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9년 2월 9일,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 개창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源 賴朝, 1147 ~ 1199) 별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일: 源 賴朝, 1147년 5월 9일 ~ 1199년 2월 9일)는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까지의 무장으로, 겐페이 전쟁에서 겐지(源氏)를 이끌었던 무사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가마쿠라 막부를 개창한 초대 정이대장군이다.
헤이안 시대 말기의 유력한 무문(武門)이었던 가와치 겐지의 도료(棟梁)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3남으로 태어나 아버지 요시토모와 함께 싸운 헤이지의 난에서 헤이시(平氏)에 패해 이즈국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황족 모치히토 왕의 영지(令旨)를 받고 이후 극적으로 회생,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등의 겐지들과 함께 거병해 간토의 헤이케 세력을 평정하고 가마쿠라를 본거지로 삼았다. 헤이케를 쓰러뜨린 뒤, 전공이 뛰어났던 이복 동생 요시쓰네를 추방해 권력을 강화했다. 또, 여러 지방에 슈고와 지토를 파견하여 힘을 키웠으며 오슈 전쟁에서 오슈 후지와라씨를 멸하였다. 겐큐 3년(1192년) 정이대장군으로 취임했다.
이로써 조정으로부터 반 독립적인 정권을 창출하였고, 이 정권은 그 후 소재지의 이름을 따서 ‘가마쿠라 막부’로 불리었다. 이러한 ‘막부’에 의한 무가정권은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행해지는 게이오 3년(1868년)까지 약 680년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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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및 활동
– 인물
.용모
《헤이지 이야기》에는 “나이답지 않게 점잖다”, 《겐페이성쇠기(源平盛衰記)》에는 “얼굴은 크고 용모는 아름답다” 등으로 기술되어 있다. 주에이 2년(1183년) 8월에 요리토모와 대면했던 나카하라노 야스사다(中原泰定)의 말이 《헤이케 이야기》에 실려있는데, 거기서는 “얼굴이 크고 키는 작다. 용모는 몹시 아름다우며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구조 가네자네의 일기인 《교쿠요》에는 “요리토모의 몸은 위세가 있고 엄숙한데, 그 성품은 강렬하며 성패가 분명하고 다스림에는 끊음이 분명하지 않다.”(10월 9일조)고 적었다. 요리토모의 키는 오야마즈미(大山祇) 진쟈에 봉납된 그의 갑주를 가지고 추측해볼 때 165 cm 정도로 당시의 평균에 비하면 꽤 큰 축에 속한다.
흔히 알려진 얼굴 초상화는 교토 진고사(神護寺)에 소장된 것으로 오래전부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 전해왔다. 일본 전통 초상화의 걸작으로 오늘날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이 초상화는, 1995년에 일본의 미술사학자 요네쿠라 미치오(米倉迪夫)에 의해 실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초상화가 아니라는 주장이 처음 제기되었으며, 그 화법이나 복장을 볼 때 요리토모가 아니라 아시카가 다다요시를 그린 것이라는 학설이 발표된 이래 초상화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의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에는 요리토모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는 목상이 전해지고 있는데, 에도 시대에는 이것이 요리토모상으로 여겨졌고 지금은 도쿄 국립 박물관에 소장중이며, 마찬가지로 현재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가이 젠코지(甲斐善光寺)에 소장된 ‘목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좌상’은 센고쿠 시대에 시나노젠코지(信濃善光寺)에서 옮겨진 것으로, 복장유물을 통해 분포(文保) 3년(1319년)에 조각된 것임이 판명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요리토모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일화
요리토모 휘하의 도고쿠 무사단은 독립심이 강하고 동족 수준의 단결 말고는 하나의 거대 조직으로 결집할 줄 몰랐으며, 싸움에서는 각자 공명을 세우려 다투다 분열되어 격파되곤 했는데, 이것을 요리토모는 고케닌으로서 하나로 정리했다.
