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3년 3월 4일, 쿠르드족 출신 이집트•시리아의 술탄 살라흐 앗딘 / 살라딘 (Selahaddin Eyyubi, 1137/38? ~ 1193) 타계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튀: Selahaddin Eyyubi) 또는 살라딘 (1138년? ~ 1193년 3월 4일)은 12세기경 티크리트 (현재 이라크 북부) 출신의 쿠르드족 무슬림 장군이자 전사였으며 이집트, 시리아의 술탄이었다.
3차 십자군 원정에 맞서서 이슬람을 이끌었다.
전성기에 그는 이집트, 시리아, 예멘, 이라크, 메카, 헤자즈 등지를 아우르는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다.

– 살라흐 앗딘 / 살라딘 (Selahaddin Eyyubi)
.휘: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출생: 1137/38년, 이라크 티크리트
.사망: 1193년 3월 4일, 시리아 다마스커스
.묘지: 시리아 다마스커스 우마이야 모스크
.가문: 아이유브 왕조
.부모: 부) 나짐 앗딘 아이유브, 모) 시트 카툰
.배우자: 이스맛 앗딘 카툰 (1176 ~ 1186년)
.형제자매: 알아딜, 라비아 카툰, Turan-Shah, Taj al-Muluk Abu Sa’id Buri, Tughtakin ibn Ayyub 등
.종교: 무슬림 수니파
*이집트와 시리아의 술탄
.재위: 1174 ~ 1193년
.대관식: 1174년 카이로
.전임: 누르 앗딘 장기 / 후임: 알아프달 (시리아), 알아지즈 우르만 (이집트)
서양에서는 살라딘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본명은 유수프 (Yousuf)였다.
그는 그의 지도력과 군사적 역량으로 무슬림과 기독교계 모두에게 알려졌으며, 십자군과 맞서 전쟁을 치를 당시에 탐욕스럽고 무자비했던 십자군의 군주들에 비해 온건하고 약속을 잘 지키는 자비로운 군주로 덕망이 높았으며 그가 보인 기사도 정신과 자비심은 서방세계에 널리 전해져 수많은 전설과 기록으로 남았다.
살라딘이라는 그의 이름은 아랍어로 “정의와 신념”을 의미한다.

○ 생애 및 활동
- 성장
1137년 티크리트의 쿠르드 가문에서 태어난 살라딘은 다마스쿠스에서 학업을 마쳤다. 그의 아버지 나짐 앗딘 아이유브 (Najm ad-Din Ayyub, ? – 1173년)는 1139년에 티크리트에서 쫓겨나 삼촌 아사드 알딘 시르쿠 (Asad al-Din Shirkuh)와 함께 모술로 갔다. 나짐 앗딘 아이유브는 나중에 이마드 앗딘 장기 (Imad ad-Din Zengi)의 부하가 되었으며 이마드 앗딘 장기는 나짐 앗딘을 발베크 (Baalbek) 요새 수비대장으로 임명했다. 다마스쿠스에 머무는 10년 동안 누르 앗딘의 법원에서 수니파의 교리를 배운 살라딘은 그의 삼촌인 시르쿠에게서 기초 군사 교육을 마쳤으며, 1160년대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분파와의 전투끝에 승리하여 1169년 삼촌 시르쿠가 장관으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의 아모리 1세가 통치하는 예루살렘 왕국으로부터 이집트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한 살라딘은 이집트 왕가의 혼란 속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깨고 점차 영향력을 키워갔다.

- 행운
시리아의 외인부대 지휘관이었던 살라딘은 이름뿐인 칼리프 알아디드가 죽자, 1171년 9월 이집트에 대한 실제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살라딘은 이집트의 경제를 재건하고 군대를 양성하는 한편, 그의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살라딘의 명목상 주인이었던 누르 앗딘과의 마찰을 피했다. 누르 앗딘이 죽기 전까지 살라딘은 가급적 군사행동을 피했지만 이내 십자군과의 대대적인 전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1174년 누르 앗딘이 사망하자 살라딘은 이집트의 술탄이 되었다. 그는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아이유브 왕조를 세우고 이집트에 수니파 교단을 회복하였다. 그는 영토를 확장하고 파티마 왕조 지지세력을 소탕하였으며 홍해를 건너 예멘까지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였다. 수니파 신도들은 그에게 ‘신의 친구’ (Waliullah)라는 호칭을 붙였다.
