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9년 2월 20일, 메디치가 은행 창업자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Giovanni di Bicci de’ Medici,1360 ~ 1429) 별세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이: Giovanni di Bicci de’ Medici,1360년 ~ 1429년 2월 20일)는 피렌체 메디치 가문 출신이며, 메디치 은행 창업자인 은행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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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반니 데 메디치 (Giovanni di Bicci de’ Medici)
.출생: 1360년,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사망: 1429년 2월 20일 (69세),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가문: 메디치 가문
.부모: 아베라르도 데 메디치, 자코파 스피니(Jacopa Spini)
.형제자매: 프란체스코 데 메디치, 안토니아 데 메디치
.배우자: 피카르다 부에리
.자녀: 코시모 데 메디치, 다미아노 디 조반니 데 메디치, 로렌초 일 베키오
메디치 가문의 창시자라 불리는 피렌체의 은행가다.
1201년에 시뇨리아로 있었던 키아리시모 디 잠부오노 데 메디치 (Chiarissimo di Giambuono de’ Medici)나 역사상 중요했던 1378년 치옴피의 난에 연루됐었던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 같은 메디치 가문의 일원들과 다르게, 조반니의 가문 은행 설립은 피렌체에서 가문의 힘을 진정으로 성장시키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성품에 대해서는 친절하고 정직하며 이해심이 많고 인정이 있다는 평판을 즐겼지만 그의 처세술에 능란한 예리한 시선이나 커다란 턱에서 느껴지는 단호함을 간과하는 이는 드물었다.
달변은 아니지만 재기가 엿보이는 대화를 이끌었으며, 그의 재기는 창백한 얼굴에서 풍겨나는 처량한 표정과 어우러져 상대방을 방심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코시모 데 메디치의 아버지이자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의 할아버지, 로렌초 데 메디치의 증조부, 코시모 1세 데 메디치의 고조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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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및 활동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아베라르도 데 메디치와 자코파 스피니 (Jacopa Spini)의 아들로 1360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가 부유한 메디치 가문의 창시자로서 여겨지지만, 그는 부유한 가문으로 태어나지는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남긴 적은 재산은 미망인과 다섯 명의 아들에게 분할되면서, 조반니에게도 약간만 돌아가게 되었다.
조반니는 그의 가문과 은행에 관련되어 있지 않는 한, 정치에 대해서는 다소 무관심했었다. 피렌체 정부에서 그의 이름이 때때로 물망에 올랐으나, 그는 그곳에서 일하기 보다는 벌금을 내는 걸 택했다.
그렇긴 하더라도 그는 1402년, 1408년, 1411년에 시뇨리아에 프리오리로 근무했었고 1421년에는 법으로 인해 두 달간 곤팔로니에레로 있었다.
1402년에 그는 로렌초 기베리트가 산 조반니 세례당의 정문에 제작한 황동판에 대한 심사 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조반니는 피렌체에서 두 개의 양모 작업장을 소유했었고 아르테 델라 라나와 아르테 델 캄비오 두 길드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초기 다국적 기업 회사의 선두 자리에 있던 그의 핵심 경제 관심사인 메디치 은행은 북부 이탈리아 국가들과 그 너머에 도처에 뿌리내렸다.
1414년에 조반니는 교황이 로마로 돌아갈 것으로 기대했었고, 이는 실제로 옳았다. 교황의 지원에 대한 보상으로, 교황은 교황청 재산 관리실의 총감독권을 주었다. 이후로 교황은 메디치 은행을 이용했다. 조반니는 또한 세금 징수 청부권과 많은 명반 광산에 대한 권리로 보답 받았다. 그는 유럽의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가 되는 길을 닦았으며, 그로 인해 이후 문화적, 정치적 명성을 향한 본질적인 걸음을 내딛었다. 그가 이것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 한 가지 방법은 피카르다 부에리와 혼인하는 것이였는데, 그녀는 오랜세월 명망을 쌓아온 명문가문의 후손이였으며 조반니와의 결혼을 통해서 거액의 지참금을 가지고 오기도 했다.
그가 사망할 당시, 그는 1429년 자신의 세금 보고서에서 볼 수 있듯이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였다. 조반니는 1420년에 두 명의 아들인 코시모와 로렌초에게 은행의 소유권을 주었다. 그는 산 로렌초 성당의 구 성물안치소에 묻혔고 그의 아내도 그녀가 별세한지 4년 후에 함께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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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인 성품과 처세술
피렌체 외곽 무젤로(Muggello) 지역에서 태어난 농촌 출신으로, 토착귀족은 메디치가 사람들에 대해 경멸의 대상이라는 의미를 지닌 ‘왈라키아 사람 (Walacchi)’ 또는 미천한 계층을 뜻하는 ‘푸치니 (Puccini)’라고 조롱했다.
