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7년 9월 9일, 잉글랜드의 국왕 · 노르만 왕조의 시조 ‘정복왕’ 윌리엄 1세 (William I, 1028? ~ 1087) 타계
윌리엄 1세 (William I, 1028년경 ~ 1087년 9월 9일)는 잉글랜드의 국왕이다. 노르만 왕조의 시조. 별명은 정복왕 (the Conqueror), 사생아왕 (the Bastard). 노르망디 공작으로서는 기욤 2세 (Guillaume II)이다.
1035년 부친 로베르 사후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다. 그는 노르망디 공국을 서프랑크 왕국 (프랑스)과 대등할 정도로 발전시켰다. 1066년 도버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 침략을 개시하여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잉글랜드 왕 해럴드 2세에게 크게 승리하였다.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점령함에 따라 잉글랜드의 왕조는 노르만 왕조가 되었다. 1087년 9월 9일에 사망하였다.

– 윌리엄 1세 (William the Conqueror)
.별명: 정복왕 (the Conqueror), 사생아왕 (the Bastard)
.출생: 1028년경, 노르망디 공국 팔레즈
.사망: 1087년 9월 9일, 노르망디 공국 루앙
.매장지: 노르망디 캉 남자 수도원 생테티엔 성당
.왕조: 노르만
.가문: 노르망디
.부모: 부) 장려공 로베르 1세, 모) 에를레바 드 팔레즈
.배우자: 마틸드 판 플란데런
.자녀: 로베르 2세, 리처드, 윌리엄 2세, 헨리 1세 외 6명
* 잉글랜드 국왕
.재위: 1066년 12월 25일 ~ 1087년 9월 9일
.대관식: 1066년 12월 25일
.전임: 고드윈의 아들 해럴드 / 후임: 윌리엄 루퍼스
* 노르망디 공작
.재위: 1035년 7월 3일 ~ 1087년 9월 9일
.전임: 장려공 로베르 1세 / 후임: 로베르 2세
* 군사 경력
.참전: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 헤이스팅스 전투

○ 생애 및 활동
– 유년기
노르망디 공작이자 ‘악마공’ 로베르 1세와 그의 내연녀였던 평민 출신 에를르바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정식 혼인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았기에 사생아였고 따라서 사생아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 에를르바는 출신마저 미천했고 기본적으로 사생아에 대해 굉장히 엄격했던 시대에 로베르 1세가 이런 사생아를 후계자로 삼은 이유는 로베르 1세의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로베르 1세가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귀환하는 도중에 갑자기 병을 얻어 죽게 되자 7살 나이로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다. 예루살렘 순례를 떠나기 전에 사생아였던 윌리엄을 후계자로 지정해 놓았던 덕분에 공작을 계승할 수 있었으나, 사생아라는 지위 때문에 끊임없이 친척들의 견제와 맞서야 했다. 로베르 1세는 생전 봉신들에게 윌리엄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게 했지만 사후 그의 친척들에 의한 단순한 조롱에서 암살 시도까지 괴롭힘은 그치지 않았다. 한번은 그에게 대항하는 성을 포위했을 때 성벽에 무두질할 가죽이 내걸려 그의 미천한 외가 혈통을 비웃는 일도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의 충신들 및 어머니의 보호와 헌신으로 초기 위기를 극복했고 이는 그에게 강한 의지력을 심어 주었다. 15살에 기사로 인정받은 뒤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 결혼
1050년 경에 20대 초반이 된 윌리엄 1세는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입지를 다지기 위해, 대리인을 보내 옆동네인 플란데런의 공녀이자 당시 19세쯤 된 마틸다 판 플란데런과 결혼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틸다가 거부하자 화가 난 윌리엄은 플란데런으로 달려갔다.
윌리엄이 마틸다를 보자마자 구타한다. 자신의 딸이 미천한 사생아 공작에게 두들겨 맞는 광경을 본 마틸다의 아버지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5세 (1012 ~ 1067)는 당연히 화가 나서 윌리엄 1세에게 칼을 뽑으려 했다. 그런데 다름아닌 마틸다가 아버지의 앞을 가로막으며 윌리엄가 결혼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윌리엄 1세와 마틸다는 4년 뒤에 결혼하게 된다. 이후 윌리엄 1세는 결혼 후에 정부를 뒀다는 기록도 없고 사생아도 낳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버지와 레오 9세 교황의 결사 반대에도 결혼을 강행했고 영국 왕이 교황한테 대드는 건 혈통이 그랬던 거다 결국 교황의 승인도 받아냈다. 교황이 반대한 이유는 윌리엄과 마틸다가 먼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마틸다의 어머니인 프랑스의 아델은 프랑스의 경건왕 또는 현명왕이라 불린 로베르 2세의 딸로 프랑스의 공주였는데, 노르망디 공작가의 리샤르 3세 (윌리엄의 백부)와 결혼했다가 리샤르 3세가 결혼 6개월 만에 죽자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와 재혼하여 그와의 사이에서 딸 마틸다를 낳았다. 또한 윌리엄 1세의 아버지 악마공 로베르 1세의 어머니는 부르고뉴 공작 코난 1세의 딸 유디트였고, 유디트의 외할아버지는 앙주 백작 조프리 1세였는데 조프리 1세는 선대 앙주 백작 폴크 2세의 아들이었다. 폴크 2세는 조프리 1세 외에도 슬하에 딸 아델하이드가 있었고, 이 아델하이드가 낳은 딸이 프로방스의 콘스탄스였는데 콘스탄스는 다시 경건왕 리샤르 2세의 딸 프랑스의 아델을 낳았다. 즉, 윌리엄의 할머니와 마틸다의 어머니가 같은 외증조할아버지를 둔 외가쪽 외삼종자매 (6촌) 지간이었으며, 따라서 윌리엄과 마틸다의 촌수는 외가에 외가가 겹친 11촌 당고모와 조카에 해당한다.
당대 교황인 레오 9세는 그레고리오 개혁 이전에 교회를 쇄신하고자 노력한 독일인 교황이였다. 레오 9세는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혼인 문제를 엄격히 금하고 전통적 도덕상을 되돌리려한 원칙파 개혁 교황이었고, 그런 그의 눈에 원칙적으로 금지된 근친상간에 해당하는 윌리엄과 마틸다의 결혼은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이 결혼을 지지한 것은 루앙 대주교이자 리샤르 3세와 로베르 1세의 남동생이었던 윌리엄의 숙부인 모지였으므로, 교황의 반대마저 무시하고 모지가 윌리엄과 마틸다의 결혼식을 주관한다. 이 구설수를 무마하고자 이들 부부는 성당 두 채를 지어 헌납했다. 그럼에도 레오 9세는 죽을 때까지 반대했고 이후 여러 교황도 반대했으나 결국 1059년 교황인 니콜라오스 2세가 인정했다.
이후 윌리엄 1세와 마틸다는 아들 네 명과 최소 다섯 이상의 딸을 비롯한 많은 자식을 낳았다.

