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5년 11월 14일,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 유스티니아누스 대제(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482 ~ 565) 타계
유스티니아누스 1세 또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라: 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그: Ιουστινιανός Α’ ; 482년 5월 11일 ~ 565년 11월 14일)는 527년부터 565년까지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삼촌인 유스티누스 1세에 이어 527년 8월 1일 단독으로 황제에 등극해 비잔티움 제국을 통치했으며 중세 로마 제국의 영토를 넓히고 여러 가지 제도를 개혁하고 하기아 소피아를 재건하는 등 많은 업적을 쌓았다.
– 유스티니아누스 1세 (대제)
.휘: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Petrus Sabbatius)
.존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Augustus)
.출생: 482년 5월 11일, 다르다니아 타우레시움
.사망: 565년 11월 14일, 콘스탄티노폴리스 (거룩한 사도 교회)
.가문: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부모: 사바티우스, 유스티누스 1세 (양아버지) / 모친: 비길란티아
.배우자: 테오도라
.자녀: 불명의 딸, 요한니스 (입양), 테오도라 (입양)
.종교: 칼케돈 기독교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재위: 527년 8월 1일 – 565년 11월 14일
.전임: 자유스티누스 1세 / 후임: 자유스티누스 2세
그는 중세 로마 제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교회에 대한 열정과 헌신으로 동방정교회로부터 성인의 칭호와 함께 ‘대제 (大帝, μέγας)’라는 칭호를 받았다.
○ 생애 및 활동
– 초기 생애와 집권
유스티니아누스는 482년경 다르다니아 타우레시움 (오늘날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비길라티나는 유능한 장군이자 황실 경비대장 이었다가 나중에 황제가 되는 유스티누스의 여동생이었다. 유스티누스는 그를 콘스탄티노 폴리스로 데려와 자신을 돕게 했고 나중에 양자로 삼았다. 삼촌이 황제가 되기 전에는 황실 경비대에서 삼촌을 보좌했는데 이 때의 기록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518년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죽자 유스티누스는 다음 황제로 지명되었는데 이때 유스티니아누스의 도움을 받았다. 삼촌이 황제가 된 이후에도 무지한 삼촌을 도와 여러가지 행정을 유스티니아누스가 도맡아 처리했고 나중에 노쇠한 황제를 대신하여 사실상 그가 혼자 제국을 통치했다. 527년 4월 유스티누스는 조카를 공동황제로 임명했고 한달 후 유스티누스가 서거하자 유스티니아누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다.
– 테오도르 황후
황제가 되기 전에 그는 테오도라와 결혼하였는데 테오도라 황후의 아버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마차 경주장에서 말을 돌보는 노동자였다고 한다. 테오도라는 일설에 의하면 무희 또는 창녀였다고 하며, 일설에는 아주 음탕한 여자였다고 한다. 당시 제국법에는 귀족은 평민과 결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원로원 신분인 유스티니아누스는 미천한 신분인 테오도라와 결혼할 수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인 삼촌을 사주하여 귀족신분도 낮은 계급과 결혼을 할 수 있는 법안을 제출하게 했고, 테오도라와 결혼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혼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르는 일단 황후가 되자 제국의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편견을 갖고 보던 귀족들도 테오도라 황후의 훌륭한 처신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테오도라 황후는 평생 남편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를 도움으로써 큰 힘이 되었다.
