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11월 17일, 1·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육군으로 활약한 버나드 몽고메리 (Bernard Law Montgomery, 1887 ~ 1976) 출생
제1대 몽고메리오브알라메인 자작 버나드 로 몽고메리 (Bernard Law Montgomery, 1st Viscount Montgomery of Alamein, KG, GCB, 애칭: 몬티, Monty, 1887년 11월 17일 ~ 1976년 3월 24일)는 영국의 군인이다. 1908년 영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군에 투신하였다. 1910년부터 1914년까지 인도에서 복무하고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아일랜드, 팔레스타인에서 복무하였다. 1931년 대령, 1938년에는 소장으로 진급되어 팔레스타인에서 사단장으로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3사단장을 맡아 프랑스와 연합하여 독일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940년 6월 4일 됭케르크 철수 이후에는 5사단장을 거쳐 1942년에 북아프리카 전선 제8군 사령관을 맡아 에르빈 롬멜 휘하 북아프리카 군단을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격파, 이후 전쟁판도 승기를 마련했다. 1943년 시칠리아 상륙작전, 1944년 6월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영국군 총사령관으로서 활약하여 원수로 진급했다. 종전 후 참모총장을 거쳐 1951년 ~ 1957년까지 나토 (NATO) 군 최고사령관 대리로 있었다.
– 버나드 몽고메리 (Bernard Law Montgomery)
.출생: 1887년 11월 17일, 대영제국 런던 케닝턴
.사망: 1976년 3월 24일 (89세), 잉글랜드 햄프셔 주 알턴
.별명: 몬티
.복무: 영국 영국
.최종 계급: 육군 원수
.근무: 영국 육군
.지휘: 영국 제9보병여단, 영국 제8보병사단, 영국 제3보병사단, 영국 제2군단, 영국 제5군단, 영국 제8군, 영국 제21군집단, 참모총장, 북대서양 조약 기구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부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 아일랜드 독립 전쟁, 1936년 팔레스타인 반란, 제2차 세계 대전 – 북아프리카 전역 (알람 엘 할파 전투,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 엘 아겔리아 전투), 튀니지 전역 (메데닌 전투, 마레스선 전투),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연합군의 이탈리아 침공, 오버로드 작전 (노르망디 상륙, 캉 전투, 굿우드 작전, 코브라 작전, 팔레즈 포위전), 마켓가든 작전, 벌지 전투, 베리터블 작전, 서구 연합군의 독일 침공 (플런더 작전, 바시티 작전)
.서훈 내역: 가터 훈장, 바스 훈장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활약한 영국 육군 원수 몽고메리 (Bernard Law Montgomery, 1st Viscount Montgomery of Alamein, KG, GCB, 애칭: 몬티, Monty, 1887년 11월 17일 ~ 1976년 3월 24일)는 스코틀랜드 기사 겸 몽고메리 백작 콩테 드 가브리엘의 후손으로 양차대전에 참전해 공을 세웠고, 그 공으로 전후 알라메인 자작에 봉해졌다.
○ 생애 및 활동
– 생애 초기
1887년 11월 17일 런던의 케닝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프랑스계 출신으로 성공회 목사의 아들이었으며 아버지가 호주의 태즈메니아 주교로 서품되어 버나드 몽고메리 외 8명의 형제자매들을 포함한 가족들은 몽고메리가 2살때 그곳으로 이주했다. 유년시절 몽고메리는 유복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명문집안 출신이었다. 친할아버지 로버트 몽고메리 (Robert Montgomery)경은 19세기 인도 펀자브 지방의 영국인 공무원이었다. 외할아버지 딘 프레데렉 파라 (Dean Frederic Farrar)는 뛰어난 성직자이자 작가였다.
어린시절 몽고메리는 의지가 굳고 엄격한 성격의 어머니로부터 훈육을 받고 자랐다고 한다. 13살이 되던 무렵에 아버지가 영국으로 돌아가 높은 직위를 얻게 되면서 가족의 생활 형편은 좋아졌고 그는 엘리트 학교인 런던의 세인트폴 학습원의 학생이 되었다. 그는 세인트폴 학습원에 다니는 동안 장래희망을 ‘군인’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20세의 나이로 1907년 샌드허스트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다녔다. 몽고메리는 학업에 열중했지만, 대부분의 사관학교 동기생도들은 영국 최상류층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자신은 ‘아둔한 인물’로 여겨졌었다고 한다. 사관학교 시절 몽고메리는 조그많고 호리호리한 체격에 별난 의견을 가진 생도생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1910년에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에 임관, 1914년까지 인도에서 복무했다.
– 군인생활
.제1차 세계대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때 몽고메리는 프랑스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서부 전선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영국으로 귀환해 훈장을 받으며 대위로 승진하였다. 이후 참모장교로서 프랑스로 돌아와 중령으로 승진했다.