“숙부이신 시르쿠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유수프, 짐을 꾸리거라. 우린 떠난다’ 이 명을 받는 순간 나는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줄 알았다. 나는 대답했다. ‘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그들이 내게 이집트 왕국을 몽땅 바친다 해도 저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ㅡ 이집트 원정 전날 살라딘
“나는 숙부님을 따라가기로 하였다. 숙부님은 이집트를 정복하고 나서 세상을 뜨셨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권력을 신께서 내 손에 넘겨주신 것이다.” ㅡ 살라딘의 회고
“나는 알렉산드리에서의 고초를 완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집트 원정 참여에 대해) 거절의 답변을 드렸다. 그러자 숙부께서 누르 앗 딘에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유수프는 나와 함께 가야 합니다!” 누르 앗 딘은 거듭 명하였다. 내가 처한 난처한 상황을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소용 없었다. 누르 앗 딘의 명령을 받들 수밖에 없던 나는 흡사 형장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살라딘은 이상하리만큼 행운이 많이 따랐던 군주로 평가된다. 그 예시들을 나열해 본다.
2차 이집트 원정 때의 트라우마로 강력히 거부하던 3차 원정을 숙부 시르쿠와 누레딘의 강권으로 따라감. 그리고 와지르(재상)가 된 시르쿠가 취임 두 달만에 식사 중 호흡곤란으로 세상을 떠나며 그 뒤를 이어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와지르가 됨. (1169년 3월)

와지르 취임 6개월 만에 십자군-동로마 연합군이 이집트를 침공. 하지만 내분과 물자 부족으로 연합이 와해되자 협상을 통해 철수시킴. (1169년 10월)
주군 누레딘이 (살라딘의 명목상 주군인) 파티마 조의 칼리파 알 아디드를 폐위할 것을 명령. 그러나 적대적인 민심에 살라딘이 주저하던 터에 알 아디드가 21세의 나이로 요절. (1171년 9월)
칼리파를 폐한 후 오히려 살라딘의 권력이 강화되자 누레딘이 직접 이집트를 장악하러 오기로 함. 그러나 장기 왕조의 충신이던 살라딘의 부친 아이유브가 시킨대로 충성을 맹세하는 편지를 보내 무마시킴. (1171년 말)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했던 아이유브가 사망하자 누레딘이 이집트 원정을 준비. 그러나 도중에 병사. (1174년 5월)
예루살렘 왕국의 군주 아모리가 시칠리아 함대의 지원과 함께 이집트 원정 준비. 그러나 도중 병사. 나병 걸린 보두앵 4세 계승. (1174년 7월)
시칠리아 함대가 아모리의 죽음 모르고 출항. 알렉산드리아에 당도했으나 십자군의 호응은 없었고, 살라흐 앗 딘이 북상하자 철수. (1174년 8월)
시칠리아 함대에 호응하여 반란 일으키려던 파티마 왕조 부흥 세력이 늦게 봉기했다가 진압됨. (1174년 9월) 4로 연합군 격파
누레딘의 죽음을 틈타 시리아 원정을 준비하던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룸 셀주크 군에게 패배. 원정 좌절. (1176년 9월)
동로마 함대가 십자군과 함께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 아크레에 당도하지만 예루살렘 왕국의 내분(르노 vs 이벨린)으로 원정이 무산됨. (1177년 9월)
알레포의 장기 왕조 지배자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불과 16세로 요절함 (1181년 12월)
살라딘이 알레포-모술 원정에 나서 부재한 틈에 다마스쿠스를 맡은 동생 파루크샤마저 사망, 이에 보두앵 4세가 도시를 공격하였으나 병으로 철수함 (1182년 12월)
엄청난 규모의 십자군을 이끌고 행군하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살라프 강에서 익사하며 3차 십자군 약화됨. (1190년 6월)

