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5년 6월 15일, 마그나 카르타 / 대헌장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에 영국의 왕 존 (John, 1166 ~ 1216)이 서명
마그나 카르타 혹은 대헌장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 라: Magna Carta, Magna Carta Libertatum)은 1215년 6월 15일에 영국의 왕 존 (John, 1166년 12월 24일 ~ 1216년 10월 19일)이 귀족들의 강요에 의하여 서명한 문서로, 국왕의 권리를 문서로 명시한 것이다. 왕에게 몇 가지 권리를 포기하고, 법적 절차를 존중하며, 왕의 의지가 법에 의해 제한될 수 있음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국왕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문서화하기 시작하여 전제 군주의 절대 권력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흔히 영국 민주주의의 시발점으로 강조되는 것과 달리, 문서 자체에 민주주의적 요소는 없다. 이 문서에서 민주주의의 시사점은 후대에 국왕과 대립이 발생했을 때 계속 확대 해석된 것이다.

– 마그나 카르타 / 대헌장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
.제작 시기: 1210년경
.서명일: 1215년 6월 15일
.서명자: 영국의 왕 존 (John)
*유네스코 유산등재
.국가: 영국 (United Kingdom)
.등재연도: 2009년
.표기: Magna Carta, issued in 1215
.소장기관: 영국국립도서관, 링컨대성당, 솔즈베리대성당
.관리기관: 영국 국립 도서관위원회, 링컨 성당 법인 및 링컨셔 카운티 의회, 솔즈베리대성당의 사제단
본래는 귀족의 권리를 재확인한 봉건적 문서였으나, 17세기에 이르러 왕권과 의회의 대립에서 왕의 전제 (Autocratic)에 대항하여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최대의 전거 (Authority)로서 이용되었다. 특히 일반 평의회의 승인 없이 군역대납금 (Scutage) · 공과금을 부과하지 못한다고 정한 제12조는 의회의 승인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서, 또 자유인은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에 의한 재판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으면 체포 ·감금할 수 없다고 정한 제39조는 보통법재판소에서의 재판요구의 근거로서 크게 이용되어 금과옥조 (Golden section)가 되었다.
이와 같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투쟁의 역사 속에서 항상 생각하게 되고 인용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문서로서 영국의 헌정뿐만 아니라, 국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근대 헌법의 토대가 되었다.

○ 경과
존 왕의 실정 (Misconduct)에 견디지 못한 귀족들이 런던 시민의 지지를 얻어 왕에 압력을 넣어 템스 강변의 러니미드에서 왕에게 승인하도록 한 귀족 조항을 기초로 작성되었다.
원문에는 개조번호 (Article number)가 없으나 18세기 이래 63개조로 정리되어 있다.
새로운 요구를 내놓은 것은 없고, 예로부터 관습적인 모든 권리를 확인한 문서로서 교회의 자유, 봉건적 부담의 제한, 재판 및 법률, 도시 특권의 확인, 지방 관리의 직권 남용 방지, 사냥, 당면한 애로 사항의 처리 등 여러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마그나 카르타를 단순한 계약서로 치부할 수는 없다. 효력이 한동안 제대로 없었기에 사문화된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상징성은 향후 권력의 분배와 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왕 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일부 귀족과 나누는 행위를 처음으로 가능케 한 계기였다. 이후 명예혁명과 산업 혁명 등을 겪으면서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구분이 불분명해지는 현대까지 권력의 이동의 향배를 정한 사건이었다.
또한 이 사건이 무려 13세기, 왕권신수설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대에 귀족들이 감히 일으킨 사건이라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물론 존 왕이 귀족들과 모의해서 왕좌에 올랐기 때문에 권력구도 자체가 절대적인 제왕과 충성스런 신료의 관계가 아니었고 형인 리처드 1세부터 발생한 막대한 부채 탕감을 위한 경제정책 등 국정을 잘 추진하기보다는 실정을 해왔던 탓도 크다.

