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5년 7월 11일, 명나라의 정화(鄭和)가 317척의 배를 이끌고 첫 원정에 나서다
정화 (鄭和, 1371~1434년)는 명나라의 인물로 환관이자, 탐험가다. 국적은 중국이지만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 집안 출신이다.

– 정화 (鄭和)
.본명: 마함마드 하지
.별명: 마삼보 (馬三寶, 馬三保), 아호는 복선 (福善)
.출생: 1371년, 대명국 운남성 쿤밍 진닝구
.사망: 1434년 (63세), 대명국 북경
.종교: 이슬람교
*명 수군
.복무기간: 1398년 ~ 1434년
.기타 이력: 환관(宦官) 겸 장군(將軍), 제독(提督) 겸 무신(武臣), 전략가(戰略家) 겸 탐험가(探險家), 외교관(外交官) 겸 정치가(政治家), 대명국 내시부 환관태감
윈난성 (雲南省)의 한 지방 관리였던 마합지 (馬哈只)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마화 (馬和, 무함마드 하지)로 정이라는 성씨는 정난의 변 이후 영락제에게 하사받은 성이다. 성의 마(馬)는 무슬림에게 흔한 ‘무하마드’의 음차다. 역시 합지 (哈只)라는 이름은 메카 성지순례를 마친 사람에게 붙는 칭호인 하지(Hajj)의 음차다. 본명은 ‘마함마드 하지’다.
그는 1382년에 윈난성이 명나라에 정복되자 명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어 끌려왔다. 어린 나이에 명나라에 끌려온 후 거세되어 환관이 되었고 훗날 영락제가 되는 연왕 (燕王) 주체(朱棣)를 섬겼다. 정난 (靖難)의 변 때에 연왕을 따라 무공을 세웠고, 연왕이 건문제를 물리치고 황제로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환관의 장관인 태감(太監)에 발탁되었으며, 정 (鄭)씨 성을 하사받았다.
당시 다른 국가들의 기술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대규모 함대를 꾸려 인도, 아프리카까지 항해했으며, 정화는 마지막 항해였던 7차 항해에서 돌아오는 중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사후, 후세의 환관들에게 영웅과도 같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정화는 유라시아 쪽 무슬림이라서 한족과는 다른 투르크 계열 등의 인종이라는 것이 정설이라는 점 때문에, 유라시아 나라에서도 정화의 항해에 일부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정화가 첫 항해를 떠난 날인 7월 11일을 ‘중국항해일’ (中国航海日), 즉 ‘바다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중국 해군에서는 호위함함에 정화의 이름을 붙여 기리고 있다.

○ 정화의 대원정 _아프리카까지?
영락제의 명을 받아 1405년부터 1430년까지 일곱차례에 걸친 대원정을 떠난 것이 유명하며, 항해 거리만 18만5천km에 이른다. 정화가 이런 원정을 나선 이유는 동남아시아 등지의 조공무역국을 늘리기 위한 목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난의 변이후 생사불명인 건문제를 찾아 나섰다는 설도 있다.
이른바 ‘정화의 원정’은 기존 서구중심의 역사관을 비판하기 위해서도 많이 활용된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이 정화의 원정을 정화하서양(鄭和下西洋: 정화가 서쪽 바다로 나감)이라고 부른다. 심지어는 아메리카 대륙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먼저 다녀왔다는 말도 있다. 아메리카 도달설에 따르면 정화의 함대 중 분함대 하나가 해류를 타고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서 북진하다가 사하라 남쪽에서 그대로 해류를 타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브라질 해안에 도달했고, 다시 아메리카 해안을 따라서 남진하다가 아마도 드레이크 해협을 통과해서 태평양으로 나갔고, 남아메리카 해안을 따라서 북상하다가 남아메리카 혹은 북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 어딘가에서 다시 해류를 타고 태평양을 가로지른 것이 된다. 정화는 모든 함대를 한데 모아서 항해한 것은 아니며, 중간에 여러 분함대를 파견했다. 그 중 하나가 세계일주를 했다는 것이다.
