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9년 4월 6일,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의 2번째 군주 ‘사자심왕’ 리처드 1세 (Richard I, 1157 ~ 1199) 타계
리처드 1세 (Richard I, 1157년 9월 8일 ~ 1199년 4월 6일)는 플랜태저넷 왕가 출신으로는 잉글랜드 왕국의 두 번째 국왕 (재위 1189년 9월 8일 ~ 1199년 4월 6일)이다.
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사이에서 태어난 세 번째 아들이다. 생애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냈으며, 그 용맹함으로 인해 사자심왕 (the Lionheart, 프: Cœur de Lion)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이후 중세 기사 이야기의 전형적인 영웅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재위 시 본국인 잉글랜드에 체재했던 기간이 불과 6개월이었으므로 그의 통치력에 대해서는 뚜렷이 알려진 바가 없다. 치세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내고 통치자로서 무능하였으나, 용감·관용 등을 겸비한 중세의 전형적 기사였다.

– 리처드 1세 (Richard I)
.별칭: 사자심왕 (The Lionheart / Le Cœur de Lion)
.출생: 1157년 9월 8일, 옥스퍼드 Beaumont Palace
.사망: 1199년 4월 6일, 프랑스 샬류
.묘지: 프랑스 Fontevraud-l’Abbaye 퐁트브르 수도원
.부모: 헨리 2세, 알리에노르 다키텐 여공작
.배우자: 베렝겔라 나바라 왕녀 (1191 ~ 1199)
.자녀: 코냑의 필리프 (사생아)
.형제자매: 존, 헨리 청년왕, Eleanor of England, Queen of Castile, 조프루아 2세 드 브르타뉴 공작 등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 아키텐 공작, 가스코뉴 공작, 푸아티에 백작, 앙주 백작, 멘 백작, 낭트 백작, 브르타뉴 상위 주군, 아일랜드 영주, 키프로스의 영주이다.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용장, 군사 전략가로서의 능력도 매우 뛰어나서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에는 이슬람의 영웅이었던 살라딘의 유일한 맞수로 맹활약했다. 십자군 전쟁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토머스 F. 매든 세인트루이스 대학 중세학 교수는 그를 중세 유럽 최고의 전략가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사자심왕 (The Lionheart)이라는 별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용맹했고 즉위 중 대부분의 시간을 정복과 전쟁에 쏟았다. 또한 신체가 장대하고 근력이 강했으며 무기술과 기마에도 능했다. 리처드는 십자군 원정기간 동안 전사로서도 초인적인 무용담을 쌓았다.

○ 생애 및 활동
- 유년기
1157년 9월 8일, 리처드는 잉글랜드 왕, 노르망디 공작, 앙주와 멘 백작인 헨리 2세와 아키텐과 가스코뉴 여공작, 푸아티에 여백작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삼남으로 옥스퍼드에서 출생했다. 청년왕 헨리의 동생이자 브르타뉴 공작 제프리 2세, 존 왕의 형이다.
아키텐으로 이주한 뒤 다양한 학문을 두루 섭렵하기 위해 힘쓰고 라틴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웠으며 기사 작위를 위한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 1169년, 13세에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카스티야 공주인 콩스탕스 왕비의 차녀 아델과 약혼한다. 부왕 헨리 2세가 여전히 아키텐에 권력을 행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172년 6월에 16세의 나이로 보르도 대주교에 의해 푸아티에에서 아키텐 공작으로 정식으로 서임받았다. 원래는 파리에서 8살 아래인 프랑스 왕세자 필리프와 같이 자라며 우정을 쌓고 프랑스 왕 루이 7세에게 기사 서임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부왕 헨리 2세의 음모로 취소된 덕에 모후 엘레오노르 슬하에서 장성하여 모후와 각별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아키텐의 지배자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 1173 ~ 74년 대반란
헨리 2세는 일찍이 형인 차남 청년왕 헨리를 잉글랜드 왕, 노르망디 공작 및 앙주 백작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리처드에게는 아키텐을 상속하고, 사남 제프리에게는 브르타뉴를, 막내 존은 성직자의 길을 걷게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들들에게 통치권을 양도하는 것을 미루었고 청년왕 헨리의 상속지에 속했던 성 3개를 일언반구 상의없이 막내 아들 존에게 물려주기로 한 결정 또한 청년왕 헨리의 불만을 키웠다. 게다가 정무로 바빴던 헨리 2세는 아들들에게 소홀했고, 그로 인해 리처드와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애정이 깊지 않았고 업신여기는 태도가 드러났다.