– 니카의 반란
53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일어난 니카의 반란으로 유스티니아누스는 거의 제위를 빼앗길 뻔 하였다. 당시 인기있던 전차 경주의 두 팀을 응원하던 청색당과 녹색당의 폭동이 반란으로 확대되어 군중들은 황궁에까지 몰려들었다. 이때 유스티니아누스는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려 하였는데, 여걸 (女傑)인 테오도르 황후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 “황제는 황제답게 떳떳하게 죽어야 합니다.” 라고 격려하여 황제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벨리사리우스등의 장군들을 불러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 생애 후반기 : 대제 유스티니아누스
– 능력위주의 행정과 정복활동
황제가 된 후 유스티니아누스는 신분이 아닌 능력으로 인재를 선발함으로써 오랜 로마 황실과 귀족의 부정 부패를 일소하였고 귀족계급을 견제하였다. 군사적으로도 그는 벨리사리우스, 나르세스 등 우수한 장군을 등용하여 옛 로마 제국의 영토를 많이 회복하였고 특히 이탈리아 반도 본토를 회복하는 데 노력하였다. 불가르족과 슬라브족의 침입을 막아내었고 특히 북아프리카에서 제국의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 교회
그는 정력적으로 일하는 황제로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하며 수많은 개혁을 단행하였다. 특히 세 차례에 걸쳐 로마법을 집대성하고, 신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단성론 문제로 동방 정교회 (Orthodox Church)와 대립하기도 하였으나,교회의 교리와 이론을 정리하였다. 특히 그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비하여 하기아 소피아를 건축하는 등 위대한 건축 사업을 벌였다.
– 법전
로마법의 집대성은 이미 한세기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시도하여 ‘테오도시우스 법전’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의 법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완전히 새로운 법전을 만들고 체계화 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529년 트리보니아누스를 법무관으로 임명하고 그의 지휘 아래 특별위원회를 만들었고 이 위원회에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은 세가지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편찬 순서로 보면 다음과 같다; 바다와 바닷가는 모든 사람의 소유이다. 나의 제국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마음 놓고 바닷가에 나갈 수 있다. 아무도 ‘여긴 내 땅이야! 나가!’라고 말할 수 없다. 강은 모든 사람의 소유이다. 나의 제국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강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아무도 그것을 막으면 안 된다. 바닷가에서 파도에 실려 온 보석이나 값진 재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가져도 된다. 노예를 소유하고 급료를 주지 않고 부려도 된다. 그러나 노예가 주인에게 덤비지 않는 한, 때리거나 학대할 수 없다. 이러한 입법사업은 왕년 로마법의 재흥을 의도한 것인데, 시대의 요청을 받아들여 법조문의 자구 (字句)가 수정되어 있다. 또한 이상의 3법전에 이후의 단행 (單行)의 각 칙법을 통합시킨 신칙법 (新勅法 : Novellae : 단, 사찬)을 가한 것을 하나로 해서 16세기 이래 로마법 대전 (Roma법 大典 : Corpus Juris Civilis)이라고 부른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중세 로마 황제 중에서 가장 큰 군사적 업적을 이루었다. 그리스도인 황제로 그는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를 회복하는 데 큰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본인이 직접 군사 원정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벨리사리우스, 나르세스 같은 당대의 명장들을 기용하여 정력적으로 영토를 회복하고 5세기 로마 제국의 번영을 이루었다.
황제 즉위 초기 그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530년 다라의 전투에서 페르시아군과 싸워 승리했으나 531년 유프라테스 강가의 칼리니쿰의 전투에서 완패하고 영구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때 맺은 강화로 동쪽 변방의 안전을 확보하고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점령하고 있던 아리우스주의 게르만 족과의 전쟁을 준비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가 되기 전부터 삼촌 유스티누스를 도와 484년부터 시작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 (아카키우스 분열)을 종식하는 데 힘썼다. 519년 3월 교황 호르미스다의 사절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양 교회의 분열을 끝냈을 때 유스티니아누스의 도움이 컸다. 그는 황제가 된 이후에도 군사적으로 이탈리아 등 옛 서로마 제국을 수복하는 데 앞장섰고 종교적으로도 서방 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다.
– 말년의 유스티니아누스
540년대 초 역병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덮쳤을 때 그도 감염되었으나 결국 회복되어 일어났다. 그의 아내 테오도라는 548년에 죽었지만 그는 그 후로도 17년 동안 살았다. 아내가 죽은 이후 그는 종교적인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통치를 소홀히 하였다. 특히 벨라사리우스 같은 유능한 장군을 시기하고 의심을 하였다.
565년 11월 14일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서거하였으며,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다음 제위는 그의 여동생의 아들이자 테오도라의 질녀인 소피아와 결혼한 유스티누스에게 이어졌다.
