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세 번째 잡기장 (80) _ 10월 28일자
10.26 – 안중근 의사 이야기
근대 우리네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10.26은 퍽 의미 깊은 날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그날은 저 개인적으로는 한 가지 더 의미가 더해지는 날이기도 하구요.
저는 아직도 스마트 폰이 그리 익숙하지 못하여 꼭 수첩, 다이어리를 사용하곤 합니다. 대부분의 수첩에는 당연히 그 나라의 공휴일이나 기념일, 방학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종교적 축일들이 프린트되어 있습니다만, 저는 보통 새해 다이어리북을 사게 되면 거기에 우리 식구들이나 가까운 친척들의 생일이나 기념일 같은 기억하고픈 날들을 써놓곤 합니다. 엊그제 10월 26일자 제 수첩 제일 윗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1909.10.26.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한 날.
1972.10.26. 우리 첫 아들 현철이가 태어난 날.
1979.10.26.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한 날.
10월 26일.
거짓된 동양 평화를 물리치고 진정한 평화를 선포한 안중근 의사 의거의 날,
나와 우리 가정에 주신 사랑의 선물이 태어난 날,
유신체제에 저항하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된 경험이 있던 나에게는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온 유신체제가 막을 내린 날, – 10.26은 참 여러가지 깊은 의미를 함께하는 날입니다.
이틀이 지났지만 오늘 아침 저는 그 중에서 안중근 의사를 다시 떠올리며 그의 ‘동양평화론’을 되새겨 봅니다. 우리 인문학친구들에게 있어서 ‘평화’는 우리들의 중심 화두중 앞자리를 차지하는 개념이며, 우리 거개의 간절한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아침, 만주 하얼빈역에서 당시 초대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숨지게 함으로, 항일 독립운동의 첫 불길을 당긴 애국자요, 순국열사이며, 또한 동시대 위대한 정치사상가 이기도 합니다. 저는 안 의사의 이토 저격을 흔히 일본에서 사용하는 정치용어인 ‘암살’이라는 개념으로 쓰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안 의사는 이토 저격 당시 ‘대한의병군’ 참모 중장인 현역 군인으로써 작전계획에 따라 적군을 사살한 전투행위를 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안 의사는 이토 저격 사살 후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3번 외친 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수감된 다음, 이듬해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아침 10시 향연 32세로 처형되었습니다.
거사 이후 사형집행 까지 만 5개월 동안 그분이 감옥에서 쓴 글과 유묵들과 재판기록들은 퍽 많이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칸트의 ‘영구평화론’ (Zum ewigen Freiden. Ein philosophischer Entwurf)을 비롯하여 평화에 대한 논의를 끊임없이 이어갑니다만, 이젠 안중근 의사의 미완성 유고인 ‘동양평화론’에 대하여 좀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안 의사는 당시 옥중에서 집필중이던 그의 ‘동양평화론’을 끝내기 위해서 사형집행을 한달만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일제는 이를 받아드리지 않고 그를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안 의사는 일찍이 토마스 (Thomas)라는 이름으로 영세를 받은 독실한 가톨릭신자였으나, 이토 저격후 조선교구는 그의 신자 자격을 박탈하고, 사형을 앞에 두고 요청했던 종부성사도 거절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훗날 좀더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만 일제 치하에서 한국 가톨릭교회와 성공회가 얼마나, 어떻게 친일적 행위를 해왔나 하는 데 대해서는 오늘의 친일청산문제와 더불어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에서, 하얼빈의거의 성격을 ‘동양의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는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된 주권국가로써, 서로의 국민, 영토, 주권을 인정하고 존중해야하며, 이에 바탕하여 서로 단결하고 상부상조하여 서구열강의 식민지 확장을 막아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첫째, 하얼빈 의거는 ‘동양의 평화 건설을 위한 전쟁’이다.
둘째, 한.중.일, 동양 3국은, 서로 독립된 주권국가로써 존중되어야하고 서로 침략, 수탈, 전쟁을 해서는 않된다.
셋째, 동양제국을 점령하여 식민지화 하려는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을 막아내기 위해서 한.중.일 3국은 하나로 뭉쳐 단결해야하고 상부상조해야한다.
