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0년 4월 6일, 제7차 십자군 원정 중 파리스크르 전투에서 성왕 루이 9세 (Louis IX, 1214 ~ 1270; 일명 ‘용맹왕’ le Prudhomme)가 아이유브 제국군에게 패배해 포로로 잡힘
루이 9세 (Louis IX), 통칭 ‘용맹왕’ (le Prudhomme)은 1214년 4월 25일 푸아시에서 태어나 1270년 8월 25일 튀니스 근처 카르타고에서 사망한 카페 가문의 프랑스 왕으로, 보통 생 루이 (Saint Louis)로 더 많이 불린다.
제7차 십자군 원정 중 파리스크르 전투에서 루이 9세 (Louis IX, 1214 ~ 1270; 일명 ‘용맹왕‘ le Prudhomme)는 아이유브 제국군에게 패배해 포로로 잡히는 일이 발생한다. 파리스크르 전투는 1250년 4월 6일 프랑스 왕 루이 9세 (훗날 성 루이 <Saint Louis>)가 지휘하는 프랑스의 십자군과 투란샤가 지휘하는 이집트 (당시 아이유브 왕조) 군대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날 전투에 패한 수천의 십자군이 살해당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루이 9세와 그의 귀족들은 그들이 도망친 모니아트 아브달라의 마을 근처에서 사로잡혔다. 루이 9세는 살해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자말 아드 딘 알 살리히라는 환관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
루이 9세는 1226년 사망할 때까지 43년이 넘는 치세를 통치했다.
생전에 성인으로 여겨진 루이 9세는 1297년 가톨릭교회에 의해 시성되었다.
– 루이 9세 (Louis IX)
.별호: 성왕 (聖王)
.출생: 1214년 4월 25일, 프랑스 푸아시
.사망: 1270년 8월 25일, 북아프리카 튀니스
.매장지: 생드니 대성당
.가문: 카페 왕가
.부모: 부) 루이 8세, 모) 블랑카 데 카스티야
.배우자: 마르그리트
.자녀: 필리프 3세, 로베르 드 클레르몽, Agnes of France, Duchess of Burgundy 등
* 프랑스의 왕
.재위: 1226년 11월 8일 ~ 1270년 8월 25일
.대관식: 1226년 11월 29일, 랭스 대성당
.전임: 루이 8세 / 후임: 필리프 3세
프랑스의 44대 왕이자, 카페 직계 왕조 출신으로는 9대 군주인 루이 9세는 루이 8세 “사자왕 루이”와 블랑슈 드 카스티유 왕비의 네 번째, 혹은 다섯 번째 자식이자 알려진 것으로는 두 번째 아들이다. 루이 9세는 어머니 블랑슈 드 카스티유 왕비로부터 어린 시절 전반에 걸쳐 매우 엄격하고 독실한 교육을 받았다.
형제들 가운데 살아남은 큰 형이던 루이 9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불과 12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루이 9세는 1226년 11월 29일 랭스 대성당에서 축성 받았으나, 왕대비인 어머니가 루이 8세의 유언에 따라 새 군주가 성인이 될 때까지 왕국의 섭정을 맡았다.
성인이 되자 루이 9세는 카페 왕조와 플랜태저넷 가문 사이의 대립을 끝내고, 왕국 내부의 확장을 중시하여, 노르망디, 앙주, 투렌, 멘, 푸아투에서 왕권을 강화하며 특히 보케르와 카르카손 판관령을 합병했다.
루이 9세는 기독교적 가치에 영향받아 정신적, 정치적 힘이 한 개인에게 강생되어질 수 있다는 이념을 세우는 데 기여한 통치를 펼쳤다. 그는 공공복지라는 개념을 위해 봉건제의 오용을 완화하였으며, 군주를 “지고의 심판자”로 보이게끔 왕도를 발전시켰다. 이 같은 방법으로 루이 9세는 프랑스를 오직 왕과 봉신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에 바탕을 둔 봉건 군주국에서 국가 수반으로서의 왕과 국민의 관계에 바탕을 둔 근대 군주국으로 점진적으로 이행했다.