사실 아메리카 도달설은 함대 활동에 대한 여러 공상적인 설명 중 일부에 불과하며, 그 이상의 주장도 많다. 아메리카 남쪽에서 다시 함대를 나누어 일부 함대는 남극 대륙을 발견했다거나, 다른 함대는 대서양을 가로지르지 않고 그대로 아프리카와 유럽 해안을 거쳐서 북유럽을 돌아서 시베리아 북쪽의 북극권을 항해한 후 베링 해협을 통해서 중국으로 되돌아왔다는 주장 등이다.
당연히 이런 주장들은 아메리카 도달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관심을 보인다. 그 외에도 정화의 함대 중 일부가 오스트레일리아에 도달했다는 설도 있다. 이 역시 근거는 박약하지만, 아메리카 도달설 등과는 달리 오히려 항해 난이도상으로는 크게 무리는 없다. 또한 동남아시아 일부 무역상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도 소규모이지만 무역을 하고 있었으므로, 동남아시아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의 거친 자연, 뒤떨어진 문명수준, 극히 낮은 인구밀도를 고려할 때 이곳에 닿았다고 해도 유의미한 교역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곳이 거대한 신대륙인지, 그저 작은섬의 일부 지역인지조차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정화의 함대가 어디를 항해했는가에 대한 이설이 나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정확하게 어디를 항해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화의 항해는 국가적 사업이었으므로 당연히 자세한 보고서가 작성되었겠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어서 이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대신에 정화의 원정에 따라간 사람들이 남긴 기록이나, 원정에 참여한 사람들 무덤의 묘비와 같은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아프리카에 도달했다는 기록도 사실 남아있지 않지만, 정화의 항해와 관련하여 아프리카의 기린으로 보이는 동물의 그림이 남아있고 케냐의 한 부족 가운데는 조상이 중국인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으며, DNA조사 결과 실제로 중국인의 DNA가 있는 것도 확인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동아프리카에 도달한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말레이시아, 자바섬, 인도, 실론섬, 페르시아 남부, 아라비아 반도 등의 지역은 송나라, 원나라 때 이미 바닷길이 알려진 지역이며 중국과의 교역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많은 편이라 정화의 원정 주요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후대의 문관들이 황제들이 다시 항해사업에 관심을 가질 것을 우려하여 기록을 불태워버렸다는 설이 있으나 정화의 기록이 완전하게 말살된 것이 아니며, 정화의 원정에 관한 기록이 명실록에 있다. 기록을 말살하려 했다면 이것부터 지웠을 것이다.
정화는 환관이었고 따라서 공식 관료조직의 외부에 존재했다. 병부나 공부 등 문관으로서의 신분이 있었다면 해당 관청과 교환한 문서가 남았겠지만, 정화의 모든 활동은 황제 직속의 특사로서 진행된 것이었다.
다른 관료집단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이 많이 남지 않았으며, 정화 자체도 자신의 활동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이 내용은 영국인인 개빈 멘지스 (Gavin Menzies)가 지은 ‘1421-The Year China Discovered the World’(1421-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에 잘 서술되어 있다.

○ 기함의 크기 논란
사료에는 정화의 보선이 길이 44장 4척, 너비 18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대로 한다면 보선은 축구장보다 긴 길이 134.5m(44장 x 3.03m + 4척 x 0.303m), 너비 54.5m(18장 x 3.03m)에 이르게 된다. 멘지스도 이 사료를 인용하여 보선이 “길이 150m, 폭 60미터로서 당시 세계 최대였다”고 적었다.
그러나 보선이 크기를 신뢰할 수 없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첫째는 사료의 신빙성에 의문이 간다는 것이다. 보선의 크기에 관해서는 정화 당대의 원사료가 모두 파기된 뒤, 후대에 라무등(羅懋登)이라는 작가가 쓴 ‘三寶太監下西洋記通俗演義’라는 다소 허황된 창작집에 기록된 길이 44장 4척, 너비 18장이라는 수치를 ‘明史’의 “정화전” 등의 사료에 그대로 옮긴 것이다. 둘째는 목선으로서 150미터에 이르는 선박을 건조한다는 것이 현대의 조선공학으로도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화 보선의 크기에 대해서는 중국 조선사가들 조차도 의견이 다양하다. 대만 해양대학의 수밍양은 길이 74m, 너비 12.8m 정도로, 상해교통대학 교수였던 신웬어우 교수는 600톤 내지 800톤급으로, 중국 해군 공정학원의 탕즈바는 정화 보선을 길이 55.5m, 선폭 15.3m, 배수량 1500톤급으로 각각 축소해서 추정하였다.
