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3년 3월 5일, 플랜태저넷 왕가의 첫 번째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헨리 2세’ (Henry II, 1133 ~ 1189) 출생
헨리 2세 (Henry II, 1133년 3월 5일 – 1189년 7월 6일)은 플랜태저넷 왕가의 첫 번째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이다 (재위 1154년 – 1189년). 앙주 백작, 메인 백작, 노르망디 공작, 아키텐 공작, 낭트 백작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헨리 1세의 딸로 영국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여영주에 올랐던 마틸다이고 아버지는 프랑스의 명문 귀족 앙주 백작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이다.

– 헨리 2세 (Henry II)
.출생: 1133년 3월 5일, 프랑스 르망
.사망: 1189년 7월 6일 (56세), 프랑스 시농
.매장지: 프랑스 퐁트브로 수도원
.왕조: 플랜태저넷
.가문: 앙주
.부모: 부) 제프리 5세 당주 백작, 모) 신성로마황후 마틸다
.배우자: 엘레오노르 다키텐 여공작
.자녀: 요크 대주교 제프리, 푸아티에 백작 윌리엄 9세, 청년왕 헨리, 작센 공작부인 마틸다,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1세, 브르타뉴 공작 제프리 2세, 카스티야 왕비 엘레오노르, 시칠리아 왕비 조안, 잉글랜드 국왕 존, 제3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롱게스피
* 잉글랜드 국왕
.재위: 1154년 10월 25일 ~ 1189년 7월 6일
.대관식: 1154년 12월 19일
.전임: 스티븐 / 후임: 리처드 1세
* 노르망디 공작, 앙주 백작, 멘 백작
.재위: 1151년 ~ 1189년
.전임: 제프리 5세 / 후임: 리처드 1세
* 아키텐 공작
.재위: 1152년 ~ 1189년
.전임: 엘레오노르 / 후임: 엘레오노르, 리처드 1세
* 푸아티에 백작
.재위: 1152년 ~ 1153년
.전임: 엘레오노르 / 후임: 윌리엄 9세
* 아일랜드 영주
.재위: 1171년 ~ 1177년
.전임: (신설) / 후임: 존

외할아버지 헨리 1세 시대의 영토와 권리를 수복하고자 정력 있고 필요할 때는 무자비하게 통치하기도 했다. 급한 성격에 포악스러웠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판단하기도 했다. 분쟁 시 혼란한 틈을 타 반기를 든 영주들을 굴복시키고, 반대세력을 평정하는 등의 노력으로 그는 웨일즈에서 주도권을 재구축했으며, 앙주, 멘느, 뚜렌느에 대상으로 한 전면에 걸친 통치권을 획득했다. 아일랜드 정복에도 힘썼다.
1151년 루이 7세의 전처였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여공 (女公)과 혼인하면서 그녀가 소유한 영지인 광대한 아키텐을 자신의 영지로서 차지한다.
프랑스에서 영토 문제로 루이 7세와 수십년간 다투었는데 숱한 평화 회담과 많은 조약을 체결했는데도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으면서도 헨리 2세는 브르타뉴를 차지해 동으로는 중부 프랑스, 남으로는 툴루즈까지 지배권을 확장하는 일변,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서 다양한 사법 체계 개혁을 추진해 미래 잉글랜드 법을 정초했고 왕실 재정과 통화를 재정비하였다. 잉글랜드 교회와 꽤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교회에 대한 왕권 지배 문제와 조직 개편 문제로 친구였던 캔터베리의 대주교 토머스 베켓과 1160년대 내내 계속 반목했고 버켓은 1170년에 결국 살해됐다.
엘레오노르와의 사이에서 많은 아이가 태어났으나 만년에 들어서면서 복잡한 자신의 영토를 대상으로 한 상속 문제로 아들들과 갈등했고 여기에 아들들을 대상으로 한 엘레오노르의 충동과 루이 7세와 그 사람의 아들인 필리프 2세의 이간 정책까지 겹치면서 크게 고통받았다. 1173년 장자인 ‘젊은 헨리’가 불만을 품고 반역하자 동생인 리처드와 제프리와 엘레오노르까지 합류했고 프랑스, 스코틀랜드, 플랑드르, 불로뉴까지 헨리 2세에게 대항했다. 1173년에서 1174년까지 대반란은 헨리 2세의 영토 전역으로 비화했으나 헨리 2세의 군사력과 지역 영주들이 도운 덕분에 진압되었다. 승리한 헨리 2세는 관용을 베풀면서 자신의 위세를 높이려고 했으나 승리는 일시였고 아들들은 여전히 반항했다. 1183년 제프리는 재반란했으나 실패하고 죽었다.