.1917년~1939년까지의 생활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도 몽고메리는 계속 군대에 남았고, 캠벌리의 영국 참모대학에 들어갔다. 그 후에는 제17보병여단의 여단부관이 되었다. 당시 제17여단은 코크에 주둔하면서 아일랜드 공화국군과 싸우고 있었다. 거기서 게릴라들과 싸우면서 암살과 폭탄 테러 등이 난무했음에도 불구하고도 임무를 잘 수행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5년 전에 다녔던 참모대학에서 전술을 가르치는 보직이 주어져 장교들을 가르쳤다. 참모대학에서 재직하는 동안 몽고메리는 보병방어전술에 대한 책을 저술하여 영국군 내에서 어느 정도 반향을 이끌어 냈지만, 당시 영국 육군의 화두는 전차였기 때문에 몽고메리의 저작은 상대적으로 묻혀버렸다.
참모대학에서 가르치는 보직을 끝난 뒤 몽고메리는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로 이동했고, 1937년에는 영국으로 되돌아와 제9보병여단을 지휘하는 준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프랑스 전선: 제2차 세계대전 초반에는 1940년 프랑스 전선에 참가, 사단장으로 있었으며 패주하는 영국군을 지키기 위해 아라스 전투에서 독일군을 저지하는 등의 전과를 올려 어느정도 이름을 알렸다. 연합군이 됭케르크에서 철수한 뒤에는 독일 침공에 대비해 영국 남동부 지역의 책임을 맡음과 동시에 본토에 소속 되어 영국 육군 재건에 참가했다.
북아프리카 전선: 1942년 8월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은 북아프리카 주둔 영국 제8군의 사령관으로 몽고메리를 임명했는데, 이 부대는 얼마 전 독일의 에르빈 롬멜에게 패배해 이집트로 밀려나 있었다. 몽고메리는 부대의 사기를 회복시키고 병사와 장비를 보충해 우세한 전력을 갖추었으며 군생활 내내 전투에 앞서 이같은 절차를 반드시 밟았다.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낸 몽고메리는 1942년 11월 엘 알라마인 전투로 롬멜을 이집트에서 몰아냈고, 계속해서 북아프리카를 가로지르며 독일군을 추격한 끝에 1943년 5월 튀니지에서 최후 항복을 받아냈다.
이탈리아 전선: 1943년 7월 연합군의 성공적인 상륙작전인 시칠리아 침공에 영국군 사령관으로 지휘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휘하의 제8군을 이끌고 이탈리아 동쪽 해안선을 타고 꾸준히 전진을 계속함으로써 1944년 6월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작전을 가능하게 했다.
서부유럽 전선: 미국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 밑에서 일하면서 많은 갈등을 빚기도 했으나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다. 육군 원수로 진급한 뒤에는 영국군과 캐나다 제21군을 이끌고 프랑스 북부,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마침내 1945년 5월 4일 뤼네부르크 황야에서 독일 북부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 종전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라인 강 연안에 주둔한 영국군을 지휘했고 1946 ~ 1948년에는 영국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1948년~1951년 항구적 방위조직인 서유럽동맹 의장으로 일했고 1951 ~ 1958년에는 북대서양 조약기구 (NATO)의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부 (SHAPE) 부사령관을 지냈다. NATO 사령관직을 물러난 뒤에는 전역하여 저술활동을 하다가 1976년 3월 24일 사망했다. ‘회고록’ (Memoirs, 1958)과 ‘지도자가 되는 길’ (The Path to Leadership, 1961) 등 전쟁의 이론과 역사에 관한 여러 편의 책을 썼다.
– 사망
몽고메리 장군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자신의 라이벌들인 롬멜, 패튼과는 달리 89세라는 천수를 누리고 1976년 3월 24일 햄프셔의 저택에서 편안히 사망하였다. 사후 윈저 성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 후 몽고메리 장군의 금고를 열었지만 리볼버 권총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고 한다.
죽기 전 자신의 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는지 이런 말을 남겼다.
“이제 주님께 나아가 내가 알라메인에서 앗아갔던 모든 목숨들에 대한 용서를 빌어야겠지…”
○ 평가와 비판
군사 작전에 신중함을 중시했던 몽고메리는 행동에 옮기기 전에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준비를 했으므로 조지 패튼이나 아이젠하워 등 연합군 사령관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었고, 군사적 쇄신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공격하기 전에는 병사와 장비를 완벽하게 준비해놓았다. 이러한 그의 방침으로 몽고메리는 느리기는 하지만 확고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향과는 반대로 조급한 성격과 거만한 면모가 있었으며, 다른 의견에 대해서는 배척하는 경향이 있었고 지나친 자부심이 심했다는 점 등 비판적인 측면이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 몽고메리의 독단적인 행보로 인해 개시한 1944년 9월 17일부터 9월 25일까지 수행된 마켓가든 작전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는 비판 등이 지적된다.
○ 서훈
1940년 바스 훈장 3등급(CB)
1942년 바스 훈장 2등급(KCB, 작위급 훈장)
1945년 바스 훈장 1등급(GCB, 작위급 훈장)
1946년 자작작위 서임
1946년 가터 훈장
“전쟁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전쟁도 예외는 아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남기는 것은 오로지 파괴와 슬픔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그 의도가 무엇이던,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따라서 나는 히틀러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그의 망상으로 인해 벌어진 전쟁에서 수천만 명의 죄없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 몽고메리가 쓴 전쟁의 역사의 작가 후기 중에서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