- 십자군과의 전쟁
1170년과 1172년 살라딘은 누르 앗딘의 예루살렘 왕국 침공으로부터 퇴각하였다. 살라딘은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얻게 되기 전까지 예루살렘 왕국이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의 완충지대로 남아있기를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누르 앗딘 사후 그의 직위는 아직 소년이었던 살리흐 이스마엘 알말리크에게 계승되었지만 이 소년 역시 1181년 사망하였다. 누르 앗딘 사후 살라딘은 다마스쿠스로 행군하였으며 대중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선왕을 존중하는 의미로 누르 앗딘의 미망인과 결혼하였다. 누르 앗딘이 통치한 다른 두 대도시 알레포와 모술은 그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살라딘은 이 도시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였다. 살라딘은 1176년과 1186년 이들 도시에 대한 공성에 나섰지만 1176년 5월 22일 알레포 공성 당시 해시시를 먹는 자들 (Hashshashins)이라는 정예 암살자 조직 아사신의 공격을 받고 공격을 철수하기도 하였다.
살라딘은 시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으며 십자군과의 대규모 전투에서도 늘상 승리하였다. 단 한번, 1177년 11월 25일의 몽기사르 전투에서 살라딘은 패배를 기록하였는데,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와 샤티용의 레날드, 성전 기사단 연합군과 맞닥뜨린 살라딘은 대패하여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본국 이집트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178년 살라딘은 십자군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살라딘은 패전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며 군대를 재건하였고, 1179년 벌어진 십자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십자군의 거듭된 반격은 살라딘을 자극하였고, 특히 사티용의 레날드는 홍해 함대를 동원하여 무슬림의 교역과 순례길을 습격해댔다. 이어서 레날드는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위협하였고, 살라딘은 1183년과 1184년 응징 차원에서 케라크의 레날드 요새를 공격하였으며, 레이널드 또한 1185년 하지의 순례자들을 공격해 보복하였다.
1187년 7월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국을 함락시켰다.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뤼지냥의 기와 예루살렘 왕 트리폴리의 레몽 3세 연합군과 대치한 살라딘은 십자군 부대를 괴멸시켰으며, 십자군의 재앙으로 끝난 이 전투는 십자군 원정사에 전환점이 되었다. 샤티용의 레날드는 살라딘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뤼지냥의 기 역시 사로잡혔지만 살라딘은 갈증을 호소하는 기에게 눈을 녹인 얼음물을 대접하며 그의 목숨을 보전해 주었다.
하틴 전투가 있은 지 이틀 후 살라딘은 모든 군인 포로들을 끌어내 목을 벨 것을 명령하였고, 이 처형은 살라딘의 비서인 이마드 앗 딘의 기록에 남았다. 기록에 따르면 살라딘은 감옥에 있느니 죽는게 낫다며 그들의 목을 베라고 지시하였고, 그의 주위엔 많은 학자들과 수피 (Sufi) 교도들, 독실한 신도들과 수도자들이 모여들어 칼을 뽑고 소매를 걷으며 자신들의 손으로 포로들을 처형하고 싶다고 애걸하였다고 한다. 살라딘은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며 기독교인들의 얼굴에는 절망의 빛이 서렸다고 전해진다 (이는 살라딘의 첫 처형이 아니었다. 1179년 8월 29일 살라딘은 바이트 알아존의 성을 함락시켰을 때 700명의 포로들을 처형한 전례가 있다).
