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0년 5월 2일, 명 왕조의 제3대 황제 ‘영락제’ (永樂帝, 1360 ~ 1424) 출생
명 성조 영락제 (明成祖 永樂帝, 1360년 5월 2일 ~ 1424년 8월 12일)는 명 왕조의 제3대 황제 (재위 1402년 ~ 1424년)이다. 그의 휘는 체(棣)이고, 명 태조 홍무제의 4남이며 어머니는 효자고황후 마씨이다. 영락제는 대외 정벌과 해외 무역로 확장 등의 대외 확장 정책을 펼쳐 주변국을 굴복시켜 조공질서를 명확히 하였다. 이에 베트남이 명에 정복당하여 한때 중국 영토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 영락제 (永樂帝)
.휘: 주체 (朱棣)
.연호: 영락 (永樂) 1403년 ~ 1424년
.묘호: 태종 (太宗) -> 성조 (成祖)
.시호: 체천홍도고명광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
(體天弘道高明廣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 -> 계천홍도고명조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
(啓天弘道高明肇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
.능호: 장릉 (長陵)
.출생: 원 지정 (至正) 20년 4월 17일 (양력 1360년 5월 2일), 응천 (應天, 중국 난징시)
.사망: 영락 (永樂) 22년 7월 18일 (65세, 양력 1424년 8월 12일), 유목천 (楡木川) 진중 (현 내몽골 자치구 시린궈러 [錫林郭勒] 맹 [盟] 둬룬 [多倫] 현)
.부친: 부) 홍무제 (洪武帝) 주원장 (朱元璋), 모) 효자고황후 (孝慈高皇后) 마씨 (馬氏)
.배우자: 인효문황후 (仁孝文皇后) 서씨 (徐氏)
.자녀: 홍희제, 주고후, 주고수, Zhu Gaoxi, Princess Yong’an, Princess Xianning, Princess Ancheng 등
.손주: 선덕제, Zhu Zhanshan, 주첨자, Zhu Zhanyong, Zhu Zhanqi, 프린세스 얀핑 등
* 명나라의 제3대 황제
.재위: 1402년 7월 13일 ~ 1424년 8월 12일
.즉위식: 홍무 (洪武) 35년 6월 13일 (1402년 7월 13일)
.전임: 건문제 (建文帝) / 후임: 홍희제 (洪熙帝)
* 연왕 (燕王)
.재위: 1370년 5월 2일 ~ 1402년 7월 13일
.즉위식: 홍무 (洪武) 3년 4월 7일 (1370년 5월 2일)
홍무제 시기에는 연왕에 봉 (封)해졌다. 홍무제 사후 조카 건문제의 제위계승 및 제후 숙청 정책에 반발하여 ‘정난의 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난징을 함락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이후 베이징으로의 수도 천도를 추진하였다. 그는 운하인 회통하를 완공시켜 남북 물자 교류의 교두보를 확보한 후 1421년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겼다.
영락제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건문제가 영락제의 정변에 의해 축출됐을 때 건문제의 스승 방효유는 끝까지 항거하여 그의 가족, 친구, 제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847명이 몰살당했다. 영락제는 방효유의 친족, 외족, 처족을 비롯한 십족과 문인, 동지, 그의 서적을 탐독하는 인사들을 모두 숙청하고, 집안의 여성들은 노비나 첩, 기녀로 보냈다. 이는 ‘십족을 멸한다’ 또는 ‘영락연간의 오이넝쿨 당기기’라는 유행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영락제는 중국 황제로는 역사상 최초로 다섯 번에 걸친 막북 친정을 통해 몽골 족 등과의 전투를 지휘했다. 이로인해 명은 헤이룽 강 하류까지 진출하여 요동도사를 설치하고, 여진족은 위소에 편입시켰으며 누르칸도사까지 설치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일본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패권 확립, 베트남의 정벌, 티베트의 회유와 티무르 제국과의 전쟁 준비, 정화의 남해 대원정과 문물 교류 등의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내정에서는 홍무제의 방침을 거의 대부분 계승하면서 황권을 강화하였다. 그의 치세로 명나라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 생애 및 활동
– 생애 초반
.출생과 유년 시절
영락제 주체는 1360년 홍무제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 주원장 (朱元璋)이 초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았다. 주체의 아버지 주원장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읜뒤 절에 걸승이 되었고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홍건적의 지도급 인사가 되어 있었다. 당시 주원장에게는 마씨 부인 (훗날의 마황후) 외에도 고려 출신 첩이 있었는데 이때문에 그의 생모가 고려 여인 또는 몽골계 여인이라는 설도 전한다.
1368년 아버지 주원장이 명나라를 창건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 뒤 28년 후에 명나라는 원나라를 북방으로 몰아내고 중원을 회복한다. 홍무 3년 (1370년), 10세인 그를 북평왕 (후일 연왕 [燕王]으로 개봉)에 봉해지지만 실제로 북평으로 향해 것은 홍무 13년인 (1380년), 21세 때이다. 청소년기 때에는 이른 아침부터 학자를 초청하였고, 한 번 읽은 책 내용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명나라 초기의 개국공신의 한사람인 장군 위국공 (魏國公) 서달 (徐達)의 딸 서씨 (서 황후)와 혼인하였다. 부인 서씨는 영락제가 제위에 올라 황후에 책봉되었지만 그가 황제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1407년에 사망한다. 장인인 서달은 홍무제의 황권강화책에 의해 그가 보낸 거위 (독약)를 먹고 죽게 된다.
.연왕 책봉
그 후 주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10년 동안 명 제국은 안정을 얻고 정교한 행정기구를 마련하였으며 많은 분야에서 강력하게 개편을 추진하면서 새로운 사회적·경제적 질서를 확립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대신들의 정사를 보는 것에 유난히 관심을 가졌고, 아버지 홍무제는 그의 기질을 알아보았다. 주체는 아버지의 강인하고 정력적이며 변덕스러운 성격을 닮아 범상하지 않은 인물로 성장했고, 아버지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의 타고난 지도자적 자질은 형제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1368년 명나라가 중국을 회복하자 정식으로 연왕 (燕王)에 책봉되고 성년이 되자 수도인 남경을 떠나 북평에 주둔하며 북방의 군사들을 총괄하고 중국 대륙에서 쫓겨난 북원의 동태를 감시하였다. 1380년 20세가 되어 베이징을 근거지로 하여 국경지역에서 타타르 등과 교전하여 승리하였고, 1393년 국경지대 수비군 지휘관이 되어 북부 국경을 지키는 수비군을 맡았다.
