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8월 19일, 로마 제국의 초대 (제1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BC 63 ~ AD 14) 타계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 CÆSAR · DIVI · FILIVS · AVGVSTVS, 기원전 63년 9월 23일 ~ 서기 14년 8월 19일)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재위 기원전 27년 ~ 서기 14년)이다. 또한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초대 황제이기도 하다.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 (Gaius Octavius Thurinus)였으나,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된 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라: CAIVS IVLIVS CÆSAR OCTAVIANVS)로 불렸다. 기원전 44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외할머니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남동생이자 자신의 외종조부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유언장에 따라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그 후계자가 되었다.
–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별칭: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출생: 기원전 63년 9월 23일, 로마 공화정 로마
.사망: 서기 14년 8월 19일(76세), 로마 제국 놀라
.가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부친: 가이아스 옥타비우스 / 율리우스 카이사르 (양아버지)
.모친: 아티아 발바 카이소니아
.배우자: 클로디아 풀크라 / 스크리보니아 / 리비아 드루실라
.자녀: 티베리우스, 율리아 아우구스투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저서: 아우구스투스 업적록
*로마 제국의 초대 (제1대) 황제
.재위: 기원전 27년 1월 16일 ~ 서기 14년 8월 19일
.전임: 임페라토르 / 후임: 티베리우스
Marmoream relinquo, quam latericiam accepi.
로마 제정의 초대 황제 (임페라토르)이자 로마 제국의 첫 번째 왕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The Julio-Claudian dynasty)”의 개창자이다.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유럽 최초의 황제로 평가받는다.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이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후계자가 된 이후 개명한 뒤의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이다.
기원전 43년,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군사 정권인 제2차 삼두 정치를 열었다. 삼두 정치를 행한 집정관의 한 사람으로서 옥타비아누스는 효과적으로 로마와 속주를 지배하였고, 세력을 모아 히르티우스와 판사가 죽은 뒤 집정관에 재선되었다. 이후 제2차 삼두 정치도 깨지는데 다른 집정관이었던 레피두스는 유배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진 뒤 자살하였다.
제2차 삼두 정치의 붕괴 후 옥타비아누스는 대외적으로 로마 공화정을 부활시키고 정부에 관한 권한은로마 원로원에게 주었으나, 사실상 권력은 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일한 통치자가 다스리지만 대외적으로는 공화국 형태인 정치 체제의 기틀을 다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껍데기만 공화국인 이 나라는 훗날 로마 제국으로 불린다. 황제권은 옥타비아누스 이전에 로마를 통치했던 카이사르와 술라의 독재권과는 전혀 달랐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들로부터 “독재권을 부여받았지만” 거절하였다. 법에 따르면 ‘존엄자’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은 평생 동안 권력을 가지도록 하였고 “호민관 권한” (tribunitia potestas)을 가졌으며 기원전 23년까지 집정관을 역임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재정적인 성공과 원정에서 얻은 물자, 제국 전체에 걸쳐 맺은 여러 피호 관계 (clientela), 군인과 재향 군인의 충성, 원로원에서 부여한 여러 권한과 명예 그리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로마의 정예병 로마 군단 다수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원로원에게 군사적인 위협이 되어 원로원의 결정을 억압하였고,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여 원로원의 정적들을 제거하여 원로원이 자신에 복종하게끔 하였다.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로마의 평화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계속되는 변방에서의 전쟁과 황위를 둘러싼 1년의 내전 (기원후 69년)에도 불구하고, 지중해 세계는 두 세기가 넘게 평화를 지속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넓혔으며 제국의 국경과 동맹국을 보호하였고 파르티아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는 로마의 조세 체계를 개선하였고 파발을 위해 육로 교통망을 구축하였으며 상비군과 소수의 해군 그리고 황제의 친위대인 로마 근위대를 창설하였다. 또한 로마에 경찰청과 소방청을 설치하였고 로마 시의 상당 부분을 재개발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자신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은 ‘아우구스투스 업적록’로 불리며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서기 14년 그가 죽은 직후, 원로원과 민회는 아우구스투스를 신으로 선포하였고 로마인들의 숭배를 받았다.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이 그의 황제명인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를 이름으로 썼다. 또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의 “여섯 번째 달” (Sextilis)을 “아우구스투스” (Augustus)로 바꾸어 불렀다. 그의 황위는 의붓아들이자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았다.
