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7년 10월 29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하인리히 3세 (Heinrich III, 1016·7 ~ 1056) 출생
하인리히 3세 (독: Heinrich III, 1016년 10월 28일 / 1017년 10월 29일 ~ 1056년 10월 5일)는 독일 잘리어 왕가의 두 번째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이다.
콘라트 2세의 맏아들로 1026년부터 바이에른의 대공 (하인리히 6세)이자 슈바벤의 공작 (하인리히 1세)였다.
아버지 콘라트 2세를 괴롭히던 케른텐의 콘라트 2세의 어린 아들 쿠노를 제치고 하인리히 3세가 케른텐 공작위도 물려받았다.
콘라트 2세에 의해 1028년 공동 독일 국왕이자 로마인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 하인리히 3세 (Heinrich III)
.출생: 1017년 10월 28일
.사망: 1056년 10월 5일, 보트펠트
.매장지: 슈파이어 대성당
.가문: 잘리어
.부모: 부) 신성 로마 황제 콘라트 2세, 모) 기젤라 폰 슈바벤
.배우자: 군힐다, 아네스
* 신성 로마 황제
.재위: 1046년 12월 25일 – 1056년 10월 5일
.대관식: 1046년 12월 2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전임: 콘라트 2세 / 후임: 하인리히 4세
* 독일의 왕 (공식적 로마인의 왕)
.재위: 1028년 4월 14일 – 1056년 10월 5일
.대관식: 1028년 4월 14일, 아헨 대성당
.전임: 콘라트 2세 / 후임: 하인리히 4세
* 이탈리아의 왕
.재위: 1039년 6월 4일 – 1056년 10월 5일
.전임: 콘라트 2세 / 후임: 하인리히 4세
* 부르군트의 왕
.재위: 1039년 6월 4일 ~ 1056년 10월 5일
.전임: 콘라트 2세 / 후임: 하인리히 4세
신성 로마 제국의 17대 황제이자 잘리어 왕조의 2대 황제이다.
짧은 10년의 치세 동안 헝가리와 보헤미안을 복속시켰으며 3명의 대립교황을 추방시키고 교황을 세워 교회를 지배, 이후에도 3명의 교황을 순차적으로 교체하며 황제의 교황 지배권이 절정에 달했다.
○ 생애 및 활동
하인리히 3세의 첫 가정교사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주교 브루노였다. 1029년에 브루노가 죽자 프라이징의 주교 앵겔베르트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1033년 16살의 나이에 하인리히는 성년이 되었고 앵겔베르트는 그의 서비스로 보상했다.
1035년 케른텐의 공작 아달베로가 콘라트 2세에 의해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앵겔베르트는 하인리히에게 이 부당함을 거부하고, 왕이 했던 것처럼 하지 않는다면 퇴위를 하지 않고 제후들이 하인리히를 왕으로 선출한다고 설득했다.
그는 아버지가 했던 행동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앵겔베르트와 약속했다. 그리고 콘라트 2세는 하인리히가 태도를 바꿔 많은 시도를 하자 다음에 충격을 받아 실신했다. 회복된 다음에 콘라트는 아들에게 무릎을 꿇고 정밀하게 합의했다. 결국 앵겔베르트는 황제에게 처벌을 받게 되었다.
1036년 하인리히 3세는 크누트 대왕의 손녀 덴마크의 군힐다와 결혼했다.
초기에 콘라트 2세는 크누트와 북독일의 일부 지방을 크누트가 다스리고 그들의 자식들을 결혼시키자고 합의했다.
두 사람은 법정 나이에서 가장 빠를 때에 나이메헨에서 결혼했다.
1038년에 하인리히는 아버지의 원조로 이탈리아로 갔는데 돌아올 때 군힐다가 아드리아 해안에서 죽었다.
1039년에 역시 아버지 콘라트 2세도 사망해 하인리히 3세가 황제가 되었다.
1039년 부친 콘라트 2세가 사망하자 독일왕으로 즉위하였다.
대관식때 프랑크족의 왕이 아닌 ‘로마인의 왕’ 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한 군주이다.
1046년 로마교회의 개혁파 성직자들의 요청을 받아 이를 수락한후 이탈리아로 원정을 가서 3명의 교황을 한꺼번에 폐위 시키고 자신을 수행한 독일인 성직자를 클레멘스 2세로 하여 새로운 교황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교황을 통해 로마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며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 후에도 3명의 교황을 순차적으로 지명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임명권을 행사하며 로마 교황을 완전히 자기 지배 아래 두었다.
하인리히 3세가 세운 4명의 교황은 모두 독일인 성직자였으며 1046년이후 10년간 로마교회를 장악하고 교회개혁을 지원하였다.
1053년 바이에른의 벨프, 하 로렌의 고드프리 3세 등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진압하고 3살이 된 아들 하인리히 4세를 독일 왕으로 임명하여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1056년 6살된 아들 하인리히 4세를 남겨두고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이후 왕비였던 아그네스가 모후로서 섭정을 하였지만 그녀는 정치적으로 무능하여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하인리히 3세의 아들인 하인리히 4세가 1065년 친정을 시작하지만 선친보다는 무능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서임권 투쟁을 벌이다가 1077년에 카노사의 굴욕을 겪은 왕으로 유명세를 떨치게된다.
카노사의 굴욕은 황제와 교황간에 권력다툼에서 교황권이 우위를 차지하는 전환기에 벌어진 매우 드라마틱한 사건이였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