발견된 유물의 크기도 이 이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남경 삼차하명대 보선창에서 11.07미터 길이의 타간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토대로 중잉, 황건위는 선박의 배수량을 1,251톤으로 추정했으며 천얜항, 시륭페이 등은 17,000톤의 배에는 최소 22미터의 타간이 필요했다고 계산했다. 한편 11미터 타간에 적합한 배는 5972료, 길이 220척, 폭 41척, 높이 14.8척에 970명이 타는 것으로 계산했다. 신웬어우는 11미터 타간에는 배수량 800톤의 선박이 적합하다고 계산한다.
목선으로 크기를 키우는데 재료의 구조적 한계로 인한 제한이 있다. 현재까지 건조된 가장 큰 목선은 USS 와이오밍으로 길이 329피트(약 90m), 배수량 6천톤에 달했지만 방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해 항상 펌프질로 물을 빼내야 했다. 따라서 길이 90미터 이상의 목선은 재료 자체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실용적인 건조가 불가능했다. 또한 44.4장의 배는 돛대가 90미터여야 하며 최소한 길이 30미터 재목 3개를 이어 붙여야 한다. 재목을 이어붙이면 강도와 내구성이 극히 떨어지며, 장거리 항해에 견딜 수 있다고 보기 힘들다. 그나마 길이30미터의 재목은 사천 오지의 깊은 산중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이전과 이후의 최대 선박 크기와도 격차가 매우 크며 기술적으로 연속성이 없다. 송대의 최대 해선은 배수량 550톤이며 청대 후반의 기영호는 배수량 830톤에 달했지만, 정화 보선으로 주장된 17,000톤과 격차는 20배 이상으로서 갑작스러운 크기 증가를 설명할 추가 기술개발 등의 증거가 없다.
보선을 운영하기 위한 승무원 숫자가 부족하다. 르네상스시대 1,500톤급 베니스선에 1,200명의 운용인력이 필요했으며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는 130척, 배수량 3만 톤에 30,493명이 탑승했다. 반면 상륙을 위한 육군이 탑승하지 않았던 영국함대는 총 17,472명이 197척, 배수량 3,1985톤에 탑승했다. 중국의 400료선(배수량56톤)에 필요한 인력은 65명이었다. 이를 토대로 외삽하면 17,000톤의 거선에만 1만명의 운용인력이 필요하게 된다.
실제 발견된 비석의 기록 역시 17000톤 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남경에서 발견된 정해사잔비에는 1,500료, 2,000료선(각 배수량 210톤, 280톤)만이 언급되어 있다. 현재 정화함대는 17,000톤급의 거선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주장하는 경우가 있으나, 현실적인 제반여건으로 볼 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중국의 정크선 등이 수밀격벽 등, 일부 분야에서 보여주는 로스트 테크놀로지급의 성능을 들며 보선이 크고 아름다운 크기였을 거라는 주장도 있긴 하다.

○ 역사적 권리 _ 역사의 소급해석?
정화의 해외원정은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의도적인 재평가를 받아서, 현재의 정화의 해외 원정은 중국의 내셔널리즘의 상징으로 이용되고 있다. 함대 이름에 정화를 붙이는 것은 물론, 중국 패권주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써 정화의 해외 원정을 이용하고 있다.
필리핀 두테르테 대통령이 “우리는 (헤이그) 중재법정의 판결을 갖고 있다”고 반박했고, 시 주석은 “맞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적 권리를 갖고 있다. 당신들은 최근 판결만 가졌을 뿐”이라며 명(明)대 정화(鄭和)의 남중국해 원정을 언급하며 중국 해역이라고 주장했다.