넷째, 이토 히로부미는 서구 식민주의를 반대하는듯 하면서 실제로는 그들 제국주의를 그대로 따라하는 위선적이며 거짓된 자요,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동양평화론’은 위장된 거짓 평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일체의 침략과 전쟁을 거부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서구열강의 식민지 정책을 반대하고 비난합니다. 일본이라는 나라 역시 식민지를 확장하려는 제국주의 국가, 즉 ‘일제’라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백여년 전 안중근 의사가 주창했던 평화론을 좀 더 국제적 논제로 확대, 발전 시켜, 군사적 침략만이 아니라, 경제적 횡포까지도 거부하는 참된 평화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안중근 의사가 남긴 글과 유묵 중에서 추린 10개를 추수린 것입니다.
1)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침이 군인의 본분이다. (위국헌신 군인본분)
2) 나는 늘 나라의 안위를 위해 걱정하며 애를 태운다. (국가안위 노심초사)
3) 가난하되 아첨하지 아니하고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아야한다. (빈이무첨 부이무교)
4) 장부는 죽을지라도 그 마음이 무쇠와 같아야하고, 의사는 위태로운 일을 당할지라도 그 기운이 구름과 같도다. (장부수사심여철 의사임위기사운)
5) 남루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자와는 더불어 생각과 뜻을 나눌 수 없다. (차오의오식자 부족여식)
6) 눈보라가 친 연후에야 잣나무가 이울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세한연후 지송백지부조)
7) 백번 참는 집안에는 태평과 화목이 찾아온다. (백인당중유태화)
8)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아니하면 입안에는 가시가 돋는 법이다. (일일불독서 구중생형극)
9) 황금 백만냥이 있어도 자식 하나 잘 가르침만 못하다. (황금백만량 불여일교자)
10) 사람이 멀리 보지 못하면 큰 일을 이루기는 어려운 법이다. (인무원여 난성대업)
Carpe diem !
Bonam fortunam !
오늘도 좋은하루되시길 바라며…
○ 안중근 의사의 ‘동양 평화론’ (東洋 平和論)
동양 평화론 (東洋 平和論)은 안중근 (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1910년 3월 중국의 뤼순 감옥에서 집필한 미완성의 글이다.
동양대세사묘현유지남아기안면화국미성유강개정략불개진가련(東洋大勢思杳玄有志男兒豈安眠和局未成猶慷慨政略不改眞可憐)은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로 칠언절구의 자작시를 쓴 것이다. (숭실대학교 박물관 소장 유목)
“암담한 동양의 대세를 생각해보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기개있는 남아가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가 없구나, 게다가 아직 동양 평화의 시국을 이루지 못한 것이 더욱 개탄스럽기만 한데, 이미 야욕에 눈이 멀어 정략 즉 침략정책을 버리지 못하는 일본이 오히려 불쌍하다”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이것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소장의 유묵에서 “동양을 보존하기를 바란다면 우선 침략정책을 버려야 한다. 때가 지나고 기회를 잃으면 후회한들 무엇하랴!” (욕보동양선개정략시과실기추회하급, 欲保東洋先改政略時過失機追悔何及)라는 내용을 담아, 유묵에는 일본 정책의 잘못을 지적하여 고칠 것을 촉구하였으며, 일본인 집정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과 연관된 글귀이다.
중국 안위성 선성현에서 만들어진 품질이 우수한 선지(宣紙)에 2행 16자를 쓰고, 왼쪽에 “경술삼월 (庚戌三月) 여순옥중 (旅順獄中) 대한국인 (大韓國人) 안중근서 (安重根書)”라고 묵으로 쓴 글씨와 왼손 장인 (掌印, 손바닥으로 찍은 도장)이 찍혀 있다.
제2차세계대전의 주역,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함께 세계침략전쟁으로 변질돼가는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발판으로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던 1910년 경술년 (庚戌年) 당시, 노골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침략정책의 잘못을 지적하여 고칠 것을 촉구하고 일본인 집정자들에게 야욕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던 것이다.
