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1년 6월 14일, 영국의 왕 리처드 2세 (Richard II, 1367 ~ 1400)가 농민반란 지도자 와트 타일러 (일명 ‘와트 타일러의 난’ Wat Tyler’s Rebellion)와 협상
‘와트 타일러의 난’ (Wat Tyler’s Rebellion)은 1381년에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민란이다.
민란의 배경은 13세기 유럽의 경제성장과 14세기 초반의 정체, 그리고 흑사병으로 전 유럽의 인구가 격감하면서 발생한 사회적 혼란에 백년전쟁으로 인한 과도한 착취까지 겹치자 잉글랜드의 민중들이 봉기한 것이다. 직접적인 원인은 1381년 5월 30일에 왕실 관리인이었던 존 뱀프턴이 에식스 일대에서 인두세 채납을 채근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인두세를 두고 일어난 다툼은 삽시간에 민중 봉기로 이어졌고 잉글랜드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던 성직자 존 볼은 민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봉건제의 해체 및 신분제 폐지 등을 설파하면서 여러차례 수감되었다 풀려났다. 그는 이 민란의 상징과도 같은 연설을 하였고, 이 연설에서 외쳐진 구호는 농민군의 봉기와 함께 삽시간에 잉글랜드 전역으로 펴져나갔다.

– 농민반란 ‘와트 타일러의 난’ (Wat Tyler’s Rebellion)
.캐롤라인 전쟁의 일부
.날짜: 1381년 5월 30일 ~ 동년 11월
.장소: 켄트에서 런던에 이르는 잉글랜드 왕국 일대.
.결과: 반란은 진압되고 봉기 지도자들은 처형됨.
.교전: 농민 반군 / 잉글랜드 왕국
.지휘관: 농민군 – 와트 타일러, 존 볼, 잭 스트로우, 존 라위 / 왕국군 – 리처드 2세, 윌리엄 월워스, 헨리 디스펜서
.피해 규모: 최소 1500명 이상 / 불명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길쌈하던 시절에, 대체 귀족은 누구였나?” (When Adam delved and Eve span, Who was then the gentleman?) ㅡ 존 볼