“나는 벽돌로 지어진 로마를 발견해 대리석의 로마로 남겨 두었다.” – 아우구스투스
○ 초기 생애 및 활동
그의 아버지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이며, 원래 로마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벨리트라이라는 마을 출신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63년 9월 23일 로마 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의 머리’라 불리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포룸 로마눔과 매우 가까운 팔라티누스 언덕에 있던 곳이다. 옥타비우스는 아이를 들에 버리라는 점성가의 경고를 받았지만 무시하고 계속 키우기로 했다. 아이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Gaius Octavius)라고 지었다. 그러나 로마 시내의 인구가 늘자 어린 옥타비아누스는 아버지의 고향인 벨리트라이로 이사가 거기서 자랐다.
옥타비아누스는 회고록에서 자기 아버지에 대해 기사 가문 출신이었다고만 적었다. 그의 친증조부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시칠리아에서 군단 사령관을 맡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지방의 여러 공공기관에 재직하였다 한다. 아버지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마케도니아의 총독을 지냈으며, 아이의 가명 (家名)을 투리누스로 지었는데, 이 가명은 옥타비우스가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을 진압한 시칠리아의 투리이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크다.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인 아티아 발바 카이소니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딸이었다.
아버지 옥타비우스가 평민이었기 때문에, 어머니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조카딸로 귀족이었음에도 옥타비아누스는 평민층에 속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귀족의 지위를 얻었다.
기원전 59년 옥타비아누스의 나이 네 살 때, 아버지 옥타비우스가 세상을 떠났다. 얼마 안 돼 어머니 아티아는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재혼하였다. 필리푸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손이었고 기원전 56년에는 집정관을 역임하였다. 필리푸스는 어린 옥타비아누스에게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옥타비아누스는 누나인 소 (小) 옥타비아와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누나이자 자신의 외할머니인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손에서 자랐다.
기원전 51년, 율리아 카이사리스가 죽자, 옥타비아누스는 외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추모사를 낭독하였다. 이때부터 어머니 아티아와 계부 필리푸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단련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옥타비아누스는 4년 뒤인 기원전 47년부터 토가를 입게 되었고 국가 사제단 (Collegium Pontificum)에 선출되었다. 다음 해에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세운 베누스 게네트릭스 신전에서 행해지는 그리스 경기를 관장하였다.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오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46년, 아티아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여하는 것에 동의하였는데, 이 원정에서 카이사르는 오랜 숙적이었던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싸우려 하였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병이 들어 원정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병에서 회복한 뒤 옥타비아누스는 배를 타고 카이사르의 뒤를 쫓았으나 배는 곧 난파되었다. 육상으로부터 숙련된 정비사들이 와서 난파된 배를 수리한 후 원래 자신이 머물던 적의 영토에서 카이사르의 막사까지 배를 타고 횡단하였는데, 이 사건은 외할머니의 남동생인 카이사르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자기 마차에 동승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고 말하였다. 로마로 돌아오고 난 뒤 카이사르는 새 유언장을 사제녀들과 함께 보관하였고 옥타비아누스를 자신의 제1 상속자로 낙점하였다.
카이사르의 누나 율리아의 외손자로 ‘3월 15일’ (이두스 마르티아이) 이후 카이사르 유언장에 따라 그의 양자이자 후계자가 되었다. 기원전 43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연합해 제2차 삼두정치 시대를 열었고, 이후 최후의 경쟁자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오랜 내전은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면서 사실상 끝나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때 로마 세계의 권력을 거머쥐었는데, 안토니우스와 연합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멸망시킨 뒤 이집트를 로마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공화정 로마는 사실상 제정으로 변하게 된다. 기원전 27년, 내전이 종결되었으므로 자신에게 위임된 비정규적 특권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반납한다고 선언하면서 로마를 형식상 공화정 체제로 되돌리는 선언을 했고, 이에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 (존엄한 자)’라는 존칭을 부여했다. 따라서 이때부터 옥타비아누스는 본명 대신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살아있던 시절, 전임자였던 카이사르처럼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보다는 자신을 단지 “제1의 시민 (Princeps, 프린켑스)”으로 자칭했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14년까지이며, 죽은 뒤, 원로원과 민회에 의해 신격화되었다.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은 황제명에 아우구스투스가 사용한 존칭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개인성씨 ‘카이사르’를 제호에 넣어 사용했다. 또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의 “여섯 번째 달 (Sextilis)”을 “아우구스투스” (Augustus: 존엄한 자)로 바꿔 불렀다. 그의 뒤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큰 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았다. 옥타비아누스의 친구이자 유능한 군사적 조력자였던 장군 아그리파도 유명하다.