이들 내용과 관련하여 안 의사는 옥중에서 ‘안응칠 역사’와 ‘동양 평화론’을 지었다. 그중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는 완성되었지만, 논문형식의 논설 ‘동양 평화론’은 “서문”과 “전감 1”만 지어졌고 나머지 “현상 2”, “복선 3”, “문답”은 목차만 제시된 채 미완성으로 남았다. 당시 안 의사가 이를 집필하기 위해 사형집행 날짜를 한 달쯤 늦추도록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에게 청하여 그의 약속을 받았으나 결국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동양 평화론’의 서문에서 안 의사는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지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 황인종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는 의론이 한국·청국 두 나라 사람의 마음속에 용솟음쳐 위ㆍ아래가 한 몸이 되어 스스로 여러 사람 앞에 나설 수밖에 없음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 (若政略不改 逼迫日甚則 不得已寧亡於異族 不忍受辱於同種 議論湧出於韓淸兩國人之肺腑 上下一體 自爲白人之前驅 明若觀火之勢矣. 然則…)이라 하여 일제의 침략정책을 경고하여 안중근 의사의 생각과 뜻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세계정세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논리가 엿보이는 내용이다.
– 안중근 (安重根)
.출생: 1879년 9월 2일, 조선 황해도 해주부
.사망: 1910년 3월 26일 (30세), 만저우 지방 관동주 펑톈 성 료준
.본관: 순흥 (順興)
.종교: 유교(성리학) → 천주교(세례명: 토마스) → 신자 자격 박탈(종부성사는 받음)
.정당: 무소속
.부모: 안태훈(부), 배천 조씨 부인(모)
.배우자: 김아려
.자녀: 안문생(장남), 안준생(차남)
.복무: 대한의군 (1907년 ~ 1909년), 최종계급은 대한의군 참모중장
.근무: 의병 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 아령지구사령관
.지휘: 대한의군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사령관
.서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개요 및 저술 목적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기다리며 뤼순 감옥에서 저술한 미완의 저서로, 서론과 목차만 쓴 상태에서 사형이 집행되었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했다.
안중근 의사는 중국 뤼순 감옥에서 1910년 2∼3월 동안 ‘동양평화론’을 집필한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후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언도받았다. 안 의사는 형의 집행만 남은 상태에서 이를 완성할 때까지 처형을 연기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원래 집필을 구상했던 서·전감·현상·복선·문답 가운데 서문과 전감 일부만 작성한 채 미완성으로 남았다. 한문으로 쓴 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A4용지 7∼8장 분량이다.
비록 ‘동양 평화론’은 완성되지 못했지만,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검찰의 신문 및 재판과정에서 한 공술내용, 그가 남긴 글들을 보면 동양 평화론을 통해 “동양의 대세관계와 평화정략의 의견”을 개진하려고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안 의사는 한·중·일 3국 간의 상설기구인 동양평화회의를 뤼순에 조직해 기타 아시아 국가가 참여하는 회의로 발전시키고, 동북아 3국 공동은행 설립, 동북아 3국 공동평화군 창설 등의 구체적인 구상도 밝혔다. 이는 유럽연합 (EU) 형태의 한·중·일 평화체제 구상론으로 100년이라는 시간을 앞선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당시부터 자신의 거사가 동양의 평화를 위한 행위였음을 역설해 왔고, 동양평화론을 통해 이러한 그의 사상과 동북아 정세에 관한 식견, 미래구상을 담고자 했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14일에 사형을 언도받은 후, 항소하지 않는 대신 동양평화론의 집필을 위한 시간을 허락해 달라고 판사에게 요청했고, 판사도 이에 동의했다. 안중근은 이 말을 믿고서, 자신의 자서전인 ‘안응칠역사’를 먼저 옥중에서 쓰고서, 이후에야 ‘동양평화론’ 저술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은 안 의사가 자국의 전직 수상이자 정계 거물인 이토를 살해했다는 점, 그리고 오래 살려둘 수록 한반도 내부의 항일 여론과 세계적인 동정 여론이 고조될 가능성을 의식하여, 최대한 빨리 그의 사형 집행을 앞당기려 했다. 결국 안중근 의사는 사형이 언도된 지 40여일 후인 3월 26일에 처형되었고, 이때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의 초반 일부분만을 겨우 쓸 수 있었을 뿐이었다.