가마쿠라 막부의 정사인 《아즈마카가미》 등의 자료에는 분지 원년(1184년) 4월에 요리토모의 추천도 거치지 않고 조정으로부터 임관받은 고케닌들의 용모를 세세하게 묘사하며 그들을 매도하는 기술이 있는데, 이는 요리토모가 고케닌 한 명 한 명의 용모를 모두 숙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어느 전투의 보고를 듣고 “◎은 전사하고 △는 도망쳤다, 하는데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 ◎가 도망친 것이고 △가 전사한 것일 것이다.”라고 지적하는데 조사해보면 거의 모두 요리토모가 지적한 대로였다는 에피소드가 《아즈마카가미》에는 빈번하게 등장한다.
측근의 한 명으로 공사봉행인(公事奉行人)이었던 후지와라노 도시카네(藤原俊兼)가 사치스러운 의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요리토모는 칼로 소매를 베어 떨어뜨리고는 “지바 쓰네타네나 도이 사네히라 등은 선악도 분별 못하는 무사지만, 의복은 투박한 것을 쓰며 호화로운 것을 즐기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그의 집은 유복하고 많은 케닌과 노토를 길러 장차 훈공을 주려 한다. 헌데 너는 재산을 쓸 줄도 모르면서 분수도 모르는구나.”라며 훈계하고 있다. 측근 관료와 도고쿠 고케닌들 양쪽 모두의 개별 성격까지 모두 파악해 적재적소에 쓸 줄 알았던 것이 요리토모의 강점이었다.
자신의 처자에게는 관대하여, 후지 강에서 벌어진 대규모 사냥에서 12세의 아들 요리이에가 사슴을 쏘아 맞춘 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뻐하며 아내 마사코에게 자랑삼아 알렸다가, 마사코로부터 “무사의 자식이라면 당연한 것 아닙니까?”라는 핀잔을 받고 있다.
생애에 요리토모가 직접 전선에 나아가 싸운 적은 별로 없지만, 이시바시 산의 싸움에서는 갑옷으로 중무장한 무사를 화살 한 발로 넘어뜨리는 등, 자신의 삼촌 미나모토노 다메토모만큼의 강궁을 다루고 있다.
승려 지엔(慈円)과 친교가 있어 자주 와카를 주고받았으며, 그 노래가 《신고킨와카슈(新古今和歌集)》에 수록되기도 했다.
– 기요모리의 유언
《헤이케 이야기》에 따르면, 죽음을 앞둔 기요모리는 자제들을 향해 “내 죽은 뒤에는 당탑도 효양도 다 필요없다. 그냥 요리토모의 목을 베어 내 무덤 앞에 바쳐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진위 여부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높다.
센고쿠 시대 무사의 감각이라면 몰라도 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사의 감각으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유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기요모리는 거꾸로 요리토모와의 화목과 고시라카와 법황과의 협조 정치를 바랐다고도 한다. 하지만 기요모리 사후 그의 뒤를 이은 무네모리가 어리석었던 탓에 사사건건 반대했고 결국 무엇 하나도 실현되지 못했다고 말이다.
다만 오늘날까지 기요모리의 묘소는 확실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교쿠요》지쇼 5년(1181년) 8월 1일에 《헤이케 이야기》의 그것과 제법 닮은 뜻의 기요모리의 유언과 함께, 그런 이유로 헤이케가 요리토모를 받아줄 리가 없다고 저자 가네자네는 적고 있다.