1173년, 부왕으로부터 하루빨리 독립적인 권한을 얻어내고 싶었던 17세의 리처드와 형 헨리, 동생 제프리는 남편과 깊은 불화를 겪고 있던 모후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주도로 그녀의 전남편인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원조를 받기로 하여 파리에 집결하고 대반란을 모의했다. 이때 리처드는 프랑스 궁정에서 자연히 형제들과 함께 9살이 된 프랑스 왕세자 필리프를 만나게 되었고, 눈여겨볼 만한 점은 리처드가 루이 7세로부터 기사 서임을 받았다는 것이다.
리처드와 형제들은 루이 7세의 동의 없이는 부왕 헨리 2세와 평화를 이루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헨리 2세는 우선 아들들과 협상을 벌여 두둑한 보상으로 달래려 했으나 루이 7세는 그들이 거절하도록 부추겼다. 이러한 행위의 결과는 전쟁의 규모를 거대하게 확장시켰고 종국에 부자지간에 결코 회복할 수 없는 깊은 감정적 골을 남기게 했다.
1173년 여름, 동맹군은 노르망디를 침공하고 이것이 훗날 사자심왕의 첫 전투였다. 동맹군에는 스코틀랜드의 사자왕 윌리엄,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불로뉴 백작 마티외를 비롯한 수많은 권력가들이 가세했다. 이 대반란 뒤에는 당대 기록가들이 지목한 첫 배후, 바로 엘레오노르 다키텐이 존재했으나 나중에 아들들과 합류하려던 엘레오노르는 도중에 헨리 2세의 계략에 걸려 체포되고 장장 10년이 넘는 연금 생활에 처하게 되었다. 리처드는 사랑하는 모후의 체포 소식을 듣고는 당장 라로셀로 진군했지만 도시의 격렬한 반항에 부딪혀 승전보를 울리지 못하는 반면, 헨리 2세는 동맹군을 완전히 압도하여 불로뉴 백작은 전사, 루이 7세는 패배하여 도주하는 신세에 이르었다.
1174년 봄, 동맹군의 수익이 지지부진해지고 패색이 짙어진 상황을 판단한 프랑스 왕 루이 7세는 청년왕 헨리와 제프리만 챙겨서 헨리 2세와 협상을 열었고, 리처드는 이 배신에 격분하여 마지막까지 분투했지만 철저한 고립에 처했다. 1174년 9월 23일, 궁지에 몰린 리처드는 결국 부왕의 발 밑에 엎드려 무릎을 꿇고 눈물로 대성통곡하며 용서를 빌었고 형 헨리와 동생 제프리도 뒤따라 눈물로 부왕에게 용서를 비는 것으로 마침내 대반란은 종결되었다.

- 아키텐 반란 진압
이같이 ‘사랑이 없는’ 내전은 남프랑스 군벌들 사이에 반심을 야기했고, 아키텐 공작 리처드는 그들의 반란을 진압하며 다음 3년간 활발히 활동했다. 이 전쟁은 리처드가 지휘관으로 활약하여 처음으로 성공한 것으로, 여기서 그는 전투 기술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1177년, 리처드는 가스코뉴로 진격하여 아키텐 반군을 무자비하게 응징하고 이듬해 1178년, 헨리 2세가 아키텐에서 지내는 동안 리처드는 조언자의 역할에 머물렀지만 아버지가 잉글랜드로 건너간 뒤에 군 통솔권을 완전히 장악, 가스코뉴에 대한 군사 계획을 재개하여 1178년 4월, 타유부르 공성전을 벌인다.
이 성은 동시대에 난공불량으로 널리 믿어졌지만 리처드는 단 2주만에 파괴적이고 잔학무도한 공격으로 수비대를 굴복시키고, 그 여파로 나머지 아키텐 반군의 항복을 유도하였으며 그 자신은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위명을 크게 떨쳤다. 하지만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례 없는 포학한 패악을 떨었고 이 때문에 아키텐의 귀족들의 깊고 식지 않는 공분을 샀다고 전해진다. 헨리 2세는 이 승리에 대해 큰 기쁨을 표출하며 엄청난 예우를 다해 아들을 맞이했다.