1392년에 황태자가 죽자 홍무제는 그를 황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홍무제는 반 년 동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 전통에 따라 죽은 황태자의 아들 주윤문 (朱允炆)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때 그를 황태자로 책봉하지 못한 것을 홍무제는 많이 아쉬워했다 한다. 당시 황태손인 윤문은 만 15세의 소년이었다. 1395년과 1398년, 부왕이 죽기 전 두 형이 각각 차례로 죽은 뒤 연왕은 점점 더 거만하고 도도해졌다고 한다.
.정난의 변
1398년 홍무제가 죽었다. 뒤이어 즉위한 건문제는 자신의 숙부들을 견제하고자 한다. 건문제의 할아버지인 홍무제 연간에 황실을 보호할 울타리로써 홍무제가 자신의 아들들을 변경의 왕으로 봉하였다. 이러한 변경의 군왕세력은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건문제에게 큰 부담이 되었으며, 따라서 건문제는 황제로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하기 위해서 이른바 ‘삭번 정책’을 펼쳤다. 이에 당시 홍무제의 아들들 중 가장 연장자이며 세력이 강대한 연왕 주체가 중심이 되어 1399년 7월 거병하니 이를 ‘정난의 변’이라고 한다.
1402년 6월 주체는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건문제에게서 제위를 찬탈하여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그가 바로 명조 (明朝) 제3대 황제 성조 영락제 (永樂帝)이다. 영락제는 즉위 이후 얼마간 난징에서 머물다가 1421년 자신의 정치 기반인 베이징으로 수도를 천도하였다. 이로인해 다시 중국의 정치 중심지는 베이징이 되었다. 영락제의 베이징 천도는 그가 북방의 군사력을 온전히 장악하게 되었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강남지방의 경제력을 화북지방까지 끌어올림으로써 중국의 경제적 통일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남방에서 건국된 명 왕조가 북방을 국정 운영의 중심으로 삼음으로써 명실상부한 통일 정권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 치세 기간
.즉위 초반
1403년 영락제는 환관들과 장수들을 시켜서 3개의 대함대를 편성, 동남아시아로 파견한다. 이 함대는 자바 섬, 보르네오 섬, 필리핀, 베트남, 인도 남부 등 동남아시아 전역에 파견되어 그의 즉위를 알리게 했다. 즉위 초기 그는 주변 대외국으로부터 패자로 인정받기를 원했고,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 지역의 군주들한테도 인정을 받고 싶어하였다. 그의 위세에 눌린 말라카, 브루나이를 비롯한 자와섬, 보르네오, 필리핀 등의 부족국가와 족장들은 그가 재위에 있는 동안 정기적으로 중국에 조공 사절단을 보냈다. 이러한 사절 파견이 신통치 않으면 그는 즉시 해당국에 경고와 통첩을 보내기도 했고, 그의 정복전쟁이 실제 감행되고 있었으므로 동남아 군주들은 그의 위압에 저항하지 못하였다.
영락제는 티베트와 네팔에도 환관과 사절로 파견하여 명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거듭 요구하였다. 그 뒤 네팔 등에서도 수시로 사신과 조공이 오게 된다. 이어 중앙 아시아를 지나 아프가니스탄과 러시아의 투르키스탄까지 사절과 관료를 파견하여 명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할 것을 강요했다. 또한 일본에도 사절을 파견하여 종주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실권자 아시카가 막부 (足利幕府)의 아시카가 요시미쓰 (足利義滿)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쓰시마 섬 등의 왜구를 잡아가다 난징으로 보내기도 했다. 아시카가가 있을 동안 일본은 조선과 명나라의 해안가를 노략, 약탈하던 왜구들의 송환 명령에 적극 호응하여 이들을 중국 조정에 보내어 벌을 받게 할 만큼 고분고분하게 따랐다. 그러나 아시카가의 후임자들은 중국의 종주권과 조공을 거절했고 그의 사후 세력이 약화된 명나라는 원나라 때의 현해탄 카미카제 사건 등을 언급하며 일본원정을 반대, 일본원정을 포기하게 된다.
영락제는 1410년 스스로 고비사막 북쪽에 원정하였고 이후 1424년 진중에서 병사할 때까지 5차례의 친정 (親征)을 하여 영토를 확장시켰다. 티베트와 필리핀, 수마트라, 인도 등으로부터 조공을 받았고, 변경의 소수민족을 억제할 목적으로 구이저우 포정사사 (貴州布政使司)를 설치하여 변방 소수민족의 움직임을 통제하였다.

.정벌 사업
영락제는 북경으로 천도하여 홍무제의 신중책을 바꿔, 왕성하게 세력을 넓혔다. 북쪽으로 후퇴한 원나라의 잔당 (북원, 명나라에서는 이것을 타타르라고 부른다)은 1388년 토곤 테무르의 왕통이 단절되었으나, 영락제는 원정을 감행해 이들을 제압했다. 만주에는 여진족을 복속시켜 위소제에 조직해 넣는 데 성공했다. 남쪽은 베트남의 진조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이를 틈타 정복하였다.
거기에 해외의 동남아시아, 인도양까지 위신을 넓히기 위해 정화가 이끄는 대함대를 파견하여 일부가 메카,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도달한 대원정의 결과, 다수의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는 관계를 맺었다.
친히 대군을 이끌고 다섯 번에 걸쳐 몽골 족과 교전하여 헤이룽 강 하류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그가 국외 정벌과 원정을 위해 출병할 때면 황태자인 홍희제가 부황을 대신해 섭정을 하였다. 홍희제는 황태자 시절에 아버지가 오랫동안 수도를 비울 때마다 섭정으로 유능하게 나라를 다스렸고 이미 그가 병사하기 전에 실력을 인정받아 후계자의 지위를 든든히 굳혔다. 아들의 재능을 본 그는 아들에게 섭정 정권을 맡김으로써 안전한 후계체제를 구축하려 하였다.