– 요시쓰네와의 대립
헤이케 타도에 가장 많은 공을 세웠던 막내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를 쫓아내고 죽음에 이르게 한 경위에 대해, 예부터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 일으켜 숱한 이야기를 만들었고 오늘날까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즈마카가미》는 8월 6일에 교토에 있던 요시쓰네가 요리토모의 허락도 없이 조정의 임관을 받은 것에 분개한 요리토모가 요시쓰네를 헤이케 추토군에서 제외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기술은 같은 《아즈마카가미》의 다른 기사와는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는 설이 있다. 헤이케 추토군에서 제외되기 사흘 전인 8월 3일, 요리토모는 요시쓰네에게 이세의 다이라노 노부카네(平信兼) 추토를 명하고 있는데 요시쓰네는 12일에 출발하고 있다. 즉 임관 이전에 이미 요시쓰네는 다른 이유로 서해 원정에서 제외되어 있었던 것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거기다 26일에 요시쓰네는 실제로 헤이케추토사의 관부(官符)를 받고 있다. 요리토모는 처음부터 요시쓰네에게 어떤 처벌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요리토모가 요시쓰네의 무단 임관 사실을 안 것은 8월 17일이므로, 그 전에는 어떠한 명을 요시쓰네에게 내리는 것은 당연하고, 헤이케추토사 관부를 받은 것도, 조정이 요리토모와 상의도 없이 요시쓰네를 게비이시에 임명했듯 요리토모와의 상의 없이 또 한번 헤이케 추토의 관부를 내렸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요시쓰네를 무서워했다는 설도 있다. 싸움에 지는 일도 많았던 요리토모와는 달리 헤이케 추토에서 연전 연승을 거둔 요시쓰네를 요리토모는 두려워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인데, 요시쓰네가 후지와라노 야스히라에게 죽은 뒤 오슈 캇센이 시작된 것은, 그 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인용되고 있다.
헤이케 멸망 이후의 가마쿠라 정권은 몹시 중대한 시기에 직면해 있었다. 내란이 잦아들면서 헤이케 추토를 명목으로 획득한 간토의 군사적 지배권을 더 이상 행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요리토모는 지금껏 가지고 있던 군사력을 조정과의 정치 교섭을 통해 평시에서도 그대로 유지하며 보강해야 하는 곤란한 지경이었다. 그러한 시기에서는 아무리 육친이고 공적이 높은 자라도 반항하는 것을 허락할 수는 없다. 요시쓰네의 배후에는 무가 정권 확립을 위한 대항 세력인 조정이나 오슈 후지와라씨가 있었다.
교토를 떠난 요시쓰네를 숨겨준 혐의로 가마쿠라로 소환된 고후쿠지(興福寺)의 승려 세이코(聖弘)는 요시쓰네를 비호한 일을 힐문하는 요리토모에게 “지금 간토가 평안무사한 것은 요시쓰네의 무공 덕분이다. 은상으로 받은 토지를 중상 모략 때문에 잃게 되면, 사람으로서 모반할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요시쓰네를 불러들이고 형제로서 수어지교를 하셔야 한다. 그러면 요시쓰네를 감싸는 것뿐만 아니라 천하의 무사들도 바랄 것이다.”라며 기죽지 않고 직언했다. 그 말에 감동한 요리토모는 세이코를 쇼죠슈인의 공승(供僧)에 임명했다. 이것을 보면 요시쓰네를 완전히 미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님을 엿볼 수 있다. 요리토모는 ‘정치가’이고 요시쓰네는 ‘군인’이었다는 그 차이가 헤이케 멸망 후에 드러난 것이다.
요시쓰네가 가마쿠라 방문을 제지당하고, 절절한 심정으로 자신의 처지를 항변했을 고시고에장을 받았을 때, 히라이즈미에서 자결한 그의 목이 가마쿠라에 도착했을 때 요리토모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아즈마카가미》는 적고 있지 않다.