막내 아들 존을 아꼈던 헨리 2세는 존에게 물려줄 영지를 구하고자 아일랜드를 침공할 정도였으나 존은 그 정도로는 불만족했다. 아버지인 헨리 2세가 존에게 왕위를 물려줄까 우려한 리차드는 필리프 2세와 연합하여 1189년에 흥융했고 헨리 2세가 아끼던 존마저 리처드에게 가담했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헨리 2세는 앙주로 은퇴하였고 그곳에서 죽었다.

○ 생애 및 활동
– 출생과 초기 생활
1133년 3월 5일 헨리는 프랑스의 르망에서 마틸다 여제와 그의 두번째 남편, 앙주 백작 제프리 공정백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앙주 백작위는 10세기에 형성되었으며 앙주가문 지배자가 수 세기간 프랑스 전체에 걸쳐 신중한 결혼들과 정치적 동맹을 통해 그들의 영향력과 권력을 확장하고자 시도했다. 이론상으로, 백작령은 프랑스 왕에 부합하였으나, 앙주에 대한 왕실의 힘은 11세기에 걸쳐 악화되었고 백작령은 크게 자치적이게 되었다.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5세와 처음으로 결혼한 헨리의 어머니는 잉글랜드 왕이자 노르망디 공작인 헨리 1세의 장녀였다. 그녀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두 곳 모두에서 대규모의 토지를 소유한 전통적인 노르만의 강력한 지배계급으로 태어났다. 1135년 그녀의 아버지의 사망 후, 마틸다는 영국 왕위에 대한 주장을 희망했으나 대신에 그녀의 사촌 블루아의 스티븐이 왕위에 오르고 노르망디 공작으로 인정되었고 이는 그들 경쟁 지원자들에 사이에 내전을 초래했다. 제프리는 노르망디 공작위를 공격할 혼란을 기회로 활용했으나 잉글랜드 갈등에 직접적인 역할은 하지 않았다. 그는 마틸다와 그녀의 이복형제 글로스터의 로버트 에게 이 일을 맡겼으며, 빅토리아 시기 사학자들에 의해 “무정부 상태”라고 불린 이 전쟁은 질질 끌어지고 교착상태로 악화되었다.
헨리는 아마 그의 어머니의 가정에서 그의 어린 시절을 지냈으며, 1130년대 말 마틸다와 노르망디로 동행했다. 헨리의 유년시절 후기, 아마도 7살 쯔음,땐 앙주에서 지냈으며 그는 거기서 그 시대의 문법학자라고 알려진 상트의 피에르에게 교육받았다. 1142년 말, 제프리는 9살먹은 헨리를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동행해 남서부 잉글랜드에 있는 앙주가문의 스티븐 반대세력의 중심인 브리스톨로 보낼 결심을 했다. 친척의 집에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은 그 시기의 귀족들에게 흔하긴 했으나, 헨리를 잉글랜드로 보내는 것은 제프리가 잉글랜드의 전쟁에 참여를 거부한 비난에 대한 정치적 이익이 있었다. 1년정도, 헨리는 로버트의 자식들중 한 명인 우스터의 로저와 함께 살았고 마스터 매튜에게 교육받았다. 로버트의 가정은 그들의 교육과 학식으로 유명했다. 브리스톨의 성 아구스틴의 수사신부들 역시 헨리의 교육에 도움을 주었고, 그는 나중에 그들을 애착과 함께 기억했다. 헨리는 1143년 혹은 1144년 앙주로 돌아왔고, 다른 유명한 교수인 콘슈의 귀욤 아래서 교육을 재개했다.