비슷한 시기의 서양의 대항해시대와 비교해 보아도 역사적인 의의가 매우 큰 사건이다. 허나 정화의 대원정이 끝이 나고 명나라는 더 이상 해상 진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화의 원정에 비해서 훨씬 적은 지원을 받으며 소규모 선단을 꾸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작은 배 몇척으로 신대륙을 발견하고 탐험한 것이 이후 유럽 역사를 크게 바꾸고, 여러 차례 탐험에 대한 상세한 기록까지 남겨진 것에 비하면 정화의 원정이 남긴 영향과 기록은 지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물론 명나라처럼 대륙통일을 이룩한 역대 중국왕조들은 이미 큰 영토를 통치하는 제국인만큼 바다 건너 먼 서구까지는 관심영역 밖인게 너무 당연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화의 대원정은 오랜 중국 역사에서 특이한 것이다. 그나마 잠재적인 위협이 되는 오랑캐를 정벌하기 위한 원정은 시도하지만, 물산이 풍부하고 다인구 중국은 중원만 잘 경영하고 주변 국가들의 세력을 잘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명나라 멸망이후 들어선 청나라 역시 서양과 일정한 통상무역은 하였지만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청나라 시절의 아담 샬과 같은 예수회 선교사가 중국인들보다 중국과 유럽 이외의 세계에 대해서 더 상세하고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도 정화의 원정에 의해 습득된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이 중국 지식층들에게는 널리 퍼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정화의 대원정은 중국의 사실상 첫 해양진출이자 마지막 원정이란 상징적 의미는 있으나, 대원정이 없었더라도 중국 역사는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 명나라 왕조 시대의 장군 (將軍) • 환관 • 무관 (武官) • 제독 (提督) • 전략가 • 탐험가 • 외교관 • 정치가, 정화 (鄭和, 1371 ~ 1434) 개관
정화 (鄭和, 1371년 ~ 1434년, 본명: 마삼보, 馬三寶)는 중국 명나라 왕조 시대의 장군 (將軍)이자 환관, 무관 (武官), 제독 (提督), 전략가, 탐험가, 외교관, 정치가이다. 영락제 (永樂帝)의 심복으로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남해에 일곱 차례의 대원정을 떠난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성씨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중국식 한자인 마 (馬)씨인데, 이는 중국 전통시대 이슬람교 신자들이 마씨를 성으로 삼은 풍습에서 유래한다. 이름은 삼보 (三保)였다. 환관의 최고위직인 태감 (太監)이 되었기에 중국에서는 삼보태감 (三保太監 혹은 三寶太監)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 정화 (鄭和)
.생애: 1371년, 명 왕조 윈난성 쿤밍 진닝 구
.사망: 1434년 (63세), 명 왕조 베이징에서 병사
.별명: 본명은 마삼보 (馬三寶, 馬三保), 아호는 복선 (福善)
.종교: 이슬람교
.복무: 명나라 관군 군사 수군
.복무 기간: 1398년 ~ 1434년
.최종 계급: 명나라 내시부 환관태감
.기타 이력: 환관 (宦官) 겸 장군 (將軍), 제독 (提督) 겸 무신 (武臣), 전략가 (戰略家) 겸 탐험가 (探險家), 외교관 (外交官) 겸 정치가 (政治家)
* 명 제국 내시부 환관태감
정화의 함대는 동남아시아, 인도를 거쳐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까지 항해하였고, 가장 멀리까지 도달한 지점은 아프리카 동해안의 말린디 (현재의 케냐 말린디)였다. 그가 지휘한 함대에서 가장 큰 배인 보선 (寶船)은 전체 길이가 120미터가 넘는 대형 선박이었다고 한다.