- 골육상쟁
1179년 11월, 랭스에서 열린 13세인 프랑스 왕세자 필리프의 프랑스 왕 대관식에 참석하고 아키텐 공작의 권위에 걸맞는 선물을 하였으며, 주목할 만한 점은 이때 동생 브르타뉴 공작 제프리 2세와 함께 각각 아키텐 공작령과 브르타뉴 공작령에 대해 필리프 2세에게 개인적으로 충성 서약까지 했다는 것이다. 1181년, 리처드는 형인 청년왕 헨리, 동생 제프리와 힘을 합쳐 썽쎄흐와 플랑드르의 반란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필리프 2세를 구했으나 이듬해인 1182년 형 헨리와 동생 제프리가 반리처드 아키텐 봉신들과 결탁하여 대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아키텐으로 진격하고, 필리프 2세는 뒤에서 은밀하게 그들에게 용병을 지원하는 것으로 리처드에게 은혜를 되갚았다. 크리스마스에 모후를 제외한 가족들과 수많은 귀빈이 보는 자리에서 부왕 헨리 2세가 차남 헨리를 달래기 위해 리처드와 제프리에게 형에게의 충성 서약을 요구하자 제프리는 응했으나, 리처드는 부왕에게 “나의 주군은 필리프뿐이고 영지는 모후에게서 받은 것이니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형에게는 “내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직접 와서 싸워서 가져가라”라고 도발했다. 부왕의 아들간의 싸움 중재는 실패하고 전쟁이 재발하여 봄 동안 지속되었고 아키텐 귀족들의 움직임이 우려할 수준을 넘어서게 되자 상황의 위급함을 판단한 부왕이 리처드에게 가세한 뒤 리처드, 헨리 2세 대 청년왕 헨리, 제프리, 필리프 2세 구도에서 1183년 6월에 청년왕 헨리가 이질로 급사했을 때 비로소 중단되었다.
그 뒤 헨리 2세는 슬하에서 양육했던 리처드의 약혼녀인 프랑스 공주 아델과 막내 존의 결혼에 대해 상위 주군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서 동의를 받았고 프랑스의 플랜태저넷령에 대해 충성 서약을 하는 것으로 아들들에게 상속지와 상속 권한을 공고히 한 다음 상속에 대해 새로운 결정을 공포했다.
- 리처드는 아키텐을 포기하고 청년왕 헨리의 몫이었던 노르망디, 앙주, 잉글랜드를 상속받을 것.
- 아키텐은 막내 존이 양도받을 것.
분노한 리처드는 부왕에게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아키텐으로 달려가 전쟁 준비를 하였고 그와 동일하게 부왕의 눈 밖에 난 자식이었던 동생 제프리 2세는 위선적인 정치 공작을 펼쳐 부왕의 호의를 사면서 야심을 실현시키려 했다. 또한 상위 주군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의 우정 및 동맹을 두고 제프리와 경쟁을 벌였고 약혼녀인 프랑스 공주 아델에 대한 결혼을 선언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묵살되었다. 삼형제 사이에 벌어진 맹렬한 신경전은 전쟁으로 변질되었고 헨리 2세가 노르망디 상속인을 제프리 2세로 점찍은 정황이 밝혀지면서 리처드와 제프리의 불화는 삽시간에 극으로 치달았다. 리처드는 동생 제프리를 선택했던 상위 주군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 대한 협박조의 조롱하는 노래를 퍼뜨리는 것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한편,
제프리와 싸우겠다고 대규모 군사를 일으키고 브르타뉴 침공을 개시하기 직전, 부왕의 개입으로 이는 불발되었고 모후 엘레오노르 다키텐을 정치적 볼모로 앞세운 부왕의 명령에 굴복하여 아키텐 전체를 반환해야 했던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 이와 반대로 동생 제프리는 승승장구를 거듭했으며 그의 절친이자 플랜태저넷 왕가의 분열을 꾀하던 상위 주군 필리프 2세는 제프리를 헨리 2세의 후계자로 대우하고 리처드의 고달픈 상황을 철저히 외면하였다. 이같이 동생 제프리에 대해 정치적 열세를 면하지 못했던 리처드와 프랑스 공주 아델을 싫어하던 모후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분노를 삭히며 헨리 2세의 명령을 묵묵히 따르면서도 뒤에서 은밀히 결혼 동맹을 맺을 새로운 신부를 물색하였고, 전부터 헨리 2세에게 엘레오노르의 연금을 풀어주도록 청했을 정도로 모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던 나바라 왕 산초 6세 내외가 그들에게 동맹의 손을 내밀자 장녀인 베렝겔라 공주와 비밀리에 약혼 절차를 밟았다고 믿어진다.