○ 다양한 버전
– 1215년 버전
귀족들의 강요에 의해 존 왕은 1215년 마그나 카르타에 날인했다. 그러나 날인하자마자 준수를 거부하고자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청원했고, 교황은 1215년 8월 24일에 헌장이 무효라는 교서를 내렸다. 그러나 존 왕은 1216년 10월 19일에 사망했다.
‘마그나카르타’는 1215년에 러니미드 (Runnymede)에서 존 왕이 남작들을 만났을 때 인장을 찍은 단 하나의 원본 문서는 아니었다. 그 합의는 구두로 이루어졌고, 후에 왕의 필경사에 의해 왕의 칙허장으로서 문서로 선서를 하고 확인되었다. 1215년 6월, 전국에 ‘마그나카르타’의 사본을 많이 보냈지만 현재 이들 가운데 4부―영국 도서관에 2부, 링컨 (Lincoln) 대성당과 솔즈베리 (Salisbury) 대성당 문서보관소에 각각 1부씩 남아 있다. ‘마그나카르타’의 선포는 영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사건 중의 하나였다. 현재 남아 있는 4부는 영국 생활방식의 상징이며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물로서 지속적으로 전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 1216년 버전
존 왕이 죽고 어린 헨리 3세가 9세의 나이에 즉위했다. 헨리 3세의 후견인인 귀족들이 헨리 3세의 이름으로 1215년 헌장의 수정판을 반포 (issue) 했다.
– 1217년 버전
1217년 자유헌장 (Charter of Liberties)과 삼림헌장 (Charter of the Forest) 이라는 2개 헌장이 1215년과 1216년 헌장에 기초하여 헨리 3세의 이름으로 반포되었다.
– 1225년 버전
1217년의 2개 헌장을 약간 수정하여 1225년에 재반포했다.
– 1237년 버전
헨리 3세는 1225년의 2개 헌장을 확인하는 또 다른 헌장을 반포했다.
– 1297년 버전, 인스펙시무스
마그나 카르타 1225년 버전의 사본을 작성하기 위해 영장이 발부되었다. 옛 카르타 사본을 작성하기 위해 발부되는 영장에 따라 작성된 보고서를 인스펙시무스라고 부른다.
인스펙시무스의 서문은 라틴어로 “우리는 잉글랜드의 자유권에 관한 우리의 아버지, 선왕, 헨리의 대헌장을 조사한 결과, 아래와 같은”이라고 시작된다. 그리고 헨리 3세의 1225년 대헌장 원문을 옮겨놓고 있다. 이 인스펙시무스 (inspeximus)는 제정법기록집 (Statute Roll)에 등재되었고 법률가들에게는 권위있는 텍스트가 되었다.
마그나 카르타라는 정식 명칭은 1297년 버전인 인스펙시무스 때 부터 사용되었다. 마그나 카르타 최고의 권위자인 16세기 영국 대법원장 에드워드 코크가 인용한 버전이 인스펙시무스이다.

○ 마그나 카르타의 내용
다음은 마그나 카르타의 주요 조항 중 일부이다.
제12조 오래된 관습상 인정되어 온 것 (관례로 굳어진 것) 외의 과세 혹은 봉건 지원금은 귀족들의 자문을 거치지 않으면 부과할 수 없다. 다만 왕이 인질이 되었을 때의 협상금, 왕의 아들이 기사가 될 때 필요한 비용, 왕의 장녀의 혼인에 필요한 비용 등은 예외로 한다.
제21조 대귀족은 동료 귀족에 의해서만 처벌될 수 있다. 그러나 큰 죄목 (반역죄 등)일 경우로만 제한한다.
제39조 자유민은 동등한 신분을 가진 자에 의한 합법적 재판 혹은 국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체포, 감금, 추방, 재산의 몰수 또는 어떠한 방식의 고통도 받지 않는다.
조약의 내용들로 알 수 있듯이 대헌장은 오직 성직자와 귀족, 그리고 봉건 제후의 권리만을 보장하는 문서였다. 또한 이 문서에서의 자유민이란 성직자, 귀족, 자유 시민 (거주와 이주의 자유가 있는 평민)을 뜻한다.
○ 결과 및 의의
마그나 카르타로 인해 왕의 권한은 크게 줄어들었고 귀족과 성직자들의 권리는 크게 늘었다.
이는 곧 의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마그나 카르타는 원래 고위 귀족신분만을 위한 문서였으나 후대에 가서는 부르주아 시민들에 대한 것으로 확대 해석되었다.
특히 12조에서의 왕의 과세권 제한 내용은 이후에 발생한 권리 청원, 권리 장전 등의 영국 부르주아혁명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고, 영국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 에드워드 코크의 견해
에드워드 코크는 마그나카르타가 귀족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했다.
에드워드 코크 경은 마그나 카르타를 깊게 논평한 최고의 법학자 중의 한 명이다. 그는 1225년 판본을 해석했는데, 마그나 카르타가 귀족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했다. 코크는 마그나 카르타가 수백년 간 잘못 해석되어 왔다고 비판했다. 그는 마그나 카르타의 자유들 (liberties)이 개인의 자유 (individual liberty)와 같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코크는 마그나 카르타의 자유들을 보완하기 위하여 1628년 권리청원을 제정했다. 권리청원을 제정하는 토론 중에, 코크는 국왕의 주권을 부정하는 유명한 주장을 했다. 그는 국왕이 아니라 성문법이 절대적이라고 믿었다.
‘마그나 카르타‘ 서명자, 잉글랜드의 왕 존 (John, 1166 ~ 1216) 일명 ‘무지왕‘ (Lackland)에 대하여
존 (John, 1166년 12월 24일 ~ 1216년 10월 19일)은 1199년부터 1216년 사망할 때까지 잉글랜드의 군주였다. 그는 플랜태저넷가의 세번째 왕이었다. 존은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의 전쟁에서 노르망디 공국을 비롯한 프랑스 내 영토를 대부분 잃었고, 이는 13세기 앙주 제국이 붕괴하고 프랑스의 카페 왕조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존의 치세 말기에 발발한 제1차 남작 전쟁에서 존은 오늘날 영국의 헌법의 기초가 되었다고 판단하는 ‘마그나 카르타’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에 서명했다.