– 구성
1.서론 2.전감(前鑑)에 이어 그 다음 차례는 3. 현상(現狀) 4. 복선(伏線) 5. 문답(問答)으로 이뤄지는 구성으로 이미 머리속에 전문에 대한 구상을 마쳤음을 알 수 있다.
전해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문
대저 합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에 분명히 정해져 있는 이치이다. 지금 세계는 동서(東西)로 나뉘어져 있고 인종도 각각 달라 서로 경쟁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실용기계 연구에 농업이나 상업보다 더욱 열중하고 있다. 그러나, 새 발명인 전기포(電氣砲 : 기관총), 비행선(飛行船), 침수정(浸水艇 : 잠수함)은 모두 사람을 상하게 하고 사물(事物)을 해치는 기계이다.
청년들을 훈련시켜 전쟁터로 몰아넣어 수많은 귀중한 생명들을 희생물(犧牲物 : 하늘과 땅이나 사당의 신에게 제사지낼 때 쓰는 짐승, 소, 돼지, 양 따위)처럼 버려, 피가 냇물을 이루고, 고기가 질펀히 널려짐이 날마다 그치질 않는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마음이거늘 밝은 세계에 이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면 뼈가 시리고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 근본을 따져보면 예로부터 동양민족은 다만 문학(文學)에만 힘쓰고 제 나라만 조심해 지켰을 뿐이지 도무지 한치의 유럽 땅도 침입해 뺏지 않았다는, 오대주(5大洲) 위의 사람이나 짐승, 초목까지 다 알고 있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런데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가까이 수백 년 이래로 도덕(道德)을 까맣게 잊고 날로 무력을 일삼으며 경쟁하는 마음을 양성해서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다. 그 중 러시아가 더욱 심하다. 그 폭행과 잔인한 해악이 서구(西歐)나 동아(東亞)에 어느 곳이고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악이 차고 죄가 넘쳐 신(神)과 사람이 다같이 성낸 까닭에 하늘이 한 매듭을 짓기 위해 동해 가운데 조그만 섬나라인 일본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강대국인 러시아를 만주대륙에서 한 주먹에 때려눕히게 하였다. 누가 능히 이런 일을 헤아렸겠는가. 이것은 하늘에 순응하고 땅의 배려를 얻은 것이며 사람의 정에 응하는 이치이다.
당시 만일 한(韓), 청(淸) 두 나라 국민이 상하가 일치해서 전날의 원수를 갚고자 해서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를 도왔다면 큰 승리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나 어찌 그것을 예상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한, 청 두 나라 국민은 이와 같이 행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일본군대를 환영하고 그들을 위해 물건을 운반하고, 도로를 닦고, 정탐하는 등 일의 수고로움을 잊고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거기에는 두 가지 큰 사유가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가 개전할 때, 일본천황이 선전포고하는 글에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공고히 한다’라는 했다. 이와 같은 대의(大義)가 청천백일(靑天白日)의 빛보다 더 밝았기 대문에 한 · 청 인사는 지혜로운 이나 어리석은 이를 막론하고 일치동심해서 복종했음이 그 하나이다. 또한 일본과 러시아의 다툼이 황백인종(黃白人種)의 경쟁이라 할 수 있으므로 지난날의 원수졌던 심정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고 도리어 큰 하나의 인종 사랑 무리(愛種黨)를 이루었으니 이도 또한 인정의 순리라 가히 합리적인 이유의 다른 하나이다.
통쾌하도다! 장하도다! 수백 년 동안 행악하던 백인종의 선봉을 북소리 한 번에 크게 부수었다. 가히 천고의 희한한 일이며 만방이 기념할 자취이다. 당시 한국과 청국 두 나라의 뜻있는 이들이 기약없이 함께 기뻐해 마지않은 것은 일본의 정략(政略)이나 일 헤쳐나감이 동서양 천지가 개벽한 뒤로 가장 뛰어난 대사업이며 시원스런 일로 스스로 헤아렸기 때문이었다.
슬프다! 천만 번 의외로 승리하고 개선한 후로 가장 가깝고 가장 친하며 어질고 약한 같은 인종인 한국을 억압하여 조약을 맺고, 만주의 창춘(長春) 이남인 한국을 조차(祖借)를 빙자하여 점거하였다. 세계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의심이 홀연히 일어나서 일본의 위대한 명성(名聲)과 정대한 공훈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만행을 일삼는 러시아보다 더 못된 나라로 보이게 되었다.