○ 법전의 편찬
로마법의 집대성은 이미 한세기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시도하여 ‘테오도시우스 법전’을 발표한 적이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의 법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완전히 새로운 법전을 만들고 체계화 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529년 트리보니아누스를 법무관으로 임명하고 그의 지휘 아래 특별위원회를 만들었고 이 위원회에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은 세가지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편찬 순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칙법휘찬 (Codex Constitutionum) : 제국의 모든 로마법에 최고권위를 가지는 법
.학설휘찬 (Digesta, Pandectae) : 고대 로마의 모든 법률가들의 주요저작을 포함하여 법학설을 정리함
.법학제요 (Institutiones) : 위의 두 법전에서 주요 내용을 발취하여 제국내 법학교에서 사용할 교과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다와 바닷가는 모든 사람의 소유이다. 나의 제국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마음 놓고 바닷가에 나갈 수 있다. 아무도 “여긴 내 땅이야! 나가!”라고 말할 수 없다.
.강은 모든 사람의 소유이다. 나의 제국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강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아무도 그것을 막으면 안 된다.
.바닷가에서 파도에 실려 온 보석이나 값진 재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가져도 된다.
.노예를 소유하고 급료를 주지 않고 부려도 된다. 그러나 노예가 주인에게 덤비지 않는 한, 때리거나 학대할 수 없다.
이러한 입법사업은 왕년 로마법의 재흥을 의도한 것인데, 시대의 요청을 받아들여 법조문의 자구 (字句)가 수정되어 있다. 또한 이상의 3법전에 이후의 단행 (單行)의 각 칙법을 통합시킨 신칙법(新勅法 : Novellae : 단, 사찬)을 가한 것을 하나로 해서 16세기 이래 로마법 대전 (Roma법 大典 : Corpus Juris Civilis)이라고 부른다.
○ 군사적 업적
유스티니아누스는 중세 로마 황제 중에서 가장 큰 군사적 업적을 이루었다. 그리스도인 황제로 그는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를 회복하는 데 큰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본인이 직접 군사 원정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벨리사리우스, 나르세스 같은 당대의 명장들을 기용하여 정력적으로 영토를 회복하고 6세기 로마 제국의 영토 확장을 이루었다.
황제 즉위 초기 그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530년 다라의 전투에서 페르시아군과 싸워 승리했으나 531년 유프라테스 강가의 칼리니쿰의 전투에서 완패하고 다음 해 영구 평화 조약을 맺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보상금으로 페르시아에 1만 1,000파운드 (약 5톤)의 황금을 지급했고, 이때 맺은 강화로 동쪽 변방의 안전을 확보하고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점령하고 있던 아리우스주의 게르만 족과의 전쟁을 준비하였다.
– 북아프리카 원정 (533–534)
그 다음 그가 벌인 전쟁은 반달족이 지배하는 북아프리카의 반달왕국이었다. 반달왕국의 힐데리크는 친로마, 친가톨릭 정책을 폈고 유스티니아누스와 친분을 맺고 있었는데 530년 사촌인 겔리메르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반달족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장군 벨리사리우스에게 군사를 이끌고 아프리카로 쳐들어가게 했다. 벨리사리우스는 533년 북아프리카로 가서 레프키스 마그나 근처에 상륙하여 카르타고로 향했다. 벨리사리우스의 로마군은 카르타고에서 10마일 떨어진 아드 데키미움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겔리메르의 반달군에게 완패했다. 그러나 겔리메르의 조카가 전투에서 죽어 전쟁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전열을 가다듬고 티카메론의 전투에서 반달군을 격파하고 534년 반달왕국을 완전히 항복하게 만들었다. 이어서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등 지중해의 여러 섬들을 다시 제국의 지배로 만들었다.