바하 앗딘의 기록에 따르면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전 바하 앗딘에게 팔레스타인 뿐 아니라 무슬림에게 속하지 않은 모든 땅을 비신도들로부터 해방시키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고 한다. 이어서 살라딘은 모든 십자군 도시에 대한 정복을 시작하였다. 88년간 십자군 도시였던 예루살렘을 1187년 10월 2일 접수한 살라딘은 본래 협상 같은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예루살렘을 사수하던 이벨린의 발리앙은 3천에서 5천에 이르는 예루살렘의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무슬림의 성지를 파괴하겠다는 협박으로 살라딘을 협상에 끌어낼 수 있었다. 도시 안의 프랑크족들은 남녀노소를 불분하고 몸값을 지불하고 무사히 예루살렘을 떠날 수 있게 되었지만 사실상 살라딘은 몸값 일부만을 지불한 사람들도 무사히 도시를 떠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마드 앗딘의 기록에 따르면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7천에서 8천 가량의 남녀가 노예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 남은 것은 티레 (Tyre)였다. 티레의 십자군을 지휘하던 몬페라토의 코라도는 티레의 수비를 강화하고 살라딘의 두 차례에 걸친 공성을 막아냈다. 1188년 살라딘은 뤼지냥의 기를 석방하여 그를 그의 아내인 예루살렘의 시빌라에게 돌려보냈다. 기와 시빌라는 티레로 입성하여 피난민들을 찾고자 하였지만 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코라도는 이들을 돌려보냈고, 기는 아크레에 대하여 공성을 단행하였다.
하틴에서의 패배와 예루살렘의 함락은 제3차 십자군 원정의 발단이 되었다. 영국이 재정을 부담한 3차 십자군은 아크레를 점거하였으며, 영국의 국왕 리처드 1세 (사자심왕 리처드)는 아크레의 무슬림들을 처형하였다. 살라딘은 8월 28일부터 10월 10일 사이에 포로로 잡은 모든 프랑크인들을 처형함으로써 이에 보복하였다. 무슬림의 기록에 따르면 전위부대가 잡아온 프랑크인 포로를 살라딘이 목을 베어 처형하자 병사들이 남은 몸통을 난자해 복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1191년 9월 7일 살라딘의 군대는 사자왕 리처드 1세의 군대와 맞닥뜨렸다 (아르수프 전투). 비록 살라딘은 전투에서 패배하였지만 리처드 역시 예루살렘을 정복하는데는 실패하였다. 두 왕은 내심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고, 일련의 기품있는 일화들을 낳았다. 리처드 1세가 부상을 당하자 살라딘은 공격을 중단하고 그의 개인 의사를 보내 상처를 돌보게 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전투 중에 말을 잃자 살라딘은 두 필의 말을 보냈으며, 눈으로 채운 신선한 과일을 보내기도 하였고, 호의에 감복한 리처드 1세는 자신의 누이와 살라딘의 동생을 결혼시키고 예루살렘은 결혼 선물로 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결국 두 왕은 1192년 평화 협정을 맺었고, 예루살렘은 무슬림의 지배하에 두되 기독교도 순례자들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 사망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에서 이탈한 지 오래 지나지 않은 1193년 3월 4일, 살라딘은 다마스쿠스에서 눈을 감았다. 사망 전의 유언은 “이제야 유수프가 그 감옥에서 해방되는 구나”였다고 한다. 그의 사후 살라딘의 금고 안에는 한 조각의 금과 마흔 조각의 은 조각만이 있었고, 한 왕조의 지도자로써 장례식을 치르기에도 부족한 정도의 수준임을 본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고 한다. 그는 대부분의 재산을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의 영묘 (靈廟)는 다마스쿠스의 우마야드 모스크 북서쪽 모퉁이에 조성되었다. 7백 년 뒤 시리아를 방문한 독일의 황제 (카이저) 빌헬름 2세가 대리석으로 만든 석관을 영묘에 기증하였으나, 살라딘의 영구는 처음 영묘를 만들면서 안치한 목관에 안치되어 있다. 대신 영묘는 방문객들에게 개방되어 원래의 석관과 새로 기증된 석관 이렇게 두 개의 석관이 나란히 영묘에 안치되어 전시되고 있다 (무슬림은 간소한 방식으로 장례를 치르며, 석관은 이슬람 방식으로 조성된 묘소 위를 덮는 데 사용된다).