환관 정화 (鄭和)에게 명하여 대함대 (大艦隊)를 인솔하게 하여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종주권, 패권 확립 및 서구와의 신 교역로를 개척하였다.
.대량의 연좌제
영락제는 즉위 직후 제태와 황자징 등 건문제의 측근 세력을 처형하였다. 그의 즉위 직후, 당시 즉위 조서를 쓰도록 명을 받은 방효유는 붓을 집어던지며 이를 거부했다.
그러던 한편, 건문제의 측근이자 당대의 대문장가인 방효유에게 자신을 찬양하는 글을 쓰라고 요구했는데 그가 오히려 비난하는 글을 쓰자 투옥, 고문한 뒤 회유하였으나 끝내 영락제의 찬양을 거부하였다. 영락제는 그의 십족 (구족에다 방효유와 친분이 있는 모든 사람, 방효유의 문집을 애독하는 모든 사람과 모든 제자 추가)을 차례로 처형하고, 집안 여성들은 노비와 첩으로 분배했으며 제일 마지막에 방효유를 처형하였다. 방효유의 처와 자녀들은 자신의 집에서 음독자살하여 화를 면하였다.
방효유가 극형을 당하면서 그의 9족에다 친구·제자 등 847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방효유 등을 처형하게 된다면 나라에 충신이 사라질 것이라는 일부의 경고에도 그는 ‘나의 패륜은 세월이 흐르면 비바람에 잊혀지겠지만, 나의 위업은 역사에 오래 기록될 것’이라 했다. 방효유의 일족 구족에 그 지인들을 묶어 십족이라 하면서 십족을 처형했는데, 여기서 ‘십족을 멸한다’는 고사가 나왔다. 또한 이를 가리켜 ‘영락연간의 오이넝쿨 당기기’라는 유행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베트남 정벌과 실패
1400년 안남 진씨 (陳氏) 왕조의 후계자인 나이 어린 트란이 폐위당하고 새로운 왕조인 찬 왕조가 선포되었다. 영락제가 제위에 오른 직후부터 진씨 왕조에 충성을 바치는 망명자들은 그에게 더욱 열심히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하며, 안남에 개입하여 합법적 통치를 회복시켜 달라고 영락제를 졸랐다. 그는 처음에 형식적으로 응답하여 되돌려보내던 중 1406년 안남에 파견된 명나라의 사절단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영락제는 사신 살해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그해 수마트라까지 원정하여 교지 포정사사 (文趾布政使司)를 설치하고 역시 직할지배하에 넣었다.
그가 베트남에 보낸 소규모의 명나라 군대는 순식간에 안남을 정복하여 평정, 함락시켰다. 그러나 진씨 왕조의 후계자 가운데 왕위 자격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1407년 영락제는 속국이었던 안남을 중국의 일개 성으로 편입하였다. 그러나 베트남 현지에서는 계속 반발과 저항이 일어났고, 저항이 일어날 때마다 곧 분쇄, 토벌되었지만 항명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그의 치세 말기부터 베트남의 저항운동은 계속 심해졌다. 1418년부터는 명의 관헌에 대한 유격전이 일어났는데 명나라 군대가 패배함으로써 안남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생애 후반의 영락제도 1410년대 후반에는 이미 남방지역에 대한 초기의 관심을 거의 다 잃어버렸고, 아들인 홍희제의 짧은 치세기간 동안에 겨우 영향력을 행사했다. 결국 그의 사후 1428년 손자 선덕제는 베트남에 대한 식민통치를 포기하게 된다.

.정화의 원정 후원
1403년 환관들이 이끄는 3개 함대를 서역 지방에 파견하였으며 1405년부터는 환관 정화 (鄭和)의 원정을 후원하였다. 정화는 1405년부터 33년까지 함대를 이끌고 7차례나 항해하여 페르시아 만, 홍해, 카스피해와 비잔틴, 아프리카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면서 40여개 국가를 방문하였다. 정화는 이들 함대들을 통해 방문한 각국의 정세와 사정을 파악하여 영락제에게 보고하는 한편 방문국가들과의 수교를 통해 교역로를 확보하려 노력하였다. 정화의 교역로 개척은 이후 서구의 문물이 명나라로 유입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영락제 사후에도 1433년까지 정화의 원정은 계속되었다.
.티무르 제국과의 관계
그가 제위에 올랐을 무렵 티베트 넘어 서쪽에서는 투르크-몽골계의 제국을 세운 티무르가 칭기즈칸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인도북부와 시리아를 공략했고 1404년부터는 동방 원정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는 티베트 또는 중국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영락제는 이미 이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있었으므로 즉위 직후부터 토번에 대한 우호정책을 펼치는 한편 서쪽에 병력을 비밀리에 주둔시키고 서쪽을 지키는 명나라의 장군들에게 분쟁에 대비하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1405년 티무르가 갑자기 죽자 동방 원정은 취소되었다. 그러나 영락제는 서변의 방비를 계속 강화하는 한편 사마르칸트와 헤라트의 지도자들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중앙 아시아와의 교역로를 계속 열어놓았다.
.황후의 사망과 청혼 거절
1407년 정비 (正妃) 서황후가 죽자 인효 (仁孝)라는 시호를 내리고, 인효황후 (仁孝皇后)의 여동생이며 명나라의 개국공신인 위국공 서달 (徐達)의 셋째 딸 서묘금 (徐妙錦)에게 청혼하였다. 처제인 서묘금은 재주와 용모가 친언니이자 영락제의 정비인 인효황후보다 더 뛰어났다고 한다. 정비의 모습을 닮은데다가 그녀의 뛰어난 용모와 재주를 본 영락제는 1407년 그해에 새로운 황후의 간택령을 내렸다가 취소하고, 바로 서묘금을 불러들여 청혼하였다.
