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6년 1월 5일, 잉글랜드의 참회왕 에드워드 (Edward the Confessor, 1003 ~ 1066) 타계
에드워드 참회왕 (Edward the Confessor, 라: Eduardus Confessor, 1003년 ~ 1066년 1월 5일)은 잉글랜드 왕국 웨식스 왕조의 왕이다.
– 에아드웨아르드 / 에드워드 참회왕 (Ēadƿeard Andettere / Edward the Confessor)
.출생: 1003년,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셔
.사망: 1066년 1월 5일 (63세 가량), 잉글랜드 왕국 런던
.매장지: 웨스트민스터 사원
.이름: 에드워드 (Edward)
.별칭: 참회왕 에드워드 (Edward the Confessor)
.국적: 잉글랜드 왕국
.왕조: 웨식스 왕조
.부모: 부) 애설레드 2세, 모) 노르망디의 엠마
.배우자: 웨식스의 이디스
.종교: 로마 가톨릭 교회
*앵글인의 왕
.재위: 1042년 6월 8일 ~ 1066년 1월 5일
.대관식: 1043년 4월 3일, 윈체스터 대성당
.전임: 하르다크누트 / 후임: 고드윈의 아들 해럴드
매우 두터운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치세 중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지었으며 1161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3세로 부터 시성 (諡聖)되었다.
웨스트민스터, 고아, 방랑자들의 주보성인이다.
○ 생애 및 활동
1013년 당시 덴마크가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왕좌를 차지하자, 그는 어머니의 고향인 노르망디 지방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는데 그의 두터운 신앙심을 당시 어머니로부터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1042년 그의 이부 (異父) 형제 하레크누드가 죽자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는 큰 키에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 은빛을 띈 금발을 가지고 있었다.
왕위에는 올랐으나 그는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자연히 정권은 강력한 권력을 차지한 귀족들에 의하여 농단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위를 지킬 수 있던 것은 경건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전 국민적인 지지덕분이었다.
1051년 에드워드는 약 10여년간 정권을 쥐고 있던 그의 장인인 고드윈 일파를 몰아내었으나, 당시 공을 세운 노르만인들을 중용하여 당시 주류였던 앵글로 색슨 인들에게 반감을 사게 되었다. 결국 1053년 고드윈이 죽자 그의 아들인 웨식스 백 (伯) 해럴드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정권을 잡게 된다.
1065년 노섬브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에드워드는 그 다음해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 어린 시절
옥스포드셔의 아이슬립이란 곳에서 애설레드 2세의 7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만 에드워드의 생모 노르망디의 엠마는 부왕의 두 번째 아내였으며 생모에게는 첫 번째 아들이다.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며 1003년~1005년 사이의 어느 해로 추정된다. 그의 어린 시절은 바이킹의 노략질과 덴마크의 잉글랜드 침략이 성행하던 시기였다. 덴마크 왕 스벤 트베스케그와 그의 아들 크누트 대왕이 덴마크 군을 이끌고 침략했고, 후일 스벤은 결국 잉글랜드 정복에 성공하게 된다. 이에 에드워드의 일가는 노르망디로 피신하기도 한다. 에드워드의 아버지 애셀레드 왕은 스벤 왕과 피터지게 싸웠으며, 두 왕 모두 죽자 각자의 아들끼리 대를 이어 싸웠다.
13~15세쯤 되었을 1016년에 스벤의 아들인 크누트와 싸우던 에드워드의 이복 형이 죽었고 크누트도 왕위에 올랐기에, 에드워드는 다시 피난길에 오른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인 노르망디의 엠마는 얼마 후에 크누트와 결혼한다. 다시 말해, 자기 남편의 적의 아들이자 자신의 이복 자식의 적과 결혼한 것이다. 전 남편인 애셀레드 왕과 결혼할 때처럼 이번에도 두 번째 아내로서 결혼했다. 같은 해, 크누트는 마지막 남은 에드워드의 이복 형을 처형했고, 따라서 에드워드는 앵글로색슨 족으로는 유일한 왕위 후계자로 남게 되었다.