하지만 1186년 8월 동생 제프리 2세가 파리에서 돌연 급사하자 리처드에게 국면을 뒤집을 기회가 찾아오고 거의 30세인 리처드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드디어 동맹을 맺게 되었다. 명운이 다하고 있던 헨리 2세는 가장 총애하는 아들인 막내 존을 위해 무리를 하여서라도 아키텐 상속 계획에 박차를 가하며 프랑스 공주 아델과 결혼시키려 했고, 대륙의 플랜태저넷령을 산산조각내어 정복할 야심을 숨긴 필리프 2세는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을 재촉하면서 부자를 이간질하는 가운데 상냥함으로 위장하여 리처드를 구워삶았고, 아키텐의 지배권을 꽉 쥐고 헨리 2세의 후계자 자리에 서고자 한 리처드는 필리프의 술수에 완전히 현혹되면서도 나바라 공주 베렝겔라와의 약혼에 대해선 철저히 비밀로 부치고 산초 6세 내외에게 신뢰를 주며 제각기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다.
1188년 11월 18일, 항구적 평화를 물색하려는 회담이 교황의 노력으로 열렸지만 헨리 2세가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 리처드를 공식 후계자로 인정하기를 주저하자 그 자리에서 리처드는 무릎을 꿇고 대륙의 모든 플랜태저넷령에 대해 필리프 2세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 이듬해인 1189년, 리처드는 필리프 2세와 협공하여 부왕과 전쟁을 재개하고 전세가 기울어지자 헨리 2세의 봉신들이 배반하여 그들에게 붙었으며 6월에 헨리 2세가 소수의 지지자인 서자 제프리, 윌리엄 마셜, 르노 다마르탱 등과 연합하여 맞서려 했으나 르망에서 대패하고 시농으로 퇴각하였다. 1189년 7월 3일, 리처드와 필리프는 서있기조차 힘든 헨리 2세를 회담장에 소환하여 3차 십자군 원정을 마친 즉시 아델과의 결혼, 가장 굴욕적인 조건들을 받아냈다. 3일 후 부왕이 병사하자 리처드는 대륙의 플랜태저넷령을 모조리 독식하고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 아버지 헨리 2세가 왕위를 계승하는 조건으로 아키텐을 존에게 양도하라고 명령하자 이에 반항, 거절하였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 자라왔던 고향을 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일단은 아버지와 화해를 했지만 지배권을 둘러싼 불만은 계속 남아있었기 때문에, 1188년에 헨리 2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한창 싸우던 중에 리처드는 아버지를 배반하고 필리프와 합세하였다. 1189년에 힘이 다한 부왕이 시농에서 병사하면서, 리처드는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였다.
리처드는 9월 30일 재위하자마자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기로 결정하였다. 왕실 금고나 세금, 병역 부담금만으로는 원정 비용을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 영지, 관직 등을 매매해 십자군 원정을 위한 자금을 모았다. 그렇게 자금이 모이자, 그는 병력을 모아 함선을 타고 잉글랜드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원정을 떠났다.
- 즉위와 숙청
1189년 9월,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리처드 1세는 난데없이 헨리 2세에 맞서 자신의 편을 든 사람들을 비열한 아첨꾼에 기생충 같은 인간들이라고 모조리 처벌함으로써 토사구팽해버리는 등 대대적인 숙청을 가하고 잉글랜드 왕국의 보물을 모두 차지했다. 대관식 날에 리처드에게 선물을 바쳐 혹여 발생할 화근을 피하려던 유대인들을 붙잡고 내쫓아 옷을 벗기고 후드려 팬다. 그의 대관식 날에 왕이 유대인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헛소문이 퍼져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량 살육이 벌어졌건만 리처드는 폭도들 중에 오로지 3명만 처형했는데 그나마도 살인죄가 아니라 기독교도 집에 불을 지른 방화죄였다. 이후 그는 제3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게 되는데, 전쟁 비용으로 무거운 세율을 매기고 재정적으로 나라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국가를 아주 말아먹을 생각까지 없었고, 동생인 존 왕의 문제도 있었기에 나름대로 조치를 취해놓았다.

- 3차 십자군과 살라딘
제3차 십자군은 베로니카,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도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였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한발 앞서 출발했다가 킬리키아에서 익사하고 만다. 필리프 2세와는 중간까지 동행하였다가 시칠리아 섬에서 합류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필리프 2세의 여동생 아델과의 약혼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나바라의 안초 6세의 딸 나바라의 베렝가리아와 약혼식을 올렸으나, 서로 반목하여 이후 개별 행동을 취하게 된다.