서묘금은 학식도 뛰어나고 역사서와 고전에 능했다 한다. 그러나 영락제를 멸시하던 서묘금은 영락제의 청혼을 여러번 사양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서신을 보내 영락제의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한다. 이 서신에서 자신은 양가집 규수로 태어났지만 욕심도 없고 부귀영화도 꿈꾸지 않으며 오직 불교에 귀의하고 싶다는 것과 열심히 불공을 드려 황제의 앞날을 축원하겠다는 것과 다시는 세속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것을 여러번 강조했다. 세상을 떠나 불교에 귀의하여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은것이 소원이라 하였다. 마지막으로 묘금의 장문으로 된 청혼거부 서신을 받자 결국 그는 결혼을 포기한다. 이후 그는 새 황후를 맞이하지 않고 여생을 보낸다.
.여진족 공략
또한 동북지방에 성을 쌓고 여진족을 공략하는 한편 여진족을 통제하는 통제기관의 설치를 추진한다. 1403년 만주의 여진족을 통할하기 위하여 백두산 북쪽에 건주위 (建州衛)를 설치했는데, 건주위의 설치장소는 건주 지린성 부근의 휘발천 (輝發川) 상류에 있는 북산성자 (北山城子)였다. 그러나 여진족의 부락은 다양했고, 1411년에는 헤이룽강 (黑龍江) 하류에 누르간 도지휘사사 (奴兒干都指揮使司)를 두었다. 건주위 · 우자위 (兀者衛) · 누르간위 (奴兒干衛)를 일괄 통제하기 위하여 영락제는 1411년 태감 (太監) 이시하 (赤失哈) 등에게 명하여 군병 약 1,000을 인솔하고 25척의 선박으로 쑹화 강 (松花江) · 헤이룽강이 만나는 하류지점에 행정관청인 도사(都司)를 설치하여 3개의 여진 부락을 감시, 통제하였다.
이어 토착원주민 교화를 위하여 영녕사 (永寧寺)를 세우고 2년 교대로 군병 200∼300명을 파견, 주둔하였는데 영락제 말기에는 그 세력이 사할린의 아이누 주거지대까지 미쳤다. 그러나 간도지휘사는 그의 사후 선덕제 때 카이위안 (開原)으로 후퇴한 다음으로는 국력이 쇠퇴해지면서 관리가 허술해졌고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다만 그가 만든 건주위 등은 여진 부족의 토착 부족장이 위의 대표노릇을 수행하여 서서히 독자세력화 하게 된다.

– 생애 후반
.베이징 천도
그는 즉위 초부터 난징을 떠나 베이징으로 수도를 이전하려 했다. 베이징은 북평왕에 책봉될 때부터 이미 영락제의 정치적, 세력 기반이었고, 베이징에서는 북부지방의 수비대를 효율적으로 감독할 수 있었다. 1407년에 영락제는 천도를 정식으로 지시한 후 1409년부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북부에서 보냈다. 그러나 수도이전을 반대하는 유학자들과 난징이 생활의 주 터전화된 환경은 쉽게 수도를 옮기지 못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의 수도 이전계획은 무려 14년만에야 성사된다.
한편으로 문화에도 비상한 관심을 가져 ‘영락대전’ (永樂大典) 편찬을 주관, 추진하였고, 또 ‘사서대전’ (四書大典) · ‘오경대전’ (五經大全) · ‘성리대전’ (性理大全) 등을 편찬케 하여 과거 (科擧)의 수험참고서 (受驗參考書)로 하였다.
1417년에 베이징을 재건하는 대규모 공사가 시작된 뒤 그는 직접 베이징의 황궁 건립 현장을 시찰하였으며, 한 번도 난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7년부터 짓기 시작한 베이징의 새 궁전은 1420년에 완공되고, 1421년 1월 1일 그는 베이징을 명나라의 공식 수도임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베이징은 명나라의 도읍지가 되었다.
.당새아의 반란
그의 치세 후반에는 혹독한 징발과 연이은 기근, 흉년과 천재지변이 계속되어 각지에서 농민반란을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영락제는 이를 모두 강경진압하였다. 그 중 당세아의 난은 그의 치세말년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1420년 (영락 18년) 2월 청주 포대현 (蒲臺縣) 출신 당새아(唐賽兒)라는 여성이 당시 중국 각지 농민층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 백련교 (白蓮敎)라는 종교단체를 근간으로 하여 청주에서 반란을 선언했다. 명나라의 평민 농부인 임삼(林三)의 아내였던 당새아는 어릴 때부터 불경 (佛經)을 외웠는데 나중에는 스스로를 불모 (佛母)라고 자칭하였고 백련교도가 되었는데 그의 설법에 많은 사람들이 설복하였다.
1420년에는 이들과 백련교도들을 기반으로 1419년 겨울부터 익도 (益都)를 점령, 영락제의 실정을 비판하고 그를 폭군이라 규탄했다. 당새아가 이끄는 반란군은 난징과 강소성, 산동성 주변 점령하고 산둥 지방을 중심으로 맹위를 떨쳤다. 영락제는 즉시 진압명령을 내렸으나 관군들은 번번이 패전, 부상당하거나 사상자들만 내던 중 그해 겨우 반란을 가라앉혔다.
나중에 당새아는 체포되어 목과 손발에 형구를 씌우고 굵은 철사로 묶어 놓았는데, 매복한 당새아의 잔당이 그녀를 탈옥시켰다. 이에 시중에는 당새아가 요술 (妖術)을 부려 모두 벗어 던지고 달아났다는 전설이 나오게 되었다. 화가 난 영락제는 “삭발하고 중이 되었거나 여도사 (女道士) 무리에 당새아가 숨어 있을지 모르니 산둥과 난징, 베이징의 비구니들과 출가한 부녀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조칙을 내렸다. 명나라 각지에서 수 만명의 비구니 여승과 여도사들이 잡혀왔으나 결국 당새아는 잡지 못했다. 이는 그의 만년 치세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는 민중들 사이에 회자화되어 민담과 전설의 소재가 되었다. 후일 청나라 때의 백련교도의 난은 당새아의 난과 홍건적의 난을 참고하였으며, 청나라 때의 작가 여능 (呂能)은 당새아의 반란을 소재로 하여 소설 ‘여선외사’ (女仙外史)를 쓰기도 했다. 당새아의 난은 조선에도 알려져 인조실록 등에도 고사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최후
그는 정화 등의 항해사를 서부에 파견하여 서역 등을 탐험하게 하였고, 이후 한나라와 당나라 이후 새로운 교역로 (해상 교역)을 개척하게 한다. 《영락 대전》을 편찬하게 하는 등 문화에 대한 관심도 컸다.