– 생애 초기
마삼보 (馬三保)는 마합지 (馬哈只)의 아들로 운남성 (雲南省) 곤양 (昆陽)의 무슬림 (이슬람 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씨인 마 씨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아버지의 이름 합지도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를 순례한 사람에게 붙이는 존칭인 하지에서 유래되었다. 선조는 칭기스칸의 중앙아시아 원정 때 몽골에 귀순하여 원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 때 운남성 개발에 노력했던 색목인 정치가 사이드 아잘 샴스앗딘이었다. 정화가 이슬람교도 출신이었던 것은 나중에 영락제가 대원정을 준비할 때 그 지휘관으로 정화를 염두에 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건국한 후 원나라의 세력하에 있던 운남성을 공격할 때, 소년 정화는 붙잡혀 거세된 뒤 환관이 되어 당시 연왕(燕王) 주체(朱棣)[1]에게 헌상되었다. 주원장 사후 영락제가 제위를 찬탈한 정난의 변(靖難의 變) 때 정화는 공적을 세워, 영락제로부터 정(鄭) 씨란 성을 하사받고 환관의 최고위직인 태감이 되었다.

– 원정
.남해 원정
정화는 영락제 명령을 따라 남쪽 바다 대원정을 준비하여 1405년 6월 제1차 원정을 떠났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전체 길이가 44장(丈; 약 137미터), 폭 18장(약 56미터)에 이르는 대형 선박을 포함한 함선 62척에 총승무원 2만 7,800명이 탑승했다. 훗날 바스코 다 가마의 함대가 120톤급 3척에 총 승무원 170명이었고, 지구 한 바퀴 원정을 기획했던 콜럼버스의 함대도 250톤급 3척, 승무원 88명이었던 것에 비교하면 초거대 규모의 함대였다.
소주(蘇州)에서 출발한 함대는 참파(지금의 베트남 중부)와 수마트라를 거쳐 팔렘방, 말라카, 실론(지금의 스리랑카) 등의 항로를 거쳐 1407년 초쯤 인도 캘리컷(Calicut, 지금의 코지코드)에 도달했다. 함대의 목적은 항해하여 도착하는 나라에 대하여 명나라에게 조공을 요구하는 일과 남방 지역의 문물 등을 가지고 돌아오는 일이었다. 말라카 해협의 해적 진조의(陳祖義)라는 중국인을 붙잡아 일시 귀국하였다. 이 항해를 통해 명나라와 교류가 없던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차례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1407년 9월 귀국한 정화는 얼마 뒤 재출발 명령을 받아 연말에 제2차 원정을 떠나게 되었다. 항로는 전과 같았지만 이번에는 시암(태국)과 자바 섬 등을 거쳐 캘리컷에 도착했다. 귀환 중 스리랑카 섬의 갈에 중국어, 타밀어(현지어), 페르시아어(당시 국제어) 등 3개 국어로 쓰여진 비석을 세웠다.
1409년 여름에 돌아온 정화는 다시 출발 명령을 받고 연말에 제3차 원정을 떠났다. 이번에도 캘리컷에 도달하고 돌아오던 중 스리랑카 섬의 현지 왕이 정화의 배에 실려 있던 보물을 강탈하기 위해 공격했다. 정화가 반격하여 그 왕과 그 가족을 포로로 잡아 1411년 7월에 귀국했다.
3차례 대원정은 거의 같은 항로를 유지했지만, 4번째 원정은 약간 시간을 두어 1413년 겨울에 출발했다. 이번에는 좀 더 서쪽으로 나아갈 생각으로 준비가 더 필요했던 것이다. 캘리컷에 도달한 후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해 페르시아 만의 호르무즈와 아라비아 반도 남쪽의 아덴에 도달했다. 귀환 중 수마트라 현지 국왕의 요청을 받아 병사를 움직여 반역자를 토벌하고 1415년 7월에 귀국했다.
5번째 원정은 1417년 겨울에 출발해 본대는 4번째 원정처럼 아덴까지 도달했으나, 도중에 나뉜 분대는 아프리카 대륙 동쪽 해안의 말린디에까지 도달했다고 전해진다. 1419년 8월에 귀국할 때 사자, 표범, 얼룩말, 코뿔소 등 진귀한 동물을 데리고 돌아왔다.
6번째 원정은 2년 후인 1421년 2월에 있었으나, 이번에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공을 바쳤던 각국의 사절을 돌려보내기 위한 것이 임무였다. 항로는 동일했고, 1422년 8월에 귀국하였다.