○ 업적
– 공적인 부분
아우구스투스는 초대 황제이면서 오랫동안 재위한 몇 안되는 황제였으며 뛰어난 정치력으로 유능한 내정을 펼쳤고, 이 덕분에 로마의 제정은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시민들의 질서와 생활 환경을 정리하고 내실을 튼튼히 하여 로마 제국을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장수 국가로 만든 원동력을 키웠고 그가 통치하는 기간엔 물레방아를 발명한 비트루비우스, 위대한 역사가인 리비우스와 라틴 문학에 중대한 진보를 가져온 베르길리우스와 같은 위대한 학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군사적으로도 황제가 되기 이전의 달마티아 원정부터 시작해 칸타브리아 전쟁, 도나우 및 유프라테스 방어선 확립, 파르티아와의 평화 등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면서도 제국의 안전을 보장하였으며, 보조군 제도 등 원수정 시기 로마군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의 치세는 매우 안정적이었으나, 말년의 토이토부르크 전투로 군단 3개를 잃은 것이 흠으로 평가받는다. 정규 군단병에 기타 보조 병력까지 합치면 2만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실 카이사르로부터 군사적인 재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은 아우구스투스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사망한 이후 카이사르의 판단을 거스르고 게르만 정벌에 나선 것에서 비극은 예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실수가 곧 제국의 위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제정 확립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공화정이 무너지고 제정이 확립된 것이 궁극적으로 로마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는지 아닌지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가령 로마의 공화정은 당시 넓은 땅을 통치하는데 뚜렷한 한계를 보였다. 예를 들어 당시 로마를 통치하였던 원로원은 자신들의 이익 수호를 최우선시하여 국익에 반하는 정책을 여러 차례 가결하였고 또한 과거 효과적으로 민심을 반영했던 시민 집회들은 몇몇 정치가들에게 의해 통제되어 이들의 이익을 반영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가령 로마의 공화정 말기에는 로마의 영토가 엄청나게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평민 집회는 로마 공화국의 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당시 평민 집회는 많아봐야 1~2만 정도만 참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고작 이 정도의 숫자로 지중해를 거의 다 통치할 수 있는 거대 국가의 정책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마리우스나 폼페이우스의 경우 자신의 퇴역병들 몇천명을 로마로 부르는 것만으로 평민 집회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공화정으로는 거대 로마 국가를 통치하는데 한계가 분명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을 잡은 뒤 제정으로 탈바꿈시킨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제정은 여러 문제점이 있었다. 로마인들이 왕을 바라지 않는 정치적 상황을 우회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투스는 기존 로마 공화정에 존재하던 합법적인 직책 및 제도를 조합하여 로마 “황제”라는 지위를 만들었다. 이는 다음과 같다.
… (종신) 호민관 특권, 군 통수권자(임페라토르)의 권위와 권한, 원로원의 1인자 (프린켑스), 대제사장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지위. 그리고 비공식적으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계승자라는 점에서 발생하는 권위, 마지막으로 황제가 가지는 막대한 양의 부 (富) …
그러나 ‘제1인자’ 혹은 ‘아우구스투스’란 직책은 당시로서는 편법에 가까웠다. 황제의 지위는 이러한 여러가지 “특권”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취약점이 많았다. 최고 지휘관이었던 황제가 그저 세습에 의해 권력을 손에 넣었다곤 하나 사실 세습이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원로원과 군대의 지지가 있어야 했고, 또 최고 지휘관이 반드시 국가 원수여야만 한다는 관념만큼은 여전히 로마에서 불식되기 어려웠다. 황제로서의 직위가 이런 편법에 기대야했다는 것은 로마 제국의 정체가 어느 일면은 도시국가 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시민들이기도 한 군인들에게 옹립되면 누구든 ‘임페라토르’가 될 수 있었다. “무장을 한 자유민”인 로마 병사에게 자신의 지휘관 = 임페라토르를 선출하는 것은 그들 고유의 권리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의 권위가 흔들리면 곧 각지에서 임페라토르가 선출되어 잦은 내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들의 목표는 “로마”가 되었는데, 그것은 원로원의 추인을 받아 호민관 특권을 얻어 자신의 지위를 정치적으로 반석에 올리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린켑스”로서 시민들에게 존경과 지지를 받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황제들은 빵과 서커스를 풀어서 서민들에게 선심을 베풀었다. 