루이 9세는 실로 국민들이 정의로운 힘을 따르는 왕국을 후대에 물려주고자 한 개혁왕이었다. 그는 왕의 명으로 40일간 사적 전쟁을 금하는 “40일왕” (quarantaine-le-roi) 제도를 다시금 도입하고, 무죄 추정의 원칙을 따르고, 고문을 완화하며, 신명 재판과 사적 복수를 금하고, 재판결을 위해 왕에게 호소할 수 있는 격쟁 (supplicatio) 제도를 도입했다. 본인의 명성이 왕국의 국경을 넘어서까지 전해지며, 루이 9세는 유럽의 여러 왕국들 사이를 중개하기도 했다. 루이 9세는 또한 왕국에 단일 통화를 도입하였으며, 훗날 의회와 감사원이 될 기관들의 창립을 추진하였다. 매우 독실했던 루이 9세는 여러 교회, 수도원, 병원을 건립하고 빈자들을 도우며, 몽골 군주들의 개종을 도모하기도 했고, 소르본 대학교 개교를 지원했으며, 수난 성유물들을 얻어 이를 보관하고자 1242년 생트샤펠을 건설했다.
루이 9세는 1297년 8월 11일 생 루이 드 프랑스 (saint Louis de France)라는 이름으로 손자 필리프 4세 미남왕의 추진을 받아 보니파시오 8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루이 9세의 전례 축일은 그의 사망일을 기념하여 8월 25일로 정해졌다. 오늘날에는 프랑스 경제, 지식, 예술 재부흥을 일으킨 군주로 평가받는 루이 9세는 할아버지 필리프 2세 오귀스트, 손자 필리프 4세 미남왕과 함께 세 명의 위대한 카페 직계 군주 중 한 명으로도 평가받는다.
○ 생애 및 활동
– 어린 시절과 교육
할아버지 필리프 오귀스트의 치세인 1214년 4월 25일 푸아시 성에서 태어난 훗날의 루이 9세는 이후 왕위에 오르게 될 루이 8세 “사자왕”과 블랑슈 드 카스티유의 다섯번째 자식이자 차남이었다. 루이 9세는 네 살 물벼 형이 요절하자 실질적으로 계승권을 얻게 되었다. 태어나자마자 노트르담 드 푸아시 사목구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야말로 진정한 탄생으로 여겼던지라, 이후에도 그곳은 루이 9세가 애착을 갖는 장소로 남아, 편지에 “루이 드 푸아시”, 또는 “푸아시 영주 루이”라고 서명할 정도로 사랑했다.
루이 9세의 부모, 특히 블랑슈 드 카스티유 공주가 매우 철저하게 아이를 교육시킨지라, 루이 9세는 종교적, 도덕적으로 왕위에 걸맞는 역할을 다하며 교회 보호에도 준비된 이로 성장하게 된다. 어린 왕자는 또한 늙어가는 할아버지, 국왕 필리프 오귀스트 곁에서 자랐는데, 이로 인해 할아버지로부터 큰 영향을 받게 된다. 필리프는 손자를 보게 된 첫 프랑스 국왕으로, 이는 가문에서 아이의 힘을 키웠다.
– 루이 9세 치세
루이 9세 치하에서 프랑스는 번영과 안정을 누렸으며, 서유럽의 중심 국가로 부상한다. 특히 루이는 스스로가 프란치스코회 제3회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프란치스코회의 이상에 공감하였기에 금욕과 청빈, 자선을 직접 실행했다. 복장과 식사에서 왕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청빈과 금욕적 태도를 유지하고자 했으며, 나병 환자와 맹인들을 왕실에서 세운 구호소에서 직접 돌봐주고 빈민들의 발을 씻어주는 등 중세인들이 생각하던 이상적인 그리스도교 군주로 존경을 받았다.