7번째 원정은 영락제의 사후 그의 손자 선덕제(宣德帝)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1431년 12월에 출발하였는데, 이때 정화는 나이가 많아 지휘관직을 거절하려 했으나 그를 대신할 인재가 없었다. 이번 항해 때 분대는 메카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1433년 7월에 귀국하였지만 얼마 후 정화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정화의 사후 명나라는 다시 쇄국정책으로 전환하여 이후 원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화제(成化帝) 때 다시 대항해에 대한 목소리가 나왔으나 항해에 쓰이는 막대한 비용과 유교적 성격을 지닌 관료의 반대에 부딪혀 물거품이 되었다. 이 대항해에 대한 기록은 제4차 원정과 제7차 원정 때 동행했던 마환(馬歡)의 《영애승람》(瀛涯勝覽)과 비신(費信)의 《성차승람》(星槎勝覽), 공진(鞏珍)의 《서양번국지》(西洋番國志) 등의 견문지가 현재까지 남아 있어, 그 시대 동남아시아에 대한 매우 귀중한 자료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민간의 것이었고, 정화의 공식 기록은 다시 대항해를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한 관료들이 감추어 찾지 못하고 있다.

.대원정을 한 이유
영락제가 막대한 비용이 드는 대원정을 기획한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었다.
정난의 변 때, 남경(南京)에서 탈출하여 실종된 건문제가 남해로 도망치지 않았을까 하는 이유로 그 탐색을 위해 시작한 설
서쪽의 티무르 왕조의 성장을 두려워 한 영락제가 티무르 제국의 주변 세력과 동맹을 맺고 협공을 하기 위한 설
예전 주원장이 명나라 건국 시 멸망시킨 진우량(陳友諒) 휘하에 있던 수군 세력이 반항할 것을 두려워해 이들을 남해원정에 포함시켰다는 설 등이 있다.
첫 번째 설은 믿지 못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주목적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다. 두 번째 설은 티무르가 제1차 원정이 시작한 해에 죽었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 세 번째 설은 주원장이 진우량을 격파한 시기가 너무 오래되었기에 납득할 수는 없다. 달리 생각할 만한 이유로는 찬탈이란 수단을 이용하여 즉위한 영락제가 국내의 불만을 불식시키기 위해 타국의 조공을 많이 받아 유교적 성왕이란 모습을 연출하여 스스로 계승의 정당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시작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도 있지만 중국 함대가 남중국해와 인도양에 이르는 해상패권을 수립하는 것으로 여러 나라의 조공을 촉구하여 궁정에서 사용하는 해외의 사치품을 입수하기 위한 것이 주목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비신 등의 기록을 보더라도 여러 나라의 물물과 통상교역에 대한 사정에 관심을 기울인 것을 보더라도 경제적인 동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정화 사후 대원정 중단 이유
KBS 공사창립특집 ‘문명의 기억, 지도 3부 프레스터 존'(2012년 3월 10일 방영)에 따르면, 베이징대학의 리사오총교수와 인터뷰로 당시 명나라인 중국은 자원이 풍부하고 자급자족할 수 있으니, 외부와 물자를 주고 받을 필요가 없다고 했고, 굳이 외국 세력에 문호를 개방하여 이민족의 침입을 이끌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바다 끝 중국 봉래시 북쪽 1km 떨어진 봉래수성을 견고하게 세워 외부와 왕래를 금지하였다.
– 역사적 평가
이 대원정은 유럽의 대항해시대보다 70년이나 앞선 대원정이자 대항해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후세에 삼보태감으로 불리며, 사마천 및 채륜 등과 함께 환관의 영웅으로 이야기 되었다. 또 정화가 머물렀던 각지의 항에서도 정화에 대한 평판은 높아 자바와 수마트라, 태국에서는 삼보묘가 건립되어 그에 대한 제사가 치러지기도 한다.
또한 정화 함대는 당초부터 말라카 해협에 건국된 말라카 왕국을 인도양 항해를 위한 근거지로서 중시하여 말라카 국왕을 우대하였다. 그 때문에 말라카 왕국은 정화 함대의 보호에서 성장하여 중국 함대의 항해가 단절된 뒤에도 동서교역의 중계항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