시칠리아에서는 새로이 왕으로 등극한 탕크레디가 리처드의 누이이자 전왕 구기에르무 2세의 미망인인 조안나의 유산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은데다가 그녀를 감금해버리자, 10월 4일 메시나를 기습 점령하여 탄크레드를 굴복시켰다.
그리고 시칠리아 왕과 메시나 조약을 맺어 탄크레드는 조안나에게 그녀 몫의 유산과 자유를 되찾아주고, 리처드는 탄크레드를 시칠리아의 국왕으로 인정하였다. 또한 리처드의 후계자를 조카인 브르타뉴 공작 아서로 명기하여 탄크레드의 딸과 결혼시키도록 했다.
키프로스에서 약혼녀인 베렝가리아와 합류할 예정이었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키프로스 태수가 그녀를 사로잡았기 때문에 리처드는 비잔티움 제국군과 전투를 벌여 키프로스를 점령한 다음, 1191년 5월 12일 베렝가리아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다.
6월 8일, 리처드는 필리프 2세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와 연합하여 아크레를 공략하였지만, 레오폴트 5세의 깃발을 찢어 그를 모욕했기 때문에 레오폴트 5세는 이러한 처사에 화를 내며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또 차기 예루살렘 국왕을 물색하던 리처드는 옛 신하이기도 한 기 드 뤼지냥를 내세웠지만, 필리프 2세는 티레 방어전에 큰 공을 세웠던 코라도 델 몬페라토 변경백를 내세워 역시 대립하게 된다.
결국 코라도는 예루살렘의 왕으로 선출되었지만 즉위 직전에 암살되어 리처드와 필리프 두 사람 모두의 조카에 해당되는 샹파뉴 백작 앙리 2세가 예루살렘 공주 이사벨과 혼례를 올려 왕으로 즉위하였으며, 리처드는 왕위 경쟁에서 밀려난 뤼지냥의 기에게 키프로스를 주어 위로했다.
필리프 2세는 이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여 병이 났다는 핑계로 프랑스로 돌아가 버렸다. 이 때문에 결국 단독으로 아이유브 왕조의 영웅 살라딘과 1년간 싸웠지만, 끝내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하고 1192년 9월 십자군의 아크레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것과 비무장한 그리스도인 순례자의 예루살렘 방문을 허락한다는 조건하에 3년간의 휴전 조약을 맺었다.
- 독일에서의 체포 및 석방
한편, 미리 귀환해 있던 필리프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6세와 결탁하여, 리처드의 동생 존의 왕위 찬탈을 지원하였다. 리처드는 그 음모를 듣고 귀로를 서둘렀지만, 도중에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당하여 베네치아 부근 해변에 상륙하였다.
리처드는 변장을 한 채 신분을 위장하여 육로를 통해 잉글랜드로 향했지만, 1192년 12월 빈에서 오스트리아 공작에게 사로잡혀 뒤른슈타인 성에 유폐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왕제 존은 리처드가 죽었다고 공표하고 왕위에 오르려고 했지만, 영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단념하였다.
1193년에 리처드의 신병은 레오폴트 5세에게서 하인리히 6세에게로 양도되었다. 하인리히로부터 필리프에게 넘겨버리겠다는 협박에 굴복하여 그가 제시한 터무니 없는 조건을 모두 받아들여 15만 마르크라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함과 동시에 나라 전체를 신성 로마 제국에 양도했다가 봉토로서 되돌려 받았다.
존과 필리프는 리처드의 석방을 많이 늦추기 위해 하인리히와 교섭을 했지만, 리처드와 하인리히 간에 교섭이 성립됨으로써 리처드는 1194년 2월에 풀려났다. 이때, 필리프 2세는 존에게 서신을 보내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리처드는 석방된 후 잉글랜드로 돌아와 존을 굴복시켜 왕권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채 1개월도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캔터베리 대주교 휴버트 월터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다음 필리프 2세와의 전쟁을 위해 프랑스로 떠났다. 이 시기에 그는 노르망디 방위를 위해 중동의 선진 요새 구축 기술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한 사나이 마 시로를 쌓았다.
- 죽음
1199년 리모주 자작령 샬뤼 성을 공격하던 중 석궁에 맞아 전사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42살이었다.
그의 시신은 퐁트브로 대수도원에 매장되었다.

