같은 예술의 세계만이 황금분할이 있겠습니까? 인생살이 모두가 다 황금분할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일과 쉼, 말과 행위, 이성과 감성, 가는 것과 멈추는 것,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갖는 것과 버리는 것, 나와 너, 이것과 저것, 남편과 아내의 역할, 대통령과 국민의 일, 여당과 야당의 역할, 목사와 교인들, 부모와 자식, 육체와 정신 – 이 모든 것들 사이에도 황금분할이 필요합니다. 황금 같은 나눔과 보석같은 균형과 조화가 있는 곳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이루어지리라고 봅니다.
Harmony & Balance! 조화와 균형! 참 아름답습니다. 인문학이 추구하는 ‘중용’ Moderation 역시 이 황금분할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내 인생은 모든 게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황금분할 까지는 못되어도, 지나치게 한 쪽으로 치우쳐져서,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모든 게 보기 싫게 되진 않았는가? 이 아침 다시 한번 저를 되돌아 봅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오늘도 아름다운 하루가 되시길 빌며…
○ 황금비 (黃金比, Golden Ratio), 황금분할 (黃金分割)에 대하여
황금비 (黃金比, Golden Ratio) 또는 황금분할 (黃金分割)은 어떠한 선으로 이등분하여 한쪽의 평방을 다른쪽 전체의 면적과 같도록 하는 분할이다. 이 비의 값은 거의 1.61803398….:1 또는 1:0.61803398…로 이것을 황금비라 한다. 황금비를 소수점 이하 50자리까지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1.61803 39887 49894 84820 45868 34365 63811 77203 09179 80576
황금비는 고대 그리스인에 의하여 발견되었고, 이후 유럽에서 가장 조화롭고 아름다운 비례(프로포션)로 간주되었다. 어떤 두 수의 비율이 그 합과 두 수중 큰 수의 비율과 같도록 하는 비율로, 근사값이 약 1.618인 무리수이다. 유클리드가 그 특징을 연구한 이래로 많은 수학자들이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황금비율을 연구해 왔다.
– 수학적 성질
황금비는 기하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수학 상수이다. 특히 오각형에 연관성이 크다. 예를 들어, 정오각형의 한 변의 길이와 대각선의 길이의 비는 황금비이다.
또한 오각형에서 황금비가 발견되는 만큼 오각형과 관련이 있는 도형은 황금비와도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각 면이 정오각형으로 이루어진 정십이면체와 정십이면체의 각 면의 무게중심을 꼭짓점으로 하는 정이십면체는, 모든 꼭짓점을 한 면에 평행한 평면에 정사영시켰을 때 나오는 도형에서 바깥쪽의 꼭짓점들을 지나는 원과 안쪽의 꼭짓점들을 지나는 원의 반지름의 비는 황금비이다. 입체도형의 정사영이 가지는 성질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정십이면체와 정이십면체를 눈으로 볼 때 황금비가 관찰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피보나치 수는 황금비를 포함한다. 또한, 피보나치 수열의 두 수의 비의 극한값은 황금비이다.
– 반론
황금비가 오래전부터 널리 이용되어 왔으며, 자연속에서도 황금비가 자주 보인다는 주장에는 여러 반론이 있다. 먼저, 자연에는 무수한 비율이 존재하는데 우연히 얼마 안되는 황금비와 일치하는 경우를 가지고 과장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알려진 유명 사례중에는 전혀 황금비가 아닌 경우가 많다.
흔히 황금비의 속성이라 일컫는 조화로운 아름다움에 대한 수치적 근사 범위가 연구/결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알려진 황금비의 근사치들은 임의적이고 주관적이라고 보기도 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