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1년 4월 11일, 킵차크 칸국의 바투 칸 (Batu Khan, 1207 ~ 1255)이 모히 전투에서 헝가리의 벨러 4세 격퇴
바투 (Batu Khan, 1207 ~ 1255년)는 몽골 제국 킵차크 칸국의 칸 (재위 1242 ~ 1255년)으로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주치 칸의 차남이다. 주치 칸의 아들들 중에 훌륭한 칸이라는 별명의 그는 아버지 속령에 대한 통치권을 계승하였다.

– 바투 칸 (Batu Khan)
.휘: 보르지긴 바투 (孛兒只斤 拔都, 패아지근 발도)
.출생: 1205년, 카묵 몽골
.사망: 1255년, 사라이
.왕조: 금장칸국
.가문: 보르지긴
.부모: 부) 보르지긴 주치, 모) 온기라트 우크하
.국적: 몽골
.자녀: 사르타크 칸, 울라크치 칸, Toqoqan, Andewan Khan
.손주: 뭉케 테무르 칸, Feodora Sartakovna, 울라크치 칸, 투다멩구 칸, Tartu Khan 등
* 청장 칸국의 칸
.재위: 1227 ~ 1255년
.전임: 주치 칸 / 후임: 사르타크 칸
몽골인들은 바투를 생 칸 (Сайн хаан)이라 불렀는데, ‘좋은 임금’이라는 의미이다.

○ 생애 및 활동
바투의 영토는 이르티쉬의 서쪽인 세미팔라틴스크, 악몰린스크, 투르가이 또는 약튜빈스크, 우랄스크, 아다지, 호레즘 본토 (히바)를 포함하였고, 또한 킵차크 인들의 땅부터 볼가 강 서쪽의 정복지인 제베와 수베에테이의 원정으로 얻은 땅을 포함하였다.
1227년 8월 18일 칭기스 칸이 죽은 뒤, 혈통 문제가 불거져 바투와 칭기스 칸의 다른 손자들 간의 알력다툼이 나타났다. 우구데이 칸은 주치의 혈통 문제를 거론하며 바투를 모욕한 자신의 아들들을 책망했지만, 사촌들에게 모욕을 당한 바투는 1237년 킵차크 칸국을 건설하고 몽골 본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끊어버렸다.
바투는 몽골 전승에는 ‘훌륭한 임금’이라 하나, 루스인들에게는 무자비한 정복자로 알려져 있다. 바투는 1237년에 루시의 도시 쿠르스크, 벨고로드, 랴잔 등을 포함한 12개의 도시를 단 5일만에 무너뜨렸고, 1238년에는 루스 노브고로드 주의 크레스테츠키 군을 침략했다.
1241년 4월 11일 셔요 강 인근에서 일어난 모히 전투에서 헝가리의 벨러 4세를 무찔렀다.
그는 칭기즈 칸 가문의 장로로서 제국의 대칸을 둘러싼 권력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여, ‘대칸 옹립자’도 알려져 있다.
1241년에 우구데이 칸이 죽자 대칸의 자리를 두고 우구데이의 아들인 귀위크와 바투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1246년, 귀위크는 바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대칸 에 올랐다.
귀위크의 즉위 이후 두 사람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1248년에는 전쟁 직전까지 치닫았지만 그 해에 귀위크가 사망하여 무산됐다. 그 이후 바투는 툴루이 의 왕비 소르칵타니 와 손 잡고 우구데이계 와의 분쟁이 다시 발생했다. 바투는 1251년에 쿠릴타이를 통하여 툴루이의 장남 몽케가 대칸에 오르도록 도왔다.
바투와 그의 장남 사르타크가 죽었을 때 바투의 형제 베르케 (1207 이후 ~ 1266)가 킵차크 칸국을 계승하였다. 베르케는 몽골의 그의 사촌들과 통합하려하지 않았으며 훌라구 칸과는 전쟁을 하였다. 그러나 베르케는 중국을 그의 이론적인 상부로 공공연히 인식하였다. 사실 베르케는 그때까지 독립적인 군주였다. 다행스럽게도 베르케는 유럽 공략에 관하여 바투와 이해를 공유하지 않았다.
바투는 적어도 4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토코 칸은 차남이다.

○ 평가
몽골 전승에 의하면 현명하고 온화한 칸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러시아의 전승에는 지옥에서 올라온 무자비한 폭군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당시 동유럽에서 몽골군의 악명은 자자했는지 바투가 한 러시아 귀족의 아들을 잡고 금발벽안의 모습에 반해 어루만졌는데, 그가 바투의 손을 치자 분노해서 죽였다는 얘기도 있다. 당대의 러시아 시문학에서는 우리는 열심히 싸웠는데 하느님의 군대에게 이길 수는 없었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의외로 군사적 능력은 시원찮은 면이 많았다. 기실 원정군에서 실제로 부대를 지휘한 건 칭기즈 칸 이래의 개국공신이자 백전노장 수부타이일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토르조크 전투에서는 2주나 허비하고도 못 이겨 수부타이 불러와서 이기고 코젤스크 전투에서는 7주를 허비하고 병력도 4천 명이나 잃었는데 그런데도 못 이겨 다른 부하의 도움을 받아서야 겨우 이겼다.
심지어 모히 전투에서는 수부타이가 세운 작전을 무시하고 멋대로 나섰다가 팔합독이라는 본인이 신임하는 장수가 전사했다.수부타이 덕에 이긴 후에는 분했는지 수부타이에게 늦게왔다며 화풀이했지망 수부타이 덕분에 이긴 거 맞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수부타이는 바투의 패배를 미끼 삼아 헝가리군을 물리친다.
다만 바투가 상황 판단력만큼은 좋았다는 의견도 있는데, 본인의 능력을 알고 지휘권을 사실상 수부타이에게 넘긴 덕분인지 당시 몽골군은 큰 패배를 당한 기록도 그다지 없고 동유럽까지 진출하며 세계 최강 명성을 쌓아올린다.
실제 바투는 군사적 능력보단 정치적 능력을 더 주목해야 하는데, ‘사인 칸’이라는 별명이나 구유크 사후 후계 문제에 적극 개입하며 몽골 제국 내에서 주치가의 영향력을 확대한 점, 킵차크 초원 지역에서 몽골의 지배권을 굳게 다진 점 등을 종합해 보면 정치력이 결코 모자란 인물은 아니었다. 실제 바투와 이후 바투 후손들의 행적을 보면 바투는 성공한 편이다. 그가 세운 킵차크 칸국도 다른 칸국들처럼 혼란이 좀 있기는 했지만 우구데이 칸국 1310년 멸망, 차가타이 칸국 1370년 멸망, 일 칸국 1355년 멸망을 기록한 것에 비해 킵차크 칸국은 무려 1502년까지 지속되었고, 그 후신 국가들은 대부분 16세기 중반에 멸망했지만 크림 칸국은 19세기까지 지속되었으니 어찌보면 최후의 승자다. 본가도 몽골제국 – 원나라 – 북원 등으로 이어지다가 17세기에 결국 대칸 자리가 청나라에 넘어간 것과 비교하면 참 오래 살아남은 셈이다.
다만 바투가 그렇게도 악명이 높은 다른 이유가 있다면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수부타이와는 달리 잘 싸우지는 못했지만 바투는 꼭 정복한 곳마다 무자비하게 짓밟고 다녔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