– 사망 원인
각 사료에서는, 사가미 강의 다리 공양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길에 병을 얻게 된 것까지는 일치하고 있지만,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즈마카가미》는 ‘낙마’, 《이노쿠마 간파쿠기》(猪隈關白記)는 ‘음수병(飮水病)’, 《조큐기》(承久記)는 ‘수신(水神)에게 홀려’, 《보력간기》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나 안토쿠 천황 등의 망령을 보고 정신을 잃고 병으로 쓰러졌다’고 적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요리토모가 사망한 원인은 오늘날까지 많은 설이 존재하며, 확정된 것은 없다. 다만 사망 시점에 대해서만은 여러 기록이 모두 일치하고 있어 의문을 품는 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낙마설
겐큐 9년(1198년) 중신인 이나게 사부로 시게나리(稲毛三郎重成)가 죽은 아내를 위해 사가미 강에 놓은 다리의 낙성식을 겸한 공양식에 참석했던 요리토모가 귀가 도중에 그만 말에서 떨어졌다는 것이 《아즈마카가미》에 기록된 가장 널리 알려진 요리토모의 사망 원인이다. 하지만 이것이 《아즈마카가미》에 등장하는 것은 요리토모 사후 13년이나 지난 뒤의 일로 《아즈마카가미》에는 다리 공양부터 장례 의식까지 요리토모의 죽음에 대한 기재가 일절 없다. 이에 대해 요리토모의 최후가 불명예스런 내용이었기에 그를 존경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명장의 수치가 될 일을 실어서는 안 된다”며 해당 부분을 숨겨버린 것이라고도 하지만, 도쿠가와 집안에만 《아즈마카가미》가 전해진 것이 아니기에 이는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덧붙여 사망 원인과 낙마의 인과 관계에 따라 해석은 달라진다. 말에서 떨어진 것이 사망 원인인지 아니면 그 사망 원인 때문에 말에서 떨어진 것인지, 후자의 경우 뇌졸중 등 뇌혈관 장해가 사고 전부터 일어났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며, 낙마 자체가 원인이라면 두부외상성 뇌내출혈을 일으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낙마에서 사망까지 17일이 걸린 것을 보면 뇌졸중 후의 오연성·침하성 폐렴의 가능성이 있다.
.요붕증설
낙마로 인해 뇌의 중추신경이 손상되어 항이뇨호르몬 분비에 이상을 초래하여 요붕증을 일으켰다는 설. 이 병은 소변량이 급증해 몹시 물을 찾게 된다. 또한 혈중 나트륨 농도가 저하되기 때문에 적절한 치료법이 없던 12세기에는 이 병으로 죽음에 이를 가능성도 높았다.
.당뇨병설
《이노쿠마 간파쿠기》에서 말한 ‘음수병’, 물을 마시고 싶어하는 병이란 바로 당뇨병을 가리킨다고 하는 설이지만, 당시 요리토모에게 당뇨병 증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어 가능성은 낮다.
.익사설
현존하는 사료를 보면 요리토모의 죽음을 전하면서 ‘음수병’, ‘사가미 강의 다리 공양’, ‘수신의 꾐’, ‘바다 위에 나타난 안토쿠 일왕’ 등 모두 ‘물’을 연상시키는 말이 많은데, 이를 두고 어떤 경위로 그가 물에 빠진 것이 죽음으로 연결되었다는 설이다. 오늘날 사가미 강 하구 부근은 바뉴가와(馬入川, ‘말이 들어간 강’이라는 뜻)라고도 불리는데, 요리토모가 타고 있던 말이 뭔가에 놀라 갑자기 날뛰다가 강으로 들어가, 낙마에 이르게 된 데에서 유래했다는 전승이 있다. 이 경우 ‘음수병’은 다른 생물학적인 병이 아니라 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물을 과음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망령설
이는 《보력간기》에 기록된 것이다. 당시는 망령이나 귀신의 저주 같은 것을 깊게 믿었던 사회였고, 유배 시절부터 신불에 심취했을 정도로 믿음이 깊은 요리토모에게 그 날 갑자기 요시쓰네나 안토쿠 천황의 망령이 보였다는 것이다. 왜 하필 그 날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뭔가 요리토모에게 의식장애가 있었다고 파악할 수도 있다.
.암살설
아들 요리이에나 사네토모(實朝)처럼 요리토모도 누군가에게 암살된 사실을 《아즈마카가미》가 일부러 기재하지 않고 숨겨버렸다는 설이다.
오인살상설
정실인 마사코 몰래 애인을 만들어두고 밤에 몰래 만나러 가다가 맞닥뜨린 순라병에게 수상한 사람으로 오인받아 그만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빙성은 없다.