– 존 (John)
.별호: 무지왕 (Lackland)
.출생: 1166년 11월 24일, 옥스퍼드 보몬트 궁
.사망: 1216년 10월 19일, 노팅엄셔 뉴어크 성
.매장지: 우스터 대성당
.왕조: 플랜태저넷
.가문: 앙주
.부모: 부) 헨리 2세, 모)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
.배우자: 클로체스터 백작부인 이사벨라, 앙굴렘 여백작 이사벨라
.자녀: 헨리 3세, 콘월의 리처드, 스코트인의 왕비 조안, 신성로마황후 이사벨라, 펨브룩 백작부인 엘레오노르
* 잉글랜드의 군주
.재위: 1199년 5월 27일 ~ 1216년 10월 19일
.대관식: 1199년 5월 27일
.전임: 리처드 1세 / 후임: 헨리 3세
* 아일랜드 영주
.재위: 1177년 5월 ~ 1216년 10월 19일
.전임: 헨리 2세 / 후임: 헨리 3세
존은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사이의 셋째 아들이었다. 존은 “무지왕 존”이라고 불렸는데, 어떠한 영토도 물려받지 않을 것이라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존은 그의 형제들인 헨리 청년왕, 리처드, 조프리가 1173년부터 1174년까지 일으킨 반란이 실패한 이후 아버지에게 가장 사랑을 받게 되었다. 1177년 존은 아일랜드 영주로 임명되었고, 유럽 대륙과 잉글랜드에 있는 영토도 하사받았다. 헨리 2세와 아들들 간의 전쟁은 청년왕 헨리와 조프리의 사망으로 끝났다. 존은 이후 그의 형인 리처드가 제3차 십자군에 참전했을 때 리처드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이후 그는 리처드가 1199년 사망했을 때 왕위에 올랐다. 1200년 르굴레 조약을 통해 필리프 2세는 프랑스에 보유한 앙주 제국의 영토에 대해 존의 소유권을 인정했다.
1202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재발했을 때 존은 초기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물자의 부족과 지역민에 대한 잘못된 대우로 1204년 북부 프랑스에 보유한 영토를 잃고 말았다. 그 후 10년 동안 존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세금을 거두고 그의 군대를 개혁했으며 유럽 본토의 여러 나라들과 동맹을 맺었다. 존의 사법 개혁은 잉글랜드 법에 큰 영향을 미쳤고, 추가적인 세입원을 제공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의 갈등으로 1209년 존은 파문되었지만 갈등은 1213년 종식되었다. 1214년 존은 필리프 2세를 격퇴하고자 했지만 부빈 전투에서 잉글랜드 왕국의 동맹군이 패배하면서 존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존이 잉글랜드로 귀환했을 때 존의 재정 정책과 잉글랜드의 권위있는 귀족들에 대한 대처에 불만이 많던 대부분의 남작들이 그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존과 잉글랜드의 남작들은 1215년 마그나 카르타에 합의했지만 양쪽 모두 조약의 조항에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 루이 8세의 지원을 받은 남작들이 제1차 남작 전쟁이 일으켰다. 전쟁은 곧 교착상태가 되었다. 1216년 존은 동부 잉글랜드에서 전쟁을 이끄는 동안 이질로 사망했다. 존의 아들인 헨리를 지지하는 세력이 루이 8세와 반군을 무찔렀다.
당시의 기록들은 왕으로써 존의 행동에 대해 대부분 비판적이었고, 그의 치세는 16세기부터 지금까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정기 개정과 중요한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다. 역사학자 짐 브래드버리는 존의 긍정적인 면에 대한 현재의 역사적인 입장을 요약하였고, 존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열심이 일한 행정가, 유능한 사람, 유능한 장군”이라고 여겨진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역사학자들은 존이 왕으로써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역사학자 랄프 터너는 존에게 소심함, 심술궂음, 잔인함과 같이 “재앙적인, 심지어 위험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부정적인 면은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 작가들에게 많은 글감을 제공했으며, 존은 로빈 후드 전설을 묘사하는 영화나 이야기에서 악당으로 묘사된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