그러나 피렌체에서 두 번째 부자였을 뿐 아니라 신중하고 자비로운 성품까지 갖춰, 후에 피렌체 최고위 공직 (Gonfalonier of Justice, 1421년)에 오른다.
개인적인 성품에 대해서는 친절하고 정직하며 이해심이 많고 인정이 있다는 평판을 즐겼지만 그의 처세술에 능란한 예리한 시선이나 커다란 턱에서 느껴지는 단호함을 간과하는 이는 드물었다.
달변은 아니지만 재기가 엿보이는 대화를 이끌었으며, 그의 재기는 창백한 얼굴에서 풍겨나는 처량한 표정과 어우러져 상대방을 방심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언제나 신중하고 사려가 깊어 평생 겸손과 중용을 유지해 알비치 가문이 공화국 정부에 대한 과두 정치의 영향력을 강화하자고 요청했을 때 협조를 거부했으며, 알비치 가문의 적대파들이 과두 정치에 반대하는 것에 도움을 달라고 하자 사업상 다른 일을 할 여력이 없어서 정부의 어떠한 변화에도 도움을 줄 수 없다면서 거절했다.
알비치 가문이 새로운 유형의 수입세와 재산세를 도입해 악명 높은 피렌체의 세제를 개혁하자고 제안했을 때 극도로 신중하게 제안에 수긍하면서도 너무나 많은 조건과 유보 조건을 걸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일생 동안 이런 식으로 질시당할 틈을 주지 않으면서 책임져야 할 약속을 피했으며, 죽기 직전에 두 아들에게 부유한 자와 강한 자를 거스르지 말면서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는 항상 자비로울 것을 권고했다.
조반니 디 비치는 토착귀족이 시행하려는 정부 허가권 확장과 강화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당시 시의회에서 행한 연설 기록을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다.
“허가권 강화는 현명한 사람(상인)에게 손해를 입히게 되고, 결국 공동체 경제에 해를 끼칠 것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정부 허가권을 강화하면 정부 권력이 비대해져 독재 권력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렌체 사회에 선량하고 현명하며 용기 있는 시민이 등장해야 한다. 이들이 훌륭한 법률과 제도를 만들면 저절로 해결될 수 있다. 고대 로마공화국에서 이 같은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조반니 디 비치는 경제학적 이론이 확립되기 훨씬 이전, 정부 관리보다 시장의 힘에 의해 자원이 배분되는 상태가 효율적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또한 정부보다 상인이 경제 문제에 대해 현명하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토착귀족이 평민의 정치 참여를 봉쇄하기 위해 정부 조직을 변경하는 조치에도 반대했다. 당시 정부 조직 변경안을 제출한 권력의 1인자 ‘리날도 델리 알비치(Rinaldo degli Albizzi)’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공직이라는 명예를 가져보지 못한 계층은 자신에게 명예가 주어진다 해도 그 명예를 그리 중히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명예를 누려본 사람에게서 명예를 박탈하면, 다시 그를 얻을 때까지 온갖 수단을 다 써보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직 변경으로 명예를 잃는 계층에게 가해진 불만이 새로이 명예를 얻은 계층이 얻게 되는 이익보다 크다는 점은 자명하다. 결국 이런 불만으로 조직 변경 제안을 한 자에게 동조하는 자는 적어지고, 피해를 입은 자는 더 많아진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선천적으로 감사하기보다는 복수하기를 더 원하는 성향을 지녔기 때문이다. 당신도 이 도시 사건들이 얼마나 교묘하게 수행되는지 알고 있다면 그 같은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조반니 디 비치는 권력자인 토착귀족이 평민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정부 조직을 변경하면, 오히려 적을 만들 수 있다는 논지로 토착귀족을 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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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관계
– 가문
메디치 가문
– 부모
아베라르도 데 메디치, 자코파 스피니(Jacopa Spini)
– 형제자매
프란체스코 데 메디치
안토니아 데 메디치
– 배우자
피카르다 부에리
– 자녀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
다미아노 디 조반니 데 메디치 (Damiano di Giovanni de’ Medici)
로렌초 디 조반니 데 메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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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