– 묘소·사당
요리토모의 묘는 가마쿠라시 오쿠라 산 중턱에 작은 돌탑이 남아 있다. 요리토모의 유해는 그가 죽은 뒤 그의 지불당에 묻혔다. 지불당은 죠지(正治) 2년(1200년)부터 법화당(法華堂)으로 불리며 많은 법요가 열렸다. 안에이(安永) 8년(1779년) 2월에는, 사쓰마번의 번주였던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가 지금의 모습으로 돌탑을 완성했다. 메이지 시대의 폐불훼석으로 석탑 앞에 있던 법화당은 파괴되어 메이지 5년(1872년)에 그 자취에 백기 신사를 짓고 요리토모를 신으로 모셨다. 석탑은 쇼와 2년(1927년)에 ‘법화당터(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묘)’로서 일본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쓰루가오카 하치만구 경내에도 동명의 신사가 있는데, 신사의 전승에 따르면 요리토모의 부인 마사코가 조정으로부터 시라하타 대명신의 신호를 받아 죠지 2년에 창건했다고 하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지었다고도 한다. 메이지 21년(1888년)에 지금의 자리에 옮겨 지었으며 메이지 이후로는 닛코 토쇼구(日光東照宮)의 상전(相殿)으로도 모셔지고 있다.
오늘날에는 매년 4월 13일, 요리토모의 기일로 알려진 날에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의 신직(神職) 주재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공 묘전제’가 행해지고 있다. 이 날에는 가고시마의 시마즈 집안의 대표도 참례한다. 또한 닛코 토쇼구에서 봄과 가을에 행해지는 천인무사행렬에서는 요리토모의 신여(神輿)를 멘 행렬이 참배길을 왕복하며, 효고현 가와니시시에 있는 타다(多田) 신사의 겐지마츠리에서는 요리토모로 분장한 기마무사도 볼 수 있다.
○ 평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처음으로 고안한 무사정권은 점차 제도화되어 나중에는 조정으로부터 실권을 빼앗았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는 1865년까지 ‘막부'(幕府) 시스템은 일본에서 무려 680년에 걸쳐 지속되었다. 이 막부 정권의 창시자로서 요리토모의 실적은 일본 역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의무교육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라는 통치자의 이름을 배우고 있다.
반면 인격에 있어서는 ‘냉혹한 정치가’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생전에 요시쓰네를 비롯한 많은 동족과 형제를 죽였을 뿐 아니라, 막부의 최고 사령관인 정이대장군이면서 요리토모 본인이 직접 군사를 인솔한 적은 드물었고, 주로 정치적 교섭으로 가마쿠라 막부의 수립을 완수했다. 오늘날까지 일본 사람들에게 ‘비극의 영웅’으로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막내동생 요시쓰네를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이라는 이유로, 요리토모의 인기는 그 실적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높지 않을 뿐 아니라 소설이나 만화에서 주인공으로 그려지는 일도 적다. 이상은 대체로 오늘날에 있어서의 요리토모에 대한 평가이며, 과거로부터 이미 요리토모는 많은 인물들에게 평가받아왔다.
– 호조 마사코와 휘하 고케닌들
요리토모 사후에 일어난 조큐의 난으로 조정과 막부가 충돌하게 되었을 때, 호조 마사코는 자신의 앞에 모인 고케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돌아가신 우대장군(右大將軍, 요리토모)께서 역적을 멸하고 간토를 여신 이래로 관위며 녹봉, 그 은혜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습니다…. 은혜를 알고 이름을 아끼는 자라면 어서 불충의 참신을 토벌하여 은혜에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들은 고케닌들은 눈물을 흘리며 보은을 맹세했다. 요리토모의 막부 내에서의 위치나 고케닌들로부터의 높은 평가를 알 수 있다.