결국 제정 체계는 처음부터 내재적인 문제를 가지고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제위가 세습됨으로써 엘리트 간의 경쟁엔 분명한 한계선이 그어졌는데 그 이유는 공화정 시절의 명예로운 경력은 명백히 로마 정부의 전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황제의 출현으로 인해 황제의 정부가 새로 생김으로써 원로원의 정부 내에서만 권한을 행사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는 계속 공화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로마의 정부를 그대로 남겨둔 채 황제 고유의 정부를 따로 출현시킨다. 따라서 집정관, 안찰관, 재무관 등 과거 로마 정부의 관리직은 예전처럼 시민에 의해 선출되나 따로 황제 정부를 구성하고 이 자리에는 자신의 측근들을 임용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명예로운 경력은 말 그대로 명예직처럼 돼버리고 점점 황제 정부로 힘이 쏠리게 된다. 하지만 황제 정부의 경우 명예로운 경력을 통해 시민들에게 인정받아야 되는 것이 아닌 황제가 알아서 임명하는 것이었으므로 황제와의 연줄이 필수적이었다. 때문에 황제와 혈연이나 인맥을 통해 인연이 닿아야 했고 능력 혹은 군사적 업적으로 시민들에게 어필하여 출세하는 상황은 불가능하였다. 황제와 특권이 중복되는 호민관은 아예 사라져버린다.
황제는 원로원 계급으로 구성된 엘리트의 견제를 위해 기사 계급이나 지방, 속주 출신 유력자들을 중용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중용되는 기사 계급들은 모두 황제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점점 줄어드는 공화정 시대의 명문 귀족들을 대신해 원로원에 입성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지방 유력자 정도인 플라비우스 왕조나 속주 출신의 트라야누스 이후 황제들이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아우구스투스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은 가문들은 제위 계승권자로 여겨져 숙청되기도 했고, 때문에 더욱 정치적 움직임을 제한당하게 되었다.
제정으로 바뀌고 나서 단 200년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200년은 꽤 긴 세월이고, 그 세월 동안 로마는 외부 문제가 거의 없이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리고 이후 쇠퇴기에 들어섰어도 제국이 공화정으로 회귀하지 않은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로마의 공화정 체제는 사실 적어도 카이사르가 살해당한 시기에서는 일종의 금권 정치적 요소가 너무 강하게 부각된 과두정에 지나지 않았으며, 특정 시대의 몇 가지 요소의 미비로 나중 시대의 쇠퇴가 시작되기는 어렵다. 카라칼라, 도미티아누스를 죽인 후 원로원의 공화정 회복 시도를 근위대가 무산시킨 것, 베스파시아누스가 법적으로 황제정을 공식화함과 동시에 공화정을 부인한 것,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동양의 그것과 동일한 전제정 체제를 수립한 것은 당시 로마에 어울리는 정치 체제는 공화정보다는 제정이라는 인식이 강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지식인들은 공화정 로마가 제정보다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의 공화정은 카이사르 이전 시기부터 제국을 통치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적합한 모순을 노출하긴 하였으나 인류 역사에서 몇 가지 획기적인 장치를 발명한 정치 제도인 것이 분명하며, 이는 로마 공화정을 운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많은 법들이 훗날 근대 법 체계의 기본이 된 것에서 입증된다. 때문에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는 노골적으로 공화정을 옹호하고 제정을 비하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들의 서술에서 나오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거리낌 없이 모략을 사용하고 공화정 인사들이 피해자인 것으로 서술된다.
당시의 로마 공화정을 현대의 공화정과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로마의 영토가 넓어지고 수많은 속주가 생기는 상황에서는 로마 공화정이 분명히 한계를 드러냈고 개혁이 확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제시한 원수정의 대안이 다소 불안정했던 것도 사실이며, 이런 지속적인 불안감 때문에 제정이 확립된지 오랜 시간이 흐른 머나먼 뒷날에도 기존의 공화정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없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로마식 공화정에 대한 이 환상은 현대 사회에서도 없어진 게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보편 제국”이라 불렸던 고대 로마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 있어 공화정 로마의 행정적 한계는 그다지 인식하지 못하고 제정 로마 때 늘어난 체제 불안만을 강조하는 사관을 통해 현대 보수주의 정당들의 가장 큰 이론적 기반들 중 하나가 형성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견인이었던 카이사르도 당시 제시되어온 대중주의적 정책을 일부 수용하는 과정에서 권력을 얻었고 이것이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정치적 기반이 되어줬기 때문에 대중주의에 비판적인 보수주의 입장에서는 이론적으로 좋은 예시가 된다.