“다른 나라도 흔히 그렇지만 잉글랜드에서는 귀족이 평민에 대해 큰 특권을 가지는 풍속이 있다. 예를 들자면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법률에 따라 신사들의 농지를 갈고, 곡식을 거두고, 광으로 가져가고, 도리깨질과 키질을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건초를 거두어 광으로 가져가는 의무도 있다. 성직자와 신사들은 아랫사람들에게 이 모든 봉사를 요구한다. 특히 켄트, 에식스, 서식스, 베드포드 등의 주에서 왕국 내의 다른 지방에 비해 이런 봉사에 대한 요구가 더 가혹하다. 그런 이유로 하여 이들 지방에 있는 악한 인간들 사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이야기가 있었으니, 이 세상이 시작될 때는 노예라는 것이 없었으며, 따라서 루시퍼가 하느님에게 행한 것처럼 자기 영주에게 반역죄를 지은 경우가 아니라면 아무도 노예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평민이란 천사도 정령도 아니고, 자기네를 짐승처럼 부려먹는 영주들과 똑같은 모양으로 빚어진 인간이므로 그런 반역을 저지른 적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태를 더 이상 참지 않겠으며, 앞으로 어떤 노동이든 할 경우 그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것이었다.” –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여러 민란 지도자 중 켄트 지역의 민중 지도자가 바로 와트 타일러 (Wat Tyler)였다. 잉글랜드 여타 지역에서도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여러 지도자가 있었지만 와트 타일러가 1381년에 일어난 대규모 민란의 대명사가 된 이유는 그가 런던으로 진격했고, 잠시나마 수도 런던을 사실상 점령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와트 타일러를 비롯한 민란 지도자들이 이끄는 농민군들은 쾌속의 진격을 감행해 런던에 입성했고, 리처드 2세를 비롯한 정부 관리들은 런던탑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워낙 많은 수의 농민군들이 런던에 입성하여 중과부적임을 깨달은 리처드 2세는 어떻게든 런던 시장인 윌리엄 월워스가 민병대를 조직하여 대처할 수 있도록 시간을 끌고 농민들을 달래기 위해 마일엔드로 협상하기 위해 나아간다. 이곳에서 리처드는 에식스의 농민 봉기군들에게 농노제의 폐지를 약속했고 헌장을 만든다. 이 소식은 급속히 퍼져나가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농민군들은 해산하게 된다.
하지만 강경파 농민군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심지어 리처드가 협상을 위해 런던탑을 비운 사이에 런던탑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 때 분노에 찬 농민군들은 여러 귀족들을 잡아 죽였고, 런던 시내 곳곳에서도 이러한 참상이 이어졌다. 런던탑이 농민군들에게 점령되자 리처드는 런던탑 대신 런던 서남부 블랙 프라이어스로 향하게 된다.
다음날인 1381년 6월 14일, 리처드는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기도를 마치고 스미스필드에서 강경파 농민군의 지도자 와트 타일러와 추가적인 협상을 벌이기 위해 나아갔다. 스미스필드에서 와트 타일러를 만난 리처드는 농노제 폐지를 약속했음에도 왜 해산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와트 타일러는 무례한 태도로 왕을 비난하고, 추가적인 요구 사항을 말했다. 어찌 되었든 추가적인 약속이 맺어져 헌장이 작성되었으며, 농민군은 여기에 더해 먹을 것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농민군들의 요청대로 리처드 측에서 음식물을 제공했고, 음식물을 받아든 농민군들은 스미스필드를 떠나려 했다.
그런데 이 순간 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와트 타일러가 떠나려던 와중에 리처드의 수행원과 시비가 붙었는데 런던 시장 윌리엄 월워스가 다툼을 말리기 위해 수행원과 와트 타일러 사이에 끼어 들었다. 그러자 흥분한 와트 타일러가 왕을 향해 다가가려 했고 군인들이 다급히 왕을 보호하기 위해 타일러를 막아섰다.

이 순간 리처드가 군인들에게 타일러를 체포하라 명령했다. 다급해진 와트 타일러가 월워스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월워스가 선수를 쳐서 먼저 와트 타일러를 펄션으로 찍어서 낙마시켰고, 연이어 옆에 있던 향사 랄프 스탠디쉬가 검으로 타일러를 찔러 죽였다.
당장 뒤에는 수천의 농민군이 있었기에 리처드와 수행원들은 급살당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는데 이 때 14세에 불과했던 리처드 2세는 유유히 말을 몰고 농민군들 앞으로 나아가 위엄있게 말했다.
“너희들은, 그대들의 왕을 죽이려 하는가? 짐이 바로 그대들의 왕이다. 나를 따르라!” ㅡ 리처드 2세
아직은 왕에 대한 존경심이 남아 있던 농민군들에게 소년왕의 일갈은 먹혀들었고, 농민군들은 순순히 물러나 흩어지게 된다. 이렇게 런던에서의 봉기는 일단락되었지만 이후 잉글랜드 곳곳으로 민란이 번져나갔다. 햄프셔, 요크셔, 스카버러 등에서 연이어 민란이 일어났으며, 특히 이스트 잉글리아 지방에서의 민란 양상은 매우 잔인하게 진행되어 많은 살상과 보복이 행횡했다. 민란이 잔혹성을 띄게 됨에 따라 진압도 매우 무자비하게 진행되었고, 많은 수의 민란 주동자들이 처형당했다. 최종적으로 6월 25일경 노위치 주교 헨리 디스펜서가 이스트 잉글리아에서 존 리치의 반란군을 격파함에 따라 농민봉기는 막을 내린다.
1381년의 민란은 그저 단순한 농민들의 비이성적인 일탈이 아니었다. 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한 봉건적 질서의 해체가 반란의 주된 원인이었다는 해석은 이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14세기 후반에 농노들에게 부과된 부역이 증가했다는 가설을 뒷받침할 증거는 거의 없으며, 오히려 1348년의 대역병 이후 소작농들뿐만 아니라 최하층 임금노동자들의 경제 상황도 호전되는 경향이 보였다.
이 민란의 특징은 반란군들의 투쟁이 항상 개인적인 불만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증언에 의하면 농노제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켄트주의 자유소작농들도 다른 지역 출신의 농노 한 명이 투옥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분개했으며, 반란의 하락기였던 9월에도 곤트의 존이 자신의 농노들을 해방시켰다는 루머가 퍼지자 다시 활기를 얻었다고 한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목적과 요구를 종합하고 구체화하려고 노력했다. 와트 타일러가 스미스필드에서 리처드 2세에게 전달한 유명한 요구 사항들은 대단히 명료했고, 이것이 당시 반란군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급진적인 주장들을 종합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는 몇 가지 증거가 있다.