– 첫 번째 이탈리아 원정 (535–540)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있던 동고트 왕국에서 왕위를 놓고 내분이 일어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를 이탈리아 수복의 기회로 삼고 535년 벨리사리우스를 나르세스 대신 투입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재빨리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하여 536년 나폴리를 회복했고 같은해 12월 9일 로마를 다시 제국의 품으로 수복했다. 동고트족은 비티게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대군을 모아 537년부터 538년 봄까지 로마를 포위공격했으나 벨리사리우스는 잘 막아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또 다른 장군 나르세스를 다시 이탈리아로 보냈는데 사실상 벨리사리우스를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 사이에 알력이 생겼고 이 때문에 원정이 차질이 생겼다. 밀라노를 탈환했다가 다시 잃자 나르세스는 소환당하고 벨리사리우스는 540년 동고트 왕국의 수도인 라벤나를 점령했다. 이때 동고트족은 벨리사리우스에게 왕국 절반을 주겠다고 제안했고, 벨리사리우스는 도시의 탈환을 위해 이것을 받는 척하고 라벤나를 점령했는데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때 벨리사리우스를 의심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했다.
–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대결 (540–562)
540년에 유스티니아누스가 이탈리아 문제에 골몰해 있을 때 사산조 페르시아가 침공했으며, 수도로 돌아온 벨리사리우스는 곧 이 전쟁에 투입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동방의 군대를 다소 소홀하게 방치하고 있는 틈을 타 사산조의 왕 호스로우 1세는 유스티니아누스와 맺은 협정을 깨고 메소포타미아와 북부 시리아, 로마령 아르메니아로 진격해들어와 주요도시들을 차례로 약탈했고 541년에는 북부의 라지카 (콜치스)를 침공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이에 맞서 싸우다가 544년 다시 이탈리아로 소환당했다. 전쟁은 다른 장군들의 지휘 아래 장기간 질질 끌었으며 543년에는 전염병이 로마군을 덮쳤고 호스로우는 중요한 요충지인 에데사를 공격했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양측은 별 소득없이 전투를 벌이다가 545년에 5년간의 휴전협정을 맺었다. 협정에 의해 로마는 5000파운드의 금을 주고 사산조는 로마 제국령을 침공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승인했다. 551년 양 제국간의 휴전조약이 갱신되었으나 라지카는 페르시아인들이 완강하게 반환을 거부함으로써 휴전이 적용되지 않고 산악지대에서 치열한 접전이 간헐적으로 이어졌다.그러나 557년 휴전협정이 다시 갱신되면서 이번에는 라지카도 포함되었다. 마침내 561년말경에 50년간의 휴전협정이 타결되었다. 로마는 연간 3만 솔리디 (금화)의 공물을 바치는 데 동의했으며 페르시아는 북방의 침략자들을 막아주는 중요한 방벽인 라지카에 대한 모든 권리주장을 철회했다.
– 두 번째 이탈리아 원정 (544–552)
한편 벨리사리우스가 동부 전선에 가 있는 동안, 이탈리아에서 로마군의 상황은 매우 불리하게 달라져 있었다. 가혹한 재정공출과 병사들의 약탈행위로 인해 새 체제는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 동고트족 대다수는 끝내 항복하지 않았으며 541년 가을에 토틸라를 자신들의 왕으로 선포했다. 토틸라는 유능한 지도자였으며 542년에 남부 이탈리아에서 공세를 벌여 543년 나폴리를 점령하는 등 로마군을 무섭게 밀어내고 있었다. 544년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이탈리아로 투입되어 토틸라에 대해 공세로 들어갔으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병력과 지원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고 결국 548년 나르세스로 교체되었다. 나르세스는 우세한 병력과 지원으로 고트족을 몰아내어 552년 동고트 왕국의 수도 라벤나를 탈환하고 결국동고트 왕국을 섬멸하였다. 이로써 이탈리아를 수복하고자 하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오랜 숙원은 이루어졌다.
– 히스파니아 원정과 이민족의 침략
552년 로마는 서고트족의 히스파니아를 침공하여 카르타헤나를 비롯한 남부 히스파니아의 몇몇 도시를 회복하였다. 이 원정은 중세 로마 제국의 최대 판도로 기록되는데 이후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자 이 지역은 다시 로마 제국의 영향에서 바로 벗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유스티니아누스 치세에 발칸 반도는 투르크족과 슬라브족의 침입을 받았는데 559년 슬라브족이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침공해 왔을때 다시 벨리사리우스가 투입되어 제국을 구원하였다. 561년에는 아바르족이 침공해들어왔으나 보상금을 받고 물러났다.
