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2년 2월 28일,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 재상 황희 (黃喜, 1363 ~ 1452) 별세
황희 (黃喜, 1363년 3월 8일 / 음력 2월 22일 ~ 1452년 2월 28일 / 음력 2월 8일)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재상이다. 본관은 장수 (長水). 초명은 수로 (壽老), 자 (字)는 구부 (懼夫), 호는 방촌(厖村)이다. 현명함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세종대왕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의 한사람으로서 세종대왕 치세기간 중 역대 영의정 중 최장수로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였다.
아직 고려조 말기 시절이던 1376년에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가 1389년 (창왕 1년) 별장으로 과거에 급제했으나, 1392년 (공양왕 3년) 고려 멸망 후 은거하였다. 그러나 동료들과 이성계의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올라 성균관학관으로 출사하여 조선에서 형조판서,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익성 (翼成)이다. 사후 1455년 (세조 1년) 증 순충보조공신 (純忠補祚功臣)에 책록되고, 남원부원군 (南原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종묘 세종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 황희 (黃喜)
.출생: 1363년 3월 8일, 고려 개경부 개풍 가조리
.사망: 1452년 2월 28일 (88세), 조선 경기도 파주에서 노환으로 병사
.거주지: 조선 전라도 남원
.국적: 조선 / 본관: 장수
.별칭: 초명 수로 (壽老), 호 방촌(厖村), 자 구부 (懼夫), 시호 익성
.학력: 1389년 문과 급제
.경력: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종교: 유교 (성리학)
.부모: 황군서(부), 용궁 김씨 부인(모)
.배우자: 초배 최씨 부인 (최안 崔安의 딸), 계배 청주 양씨 부인 (양진 楊震의 딸), 그 외 첩실 1명
.자녀: 아들 황수신, 황보신, 황치신
본관은 장수 (長水). 초명은 수로 (壽老). 자는 구부 (懼夫), 호는 방촌 (厖村). 황석부 (黃石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균비 (黃均庇)이고, 아버지는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 (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황군서 (黃君瑞)이며, 어머니는 김우 (金祐)의 딸이다. 개성 가조리 (可助里)에서 출생하였다.
성격이 원만하여 존경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났고 관료생활 중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다. 사후 청백리로 규정되어 일반적으로는 청백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아들과 사위가 저지른 뇌물수수, 부패 등 물의를 빚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기도 했으나, 세종은 그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임했다.

○ 생애 및 활동
1376년 (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 (福安宮錄事)가 되었다.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하였다. 그리고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 (공양왕 2)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일정 기간 은둔생활을 하며 고려 유신으로 지냈다 [장수황씨 가문의 전승에 의하면 두문동 (杜門洞)에 은거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그러다가 1394년 (태조 3) 태조의 적극적인 출사 (出仕) 요청을 수용하여 성균관학관에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 (世子右正字)를 겸임하였다. 이후 직예문춘추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398년 문하부우습유 (門下府右拾遺) 재직 중 언관으로서 사사로이 국사를 논의했다고 문책되어 경원교수 (慶源敎授)로 편출되었다가, 1398년 (정종 즉위년) 우습유로 소환되었다. 이듬 해 언사로 파직되었다가 그 해 2월경 문하부우보궐에 복직되었다.
언사로 파직되었으며, 곧 경기도도사 (京畿道都事)를 거쳐 형조 · 예조 · 이조 · 병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1401년 (태종 1)경 지신사 (知申事) 박석명 (朴錫命)이 태종에게 천거해 도평의사사경력 (都評議使司經歷)에 발탁되었다.
그 뒤 병조의랑에 체직되었다가 1402년 아버지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 해 겨울 군기 (軍機)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인물난으로 기복되어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다. 1404년 우사간대부를 거쳐 승정원좌부대인에 오르고, 이듬해 박석명의 후임으로 승정원지신사에 발탁되었다.
1409년 참지의정부사가 되고,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지의정부사 (知議政府事)·대사헌 등을 지냈다. 1411년 병조판서, 1413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질병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1415년 이조판서 재직 중 송사 (訟事) 처리와 관련해 육조에 문책이 내려지면서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 해 행랑도감제조 (行廊都監提調)에 복위된 데 이어, 참찬·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16년에는 세자인 양녕대군 (讓寧大君)의 실행 (失行)을 옹호하다가 다시금 파직되었다.
그 뒤 조정으로 복귀해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윤, 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다. 1418년 세자 폐출의 불가함을 극간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교하 (交河)로 유배되고, 곧 남원부에 이치 (移置)되었다.
세종의 치세가 시작되고 아울러 태종의 노여움이 풀리면서, 1422년 (세종 4) 남원에서 소환, 직첩과 과전을 환급받고 참찬으로 복직되었다. 1423년 예조판서에 이어 기근이 만연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어 구휼하였다.
그리고 판우군도총제 (判右軍都摠制)에 제수되면서 강원도관찰사를 계속 겸대하였다. 1424년 찬성, 이듬해에는 대사헌을 겸대하였다. 또한 1426년에는 이조판서와 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발탁되면서 판병조사를 겸대하였다.
1427년 좌의정 겸 판이조사가 되었고, 그 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기복되어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이어 평안도도체찰사로 파견되어 약산성기 (藥山城基)를 답사하였다. 이 때 약산이 요충지라 해서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한 뒤 평안도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하였다.
1430년 좌의정으로서, 감목 (監牧)을 잘못해 국마 (國馬) 1,000여 필을 죽인 일로 해서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 (太石鈞)의 일에 개입해 선처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일국의 대신이 치죄에 개입함은 부당할 뿐더러, 사헌부에 개입하는 관례를 남기게 되므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래서 한때 파주 반구정 (伴鷗亭)에 은거하였다. 1431년 다시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치사 (致仕)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 (統理)하였다. 그리고 치사한 뒤에도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 활동사항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였다. 그리고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하였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으로부터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했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했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농사개량에 유의해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각 도에 명령해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하였다. 또한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펴내면서, 종래 원집 (元集)과 속집 (續集)으로 나뉘어 내용이 중복되고 누락되거나 내용과 현실이 괴리되는 것을 수정, 보완하였다.
한편, 국방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 야인과 남방 왜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예법을 널리 바르게 잡는 데에 노력해, 원나라의 영향이 지대한 고려의 예법을 명나라의 예법과 조선의 현실을 참작해 개정, 보완하였다.
또한, 인권에 유의해 천첩 (賤妾) 소생의 천역 (賤役)을 면제하는 등 태종대의 국가기반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 세종대에는 의정부의 최고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영집현전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 세자사 상정소도제조 (領集賢殿經筵藝文館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詳定所都提調) 등을 겸대하였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 (鎭定)시키면서, 4군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였다. 특히, 세종 말기에 세종의 숭불과 연관해 궁중 안에 설치된 내불당 (內佛堂)을 두고 일어난 세종과 유학자 중신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데 힘썼다.