그러나 로마 공화정은 그것을 지키고자 했던 원로원의 전횡으로 인해 그라쿠스 형제가 암살당했을 때에 이미 그 정치적, 현실적인 정당성을 거의 상실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제정은 분명 문제점이 있었으나 그게 공화정을 무너뜨려서 그렇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아우구스투스가 주목받을 때에는 이미 공화정은 실제 사례처럼 서서히 다른 제도가 되던지 그냥 완전히 망해서 오랜 기간 동안 금기시되던지 둘 중 하나로 갈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의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바로 오랫동안 개혁을 거부한 부패한 공화주의자들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카이사르와 그를 이은 아우구스투스는 젊은 시절부터 마지막까지 민중파였다. 원수정을 확립한 사람들이지만 정책적으로는 언제나 귀족 대 민중파의 로마사에서 민중파의 입장이었고 지금으로 보면 우파보다는 좌파적인, 그라쿠스 형제를 이은 정책들을 폈다. 특히 아우구스투스는 원수정의 특성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에 신경을 많이 썼고, 실제로 그의 치세에 백성들의 삶의 질이 크게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아우구스투스가 말년에 나폴리를 들렀을 때 황제를 알아본 어부들이 그를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 사적인 부분
아우구스투스는 밀짚머리에 회색 눈동자를 가진 미남이었다. 수에토니우스가 한 묘사를 보면, 아우구스투스는 보기 드물게 잘생겼는데 반짝이는 맑은 눈, 금발 곱슬머리, 불규칙적인 치아, 갈매기 눈썹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키가 작아 키높이 신발로 단점을 숨겼다고 한다. 하지만 당대의 기록 담당자였던 마리우스는 그의 키를 지금의 기준으로 약 170cm ~ 175cm 정도로 기록하였는데 당시 로마인의 평균 키를 생각하면 결코 작은 키가 아니나 수에토니우스가 후대의 사람으로 저오학성이 떨어진다고도 본다. 아무튼 그리스 조각가들도 그의 외모를 보고 예찬했다고 한다.
다만 그는 이성적인 능력은 무척 뛰어났지만, 양부 카이사르와 달리 상대방의 감정을 전혀 배려할 줄 몰랐다. 즉, 신체적인 매력은 카이사르 이상이었을지 몰라도, 인간적인 매력과 호소력은 카이사르에 비해 훨씬 떨어졌다. 전체적으로 그는 감정이 없는 차가운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로서의 정이 없었고, 가족조차도 마치 그의 신민들을 다루는 것처럼 통치했다. 그는 그의 주변 사람들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략과 논리에 의해서만 일을 처리했다. 주위 사람들의 사생활은 무시되었고, 주변 사람들의 거의 모든 이혼과 혼인은 아우구스투스의 뜻대로 처리되었다.
그가 생전에 그렇게 지키고 싶어했던 혈연으로 탄생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는 혈연 관계에 대한 집착과 철저하게 효율만을 중시한 아우구스투스의 행동 및 아우구스투스의 장수로 인한 부작용으로 끊임없이 잡음이 일었다.
먼저 정치적 판단 아래 복잡하게 꼬인 혈연 관계 탓에 후계 문제가 복잡해졌다. 생전에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가 41년이나 제위에 머무르는 바람에 아그리파처럼 아우구스투스보다 먼저 죽어버리거나, 문제를 일으켜 객사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해 버렸다. 또 리비아가 첫 결혼에서 얻은 양아들 중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과 주변에게 ‘두 손자와 함께 공식 후계자로 진지하게 생각한다’, ‘내 후계자이다’라고 솔직한 의중을 말해왔던 조카 딸의 남편 대 드루수스 (네로 드루수스)처럼 불의의 사고로 요절해버렸다.