몽골족과 교전을 벌여 영토를 확장했고, 동아프리카에 자신의 심복인 정화를 보내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는 문화 사업에도 관심을 쏟아 명나라 학문을 종합한 ‘영락대전’ (永樂大典), ‘사서대전’, ‘오경대전’, ‘성리대전’을 편찬하였다.
1424년 여름 영락제는 몽골 원정에서 돌아오다가 과로로 병에 걸렸으나 의관들 조차 그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 병세는 악화되었고 그의 일행은 퇴각하였으나 베이징으로 들어오기 직전인 8월 진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맏아들인 태자 주고치 (朱高熾)가 그 뒤를 이어 홍희제 (洪熙帝)가 되었는데, 이미 부황의 출정 중 섭정으로서 정사를 돌본 주고치는 무난히 후계자로 황위를 계승하였다. 당시 영락제의 나이 향년 64세였다.
.사후
그가 죽자 30여 명의 궁인만 함께 순장하였다. 이 중 2명이 조선인 출신 공녀였고 그 중 1명은 강혜장숙여비 (康惠莊淑麗妃) 한씨로 지순창군사 한영정 (韓永矴)의 딸이자 조선에서 좌의정을 지낸 한확의 누이였고 소혜왕후의 고모였다.
사후 영락제는 국가의 기틀을 잡은 황제 또는 두 번째 황제에게 의례적으로 주어지는 묘호인 태종 (太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그러나 1500년대 이후 명나라의 유학자들은 그에게 태종이라는 칭호를 부여한 것은 두 번째 황제인 건문제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부당한 행위라는 여론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의논이 계속되면서 1538년 영락제의 묘호는 태종에서 성조 (成祖)로 바뀌게 된다. 한편 베이징 근교의 명 13릉소재지 광대한 묘역은 영락제가 조성하였는데, 영락제의 묘소는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외에도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던 마오쩌뚱이 현장을 답사하는 사진이 전시 되어 있다
○ 시호, 묘호
사후에 묘호는 태종 (太宗)이고, 시호는 체천홍도고명광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 (體天弘道高明廣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라고 추존을 하였으나, 훗날 가정제 때 묘호를 성조 (成祖)로, 시호는 계천홍도고명조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 (啓天弘道高明肇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로 재추존을 하였다.

○ 대외적 업적
이런 내정적인 면도 뛰어났지만, 외정적인 업적은 정말 화려하다. 연왕 시절부터 전장을 누빈 무인이었던 만큼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펼쳐 1410년 고비 사막을 넘어 친정한 이후 재위 기간 동안 무려 5차례나 몽골을 친정하였다. 역대 중국 황제 중 고비 사막을 넘어 친정한 황제는 북위의 태무제, 명의 영락제, 청의 강희제 세 명뿐인데 그나마도 태무제는 북방 선비족 출신이었고 강희제는 만주족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영락제는 막북 친정을 감행한 유일한 한족 (漢族) 황제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영락제는 베트남을 영토화시키기 위해 베트남에도 원정군을 파견하기도 했으며 명나라 해안에 자주 쳐들어오던 왜구를 엄중히 단속하기 위해 조선의 태종과 협력하여 대마도 정벌을 추진하였다. 또한 왜구 관리를 위해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와 협력하기도 했다. 특히 건문제 시절 일본 국왕에 봉한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와 감합 무역을 실시했으며, 요시미츠가 죽자 그에게 ‘공헌’이라는 시호를 내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많은 외정 중에서도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바로 정화의 원정이다. 1405년에 첫 함대가 파견된 이후 1433년 선덕제 치세까지 무려 7회나 대함대를 파견하면서 동남아시아, 인도양, 심지어 동아프리카의 케냐 해안까지 명의 함대가 진출, 나라의 위세를 크게 떨치고 많은 나라의 조공을 받았다. 하지만 선덕제 재위 시기의 항해를 마지막으로 더이상의 해상 원정은 없었고 이후 명은 해금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내정과 외정 양면으로 명나라를 대제국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그의 치세는 영락성세 (永樂盛世)라 불리며 후임 군주들인 홍희제와 선덕제의 인선지치 (仁宣之治)와 더불어 나라의 전성기로 불린다. 이런 일세의 호걸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1424년 5번째 몽골 원정에 직접 나섰다가 병을 얻었고 결국 진중에서 죽음을 맞았다. 향년 65세. 영락제가 죽자 국정의 혼란을 우려한 신하들은 마치 황제가 살아 있는 것처럼 식사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홍희제가 워낙 순한 나머지 영락제의 죽음이 홍희제의 동생들에게 알려지면 국정에 혼란이 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영락제 본인의 원정은 아니지만, 서쪽에서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가 그가 다스리던 명나라 침공을 시도한 적이 있다. 다만 명으로 오던 도중에 죽어 무산된다.
○ 비판
대체적으로는 훌륭한 황제 중 한 명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만, 비판점도 많이 존재한다.
숙청은 당시 기준으로 봐도 지나치게 잔혹했다. 게다가 그 대부분이 아버지 주원장과 달리 안 해도 되는 불필요한 숙청을 한 것이라 더욱 문제다. 특히 방효유 일족에 대한 처형은 (이게 사실이었다는 전제하에서) 악명이 높은데 물론 방효유 본인이 대놓고 연적 찬위 등의 글을 쓰는 등 대놓고 도전한 이상 죽이는 것까지야 전제 군주제인 명나라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일가족, 친척, 친구, 마지막에는 거주하던 마을 전체 주민 (주민들은 방효유랑 같은지역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아침에 일어나 끌려와 그자리에서 칼을맞고 즉사했다)들을 끌어와 방효유 앞에서 차례대로 죽인 것은 명백한 잔혹행위에다 학살이라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물론 중국에서는 황제에게 거역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을 연좌하는 일이 흔했지만 진짜 반역이 아니면 당사자만 처벌하는 게 보통이고 가족은 기껏해야 추방만 했으며, 반역을 했다고 쳐도 영락제 수준으로 마구잡이로 잡아죽이는 경우만큼은 거의 없었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잔혹했을 지가 답이 나온다. 물론 이런 짓을 통해 저항 세력을 억누르고 통치를 안정적으로 하긴 했지만 그건 영락제가 능력이 있으니까 가능했던 거고 그 밑으로 즉위하는 황제들도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 치명적이었다. 어쨌건 목숨을 걸고 바른말하면 진짜로 목숨을 거두어가는 바람에 명나라에는 충언하는 사람이 잘 나오지 않게 되었고, 그 대가는 명나라와 주씨 황족들이 치를 뿐이었다.