– 결과
이처럼 유스티니아누스는 오랜 숙원인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히스파니아에 이르기까지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를 대부분 수복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전쟁으로 너무나 황폐해 있었기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의 생애 중에는 정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며, 그가 죽은 지 3년 만에 국토의 일부분을 또다시 롬바르드족에게 빼앗겼다. 또한 페르시아에 대한 과도한 배상금 지불로 국가 재정을 악화시켰고, 다뉴브 강 너머로부터 밀려드는 슬라브족이나 아바르족 같은 여러 이민족의 공세는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으며, 서부 전선에서 오랜 시간 전력을 소비해버린 로마는 새로운 침입자들을 효과적으로 물리치지도 동화시키지도 못했다. 그의 사후에 영토는 급격히 무너졌고 또한 재임 중 끊임없이 벨리사리우스를 의심하고 그의 인기를 시기하였다.
○ 건축사업
유스티니아누스는 대규모 건축계획을 수립해 건축사업을 벌였던 황제로도 유명하다. 그는 각종 수로와 교량을 건설하고, 지진으로 파괴된 도시의 전면적 재건축 계획을 수립하고 광범위한 변경지대에 중요한 요새와 방어진지 건설 같은 토목공사들을 실시했다. 또한 수도원, 고아원등 의 건물도 많이 짓게 하였다.
○ 종교 문제
– 동서 교회의 통합 노력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가 되기 전부터 삼촌 유스티누스를 도와 484년부터 시작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 (아카키우스 분열)을 종식하는 데 힘썼다. 519년 3월 교황 호르미스다의 사절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양 교회의 분열을 끝냈을 때 유스티니아누스의 도움이 컸다. 그는 황제가 된 이후에도 군사적으로 이탈리아 등 옛 서로마 제국을 수복하는 데 앞장섰고 종교적으로도 서방 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다.
– 그리스도 단성론의 문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고질병이던 기독교 교리의 문제는 역시 유스티니아누스를 괴롭혔다. 문제는 역시 451년 칼케돈 공의회 이래 계속되어온 단성론의 문제였다. 단성론은 안티오키아를 비롯해서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고 그리스적인 민족 의식과 로마의 통치에 대한 이 지역의 불만과 밀접히 결하여 제국을 분열시키고 있었다. 황후 테오도라도 단성론 쪽에 가까웠다.
– 교황권의 확립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로마의 교회 감독을 전 세계 기독교회의 머리요, 교리의 확정자요, 이단을 처벌하는 권위자로 임명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 효력이 발생하게 된 A.D. 538년을 합법적으로 교황이 최고의 세력자로 부상한 시발점으로 간주되었다. “비질리우스 (Vigilius)가 A.D. 538년에 로마 장군 벨리사리우스 (Belisarius)의 보호 아래 교황의 보좌에 오르게 되었다.” – 기독교 역사, 3권, p. 327
– 교황과의 충돌
544년 유스티니아누스는 칙령을 내려 ‘삼장서’ (kephalia)를 비판했는데 이는 칼케돈 공의회의 결의와 단성론자 모두의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서방교회는 삼장에 대한 비판을 거부했고 마침 토틸라의 로마 침공을 피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와 있던 교황 비질리오와 충돌했다. 그러나 비질리오 교황은 황후와 황제의 압력에 삼장서에 대한 유죄 선고를 발표했으나 이는 더욱 큰 문제를 낳았다. 황후 테오도라가 죽은 이후에는 더욱 문제가 커져 황제와 교황은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 말년의 종교문제
재위 말년에 이르러 유스티니아누스는 공적인 일에서 한 걸음 물러나 신학적인 문제에 몰두했다. 564년 말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예수의 인성은 신성에 흡수되었다는 즉, 예수는 그리스도의 신체는 결코 썩지 않으며 십자가에서는 단지 고통받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가현설적인 칙령을 발표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마지막으로 발표한 법령은 성탄절과 공현절의 공식 날짜를 확인하는 법령이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