이런 까닭에 그의 제위를 이어받은 것은 그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결혼으로 혈육을 낳아주지 않았던 양아들 티베리우스였다. 하지만 그의 ‘일방적이고 지나치게 차가우며 상대의 감정을 고려치 않은 행동들’은 자신과 여러모로 비슷한 성향을 가진 양아들 티베리우스조차도 지치게 만들었다. 따라서 유아기 때부터 그의 손에서 40여 년간 아들로 자라온 티베리우스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시적으로 은퇴하기도 했다. 아울러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자신의 혈통이 아니란 이유로 죽은 이후 유언장에서도 진정한 후계자로 여기기보다는 한낱 대행 내지 징검다리로서 자신의 혈육들이 자리에 오를 때까지 기반을 잡고 자리에 앉아있는 존재로 치부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죽은 뒤 로마 시민들에게 공개된 유언장에다가 대놓고 ‘불행하게 두 손자가 일찍 죽어서 계승할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에게 제위를 넘겨준다’는 내용을 명시했다. 이 때문에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공식 후계자이자 아들’ 티베리우스는 처음엔 제위를 거부했다. 9살 때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집에서 아들로 자랐고 젊은 시절 험한 게르마니아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며 자신의 능력을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에게 바친 티베리우스가 단지 양부의 외손자라는 타이틀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가 일찍 죽은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보다 못한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즉, 제위를 물려받을 무렵 모든 것을 갖춘 율리우스 가문의 공식 후계자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사람의 모든 것이 유언장 문구 하나로 우습게 된 것이다.
이는 치명적인 실수였고, 생전에 논리와 판단대로 제단하고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꼬아 놓은 정략혼들은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이 단명할 단초를 제공했다.
앞에서 언급했듯 혈육에 지나치게 집착한 그는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두 의붓 아들과 친누나 옥타비아의 자녀들, 외동딸 율리아를 ‘문자 그대로’ 정략 결혼과 후계자 양성의 도구로 이용했다. 특히 유일한 혈육 율리아는 말 그대로 후계자 양성 도구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는 부모가 일찍 이혼해 어머니 손에서 크다가 이후 관심도 크게 주지 않던 아버지에 의해 처음 고종 사촌인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누나 옥타비아가 클라우디우스 가문에 시집가서 낳은 아들)에게 시집갔다. 하지만 남편이 일찍 요절하자 그녀는 다시 아버지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아버지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오른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결혼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사위 아그리파가 죽자 율리아를 아내 리비아의 친아들 티베리우스에게 시집보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티베리우스의 가정 생활까지 파괴해버렸다. 당시 티베리우스는 멀쩡히 아그라파의 전처 소생인 빕사니아와 결혼해 아들 소 드루수스를 낳고 금슬도 좋았는데, 아그리파 죽음 후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적 판단대로’ 율리아의 재혼 상대로 정해져 최대 피해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그 결혼이 행복했으면 다행인데, 아무리 티베리우스가 노력해도 율리아의 난잡한 사생활과 두 사람의 성격차,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죽음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끝내 파탄나고 만다. 이후 지쳐버린 티베리우스는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로도스 섬으로 떠나버렸고, 율리아는 신전에서 문란한 생활 등을 일삼다가 아버지가 만든 간통죄로 고발당해 유배당하게 되고, 티베리우스 황제 때 죽게 된다 (티베리우스가 굶겨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확실하지 않다).
이 유배는 율리우스 안토니우스 (안토니우스의 아들)와 율리아의 간통이 표면적 이유였고, 율리우스 안토니우스는 사형당했다. 이에 대해서는 율리우스 안토니우스와 율리아가 반역을 도모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거나 어린 동생들을 황제로 삼고 섭정을 하려고 했으며, 딸을 죽일 수 없었던 (부정에서든, 율리아의 자손들의 제위 계승을 위해서든) 아우구스투스가 간통죄를 적용해 처벌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와 ‘내전기’와 같은 생동감 넘치고 열정적인 서술에 비해서 아우구스투스는 매우 무미건조하게 그의 업적을 나열한 ‘업적록’만을 남겼다.