○ 기타 및 평가
- 정치
리처드 1세는 상당 기간동안 경이로운 군사적인 재능에 비하여 정치력은 부족한 암군에 가까운 인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결과는 그가 단순히 군사지휘관으로서의 능력 뿐만이 아니라 왕으로서의 능력, 대전략안, 용인술 역시 상당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살라딘과 무슬림에 대한 태도
리처드는 애초에 이슬람 교도에 대해 증오심을 갖던 인물은 아니었다. 심지어 리처드는 여동생인 조안을 화평 사절로 온 살라딘의 동생인 알 아딜과 결혼시켜 예루살렘의 공동 통치자로 삼으려고 했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분쟁이 사라지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허나 이 계획은 당연하게도 가톨릭 성직자들의 반대와 더불어 “날 이슬람 교도에게 시집 보낼 생각이냐?”고 열받은 조안나의 반대에 직면하게 되자 리처드는 알 아딜에게 상황이 이러니 당신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당연히 살라딘의 동생도 개종할 리는 없으니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확실히 전략과 전술의 천재답지 않게 정치적 감각은 다소 떨어지며 즉흥적인 면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리처드는 평화 협상에 따라온 알 아딜의 아들인 알 카밀을 기사로 임명하기도 했다. 여동생을 이슬람 교도에 시집보내려던 계획이나, 적의 조카를 기사로 임명하는 등 이러한 행동들은 리처드가 이슬람 교도에 대해 맹목적인 증오심을 갖고 있던 인물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리처드는 십자군 원정에서 귀향길에 살라딘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리처드의 부하들이 조금만 더 성지에 머물렀다면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거라고 아쉬워하자, 리처드는 “만약 우리가 계속 남아 있었다면 살라딘은 결코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고 멋지게 평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리처드는 살라딘을 위대한 왕이라고 평했으며, 의심할 바 없는 이슬람 최고의 지도자라고 말한 적도 있다.

- 평가
적어도 당대에 전쟁에 관해서는 따라올 만한 사람이 없었다. 흔히 그의 라이벌이자 호적수로 손꼽히는 살라딘 또한 이슬람 세력을 통합하고 하틴 전투에서 기독교군을 궤멸시켜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키는 등 매우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으나, 그런 살라딘도 전략적으로 월등히 유리한 상황에서조차 리처드를 상대로는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비단 십자군 전쟁만이 아니라 잉글랜드에서의 권력 투쟁, 메시나 전투, 키프로스 전투 등은 물론이고, 나중에 프랑스의 왕 필리프와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리처드 1세의 무용담을 보면 단순한 야전 지휘관으로서만이 아니라 전략적인 측면도 매우 뛰어난 인물이라는 점도 알 수 있다. 당시 누구보다도 보급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군대는 언제나 충분한 보급을 받을 수 있었으며 부상병은 회향시켜 전비를 아끼고자 했다. 아르수프 전투와 그 전후의 진격 당시에도 리처드 1세는 온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태에서 무모한 내륙 진격을 시도하지 않고 한쪽 측면은 십자군에 참여한 도시 국가들의 해군으로 보호받게끔 해안선을 따라 진격하였으며, 해군의 함선에 보급품을 싣고 측면 엄호를 받아가면서 움직였다. 이처럼 리처드는 일신의 무예와 용맹도 대단했지만, 그뿐 아니라 전략 · 전술적인 안목에 있어서도 당대에는 따를 이가 없었던 천재적인 군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 토머스 매든은 리처드 1세를 중세 유럽의 군주들 중에서도 최고의 전략가로 평하였다. 그 항우와 비교되는 무력을 가졌으니 얼마나 강한 인물인지 짐작할수 있다. 살라딘이 전술적 승리가 아닌 전략적 승리를 한것도 재미있게 비교해볼수 있다.