살라딘에 의하여 건축된 구조물들이 일부 현재까지 남아있다. 1175년부터 1183년까지 카이로에 쌓은 성채가 그러하며, 시리아와 이집트 전역에 걸쳐 크고 작은 구조물들이 남아있다. 특히 그가 산 정상에 구축한 콸랏 알긴디 (Qalaat Al-Gindi) 요새는 상단의 통행로를 잘 관측할 수 있는 요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석재로 만들어진 큰 방들과 상점, 수도시설이 포함되어 있다.

○ 연표
1138년 – 티크리트의 쿠르드족 족장 아이유브의 아들로 태어나다.
1152년 – 시리아의 군주 누르 앗딘의 군대에 들어가다.
1164년 – 십자군과 첫 대면하고 세번에 걸친 이집트 전선에서 용맹을 떨치다.
1169년 – 삼촌 시르쿠의 부장으로 활약하고 이집트로 건너가다.
1171년 – 파티마 왕조의 군주를 타도하고 이집트를 압바스 왕조에 통합하다.
1174년 – 누르 앗딘이 사망하자 세력을 확대하고 다마스쿠스를 점령하다.
1183년 – 알레포 점령
1186년 – 모술 점령
1187년 – 성도 예루살렘을 정복하다.
1189년 – 1191년 – 아크레 공방전, 결국 아크레 함락하다.
1192년 –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평화협상을 맺다.
1193년 – 짧은 투병 기간을 거쳐 다마스쿠스에서 영면하다.

○ 평가
기독교도들과의 많은 전투에도 불구하고 살라딘은 유럽에 관대하고 예의바른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14세기경 그를 칭송하는 많은 시들이 나타났다. 단테 또한 그를 미덕을 갖춘 이교도로 묘사한 바 있으며, 월터 스코트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저작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그려졌다. 살라딘은 특히 리처드 1세의 존경을 샀는데, 리처드 1세는 살라딘을 위대한 왕으로 평하며 의심할 여지 없이 이슬람 최고의 지도자라고 하였다. 살라딘과 리처드 1세는 많은 선물을 교환하며 지냈지만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다.
살라딘의 자비심을 보여주는 일화가 1191년 4월에 발생한 바 있다. 프랑크족 여인의 3달 된 아기가 유괴되어 노예시장에 팔리자 프랑크인들은 이 여인에게 살라딘에게 자비를 구할 것을 권하였고, 사연을 전해들은 살라딘은 사재를 모아 아기를 사서 여인에게 돌려주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에 따르면 여인은 눈물을 쏟으며 크게 감사하였다고 한다.
20세기 초 시리아가 프랑스의 위임통치 아래 들게 되자, 프랑스 점령군 사령관 앙리 구로 (Henri Joseph Eugène Gouraud)가 다마스쿠스에 있는 살라딘의 영묘를 찾아 “살라딘이여, 우리가 돌아왔다. 여기, 나의 존재가 초승달 (이슬람)에 대한 십자가 (기독교)의 승리를 위한 봉헌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한 일화가 있다.

○ 대중문화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지옥편에서는 제1옥에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등 다른 비기독교인 위인들과 함께 있었다. 대표적인 “선량한 비가톨릭”이다. 그 외에도 그의 기사도적인 면 때문인지 서구의 십자군 기사문학 등에도 종종 그 이름이 등장했다.
근대 서구에서 바라보는 살라딘의 이미지가 가장 함축적으로 형상화된 것이 월터 스콧의 소설 <탈리스만>이다. 이교도임에도 정정당당한 기사이며, 신비롭기까지 한 인물로 그려진다.