전반적으로 절제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평소 식사량이 매우 적었다고 한다. 음식이 생각날 때마다 먹었지만, 빵, 대추야자 약간, 물 정도를 조금씩 먹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며, 자주 먹는 소식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을 것으로 추정된다. 77세까지 살았는데,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꽤나 장수한 편이다. 그리고 궁전 역시 카이사르가 머물던 최고 제사장 저택으로 검소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친구 중에 푸블리우스 베디우스 폴리오 (Publius Vedius Pollio, ? ~ 15년)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실수를 저지른 노예를 곰치에게 먹이로 주는 자였다. 그리고 가이우스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어느날 아우구스투스가 베디우스 폴리오의 집에 방문하였을 때 한 노예가 비싼 유리잔을 깨트렸고, 평소대로 곰치의 밥으로 던져질 위기에 처했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우구스투스는 그 집안의 모든 유리잔을 가져오게 해서 자기 손으로 모두 깨트렸다고 한다. 이에 아우구스투스의 의중을 알아챈 폴리오는 사색이 되었고, 노예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며 풀려나 자유인이 되었다고 한다 (Publius Vedius Pollio, Naturalis Historia, 9장 29절).
이 외에도 자신의 정적이었던 안토니우스의 아이들 중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는 아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죽이지 않고 신분을 유지해주고 돌봐준 점 등을 보면, 정치적으로 냉정하긴 해도 사적인 인품이 잔인무도한 인물은 아니었던 듯하다.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전남편 소생이자 양아들이었던 티베리우스나 드루수스도 비록 정략 결혼에 이용하긴 했어도 오히려 친딸인 율리아보다 더 친자식처럼 총애했다. 다만 문란한 사생활로 온갖 문제를 일으킨 친딸 율리아에 비해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는 유능하고 총명했기에 그 역시 특유의 정치적 냉정함으로 쓸모에 따라 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의외의 모습으로 좋아하는 취미 중 하나가 도박이었다. 당시 로마는 사투르날리아 축제가 열리는 12월에만 도박을 허용해주는 등 도박에 부정적인 국가였는데, 아우구스투스는 기간에 상관없이 도박을 매우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본인이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쓴 편지에서도 확인되는데 주로 주사위나 홀짝 도박을 즐겨했다고 쓰고 있다. 돈을 따려고 도박을 했다기 보다는 정치적인 면모도 강해서 일부러 돈을 잃어주거나 하면서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태양력에서 2월이 짧아진 이유가 아우구스투스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로마 달력에서도 현재 1월과 2월에 해당하는 Ianuarius와 Februarius는 각각 29일과 28일이었단걸 모른 오해다.
○ 죽음과 후계 문제
기원전 23년의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가 발각되고, 건강이 크게 악화되자 아우구스투스는 후계자 선정이라는 화급한 문제에 관심을 쏟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정치 체제의 안정을 위해 후계자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은 이를 대중에게 알리려 하였다. 로마의 시민들, 특히 원로원 계급이 갖고 있는 군주제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를 추진한다. 기원전 25년에 아우구스투스는 누나의 아들인 마르켈루스와 자신의 딸인 율리아를 결혼시켰다. 하지만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23년에 20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16살의 나이에 미망인이 된 율리아를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와 혼인시켰다. 아그리파 부부는 아들 셋, 딸 둘, 총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얼마 후, 아그리파는 5년 기한으로 전권을 부여받아 제국의 동방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아우구스투스만 가지고 있었던 “호민관 특권”도 부여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외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양자로 삼는다. 이 두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배려로 기원전 5년과 기원전 2년부터 정치적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가 데려온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도 아꼈다.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인 안토니아와 결혼했으며, 기원전 12년에 아그리파가 죽고 나서는 티베리우스 부부를 이혼시킨 후 티베리우스를 미망인이 된 율리아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드루수스는 기원전 9년에 게르마니아에서 사망하고,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6년부터 로마 제국의 통치를 분담하였지만 얼마 후 로도스섬으로 은퇴해 버린다.
서기 2년과 4년에 루키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차례로 요절하였다. 서기 4년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티베리우스는 5년 기한의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았고,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 평정과 일리리쿰, 달마티아 반란을 진압하였고, 게르마니쿠스는 그 밑에서 착실히 경험을 쌓는다. 하지만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방만한 행실로 인해 7년에 추방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후계자로 삼을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13년에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모든 특권을 부여받는다.
14년 8월 19일에 아우구스투스는 놀라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자 티베리우스를 소환해 밀담을 나누었다. 얼마 후, 황후 리비아의 품에 안긴 채 평온하고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다. 티베리우스는 아들인 드루수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의 추모 연설을 하였다. 이후 마르스 광장을 지나 아우구스투스 영묘 앞 광장에서 유해를 화장하였고, 영묘에 묻혔다. 얼마 후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하기로 결정하였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