– 젊은 노르망디 공작, 잉글랜드 침공
주변에 적이 많던 윌리엄은 프랑스 왕 앙리 1세의 후원 덕분에 노르망디 공작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윌리엄이 노르망디 공작이 되고나서 노르망디 공국의 힘이 점점 강해지자 위협을 느낀 앙리 1세는 이때부터 1054년과 1056년에 두 차례에 걸쳐 노르망디를 침공했지만 실패했다. 젊은 윌리엄은 다혈질에 잔혹했지만 앙리 1세가 침공할 무렵에는 이미 노르망디의 반란자들을 모두 처단하고 지배를 공고히 했다. 그래서 앙리 1세의 침공에도 무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중요 지역을 병합했다. 앙리 1세는 노르망디의 윌리엄이 프랑스의 왕위까지 노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는데 윌리엄이 실제 노렸던 것은 잉글랜드의 왕위였다. 1066년 윌리엄은 후계자 문제로 혼란을 겪었던 잉글랜드 왕위 문제에 개입했다.
당시 즉위한 해럴드 2세는 선대 왕 에드워드의 처남이라 견제하는 말이 나오긴 했지만 의회를 통해 적법한 절차로 선출된 왕이었다. 문제는 이 해럴드 2세가 예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배를 타고 나갔다가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의 포로가 됐으며 풀려나려고 한동안 봉신 비슷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걸 빌미로 삼아 윌리엄 1세는 해럴드 2세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죽은 에드워드 왕도 생전에 왕위를 약속했다는 주장을 하면서 침공을 개시했다.
당시 잉글랜드는 내부로는 데인 계열과 앵글로색슨 계열 간 대결 구도가 확연했고 외부로는 교황에게 견제받으면서 노르웨이에 침공받기까지 하던 상황이라 그야말로 최악의 카운터를 맞은 셈이었다. 여기에 윌리엄을 적대하던 앙리 1세가 1060년 죽고 친분이 있었던 필리프 1세가 뒤를 이었으며 교황 알렉산데르 2세도 잉글랜드의 캔터베리 대주교와 대립하면서 윌리엄을 적극 후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용병을 모으고 함대를 건조하여 막 침공하려 하자 심한 북풍이 불어 배가 뜰 수 없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 사이에 노르웨이의 하랄 3세가 먼저 잉글랜드를 침공했다가 해럴드 2세가 이를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물리쳐 유력한 경쟁자 하나는 저절로 줄고 주적은 힘이 빠져 버리는 행운으로 다가왔다. 더 극적인 것은 해럴드 2세가 싸움을 마치자 바람은 기다렸다는 듯 바뀌었고 덕분에 윌리엄은 사흘 만에 잉글랜드에 간단히 상륙할 수 있었다.