국외에서 참가한 십자군 원정은 성과가 없었지만, 내치는 성공해서 파리에 대학교를 세웠으며 알비 십자군에 참가해 남프랑스에 뿌리내렸던 이단인 카타리파를 소탕했다. 알비 십자군은 1229년에 성공했지만 아직 카타리파 잔당이 남아 있었는데, 루이 9세 때 잔당을 소탕하면서 14세기에 카타리파는 소멸했다. 이 과정에서 남프랑스에 대한 프랑스 왕실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즉 루이는 개인으로서는 신심이 깊은 인물이고, 왕으로서는 통치 이데올로기로 그리스도교식 도덕 군주를 내세워서 신념에 따른 통치에 성공했고, 세속적으로는 부국강병을 이루었기에, 당대 그리스도교 군주가 보여줘야 한다고 여겨지던 덕목들을 모두 이룩했다고 할 수 있다.
카페 왕조의 국왕이었기에 동시에 발루아 왕조와 부르봉 왕조의 시조에 해당하기도 한다. 발루아와 부르봉 모두 작위명일 뿐, 카페 왕조의 방계 집안이다. 그 것도 살리카법에 적용되지도 않는 부계 후손들이다. 한국,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개념에선 다 한 가문, 한 왕조인 셈. 이 사람의 자식들에게서 카페 왕조와 부르봉 왕조로 나누어졌다. 그의 차남 필리프 3세는 카페 왕조의 왕이 되었고 막내아들이자 6남 로베르는 클레르몽 백작이 되었는데, 그 로베르가 부르봉-라르샹보 (Bourbon-l’Archambault) 시 (市)를 다스리던 소영주 가문이던 부르봉 가문의 상속녀, 베아트리스와 결혼, 아들을 낳으면서 그 아들인 루이가 부르봉 공작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그의 먼 후손인 앙리 4세가 부르봉 왕조를 창건했다. 더불어 자신의 후계자였던 필리프 3세의 막내아들, 발루아 백작 샤를의 아들 필리프 6세는 발루아 왕조를 창건했다.
– 독실한 가톨릭 군주
프랑스 군주 중 유일하게 시성된 왕으로 미국의 세인트루이스 시, 프랑스의 생 루이 섬, 브라질의 상루이스 시 등의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성 루도비코’로 표기하고 있으며 축일은 8월 25일. 다만 현재 가톨릭에서 흑역사 취급하는 십자군 공적 (알비파 십자군 포함, 다만 알비파 십자군 시절에는 아직 어려 섭정 중이었다.)이 시성에 영향을 주었고 반유대주의자 였는 데다가 후손 필리프 4세가 막나갈 때의 “너 조상 좀 본받아라”라는 교황청의 정치적 의도가 시성에 영향을 주었다. 정치적인 이유가 시성에 영향을 주고는 했기 때문이다.
루이가 이미 살아있던 시절에 성인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신심이 매우 깊은 군주이기는 하였으나, 그의 시성이 사후 27년 만에 이루어진 것은 이러한 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의 신심과 후대의 정치적 상황 등이 모두 시성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주었겠지만 말이다.
지금도 전통 가톨릭 단체에서 에콰도르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 대통령과 함께 통치자·정치인의 이상으로써 특별히 존경하는 성인이다.
전통 가톨릭 단체의 사제들이 강론 중에 자주 언급하는 성인 중 한 명이라고 한다.
○ 가계
프랑스 국왕 루이 9세는 상스 대성당에서 프로방스 백작 레몽베랑제 4세와 베아트리스 드 사부아의 딸, 마르그리트 드 프로방스 (1221 ~ 1295)와 결혼했다. 둘은 총 11명의 자식을 가졌다.
블랑슈, 루이 9세의 맏이로 1240년 7월 11일에 태어났으나, 루이 9세가 결혼하고 6년이 지난 1243년, 3살 때 요절했다.