또한 영락제의 지나친 대외 활동으로 인하여 국가의 재정이 악화되었고 이는 후대 황제들의 부담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주요한 주장이다. 위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그는 한평생 몽골 원정에 매진했고 정화의 대항해 또한 그의 시대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대외 활동은 일견 화려해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엔 나라 재정에 큰 부담을 주게 된다. 즉, 영락제 시대의 발전된 것처럼 보인 모습은 빛좋은 개살구였다는 것. 이러한 모순의 심화가 정강의 변과 함께 한족 왕조의 2대 치욕으로 평가받는 토목의 변이 일어나는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또한 황제 독재권의 강화를 위하여 환관들에게 지나치게 큰 권한을 주어 후대의 환관들의 전횡의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 또한 강하다. 이는 ‘정난의 변’으로 조카를 몰아내고 즉위한 영락제에 대한 사대부들의 비판과 저항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때 명의 많은 사대부들이 영락제에 협력하기를 거부했고, 방효유와 같이 끝까지 영락제를 비판하다가 십족이 처형된 사례도 있었다. 그래서 영락제는 이러한 사대부들에 대한 불신으로 인하여 사대부들이 장악한 조정을 통해 나라를 통치하는 대신 자신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환관들을 통해 나라를 통치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명 왕조는 환관들의 전횡이 가장 심했던 왕조 중 하나였는데, 명나라의 멸망에 일조한 유근, 왕진, 위충현 등은 모두 환관 출신이다. 환관의 권한이 얼마나 컸는지, 그리고 그 부작용이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알 수 있다. 이들은 자국에서만 욕심을 채우는 걸로는 부족했는지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으로 가서 은 내놓으라며 깽판을 쳤고, 조선에서는 명나라 환관이라면 이를 갈았다.
태조 주원장은 환관들이 권력을 가지거나 요직을 맡지 못하게 환관들이 글을 알지 못하게 만들었고 이미 글을 아는 환관들도 가차없이 내치거나 죽였다. 이는 잔혹하지만 그래도 환관들을 글자 그대로의 손발로 만들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건문제 때까지의 환관들의 업무는 황제를 보좌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를 따라다니면서 이런저런 잡다한 일이나 해주는 심부름꾼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영락제는 건문제 축출과 정적들의 감시와 제거, 사대부와 군부, 관리 등의 신하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환관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 동창이라는 비밀경찰 제도를 활용하였다. 이는 환관들이 명 왕조 멸망 때까지 권력을 전횡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주었고, 결국에는 황제마저도 환관들의 눈치를 봐야 할 정도로 그 폐해가 심각해졌다.
또한 명 제국의 수도가 북경으로 옮겨진 것도 비판이 있다. 이유야 당연히 영락제 본인의 본거지로 세력을 옮기는 편이 그에게 더 나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자주 했던 영락제의 입장에서는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기에도 북경이 남경보다 훨씬 나은 곳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최전방에 수도를 두는 것 자체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고, 중국이 강력할 때는 몰라도 쇠약해지고 북방의 몽골과 여진족 등이 세력을 떨치면서 수도가 무방비로 노출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한마디로 훗날 명나라의 멸망을 부른 무능한 황제들의 막장 행태로 대표되는 국가 막장 테크의 발단이 이미 영락제 시절부터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명나라판 세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세조에 비유하는 건 과도한 처사일 수도 있는데 일단 영락제의 외정 업적은 중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크다. 거기다가 세조는 형제들 중에서 친형인 문종은 물론 동생인 안평대군에게조차 능력 면에서 확실하게 밀렸던 것과 달리 영락제는 형제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영락제는 환관에게 힘을 실어주었을망정 세조처럼 자신의 정치력만 믿고 유력한 공신들을 방조하지는 않았다. 물론 집권 과정의 부당함과 무자비함은 세조랑 닮아서 욕을 먹는다.
○ 조선과의 관계
그의 치세는 조선의 태종 (1400 ~ 1418년) 시대와 거의 겹치며 세종 (1418 ~ 1450년)의 재위 초반과 겹친다. 영락제는 개인적으로는 조선 여인을 좋아했는지 총 8명의 공녀가 그의 후궁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사실 영락제는 홍무제의 정처인 마씨의 소생이 아니라 고려-조선의 여인 소생이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영락제가 태어날 1360년은 아버지 주원장은 황제도 아닌 강남의 유력 군벌 중 하나였을 뿐이고 또한 영락제에게 제위를 찬탈당한 건문제를 추종한 세력들이 지어낸 루머일 수도 있다. 그 외에 실록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음식과 술도 입맛에 맞았던지 그 재능이 있는 궁인도 보내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명나라로 건너간 공녀들은 각각 첩지를 받아 후궁이 되었다. 현인비 권씨, 여미인, 강혜장숙여비 한씨, 임 순비, 이 소의, 최 미인, 정비, 송비, 황비. 그중 한 명인 권씨가 현인비로 봉해졌고, 한확의 누나인 한씨는 여비로 봉해서 총애를 받았다. 이 중 현인비 권씨는 상당히 이례적인 대우를 받았는데, 당시 영락제의 황후 서씨가 죽고 없어서 후궁의 관할을 조선에서 온 지 얼마 안 되는 권씨에게 맡기기도 했다.