조반니 보카치오의 저작인 <데카메론>에서도 살라딘이 긍정적인 이미지로 나온다. 십자군 전쟁 이전 적국인 유럽을 정탐하다가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본 한 기사에게 후하게 대접을 받았는데, 이후 그 기사가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되자 그를 알아보곤 그때 받았던 호의를 갚기 위해 더더욱 융숭하게 대접해 주고 휘하 마법사의 마술로 고국으로 보내주기까지 한다.
독일의 극작가인 고트홀트 레싱이 1779년에 쓴 희곡 ‘현자 나탄’에서는 나탄에게 종교의 진리에 대해 묻는 역으로 나온다. 나탄의 재산을 갈취하기 위해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중에 어느 종교가 참종교인가’를 물어 본 것. 이에 대해 나탄은 반지 설화를 인용하며 어떤 종교든지 간에 ‘공평하고 편견 없는 사랑’이 중요하다고 가르쳐 준다.

○ 어록
한 번 흘린 피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관용과 애정으로 사람들의 신망을 얻어라. – 아들에게 한 충고
찬미받으시고 지고하신 알라께 바라오니 저들 (프랑크인들)의 노기 (怒氣)를 잠재우고 저들의 거주 지역을 파괴하는 데 무슬림들의 열의가 움직이게 하소서.
바다가 저들을 지원하는데 대지가 저들을 차단하지 않는 한, 국토는 저들로 인해 계속 시련을 겪을 것이며, 마음은 늘 저들의 질병으로 인해 병들어 있을 것이다. 무슬림들의 열의, 종교 신앙을 지닌 자들의 긍지, 굳은 믿음을 지닌 자들의 명예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다신교도들의 상호 협력에, 그리고 무슬림들의 안이함에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무슬림들 중에는 부르는 자에게 응답하는 이가 없고, 굽은 것을 곧게 잡으려는 이가 없다. 프랑크인들을 보라. 저들이 어느 지역까지 당도했는지, 어떻게 군대를 모집했는지, 어떤 목표를 추구했는지, 어떻게 지원군을 보냈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세금을 거두어 지출했는지, 어떻게 재화를 모아 저들 간에 골고루 분배했는지를. 저들의 나라와 섬들에서는 왕과 고관대작들이 지원군을 보내는 데 서로 경쟁하고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는 일에 서로 겨루고 있다. 저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는 데 목숨을 바쳐 희생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저들은 자신들의 불운한 동족 사람들에게 온갖 종류의 무기들과 전사 (戰士)들을 제공했다.
저들은 오로지 신앙에 대한 열정과 신념에 대한 자부심에서 자신의 의무를 수행했고 자신의 재산을 바쳤다. 프랑크인들 중 어느 누구라도, 만일 (그들이 차지한 시리아) 해안 지역이 (무슬림들에 의해) 점령되어 자신들의 명예가 실추되기라도 하면 자기 나라가 수중에서 빠져나간 것으로, 자기 나라에 마수 (魔手)가 닿은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이와는 정반대이다. 약해지고 용기를 잃었고, 방심하며 게을러졌고, 당황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명예심을 상실했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만일 이슬람이 속도를 늦추면, 또는 불빛이 꺼지거나 창끝이 빗나가면, 이슬람 영토의 동서에서 그리고 먼 지역이나 가까운 지역을 막론하고 알라의 종교를 위해 자긍심을 지닌 자나 거짓에 맞서 진리를 도우려 나서는 자는 없게 될 것이다.
이제 무기력한 상태를 떨쳐버릴, 그리고 먼 곳에 있는 자든 가까이 있는 자든 신앙의 열정을 지닌 자들을 불러 모을 때가 되었다. 알라를 찬미함으로써 우리는 알라의 도움을 간구한다. 우리는 알라께 헌신하고, 알라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비밀을 알려주셨으니, 다신교도들은 알라의 허락하에 멸망할 것이고 무슬림들은 안전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 김능우, 박용진 편역 ‘기독교인이 본 십자군, 무슬림이 본 십자군’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