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8년 11월 18일, 스코틀랜드의 도미니크회 신학자•철학자 둔스 스코투스 (Duns Scotus, 1265/1266 ~ 1308) 별세
둔스 스코투스 (Duns Scotus, 1265/1266년 ~ 1308년 11월 18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중세 스콜라 신학자·철학자이자, 가톨릭의 복자이다. 축일은 11월 8일이다.
‘영민한 박사’ (Doctor Subtilis)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오컴의 윌리엄과 함께 스콜라 철학의 중요한 학자 중 한 명이다.
○ 생애 및 활동
1265년 요한 스코틀랜드의 Duns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 삼촌은 그 당시 스코틀랜드 감목구장이었던 Elias이다.
1278년 둔스의 요한은 Haddington에 있는 프란치스칸 학교에 입학하였고,
Dumfries에서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더 높은 차원의 학문 공부를 위해 옥스퍼드와 파리로 보내졌다.
1291년 3월 17일 그는 Northampton에서 Lincoln의 주교였던 Oliver Sutton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캠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철학과 신학 교수로 일하였다.
파리 대학의 프란치스칸 학부에서도 가르쳤는데, 그 후 그는 보니파시오 3세 교황을 대항하여 프랑스 국왕 편에 서는 것을 거부하였기에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이것은 1303년의 일이었다.
스코투스는 그 당시 총봉사자였던 Valboa의 Gonzalvus의 추천으로 1305년 파리 대학에 복직되었다.
그는 1307년 다시 파리를 떠나 쾰른에 있는 작은 형제들의 학교로 갔다.
그는 1308년 거기에서 세상을 떠났다.
둔스의 요한은 프란치스칸 학파의 신학자이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의 수호자로 유명하게 되었으며, 또한 프란치스코 수도회서, 특히 쾰른과 이태리의 Nola에서 공경되기 시작하였다.
1991년 7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요한 둔스 스코투스를 복자품에 올렸고, 1993년 3월 20일 그를 공경하는 전례를 거행하였다.
- 여담
바보를 가리키는 명칭 중 dunce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가 ‘이성’으로 계시를 이해할 수 있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지주의를 부정했었기 때문에, 당시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르던 스콜라학자들이 그를 ‘이성’도 없는 바보라고 놀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원래 이름은 John Duns인데 그가 스코틀랜드 출신이라 잉글랜드에서 멸시하는 의미로 스코틀랜드인이라는 접미사 Scotus를 붙여서 불렀던 것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이데거의 교수자격시험 (Habilitation) 논문 주제가 바로 이 사람이었다. 하이데거는 1915년 초 <둔스 스코투스의 범주론과 의미론>을 완성하여 이를 여름학기에 교수자격논문으로 제출했고, 시험 강의 후 같은 해 7월 31일에 철학 교수자격을 취득하였다.
한국내에 번역된 저작은 제일원리론 한 권 뿐이다.
들뢰즈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차이와 반복>에서 ‘일의성’을 처음으로 말한 사람으로 둔스 스코투스를 지목하였다.
○ 사상
그는 기존 스콜라 철학 (일반적으로 아퀴나스)와는 다른 신학적 입장을 견지했다. 대표적으로 그는 ‘주의주의’적 신학관을 주장하였다. 즉, 신을 믿는 것은 의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주의주의 (Voluntarism)란 신적 이성에 대한 신적 의지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견해로서, 이 견해에 따르면 하느님조차도 구속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선한 행동이 존재하는 것 (신적 이성으로 파악되는 합리적인 질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선택한 행동이 바로 선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행한 덕 있는 행동이란 그들의 선함이 그 행동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러한 행동을 선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라는 의미가 된다. 또한 하느님의 계시 자체는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지말고 그 말이 오로지 하느님이 한 말이기 때문에 믿어야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계시 (성경)의 도움없이도 인간 이성이 계시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본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지주의 (Intellectualism)와는 다른 것으로, 그는 아퀴나스 철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적 학자로 꼽힌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후기 스콜라 철학자인 오컴의 윌리엄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철학을 하나로 요약해서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문구는 ‘모든 실체는 고유한 본질을 지닌다 (Omne ens habet aliquod esse proprium)’는 선언이다. 여기서 ‘고유한 본질’이란, 보편논쟁에서의 ‘보편자’를 의미한다. 즉 ‘보편자’가 실재하는데, 단, 모든 개별자에 실재한다는 것. 이 선언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바로 스콜라 철학의 테제, 즉 모든 불완전한 존재는 신에 대한 유비 (analogy: 비슷한 성질)에 불과하다고 하는 테제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코투스의 이 선언은 겉으로 보기에 ‘보편자’가 실재한다는 실재론이지만, 각각의 개별자에 보편자가 있다는 스코투스의 생각은, 보편이란 우리가 그러한 개별자들의 공통된 특징에 단지 이름을 붙인 것일 뿐이라는 유명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철학사적으로 본다면 둔스 스코투스의 주요한 업적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전술한 것처럼 유명론의 전통을 연 학자로서, 모든 존재를 지상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에 불완전하게 양재하는 존재로 파악하는 스콜라철학의 전통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질 들뢰즈[1]를 위시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이 주목했던 부분으로, 모든 실체가 각각 고유한 질서를 지닌다고 표현함으로써, 바뤼흐 스피노자와 프리드리히 니체에게로 계승되는 내재적 역량과 힘의 철학을 창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때문에 둔스 스코투스는 가톨릭 교리상으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영미철학계의 유명론자들,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에게는 중세철학에서 근대철학으로 이행하는 계기를 마련한 중요한 스콜라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스도에 의한 예견구제 (豫見救濟)로서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한 그의 주장은 신학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스코투스는 아포스테리오리 (a posteriori)한 논증을 개연적이고 불확실한 것으로 배척하고 아프리오리 (a priori)한 논증만이 참된 논증이라고 주장하면서 신의 존재와 속성, 영혼불멸 등에 대한 참된 논증은 가능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에 대한 개연적인 논증밖에 할 수 없다고 하여 신을 논증하려는 시도의 무의미성을 비판하였다.
신이란 어떤 것에 의해서도 구속받지 않고, 어떤 근거 없이도 존재하는 무한자 (無限者)로 신은 그의 의지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의 의지가 선악의 최고원칙이라고 주장하는 둔스 스코투스는 의지를 오성 (悟性)보다 우위에 두었다.
인간에 있어서도 의지가 이성보다 우위에 있으며 인간이 어떤 대상을 인식하거나 어떤 행위를 할 때 오성은 단지 이성의 보조원인 (causa subserviens)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에 있어서의 행위는 인간 의지의 자유에 의해 선택된 행위이고, 이 행위의 선악도 신의 의지와 얼마나 일치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은 도미니코회의 의해 채택되어 발전되었고, 둔스 스코투스의 주장은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채택되어 발전됨으로써 이 두 개의 수도회가 서로 대립된 입장을 갖게 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둔스 스코투스의 사상은 후에 유명론 자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쳤고 이로 말미암아 둔스 스코투스는 스콜라학과 르네상스를 연결시키는 교두보의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 저서
주요 저서로는 ≪opus Oxoniense≫, ≪Reportatio Parisiensis≫, ≪Questiones Quodlibetales≫, ≪De primo rerumomnium principio≫, ≪Quaestiones Disputatae≫ 등이 있다.
참고 = 나무위키, 가톨릭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