그러나 권씨는 얼마 안 되어 병사했는데, 독살로 밝혀지자 한바탕 난리가 난 끝에 같이 조선에서 온 여 강비 (여 미인, 이후 여 첩여로 추존)가 범인으로 몰려 고문 끝에 사망했다. 헌데 나중에 실은 한족 출신인 여 장비가 독살범이고 그 죄를 여미인에 뒤집어 씌운 것이라고 밝혀졌으며 여기에서 그치지 잃고 여장비가 다른 궁녀인 어씨랑 공모한 것도 모자라서 함께 환관과 간통까지 했다는 사실도 드러나서 분노한 영락제가 폭발, 관련자 2800여 명이 죽었다. 여기에 얽힌 조선인 후궁 황씨와 이씨는 참형, 임씨와 정씨는 고문을 못 견뎌 결국 자살. 관련자를 처형하던 도중 어떤 이가 이왕 죽는 거 이판사판 격으로 영락제에게 일갈했는데, 그 내용이 “네 양기가 쇠해서 환관과 간통을 한 것인데 누굴 혼내”냐는 엄청난 독설이었다. 이야기의 출처는 엉뚱하게도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 실록 26권, 세종 6년 10월 17일 무오 2번째 기사로, 같이 갔던 공녀가 용케도 살아남아 영락제 사후 조선으로 귀환해 증언한 것이다.
한편 여비 한씨의 경우, 같이 갔던 황하신의 딸 황씨가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대국을 우습게 본 거냐고 노발대발하는 영락제를 한씨가 여염의 일을 국왕이 어떻게 알았겠냐고 말렸다. 그 말에 감동한 영락제가 황씨에 대한 처벌을 그녀에게 맡기자 한씨는 황씨의 뺨을 때리는 처벌을 내렸다고 한다. 이 한씨는 영락제 사후 궁인 30명과 함께 순장당하고 말았다. 죽기 전 한씨는 유언으로 공녀로서 같이 왔던 자신의 유모인 김흑 (金黑)을 조선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명 인종 (홍희제)에게 부탁했다. 홍희제는 이를 들어주려 했으나 궁녀들이 위에 언급한 독살 사건 이야기를 조선에 알릴 수 있다며 반대해서 결국 들어주지 않았다. 김흑은 이후 홍희제에게 공인 (恭人)이란 작호를 받고 태황태후를 모시는 일을 하다가 세종 17년에 홍희제의 황후 장씨가 김흑을 비롯한 공녀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위에 언급한 독살 사건을 증언한 공녀가 이 김흑이다.
넘어간 조선 여인들이 하나같이 고초를 겪어 조선에서 말이 많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태종이 겉으로라도 명나라에 대해 저자세로 나온 대가로 조선에 엄청난 무역 특혜를 제공했다. 황제국은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들에게 조공의 물량보다 더 많은 회사 (回賜)를 내리는데, 태종은 이를 철저히 이용해 실리를 챙겼다. 본래 명나라는 조선과 대월 (베트남), 시암 (태국)은 3년에 1회, 일본과는 10년에 1회, 류큐 왕국과는 2년에 1회 조공 무역을 하였다. 그런데 아직 몽골 세력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태종 이방원이 친명 노선을 천명하자 명 측이 1년에 3회씩이나 조공 무역을 허용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 줬다. 이후 명나라는 손해가 컸는지 수시로 조공 무역을 줄이자는 얘기를 꺼냈지만 조선은 강하게 거부. 태종이 명나라에 호의적인 정권이기도 했지만 태종이나 영락제나 모두 머리가 비상한 명군들이었고 무엇이 두 나라 관계에 도움이 되는것인지 알았기 때문에 조명 관계는 정도전이 버티고 있고 매우 꼬장꼬장했던 태조 이성계 시기에 비해 매우 우호적으로 변하였다.
태종이 연부 (燕府)를 지날 때는 연 왕(燕王) [즉 성조 황제] 이 친히 대해 보았는데, 곁에 시위하는 군사가 없고 다만 한 사람이 모시고 서 있었다. 온순한 말과 예절로 후하게 대접하고, 모시고 선 사람을 시켜서 술과 음식을 내오게 하였는데, 극히 풍성하고 깨끗하였다. 태종이 연부를 떠나서 도중에 있을 때, 연왕이 서울 〈금릉〉에 조회하기 위하여 편안한 연 (轝)을 타고 말을 몰아서 빨리 달려갔다. 태종이 말 위에서 내려 길가에서 인사하니, 연왕이 수레를 멈추고 재빨리 연의 휘장을 열고서 오래도록 온순한 말로 서로 이야기하다가 지나갔다. _ 태종이 명나라 황제의 우대를 받고 돌아오다.
그리고 태종과는 위의 일화처럼 연왕 시절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있었고, 태종이 정도전을 숙청하면서 조명 관계가 개선되었기 때문에 개인적 친분과 정치적 이해를 같이 한다는 점도 꽤나 작용했을 것이다. 여하튼 두 나라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명나라의 멸망까지 지속되어서 명이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섰음에도 지속적으로 명을 찾는 목소리가 많았을 정도였다.
그리고 태종은 영토만큼은 지킨다는 방침을 세워 재위 내내 이 방침을 고수했다. 명나라가 조선의 동북 지역에까지 살고 있던 여진족을 직할로 통치하겠다는 소식을 듣자 태종은 즉시 관련 역사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토대로 명나라의 주장을 반박, 결국 동북 지역 여진족을 계속 조선이 관리하라는 말을 받아냈다. 물론 입만 살진 않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북방 경비에도 힘을 기울였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그저 저자세로만 나가지는 않은 것이다. 이러한 방침은 영락제 치세를 살았던 세종대왕 대에도 더욱 강력한 대 여진 정책과 함께 그대로 유지된다.
이런 태종도 영락제가 베트남을 정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는 ‘사대의 예’를 게을리하다간 조선도 베트남처럼 명나라에게 침공의 빌미를 줄 수 있다고 말하며 100여명이 넘는 문신들을 모아놓고 영락제의 베트남 정벌을 축하함을 주제로 글을 쓰게 하고 태종이 직접 심사를 하였다고 한다.