특히, 당대 인물들이 흔히 성지라는 명성에 눈이 어두워 예루살렘 공략에만 집중했으나 리처드는 사실상 항구가 없는 예루살렘을 기독교 세력이 지배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 때문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먼저 살라딘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다른 십자군 지휘관들의 반대 및 프랑스 왕의 영국령 침범으로 인해 이집트 공략은 시행할 수 없었으나, 리처드의 계획이 전략적으로 올바른 판단이라는 것은 후세의 사가들의 공통된 의견이기도 하다. 리처드는 이집트 공략이 무산되자 과감하게도 예루살렘 점령을 포기하고 살라딘과 협정을 맺는 등의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필리프 2세에게 잃어버린 영지들을 수복하면서 샤토 가야르라는 성을 쌓았는데 워낙에 위치가 절묘해서 공성전의 대가인 그 필리프 2세도 리처드 1세 사후 6천의 병력으로 6개월간의 공성전으로 이 성을 함락시키기 전에는 노르망디 지역에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아군이 혼란에 빠진 것을 알자 리처드 왕은 말에 박차를 가해 속도 한 번 늦추지 않고 날듯이 구호 기사단까지 도착해 원조 부대로 데리고 간 부하들을 그곳에 풀어놓았다. 그러고는 투르크군을 밀치고 나아가 담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의 앞에서 적들은 양옆으로 픽픽 쓰러져갔다. 그렇게 그는 홀로 맹렬하게 투르크군을 밀어붙이며 적을 쓰러트렸고 그의 칼 끝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쪽을 공격하든 그는 자신을 위한 공간을 널찍이 확보한 가운데 사방으로 칼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그가 마치 낫으로 곡식을 베듯 적병의 머리를 계속 내려치며 가증스런 종족을 분쇄해나가자, 자기 동료들의 죽어가는 모습에 놀란 적병들은 전보다 더 넓은 공간을 그에게 만들어주었다. (중략) 위풍당당한 키프로스 말 위에 앉아 있던 리처드 왕은 자신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언덕으로 올라가 투르크 군을 만나는 족족 요절을 냈다. 적군들이 그의 앞에서 쓰러지면 투구들도 함께 쨍그랑거렸고, 한 번씩 내려칠 때마다 그의 칼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이날 그의 공격이 얼마나 맹렬했던지 투르크 군은 곧 불가항력적인 그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 군에게 무조건 길을 내주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_ 리처드 왕의 편력기
“He was a bad son, a bad husband, a bad king, but a gallant and splendid soldier.” (나쁜 아들이었고, 나쁜 남편이었으며, 나쁜 왕이었으나, 용감하고 빛나는 군인이었다.”) _ 스티븐 런처먼 경 (Sir Steven Runciman), 3권 75p.

○ 사자왕 리처드 1세의 심장은 진품, 방부처리의 물리적 증거 발견돼
1838년 7월 31일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120킬로미터 떨어진 루앙 (Rouen)의 대성당에서 발굴과 보수작업이 한창 진행중일 때, 지역사학자인 드빌 (Archille DeVille)이 가로 12.2, 세로 23, 높이 17센티미터의 납으로 된 네모난 상자를 발견한다.
상자의 겉면에는 12~13세기에 쓰이던 대문자 알파벳이 새겨져 있었다. “히크 이아케트 코르 리카르디 레기스 앙글로룸 (HIC IACET COR RICARDI REGIS ANGLORUM).” 우리말로는 “여기에 잉글랜드의 왕 리처드의 심장이 있노라” 하는 뜻이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사자왕’ 리처드 1세의 심장이 발견되는 순간이다.
지금은 루앙 자연사박물관에 보관중인 이 상자 안에는 이미 가루가 된 잔여물만이 남아 있다. 그런데 최근 프랑스 레몽 푸앵카레 대학병원이 잔여물에서 2그램의 시료를 채취해 분석한 결과, 리처드 1세의 심장이 유력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연구진은 분석 결과를 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 (Sciencetific Reports)’ 최근호에 발표했다. 논문의 제목은 ‘방부처리된 사자왕 리처드의 심장에 대한 생물학 및 인류학적 분석 (The embalmed heart of Richard the Lionheart (1199 A.D.): a biological and anthropological analysis)’이다.