슬프다. 용과 호랑이의 위세로서 어찌 뱀이나 고양이 같은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와 같이 좋은 기회를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안타깝고 통탄할 일이로다.
동양 평화와 한국 독립에 대한 문제는 이미 세계 모든 나라의 사람들 이목에 드러나 금석(金石)처럼 믿게 되었고 한 · 청 두 나라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음에랴! 이와 같은 사상은 비록 천신의 능력으로도 소멸시키기 어려울 것이거늘 하물며 한두 사람의 지모(智謨)로 어찌 말살할 수 있겠는가.
지금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뻗쳐오는(西勢東漸) 환난을 동양 사람이 일치 단결해서 극력 방어함이 최상책이라는 것은 비록 어린아이일지라도 극히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일본은 이러한 순리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인 이웃나라를 치고 우의(友誼)를 끊어 스스로 방휼의 형세(蚌鷸之勢)[2]를 만들어 어부(漁夫)를 기다리는 듯 하는가. 한, 청 양국인의 소망은 크게 깨져 버리고 말았다.
만약 일본이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진다면 부득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에게 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소리가 한 · 청 두 나라 사람의 폐부(肺腑)에서 용솟음쳐서 상하 일체가 되어 스스로 백인(白人)의 앞잡이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 동양의 수억 황인종 가운데 수많은 뜻있는 인사와 정의로운 사나이가 어찌 수수방관(袖手傍觀)하고 앉아서 동양 전체가 까맣게 타죽는 참상을 기다리기만 할 것이며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그래서 동양 평화를 위한 의전(義戰)을 하얼빈에서 개전하고, 담판(談判)하는 자리를 뤼쑨구(旅順口)로 정했으며, 이어 동양평화 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는 바이다. 여러분의 눈으로 깊이 살펴보아 주기 바란다. – 1910년 경술 2월 대한국인 안중근 뤼쑨 옥중에서 쓰다
.동양평화를 위한 5대 구상
비록 완성되기 전에 사형이 집행되어 본인이 담고자 했던 내용을 전하지는 못했지만, 안중근은 사형 직전에 일본측 간수와의 회견에서, 동양평화를 위한 자신의 5대 구상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그가 동양평화론을 통해 주장하려던 구체적 실천 방안을 유추할 수 있다.
뤼순을 중립지대로 하여 대한제국, 일본제국, 청 3국의 협력을 위한 기구를 설치할 것.
대한제국, 일본제국, 청 3국의 공동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사용할 것.
대한제국, 일본제국, 청 3국이 연합군을 창설하여 서양 제국주의 침략에 공동으로 맞설 것.
대한제국과 청은 일본제국의 지도 아래 경제 개발에 힘쓸 것.
대한제국, 일본제국, 청 3국의 황제가 로마 교황의 중재 아래, 상호 주권을 존중하고 평화적 관계를 맺을 것.
– 평가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통해 제시한 내용들은 오늘날 자유주의 국제정치이론에서 제시하는 초국가적 통합, 협력 이론을 상당 부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구체적으로는 1) 국제기구를 통한 다국적 협력, 2) 경제통합, 3) 집단안보 등이다. 그것도 UN이나 EU같은 국제기구가 나오기 수십년 전에 말이다. 이 점에서 ‘동양평화론’이 갖는 선구적 의미는 더욱 돋보인다.
뿐만 아니라 안중근은 당시 일본이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서, 서양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이렇게만 보면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당시 일본 제국주의와 별 차이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일본의 동양 지배, 패권”이 아닌 “한중일 3국의 주권 존중, 협력”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명백한 차이를 보인다.
요컨대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타도”가 아닌, “동양 평화를 위한 선도 세력으로서 일본의 책임있는 자세”를 요구한 것이었고, 이토를 사살한 것도 일본 전체에 대한 증오보다는, 이토로 대표되는 일본 내 제국주의 세력을 겨냥한 것이었던 셈이다. 이는 안중근 의사가 단순한 반일, 극단적 민족주의 인사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범아시아 주의자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