– 《보력간기(保曆間記)》
요리토모 죽음의 원인을 그가 죽인 미나모토노 요시히로나 요시쓰네, 유키이에 및 안토쿠 천황의 망령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이미 그 당시부터 그의 생애는 ‘많은 죄를 지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
남북조 시대 남조의 구게로서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이기도 했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그의 저술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대해 “일신의 전력을 기울여 난을 평정하였다. 왕실은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더라도 수도의 전란은 진정되고 만민의 부담도 가벼워졌다. 윗사람도 아랫사람도 병화에 쫓기는 근심이 사라지고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요리토모의 덕을 칭송하였다.”고 요리토모의 공적을 칭찬하였으며, 고토바 천황이 사네토모의 죽음으로 요리토모의 직계가 끊어진 것을 계기로 막부 타도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것을 두고도 요리토모가 자신의 훈공을 계기로 천하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니 군주로써 마음이 편안하지 않은 와중에 요리토모의 직계가 끊기고 비구니인 호조 마사코와 싯켄 요시토키의 세상이 된 것을 계기로 막부 타도의 뜻을 품은 것도 당연한 것이지만, 애초에 요리토모가 세운 정도의 공적을 능가할 정도의 덕정을 행하지 않고서 어떻게 막부를 무너뜨릴 수 있겠느냐며 고토바 천황의 거병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풀이하면서 요리토모의 공적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무변돌문서》(武邊咄聞書)에 의하면, 히데요시는 쓰루가오카 하치만구 시라카타(白旗) 신사에 모셔진 요리토모상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와 당신, 모두 미약하고 작은 몸으로 천하를 평정했소이다. 허나 당신께서는 천황의 후윤(後胤)이시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간토를 이끄셨기에, 유인(流人)의 몸으로 거병했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난 성씨도 계도도 없이 천하를 잡았으니 당신보다는 내가 더 뛰어나외다. 허나 당신과 나는 천하의 친구올시다.” 이는 히데요시의 농담이지만, 은근히 요리토모의 실적이 능력보다는 혈통에 의지한 구석이 있음을 히데요시는 꼬집고 있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
요리토모의 업적이 실려있는 《아즈마카가미》를 모아 필사하도록 했다. 겐지의 분파인 닛타 씨(新田氏)의 후손을 자칭했던 이에야스는 요리토모를 몹시 숭배해, 《아즈마카가미》를 읽으며 요리토모의 행적을 배웠다고 한다.
– 아라이 하쿠세키
그의 저서 《독사여론》(讀史餘論)에서, 하쿠세키는 요리토모의 정치면의 공적에는 일정한 평가를 주되, 요리토모의 행동은 조정을 얕보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 것이라는 대체적으로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거병하고서 4년이나 상경하지도 않고 토고쿠의 토지를 거두어 케닌들에게 나누어준 데에서 이미 요리토모에게는 조정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요시나카를 토벌한 이유도 요시나카가 아사히 장군(朝日將軍)이 된 것을 질투한 것으로 요시나카가 고시라카와 법황을 유폐한 죄를 묻지 않은 것을 비판한다. 요시쓰네와의 대립에 관해서는 조정에 아손(朝臣)으로서 참내하고 있던 요시쓰네를 케닌을 시켜 교토에서 덮친 것은 신하된 자가 할 짓이 아니며, 덮친 이유도 요시쓰네가 조정으로부터 포상받은 것과 함께 요시쓰네의 군사적 재능을 두려워한 탓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요시쓰네가 교만이 더해가다가 가지와라노 가게토키의 중상모략으로 결국 처형되었다는 논에 대해서는 애초에 스스로의 교만이나 누구의 중상모략도 없었음에도 결국 모반죄로 처형된 노리요리의 예를 들어 반론하면서, “요리토모 같은 자의 동생으로 산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라 하겠다.”며 평을 맺고 있다.
– 이외
이 밖에 “성패가 분명하다”(구조 가네자네), “빈틈없는 기량을 가진 자”(지엔) 등이 있다. 대체로 정치적 능력에의 평가는 높지만, 논평자가 근왕가인지 아닌지, 유교적인 윤리관에 가까운지 아닌지 등의 견해에 따라 전체적인 평가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경향이 있는 것과 함께, 시대에 따라 평가가 요동치는 것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미야자와 겐지처럼 ‘오슈 문화의 파괴자’로서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한편 임진왜란 때에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조선의 강항이 지은 《간양록》에는 일본이 원래는 우리 나라와 풍속이 별반 다를 것이 없이 평화로워 ‘수천 리의 한 낙국(樂國)’을 이루었는데, 관동장군(關東將軍) 요리토모가 전쟁을 일삼은 이래로 하나의 전국(戰國)을 이루었다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서부터 일본 센고쿠 시대의 혼란이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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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