또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일찍이 무과 (武科)에 합격한 자는 항상 스스로 병서 (兵書)를 숙독(熟讀)하는가? 숙독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들으니, 황제 (皇帝)가 안남 (安南)을 정벌할 때에 안남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임을 당했고 대적할 자가 없었다 한다.” 하니,
공조 판서 (工曹判書) 이내 (李來)가 대답하기를, “천하 (天下)의 군사로 이 조그마한 나라를 정벌하니, 누가 감히 대적할 자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군사는 정 (精)한 데에 있지 많은 데에 있지 않다. 어찌 한 가지만 가지고 말할 수 있는가? 또 안남 국왕 (安南國王)이 황제에게 달려가서 고 (告)하였으니, 황제의 거사(擧事)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황제가 본래 큰 것을 좋아하고 공 (功)을 기뻐하니, 만일 우리 나라가 조금이라도 사대 (事大)의 예 (禮)를 잃는다면, 황제는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죄 (罪)를 물을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한편으로는 지성 (至誠)으로 섬기고, 한편으로는 성 (城)을 튼튼히 하고 군량 (軍糧)을 저축하는 것이 가장 오늘날의 급무 (急務)라고 여긴다.” _ 편전에서 병조 판서 윤저 등과 궁방 대책에 관해 의논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태종은 신료들이 영락제가 침공하면 대적 할 자가 없다고 두려워하자 “그렇지 아니하다. 군사는 정 (精)한 데에 있지 많은 데에 있지 않다. 어찌 한 가지만 가지고 말할 수 있는가?” 라고 반박하며 명의 침공에 대비해 성 (城)을 튼튼히 하고 군량 (軍糧)을 저축하는 것이 가장 오늘날의 급무 (急務)라고 주장하면서 명과의 전쟁에 철저히 대비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태종은 여진족 관련 문제로 영락제의 명과 충돌한적도 있었다. 조선 초기엔 여진 부족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조선과 명나라의 대립이 있었는데 당시 두만강 인근 변경 지역의 여진 부족은 조선의 지배를 받기로 했는데, 이 소식을 접한 명나라는 사신 ‘왕교화적’을 보내 여진족을 회유하였다. 그러나 그곳 여진족들은 조선을 섬기기로 회맹하며 맹약을 맺었다. 하지만 명나라는 이들 여진 부족에 대한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였고, 결국 힘이 없는 약소한 여진 부족들은 대부분 조선의 질서에서 벗어나 명나라의 초유를 받아들였다.
이에 분노한 조선 태종은 곧바로 ‘보복 공격’에 나섰다. 길주도찰리사 조연이 이끈 1천여 명의 조선군 기병 부대는 올량합 부족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가옥과 논밭을 불태웠고, 수백여 명의 부족민을 참수, 이어 무기로 무장한 여진족 군사 160여 명을 포로로 잡아 또 참수하였다. 그러나 이는 명나라의 사전 동의를 받지 않은 조선군의 일방적인 토벌이었고, 태종도 이를 의식했는지 신하들과 대처 방안을 논의했다. 당시 태종은 자신의 상국인 명나라 황제를 속이기로 작정했고, 태종의 계책은 성공해서 외교적 문제로까지는 비화되지는 않았다.
영락제의 조선 여인 선호는 딱히 이상하게 볼 것이 없는게 당시 명나라는 아직 원나라가 망한지 얼마 안 돼 원의 사고방식이 아직 잔존해있었고 영락제의 롤모델은 아이러니하게도 쿠빌라이였다. 즉 원대의 황제들이 고려인 공녀를 받던 관습을 이어나간 셈. 또 그는 쿠빌라이가 대도를 수도로 정한 것처럼 북경을 수도로 삼는데, 이는 현재까지 한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 된다. 중심부에 가장 가까이 자리한 외국이 한반도가 됨에 따라 한반도가 중국 안보의 핵심지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괜히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하고 그 뒤를 이은 청나라가 청일전쟁 때 조공국인 조선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겠는가?
영락제가 고려 시대에 세워진 거대 사찰인 흥왕사의 금탑을 탐내어 사신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자, 조선에서 논쟁 끝에 결국 주었다는 이야기가 한국 인터넷상에 떠돌아다니는데, 정작 조선왕조실록이나 명사 조선열전에서는 아무리 검색을 해도 전혀 찾을 수 없는 내용이라 신빙성이 의심된다.
○ 가계
– 조부모와 부모
조부 : 인조 순황제 (仁祖 淳皇帝) 주세진 (朱世珍)
조모 : 순황후 (淳皇后) 진씨 (陳氏)
부친 : 태조 홍무고황제 (太祖 洪武高皇帝) 주원장 (朱元璋)
모친 : 효자고황후 (孝慈高皇后) 마씨 (馬氏)
– 황후
인효문황후 서씨 (仁孝文皇后 徐氏, 원 지정 22년 2월 9일 / 양력 1362년 3월 5일 ~ 명 영락 5년 7월 22일 / 양력 1407년 8월 27일)는 명나라 제3대 황제인 영락제의 부인이자 정비이며 명나라 개국공신인 장군 중산왕 (中山王) 서달 (徐達)의 장녀이다. 1402년 정난의 변으로 영락제가 집권하자 황후에 책봉되었으나 5년만에 사망하였다. 그녀의 집안은 명나라의 개국공신 집안이었으나 홍무제의 공신 대숙청 때 휘말려 멸족당한다.
– 비
황후의 바로 아래 후궁이 바로 ‘비’다. 영락제 주체는 2명의 귀비 (貴妃), 4명의 현비 (賢妃), 3명의 혜비 (惠妃), 2명의 여비 (麗妃), 6명의 순비 (順妃), 7명의 비 (妃)를 뒀다. 당시 귀비는 비 가운데 가장 높은 서열이었지만 나머지 현비, 혜비, 여비, 순비, 비라는 호칭 사이에는 서로 실질적인 차등은 없었다고 한다.
비의 하위 등급으로 첩여 (婕妤), 소의 (昭儀), 귀인 (貴人), 미인 (美人), 답응 (答應) 등이 있었는데 이들을 서비 (庶妃)라고 부른다.
홍무제의 비 가운데 공헌현비 권씨 (1391 ~ 1410년), 강정장화혜비 최씨 (1395 ~ 1424년), 강혜장숙여비 한씨 (출생연도 미상 ~ 1424년), 순비 임씨 (1392 ~ 1421년), 비 정씨, 송씨, 황씨가 조선 출신이었다. 서비 가운데 소의 (昭儀) 이씨 (1392 ~ 1421년)와 첩여 여씨 (婕妤 呂氏, 1393 ~ 1413년)도 조선 출신이었다. 거의 모든 후궁 직위에 조선 여성이 자리 잡은 셈이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