헨리는 1147년 그가 14살 때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의 직속 가족과 작은 수의 용병을 갖고, 그는 노르망디를 떠나 잉글랜드에 도착하고, 윌트셔를 공격했다. 처음에 일어난 극심한 공포에도 불구하고, 원정은 조금 성공했다. 그리고 헨리는 그의 군대에게 지불할 돈이 없으며 그러므로 노르망디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의 엄마도, 그의 삼촌도 그에게 지원을 준비하지 않았으며, 이는 첫 원정에 대해 그들이 만족하지 않았음을 암시했다. 놀랍게도, 대신에 헨리는 미해결된 임금을 지불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헨리가 고상하게 은퇴할 수 있게 한 스티븐에게 돌아갔다. 스티븐이 그렇게 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가능성있는 설명 중 하나는, 친족 구성원에 대한 그의 공손함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전쟁을 어떻게 평화적으로 끝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헨리와의 관계 구축의 길로 보았다. 1149년 헨리는 다시끔 개입했다. 내전 중 헨리의 전쟁이라 불리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 때, 헨리는 북부 스코틀랜드의 데이비스 1세, 대부분의 북서부 잉글랜드를 지배한 강력한 지역 통치자인 헨리의 종조부 체스터의 라널프와 동맹을 맺고자 했다. 이 동맹 아래에서, 헨리와 라널프는 아마도 올 스코틀랜드의 도움과 함께 요크를 공격하기로 동의했다. 이 계획된 전투는 북쪽의 요크를 향한 스티븐의 신속한 행군 후 붕괴되었고 헨리는 노르망디로 돌아갔다.

– 노르망디 공작과 앙주 백작 시절
1150년 은퇴한 마틸다에게 노르망디 공작 칭호를 상속받고 1151년 아버지 조프루아가 죽자 앙주 백작을 계승하였다.
1152년 노르망디 공작에 오르고서 얼마되지 않아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전처였던 아키텐 여공 엘레오노르와 혼인하면서 엘레오노르에게 막대한 지참금으로서 푸아티에, 기엔, 가스코뉴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혼인에서 자식 여덟 명 (윌리엄, 헨리, 리처드, 제프리, 존, 마틸다, 엘리오노르, 조안)을 슬하에 두었다.
– 잉글랜드 국왕
1153년 군사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잉글랜드 왕 스티븐의 둘째 서자에게 부르고뉴 공작직을 넘기는 조건으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확약받는 윌링포드 조약을 체결하였다. 당년 말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북안 영지를 탈취했지만 잉글랜드 왕 스티븐이 묵인하였다.
1154년 스티븐 왕이 죽자 그 사람의 서자에게 부르고뉴 공작직을 넘기고 플랜태저넷 왕가 출신의 잉글랜드 왕으로서 즉위한 일변, 프랑스왕 왕 루이 7세와 싸워서 차지한 브르타뉴를 합해 노르망디 주변 서부 프랑스의 영지를 차지했다.
젊은 왕은 외모상 위엄이 부족했다. 작은 키에 땅딸막한 체격이었고 수척한 외모였다. 얼굴은 주근깨가 난 마른 얼굴에 홀쭉해 보였고 짧게 자른 황갈색 머리카락과 회색 눈이었으며, 옷을 아무렇게나 입어서 맵씨도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뚱보가 되었으나 처음에 그 사람은 침착하고 냉정하게 처신하여 인품은 주목받았고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었으나 갈수록 성난 짐승처럼 억제할 수 없는 성미를 드러내기도 했고 때로는 냉혹하고 무자비한 성정을 노출하기도 했다.

– 영토 확장
1171년 아일랜드를 병합하고 1173년에는 스코틀랜드전에서 이겨 잉글랜드 국력을 신장하게 했다.
– 행정·사법 제도 개혁
즉위 직후 세출 파악에 나서 재정 정비와 조세제도를 꼼꼼히 기록하고 지출 수납 통제를 세심히 신경 썼다. 1166년, 헨리 2세는 배심제를 도입하였으나 왕권 강화를 중시했던 그 사람은 교회 사법권을 두고 캔터베리의 대주교 토머스 베켓과 반목했다.
1166년 말 배심제 정비에 매진하기 시작해 성직자와 귀족들의 범죄행위와 월권을 단속하겠다고 선포했다. 이전 1164년에도 헨리 2세는 성직자의 범죄를 교회 법원뿐만 아니라 세속 법원에서도 재판 가능한 클라렌던 헌장을 제정하려 했다. 헌장에는 교회에서 제멋대로 재판하는, 교회 재판권 금지 조항을 추가하였다. 베켓이 이끄는 주교단은 이 법이 일사부재리 원칙을 위반한다면서 격렬히 반대했고 시골 백성을 배려한 순회재판소 확충과 문자 교육을 장려했다.