- 왕이 되다
피난길에 오른 에드워드는 25년간 망명 생활을 했다. 주로 노르망디에서 피신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 동안의 에드워드는 시골 촌 구석의 귀족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유일한 왕위 후계자였지만 그 자신조차도 잉글랜드 왕이 될 것을 기대하지 않았고, 그의 친모 (크누트 대왕의 아내)도 그를 별로 지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크누트 대왕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고 그를 왕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하레크누드로서 에드워드와는 이부동생이다.
1035년에 크누트 대왕이 죽고 하레크누드가 덴마크 왕에 올랐다. 그런데, 크누트 대왕이 해럴드 1세를 포함한 전처의 자식을 서자로 격하하여 갈등의 불씨를 남기는 바람에 결국 사후 분쟁이 일어났고, 해럴드는 잉글랜드로 가 섭정이라는 형태로 잉글랜드를 사실상 점령한다. 1037년 해럴드 1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3년 후에 급사하자, 상황이 좀 호전된 하레크누드가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불과 1년 뒤인 1041년, 병이 심각하여 곧 죽을 것을 깨달은 그는 에드워드를 잉글랜드로 불러 들였고, 하레크누드는 1년 뒤인 1042년에 세상을 떠났다.
하레크누드가 죽자,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한 권력자였던 고드윈 백작은 에드워드를 왕으로 지지했다. 덴마크 출신 하레크누드의 지배를 받아온 잉글랜드 국민들은 앵글로색슨 족인 에드워드를 왕으로 열렬히 지지했고, 1043년 4월 3일, 에드워드는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그를 후원했던 세 명의 백작의 권세가 매우 강했기에 그의 실권은 약했으나, 그는 야심차게 강한 군주로서의 자리를 되찾아 나갔다. 역사가들은 집권 초기의 그를 야심차고 강력한 인물로 평가한다.
1045년 에드워드는 고드윈의 딸 에디스와 결혼하였고 고드윈과는 사위-장인 관계가 되었다. 이 무렵의 고드윈 일가는 잉글랜드 남부 전부를 지배하고 있어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집권기에 노르만족, 프랑스인들을 주로 고용했기에 인기를 잃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 정도는 아닌 듯하다. 다만 몇몇 외국인들을 집에 머무르게 했고, 그들이 좋은 평을 듣지 못한 건 맞다.
- 고드윈과의 승부
에드워드와 고드윈 가문, 누가 이기든 언젠가는 한번 부딪칠 사이다. 강력한 군주의 위치를 다시 확립한 에드워드와 당대 제일의 권력가인 고드윈 가문은 권력에 대한 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에드워드에게는 고드윈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다. 1036년에 에드워드의 동생 앨프리드는 잉글랜드로 돌아 왔다가 웨식스의 백작 고드윈에게 붙잡혔고, 고드윈은 그를 해럴드 1세에게 넘기기 위해 배에 태워 보냈다. 배 위에서 고드윈의 부하들은 앨프리드에게 만행을 저질렀다. 벌겋게 달아오른 꼬챙이로 앨프리드의 눈을 찔러 장님으로 만든 것이다. 얼마 뒤, 앨프리드는 그 상처가 덧나 사망했다. 이 일로 인해 에드워드는 고드윈에 대한 원한을 품게 되었다.
결국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1051년 9월, 에드워드에게 그의 프랑스인 처남이 찾아왔다. 그런데 처남의 부하들이 시민들과 싸움질을 하는 일이 생겼고 확대됐다.
에드워드를 따르던 레오프릭 백작과 시워드 백작은 병력을 소집했고, 고드윈 가의 두 아들도 자신들의 병력을 소집해서 대치했다. 그리고 양 측은 오랜 대치중에 고드윈은 저항을 포기하고 그의 아들들과 함께 플랜더스와 아일랜드로 도망쳤다. 고드윈을 내쫓은 에드워드는 내친 김에 자신의 아내인 고드윈의 딸도 수도원으로 쫓아버렸다.