.일차적인 요구는 임금노동자들이 고용주와의 서면 계약을 통해 자유롭게 고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개인 어장과 수렵 금지 구역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야 한다는 것,
.지대가 에이커당 몇 펜스로 삭감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독교 평등주의에 기반한, 유토피아적이지만 더 야심찬 요구는
.국왕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영주권의 폐지,
.주교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성직 계급의 폐지,
.두 곳을 제외한 모든 수도원 철폐,
.교회 재산의 몰수 및 재분배,
.교구 사제들에게 합리적인 생계비를 보장할 것,
.모든 법률가를 해임하고 모든 법률제도를 폐지하여 소위 ‘윈체스터 법’이라 불리는 지역 공동체들에서 시행되는 법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농민 봉기는 잉글랜드 전역을 휩쓸었으나 당장에 잉글랜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의외로 적어 보였다. 일례로 작성된 헌장의 이행 할 것을 요구하는 농민 대표에게 리처드 2세가 이렇게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너희는 농노이며, 앞으로도 여전히 농노일 것이다.” ㅡ 리처드 2세
하지만 12세기에 정립된 서유럽의 봉건제와 농노제는 이미 13세기 초부터 서서히 쇠퇴하고 있었고 이후에도 사회적 변화는 조용하고 꾸준하게 이루어졌으며 결국 튜더 왕조 성립 이후 농노제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대봉기 (Great Rising)의 지도자 와트 타일러 (Wat Tyler, ? ~ 1381)에 대하여
와트 타일러 (Wat Tyler, ? ~ 1381년 6월 15일)는 1381년 잉글랜드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민란인 와트 타일러의 난의 지도자이다.
인두세 부과에 항의하는 한 무리의 시위대를 이끌고 캔터베리에서 잉글랜드의 수도인 런던까지 행진했다.
1381년 5월 난이 짧은 성공을 거두어 런던의 스미스필드에서 국왕 리처드 2세와 협상을 하던 도중, 타일러는 국왕의 장교들에게 살해당했고, 봉기도 와해되었다.
와트 타일러의 초기 생애에 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원래 이름은 월터 (Walter) 였다는데, 원래 성씨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컬페퍼 Culpepper’ 혹은 ‘헬리어 Helier’가 제안된 바 있다).
‘타일러 Tyler’라는 이름은 그 직업이 기와공 (roof tiler) 이어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타일러의 출신지는 다트퍼드, 뎁트퍼드, 메이드스톤 등 다양한 곳이 거론되고 있는데 모두 잉글랜드의 켄트주에 있다.
플랜태저넷 왕가의 잉글랜드 8번째 왕 리처드 2세 (Richard II, 1367 ~ 1400)에 대하여
리처드 2세 (Richard II, 1367년 1월 6일 ~ 1400년 2월 14일)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잉글랜드 8번째 왕 (재위 1377년 6월 22일 ~ 1399년 9월 30일)으로,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들이다.