1170년 12월 29일, 기사 네 명이 헨리 2세의 환심을 살 속셈으로 캔터베리에서 베켓 대주교를 죽였다. 전설을 좇으면, 기사 네 명은 헨리 2세가 분노하여 “이 몹쓸 대주교를 없앨 사람이 없단 말인가!” 하는 고함을 듣고서 베켓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인망이 높던 토머스 베켓이 교회당에서 비참하게 살해당하자 헨리 2세는 비난에 시달렸고 헨리 2세 자신도 정치시상 이유로 대립하였으나 깊이 존경하던 베켓이 살해당해서 괴로워했다. 1173년 베켓은 시성되었고 익년 1174년 헨리 2세는 토머스 베켓의 무덤 앞에서 참회했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용병과 민병으로 구성된 국왕 친위대를 창설하여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 아들들과 갈등
만년에 헨리 2세는 왕위를 막내 아들 존에게 물려주려 했지만, 그것을 안 셋째 리처드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내통하여 아버지인 헨리 2세를 공격했고 산으로 쫓겨나간 헨리 2세는 막내 존에게 도와달라고 하려고 했으나 존은 형인 리처드의 편이 되었다.
막내 아들 존을 아꼈던 헨리 2세는 존에게 물려줄 영지를 구하고자 아일랜드를 침공할 정도였으나 존은 그 정도로는 불만족했다. 아버지가 존에게 양위를 우려한 리차드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연합해 1189년에 흥융했고 헨리가 아끼던 존마저 리처드에게 가담하자 충격받은 헨리 2세는 1189년 결국 죽었다.

○ 업적
그는 결혼과 군사, 두 가지를 통해 잉글랜드 영토 확장에 기여했다. 19세에 결혼을 하게 되는데 아내는 10살 연상 프랑스왕 루이 7세의 전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그녀가 프랑스 왕비였던 시절, 남편과 쌓인 불화와 프랑스와 고향 아키텐의 정치적 갈등 등으로 결혼이 파탄에 이르렀다. 시대가 시대라 이혼이 아니라 교황에게 로비해서 혼인무효 판결을 받았는데 엘레오노르와 프랑스 루이 7세는 10촌이라 근친상간이라며 혼인이 무효 처리가 되었는데 몇 달 후 결혼한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는 더 가까운 8촌이었다.
이미 결혼 전부터 왕비와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그녀와의 사이에서 8명의 자식을 두었고, 아들이 다섯이 있었는데 그중 왕이 된 청년왕 헨리, 리처드 1세, 존 왕이 유명하다.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프랑스 왕보다 영지가 넓다는 아키텐 공작의 상속녀였는데, 헨리 2세와 재혼하면서 푸아티에, 아키텐 지방이 영국으로 넘어왔다. 여기에 기존에 가지고 있던 노르망디, 앙주, 잉글랜드 지방까지 합치니 영국+프랑스 서쪽 절반에 달하는 거대한 영토의 군주가 되었다. 그리고 엘레오노르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유럽 왕가에서 혼인관계를 맺어 시칠리아, 독일, 카스티야의 영지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말콤 1세에게 충성서약을 받아내고 노섬벌랜드 등의 영토를 되찾았다.
그리고 내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유능한 재판관 토머스 베켓 (Thomas Becket)을 등용해 행정과 사법 제도를 정비해 봉건 군주국에서 관료군주국으로 잉글랜드를 탈바꿈시키게 한다. 그러나 충신이었던 토머스 베켓은 헨리 2세가 주선해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자 그와 대립한다. 결국 헨리 2세는 부하 넷을 잉글랜드로 보내 토마스 베켓을 쳐죽여 복수했다. 하지만 교황청에서 토마스 베켓을 성인으로 추서해 큰 낭패를 보고 만다.
○ 기타
재위 기간은 34년이었으나 잉글랜드에서 지낸 기간은 통틀어 14년뿐이고 1170년에서 1183년까지는 아들인 청년왕 헨리에게 실권을 이양한 상태였으나 1183년 청년 헨리가 죽자 잉글랜드를 오가면서 정무를 다시 보았다.
그의 치세 아래 잉글랜드는 부유했고, 나라안의 국민들도 안심하고 살 수 있었으며,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크게 탄압하거나 대대적인 숙청 같은 것들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파멸하게 된 이유는 가족관계에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여자들과 바람나 엘레오노르와 자식들과의 관계가 멀어졌고, 다른 아들들은 생각하지 않고 거의 무조건적으로 존 왕만 사랑했다는 것에 있다. 그것 때문에 아내 엘레오노르와 다른 아들들, 특히 리처드 1세하고 가장 척을 졌다. 끝내는 아들들끼리 내전을 벌이게 만들고, 이로 인해 그동안의 많은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헨리 2세를 좋게만 평가하기는 힘들게 되었다. 집안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주는 왕이라 하겠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