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6년 3월 31일,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Bernardus Claraevallensis, 1090 ~ 1153)가 제2차 십자군 원정의 당위성을 설파해 루이 7세 (Louis le Jeune, 1120 ~ 1180)가 2차 십자군 (1147 ~ 1148) 참가
1146년 3월 31일, 수도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라: Bernardus Claraevallensis, 1090년 ~ 1153년 8월 21일)가 제2차 십자군 원정의 당위성을 설파해 루이 7세’ (프: Louis le Jeune, 1120년 ~ 1180년 9월 18일)가 2차 십자군에 참가한다.

○ 시토회의 창립자로 제2차 십자군 원정 설교가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 (Bernardus Claraevallensis, 1090 ~ 1153) 일명 ‘성 베르나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라: Bernardus Claraevallensis, 1090년 – 1153년 8월 21일)는 12세기에 활동한 수도자로 시토회를 창립하였으며 제2차 십자군 원정 중에 설교하였다.
– 행적
베르나르는 1090년 프랑스 디종 근처 퐁텐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세속적인 교육을 마친 그는 22살이 되던 해 다른 31명의 사람들과 함께 시토에 있는 베네딕토회에 들어갔다.
시토의 베네딕토회는 부르고뉴에 있는 개척 수도원으로 이곳에서 그는 나중에 시토회를 창립했다.
1115년 베르나르는 클레르보에 있는 새로운 수도원의 수도원장이 되었으며, 이 첫 번째 수도원을 시작으로 이후 많은 수도원들을 설립했다.
수도원장 베르나르는 처음엔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이유로 수도회의 비난을 받았지만 기도에 할애된 시간을 줄이고 음식을 개선했으며 지역 주교의 도움으로 수도원의 일치를 강화하여 수도원의 상태를 크게 향상시켰다.
《신애론》, 《강론집 아가》 등 많은 저술에 그의 명상적인 형상이 표현되어 있다.

– 영향
1146년 3월 31일,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가 제2차 십자군 원정의 당위성을 설파하자 루이 7세가 십자군에 참가한다.
한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의 사상은 종교개혁가 장 칼뱅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로마 가톨릭의 성인. 축일은 8월 20일. 베르나르는 독일어에서 기원한 이름으로 ‘곰처럼 힘센’, ‘힘센 곰’을 뜻한다.
회화에서는 주로 시토회의 하얀 수사복에 수도원장의 지팡이를 들고 있으며, 발 밑에 주교관과 성체, 사슬로 묶은 악마, 하얀 개, 책, 벌통과 함께 그려진다.
양봉가·양초제작자·모래채취장·일꾼의 수호 성인이다.

○ 2차 십자군에 참가한 루이 7세 (Louis le Jeune, 1120 ~ 1180)
루이 7세, 일명 ‘소 루이’ (프: Louis le Jeune, 1120년 ~ 1180년 9월 18일)은 루이 6세의 아들이자 후계자로 1137년부터 프랑스 왕이었다.
그의 체세에는 봉건귀족 가문들과의 투쟁, (특히 앙주가) 잉글랜드와의 분쟁으로 점철 되었다.
그의 시기 아키텐의 상속녀였던 엘레오노르와 이혼하며 프랑스 남부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였고 아키텐의 영토는 잉글랜드의 앙주 왕조의 국왕 헨리 2세에게 돌아간다.
그의 치세에 노트르담 대성당의 건축이 시작되었고 거의 재앙으로 끝난 제2차 십자군 전쟁도 벌어졌다.
이후 외아들 필리프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난다.

○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와 2차 십자군 전쟁 (1147 ~ 1148)
제2차 십자군 (1147 ~ 1148년)은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팔레스타인의 십자군 국가와 기독교 도시 등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공존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모술의 아타베그인 장기가 에데사 백국을 점령하자 서유럽에서는 위기감이 조성되어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호소로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당시의 명성 높은 설교가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유럽 각지에서 십자군 참가를 선동했고,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왕 콘라트 3세를 중심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출정하였다.
그러나 주요 참가자들은 제각기 생각을 갖고 있었고 각자 행동했기 때문에 제2차 십자군은 큰 전과를 이룩하지 못하고 소아시아 등지에서 이슬람 군에게 패배했고 팔레스타인에서는 누르 앗 딘에게 패하고 다마스쿠스 공격에 실패하여,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결과
교황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십자군 원정 중 가장 성과가 없었던 십자군이라고 말해도 타당할 것이다.
.십자군은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고 돌아갔으나, 대립하던 다마스쿠스와 누르 앗 딘을 협력하게 만들어, 후에 누르 앗 딘이 다마스쿠스를 얻어 시리아를 통일하게 되어 이슬람 세력의 결집을 간접적으로 도와주게 되었다.
.토착화된 십자군 국가는 무슬림 중에서 동맹자였던 다마스쿠스를 잃었고, 이전부터 서양인과는 타협하지 않았던 누르 앗 딘이 시리아 통일에 의한 압박을 받으면서 세력을 잃어간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리스본을 탈취하여 레콩키스타에 공헌했다.
.슬라브인에 대한 십자군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서양에서는 이 실패에 낙담하여, 에우제니오 3세와 베르나르도가 새로운 십자군 결성을 호소하지만 아무도 응하는 자가 없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