이자벨, 1242년 3월 18일 출생. 1258년 무렵 티보 2세와 결혼하여 나바르 왕비가 되었다. 남편은 제8차 십자군으로 인해 사망하고 둘 사이 자식은 없었다.
루이, 1244년 2월 25일 출생. 왕위를 계승할 세자로서 코르베유 조약에 따라 1258년 이자벨 데 아라곤과 약혼했다. 허나 16살 때 맹장염으로 추정되는 사인으로 요절했다.
필리프 3세, 1245년 5월 1일 출생. 맏형 루이의 사망으로 1260년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형 대신 이자벨 데 아라곤과 약혼하여 1262년 오순절이 되서야 클레르몽탕노베르뉴에서 결혼하게 된다. 1270년 8월 25일, 아버지 루이 9세가 사망하자 필리프 3세 “용맹왕 (le Hardi)”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아내의 사망 이후 마리 드 브라방과 재혼했다. 후계 있음.
장, 1248년 태어나 같은 해 요절했다.
장 트리스탕, 아버지가 무슬림에게 포로로 잡힌 1250년 4월 출생. 트리스탕이라는 중간 이름은 이러한 상황 때문에 주어졌다. 장 트리스탕은 1266년 무렵 욜랑드 드 부르고뉴와 결혼하여 외드 드 부르고뉴가 죽자 느베르 백작이 되었다. 8차 십자군으로 인해 1270년 8월 3일 후손 없이 사망했다.
피에르, 1251년 부모가 순례를 갔을 때 거룩한 땅에서 출생. 1263년부터 잔 드 샤티용과 약혼하여, 1271년 또는 1273년 잔 드 샤티용과 결혼했다. 부부는 두 아들, 루이와 필리프를 가졌으나 요절했다.
블랑슈, 1253년 오빠 피에르처럼 거룩한 땅에서 출생. 아버지 루이 9세는 딸이 모뷔송 수도원의 수녀가 되기를 원했으나 이를 거부했으며, 심지어 교황 우르비노 4세에게 만약 자신이 아버지의 명에 따라 서약한다면 이를 풀어줄 것을 탄원했다. 그녀는 1268년경, 카스티야 인판타 페르난도 데 라 세르다와 결혼했다. 후계 있음.
마르그리트, 1254년 출생. 1271년 2월 계약으로 브라방 공작 장 1세 “승리왕 (le Victorieux)”과 결혼했다. 1272년, 출산 중에 사망하며 유일한 자식을 낳았으나 아이 역시 요절했다.
로베르, 1257년 출생. 1272년 부르봉 부인 베아트리스 드 부르고뉴와 결혼했다. 부르봉계 카페 가문의 창립자이자, 훗날의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남성 직계 선조이기도 하다.
아녜스, 1260년 출생. 1273년 계약으로 부르고뉴 공작 및 테살로니카 왕위 주장자이던 로베르 2세 드 부르고뉴와 결혼했다. 후계 있음.
○ 유언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무엇보다 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없으면 구원이 있을 수 없다. 아들아, 하느님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 즉 온갖 대죄를 멀리해야 한다. 어떤 대죄를 범하기보다는 온갖 고통을 당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해야 한다.
(…)
가난한 사람과 비참한 사람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네 힘이 닿는 데까지 그들을 돕고 위로해 주어라. 하느님께서 네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대해 감사드려라. 그러면 한 층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리라. 네 수하 사람들을 언제나 정의롭게 대하며 좌우 어느 쪽으로건 기울어지지 말고 중도를 택하라. 옳은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못할 때에는 부자보다 가난한 자 편에 있어라. 너의 모든 수하 사람들 특히 성직자나 수도자들 가운데 평화와 정의가 깃들이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하여라. – 루이 9세가 아들에게 남긴 유언에서 (Acta Sanctorum Augusti 5 [1868], 546)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