– 잉글랜드 국왕
결국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2세는 전사하고 윌리엄이 승리하면서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 왕은 노르망디 공작을 겸하면서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되었다.
한국인의 눈으로 보기엔 이상할 수도 있지만, 이는 봉건제도의 특성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왕으로서는 프랑스의 신하가 아니지만 노르망디 공작위는 잉글랜드 왕위와는 별개로 프랑스의 봉신이기 때문에 노르망디 공작으로서는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된 것이다.
즉, 평소에는 독립 왕국인 잉글랜드 왕국의 왕이지만 노르망디 공국과 관련된 것으로는 프랑스 카페 왕조의 봉신이었으므로 세금을 냈다.
또한 이때부터 런던이 본격적으로 잉글랜드의 수도로써 기능하기 시작한다.
물론 알프레드 대왕이 데인 족의 침략을 격퇴한 후로 런던을 상당히 중요한 도시로 키웠기에 이미 인구 수로는 전의 수도인 윈체스터를 추월해 있었고, 참회왕 에드워드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건설하여 종교적 중심지로도 기능했었지만, 왕의 공식적인 궁전은 아직 윈체스터에 있었던 것이, 1066년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런던으로 개선할 때 웨스트민스터로 정궁 (正宮)을 공식적으로 옮기면서 웨스트민스터가 행정 수도로 기능하기 시작했고, 이웃 도시 런던은 상업 중심지로서 번영하게 되었다.
잉글랜드를 정복한 윌리엄은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토지를 조사하였는데 이때 만들어진 토지 조사 문서가 둠즈데이 북이다.
이 둠즈데이 북 전후의 잉글랜드 귀족 체계가 크게 흔들리는데, 그전에는 윌리엄도 앵글로색슨계 잉글랜드인이 귀족 신분으로 있는 것을 허락하고 토지도 두었지만 1086년 이후 상황은 급격히 변하여 오직 2명의 앵글로색슨계 귀족만이 지위를 유지하였고 4000여 명의 귀족들이 토지를 몰수당하였다.
그리고 이 4,000여 명이 소유했던 영지들은 200명이 채 안 되는 노르만계 (그리고 약간의 브르타뉴인과 플랜더스인) 남작들이 하사받았다.
종교적인 측면에선 이러한 반잉글랜드적 (anti-english policy) 정책이 더 심했는데, 1070년이 되자마자 윌리엄은 잉글랜드인 주교들을 면직시켰고 그 후로 한 명도 다시 임명하지 않았다.

– 북부원정 및 대학살
하지만 윌리엄의 재위는 순탄치 않았는데 재위 중 반란이 끊이지 않아 큰 반란만 해도 5번이나 일어났을 정도였다.
윌리엄은 남잉글랜드를 정복한 후, 북부에서 반항하는 앵글로색슨족 및 데인족에 대한 토벌 및 학살을 벌였다.
이 당시 잉글랜드는 6세기에 북독일로부터 이주해 원주민인 켈트족을 몰아내고 정착한 앵글로색슨족, 그리고 8세기부터 스칸디나비아에서 몰려온 데인족들의 소국들이 느슨하게 연합해 있는 왕국이었는데, 왕이 바뀌었다고 해서 순순히 따르진 않았고 당연히 반항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윌리엄은 군사를 이끌고 자신의 지배에 따르지 않는 북부를 초토화했는데, 이를 북부 원정 (Harrying of the North)이라고 한다.
이 참혹함은 여러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기준에서도 너무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어떤 학자에 의하면 10만 명 이상을 학살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외에도 1069년에 덴마크의 스벤 2세가 군대를 이끌고 침공해와 그에 맞서 싸워야 했다.
다만 실제로는 싸우지 않고 거금을 주어 물러나게 한다.
– 말년
영국 내의 상황이 안정되자 윌리엄 1세는 프랑스로 눈을 돌려 프랑스 내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윌리엄 1세의 영토확장으로 인해 프랑스의 왕 필리프 1세와 프랑스 귀족들이 경계하게 되어 충돌은 불가피해져 나중에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큰아들 로베르와 불화가 심해졌고 급기야 노르망디를 탐낸 로베르가 필리프 1세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다 진압당하기도 했다.

1087년 7월 프랑스의 망트를 공격하다 병을 얻어, 혹은 부상을 입고 사망한다. 사망한 뒤에 신하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캉에 있는 생 테티엔 성당에 묻혔다.
그를 성당에 안장시키려고 할 때 선약자가 나타나 권리를 주장하는 바람에 현장에서 60실링을 지불한 후에야 매장할 수 있었다.
거기다 윌리엄 1세는 말년에 대단히 거구가 되었고 매장이 늦어져 그의 시신은 부패되고 부풀어 올랐다.
그에게 맞는 관이 없어서 사람들은 왕의 시신을 소가죽 안에 넣고 꿰맨 뒤에 사이즈를 크게 맞춘 석관에 안장한다.
그의 무덤은 16세기 종교전쟁 때와 18세기 프랑스 혁명 때 약탈되어 지금은 관 속에 넓적다리뼈 하나만 남아있다.
○ 가계도
부 : 로베르 1세
모 : 에를르바 (아를레트)
여동생 : 샹파뉴 백작부인
아내 : 마틸드 판 플란데런 (바우더베인 5세 판 플란데런 백작의 딸)
아들 : 로베르 2세 – 노르망디 공작
아들 : 리샤르
아들 : 윌리엄 2세 – 잉글랜드 국왕
딸 : 아델라 – 블루아 백작 부인
딸 : 콩스탕스 – 브르타뉴 공작 부인
아들 : 헨리 1세 – 잉글랜드 국왕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