- 십자군 전쟁에서 ‘사자왕’이라 불리다
리처드 1세 (1157 ~ 1199)는 영국의 왕 헨리 2세의 아들 여덟 명 중 가장 용맹스러웠다. 큰 키에 유달리 넓은 어깨까지 전사의 신체조건을 타고났다. 형제들을 물리치고 아버지와 전쟁을 벌인 끝에 1189년 7월 마침내 왕위를 계승받았다. 그러나 이듬해인 1190년 7월에 리처드 1세는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다며 영국을 떠났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자며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다. 목적을 달성한 제1 · 2차 십자군 전쟁 이후 이슬람 세력의 왕 살라딘은 대규모 침공을 통해 예루살렘을 손에 넣는다. 그러자 리처드 1세는 병력을 이끌고 제3차 십자군 전쟁을 시작한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의 고된 생활은 견디기 어려웠다. 결국 함께 참여한 프랑스의 왕 필리프 1세도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끝까지 남아 이슬람 세력들을 차례로 무찌르며 살라딘을 위협했다. 덕분에 리처드는 ‘사자의 심장을 가진 것처럼 용맹하다’는 의미로 사자왕 (Lionheart)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리처드 1세는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1192년의 휴전협정으로 기독교 순례자들의 성지 통행권을 보장받았다. 이후 필리프 1세가 지금의 프랑스 북부에 해당하는 자신의 영토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해 유럽으로 돌아온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 서부의 브르타뉴에서부터 북부의 노르망디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리처드 1세도 브르타뉴의 도시 앙주 (Anjou)에 살던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언어도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 사후 세 조각으로 나뉜 리처드 1세의 유해
1199년 3월 대부분의 영토를 회복한 리처드 1세는 프랑스 중부의 리모주 근교 살뤼 (Chalus)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전투에 참여했다. 3월 25일 초저녁에 철제 갑옷도 없이 공격을 독려하다가 날아온 석궁 화살이 왼쪽 어깨에 박힌다. 석궁은 일반 활과 달리 큰 상처를 입히기 때문에 부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화살 맞은 자리가 곪아 고생하던 리처드 1세는 마침내 4월 6일 사망한다. 그의 유해는 세 조각으로 나뉜다. 머리는 프랑스 서부 푸아투 지역의 샤루 (Charroux) 수도원으로 보내졌고, 몸은 브르타뉴 지역 앙주에 있는 퐁트브로 (Fontevraud)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심장은 방부처리되어 노르망디 지역의 중심지 루앙 대성당의 품에 안겼다.
당시 귀족들은 사후에 유해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자신이 다스리던 영지 곳곳으로 보냈다. 지역민들에게 왕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이후 행방이 묘연했던 리처드 1세의 심장이 1838년 발굴로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오랜 세월에 가루가 된 심장의 잔해를 최근 레몽 푸엥카레 대학병원 연구진이 분석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들은 지난 2010년 프랑스의 왕 앙리 4세 (1553 ~ 1610)의 유골을 감식해 유명세를 떨친 바 있다.
연구진은 2그램의 시료를 채취해 육안검사를 비롯해 화학성분 분석, 꽃가루 분석, 인류학·고고학적 분석, 현미경 분석 등 전반적인 생의학 검사를 실시했다. 발굴 이후 최초로 분석된 법의학적 분석이라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 다량의 증거가 리처드 1세 심장임을 가리키다
흰색과 갈색의 잔해물을 분석한 결과, 12~13세기 유럽에서 사용된 리넨천과 더불어 다량의 꽃가루가 발견되었다. 박하, 데이지, 도금양, 포플러, 초롱꽃 등 종류도 다양했다. 모두 리처드 1세의 사망 즈음인 봄철에 피는 꽃들이다. 심장을 바로 땅에 묻거나 상자에 넣지 않고 일정 기간 동안 지상에 두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사체를 방부처리 하는 데 사용되던 유향나무 수액도 검출되었다. 덕분에 리처드 1세의 심장에서는 역한 냄새 대신에 은은한 향기가 났다. 중세 기독교에서는 예수 탄생 때 동방박사들이 유향을 바쳤다는 근거를 들어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사체 방부처리에도 사용했다. 예수 사망 당시에도 향신료를 발라 무덤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학성분 분석에서는 칼슘 수치가 높게 나왔다. 당시 방부제로 쓰이던 라임이 사용되었다는 증거다. 또한 보관함에서 묻은 것으로 보이는 다량의 납, 주석, 철이 발견되었다.
소량의 구리, 수은, 안티몬, 비스무트도 검출되었다. 수은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사체를 방부처리해 미라를 만드는 데 종종 이용되었다. 귀족이나 왕족에만 사용되던 방식이다. 여러 가지 증거를 검토하고 연구진은 “리처드 1세의 심장이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리처드 1세의 심장을 방부처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은 사망 장소부터 루앙 대성당까지의 거리가 500km를 넘는다는 점이 첫 번째다. 용맹함의 상징이던 리처드 1세의 심장을 손에 넣고 전시함으로써 권위를 이어받으려는 목적이 두 번째다. 또한 고귀한 신분임을 강조하기 위해 각종 향신료를 바른 이유도 있다.
연구를 주도한 필립 샤를리에 (Philippe Charlier) 교수는 “방부처리된 심장에 대한 최초의 법의학 검사이자 유향을 이용한 중세 방부처리 기술에 대한 최초의 물리적 증거”라고 평가했다. 또한 박물관 측의 반대로 인해 유전자 검사는 실시하지 못했지만 “리처드 1세의 심장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다음 분석 대상으로 성녀 잔다르크의 처형을 명령했던 베드포드 공작의 유해를 조사할 예정이다. _ 임동욱 (ScienceTimes, 2013.3.28)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