1년 후, 고드윈과 아들들은 상당한 지지를 받으며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전을 두려워 한 레오프릭 백작과 시워드 백작도 이번에는 에드워드 왕 편을 들지 않았다. 에드워드 왕은 별 수 없었고, 그들의 백작 지위를 다시 인정해 줘야 했다. 그가 쫓아보냈던 아내도 다시 불러와야 했다
- 사망
1050년대 중반 정도에 에드워드 왕은 고드윈의 세력을 견제할 정도의 세력을 키우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고드윈 가문도 세를 불려나갔다. 고드윈은 1053년에 죽었지만 해럴드를 비롯한 그의 아들들의 세력이 커졌고 1057년이 되어서는 머시아를 뺀 잉글랜드 전역이 이들 손에 들어간다. 이 무렵부터 에드워드는 정치를 점차 멀리하고 매일 사냥이나 다니게 된다.
1065년 해럴드의 동생인 토스티그가 백작으로 있던 노섬브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토스티그는 반란을 진압하고 싶었지만, 협상가로 파견된 그의 형 해럴드는 도리어 그를 비난했다. 심지어 반란군을 달래기 위해 그를 백작에서 내쫓고 모카 백작을 대신 임명하기도 했다. 토스티그는 반란을 진압해 달라고 왕 앞에서 요청했으나 해럴드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그의 편을 들지 않았고, 토스티그를 쫓아냄으로서 반란을 무마하는 쪽으로 분위기는 돌아갔다. 토스티그는 왕가와 친했으나, 에드워드 왕은 분위기를 거스르지 못했고, 마지 못해 토스티그의 추방을 명했다.
1066년 1월 5일, 에드워드 왕은 사망했고, 다음 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되었다. 문제는 누가 왕위를 이을 것인가였다. 에드워드 왕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후계자가 명확치 않았다. 그리고 그는 누구를 후계로 할지 명확히 지정하지도 않았다. 그가 살아생전 누구를 후계자로 생각했었는지는 아직도 불명확하며, 당연히 당대에도 논란이 많았다. 노르만 공국의 윌리엄 1세는 자신에게 넘기기로 이미 약속했다고 주장했고, 해럴드 2세는 왕이 죽기 직전에 자신에게 왕국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정통성으로 본다면 가장 적임은 애설레드 2세의 증손자인 에드거 애설링이었다. 실제로 그는 나중에 벌어진 헤이스팅스 전투 직후 잠시 동안이나마 왕으로 지명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당시 에드워드 왕의 관심 밖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세력 또한 없어서 왕위와는 멀어졌다.
어쨌거나 고드윈 가의 해럴드는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에드워드 왕이 죽은 다음 날, 즉 왕이 매장된 바로 그날이었다.
- 후계 : 해럴드 2세와 윌리엄 1세의 전쟁
에드워드 왕이 죽자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해럴드가 주요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해럴드 2세로 즉위한다.
하지만 당시 노르망디 공이었던 윌리엄이 이에 반기를 들고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의 군대를 물리치고 새로 ‘정복왕’ 윌리엄 1세로 왕좌에 앉게된다.
○ 웨스트민스터 사원
노르망디 망명 도중 그는 하느님에게 자신이 다시 왕위를 회복하게 된다면 로마를 순례할 것을 맹세하였다고 한다. 그는 즉위 이후 서약을 지키기 위하여 로마 순례를 추진하였는데 당시 정국이 안정되지 못했음을 들어 대부분의 귀족들이 이를 반대하게 되자 당시 교황 레오 9세에게 조언을 구하였다. 교황은 에드워드에게 로마 순례 비용으로 수도원을 짓고 빈민을 구제하는 것을 권하였고, 왕은 이에 따라 성당 부속으로 있던 수도원을 증축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