– 리처드 2세 (Richard II)
.휘: 보르도의 리처드 플랜태저넷 (Richard Plantagenet of Bordeaux)
.출생: 1367년 1월 6일, 아키텐 공국 보르도
.사망: 1400년 3월 14일경, 잉글랜드 요크셔 폰테프랙트 성
.매장지: 웨스트민스터 사원
.왕조: 플랜태저넷
.주모: 부) 에드워드 흑태자, 모) 켄트의 조안
.형제자매: 에드워드 오브 당굴렘, John Holland, 1st Duke of Exeter 등
.배우자: 안네 폰 뵈멘 왕녀 (1382 ~ 1394년), 이사벨 드 프랑스 왕녀 (1396 ~ 1400년)
* 잉글랜드 국왕, 아일랜드 영주
.재위: 1377년 6월 21일 ~ 1399년 9월 30일
.대관식: 1377년 7월 16일
.전임: 에드워드 3세 / 후임: 헨리 4세
* 아키텐 공작
.재위: 1377년 ~ 1390년
.전임: 에드워드 3세 / 후임: 존 2세
* 웨일스 공, 콘월 공작
.재위: 1376년 6월 8일 ~ 1377년 6월 22일
.대관식: 1376년 11월 20일
.전임: 우드스톡의 에드워드 / 후임: 몬머스의 헨리
* 군사 경력
.참전: 백년전쟁 – 캐롤라인 전쟁, 와트 타일러의 난

– 생애 및 활동
재위 중에 와트 타일러의 난 (1381)을 진압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의회와의 불화는 심화되었다.
의회와의 마찰은 1386년 양 세력을 중재하고 있던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왕위계승 문제로 떠난 시기에 표면화 되었는데 의회는 국왕의 최측근 중 하나인 서퍽 백작 마이클을 탄핵하고 11인 위원회를 개설하여 ‘당분간’ 국왕의 활동을 감시하게 하였다.
물론 리처드 2세는 이러한 결정을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의회파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의회파의 우두머리격인 5인의 청원파 중 한 명이자 곤트의 존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토머스 우드스톡 역시 리처드의 측근들을 탄핵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갈등은 1388년 신변의 위험을 느낀 리처드 2세가 일시적으로 의회에게 굴복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후 1397년까지 양 측은 표면상으로는 화목하게 지내게 된다.
1397년, 8년의 시간동안 자신의 추종자들을 강력하게 결속시키는 데 성공한 리처드 2세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여 5인의 청원파 중 토머스 우드스톡을 투옥, 살해하고 애런들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을 반역죄로 처형해 버렸으며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를 추방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해 9월 남은 2인의 청원파 중 한 명이였고 곤트의 존의 아들이자 랭커스터 공작인 헨리 볼링브로크가 청원파들에 대한 처분이 부당함을 주장하자 그 역시 추방한다.
얼마 후 (1399년) 곤트의 존이 죽자 리처드는 헨리에게 넘어갈 랭커스터 가의 영지마저 몰수하였다. 하지만 리처드는 그해 5월 정국이 아직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방문계획을 세웠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떠나버렸다.
이는 반란의 기회만을 엿보던 의회파에게 결정적으로 틈을 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결국 그가 추방하였던 헨리 볼링브로크를 필두로 하는 반란군이 잉글랜드로 침입하여 왕좌를 찬탈하는 데 성공한다.

이 소식을 들은 리처드는 1399년 8월 급히 잉글랜드로 돌아오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헨리에게 항복한다.
그는 9월 30일 폐위당하고 폰티프랙트 성에 감금되어 약 4개월 후에 그곳에서 죽었다.
일설에는 그는 음식을 먹지 않고 스스로 굶어 죽었다고도 한다.
– 인물평
리처드는 옷차림은 물론 외모와 머리모양에 신경을 쓰는 멋쟁이였으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규칙적으로 목욕을 했고, 손수건을 고안하기도 했다.
성미가 급하고 신경질적이며 발작적으로 폭력적인 기질을 보였지만 어머니나 아내와 같은 가족, 측근 등에게는 관대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