– 상훈과 추모
이처럼 그는 왕을 보좌해 세종 대의 성세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를 통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1452년 (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1455년 (세조 1) 아들 황수신 (黃守身)이 좌익공신 (佐翼功臣)에 책록되면서 순충보조공신 남원부원군 (純忠補祚功臣南原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상주의 옥동서원 (玉洞書院)과 장수의 창계서원 (滄溪書院)에 제향되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 (翼成)이다.
○ 가계 (家系)
할아버지 : 황균비 (黃均庇)
할머니 : 진주강씨
아버지 : 황군서 (黃君瑞, 1328년 – 1402년 3월 22일)
어머니 : 용궁 김씨 (龍宮金氏, ? – 1427년 (세종 9년) 7월 15일), 노비 출신으로 아버지 황군서의 첩
형 : 황중수 (黃中粹)
누이 : 황씨 (黃氏)
누이 : 황씨 (黃氏)
누이 : 황씨 (黃氏)
부인 : 최씨 [崔氏, 판사복시사 (判司僕侍事) 최안 (崔安)의 딸, ? – 1386년]
장녀 : 황씨 (長水 黃氏)
부인 : 양씨 [楊氏, 공조전서 (工曹典書) 양진 (楊震)의 딸, ? – 1448년 (세종 30년) 3월 28일], 1388년 혼인
장남 : 황치신 (黃致身)
손자 : 황사친 (黃事親)
손자 : 황사장 (黃事長)
손자 : 황사현 (黃事賢)
손자 : 황사형 (黃事兄)
손자 : 황사충 (黃事忠)
손자 : 황사효 (黃事孝), 동지중추부사
손자 : 황사공 (黃事恭)
손자 : 황사의 (黃事義)
손자 : 황사경 (黃事敬)
차남 : 황보신 (黃保身)
손자 : 황우형 (黃友兄)
손자 : 황종형 (黃從兄)
손자 : 황경형 (黃敬兄)
손자 : 황공형 (黃恭兄)
3남 : 황수신 (黃守身)
손자 : 황신 (黃 )
손자 : 황찰 (黃察)
손자 : 황성 (黃省)
손자 : 황욱 (黃旭)
4남 : 황직신 (黃直身, 사직)
손자 : 황삼외 (黃三畏)
손녀 : 황씨 (黃氏)
딸 : 행주 기씨 기질의 처 (공민왕 때 신돈과 함께 처형된 기현의 손자)
손자 : 기시경
외할아버지 : 김우 [金佑, 고려 말기에 감문위호군 (監門衛護軍) 역임]
장인 : 최안 (崔安)
장인 : 양진 (楊震)

○ 일화
– 불교 비판
불교정책에 있어서는 그는 조선의 건국 이념이 유교 성리학에 있음을 주장, 강력한 억불정책을 추진할 것을 건의하여 만년의 태종의 회암사 행차를 반대하였고, 세종 말년에 세종 이 궁중 내에 법당인 내불당을 설치하려고 하자 조선의 건국이념을 들어 이에 반대하였으며, 승려와 승도 600명을 노역에 동원하여 풍저창과 광흥창을 건립케 하기도 했다.
– 사람들의 잘못을 깨우치다
두 여종이 서로 상대방이 서로 잘못했다며 싸웠다. 그는 두 여종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은 후 한 여종에게 ‘네 말이 옳도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다른 여종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역시 ‘네 말도 옳도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부인이 ‘한 여종의 말도 옳고 다른 여종의 말도 옳다면 누가 잘못했는가? 혹은 한 여종이 옳다면 다른 여종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며 이의를 제기하였다. 손님들 역시 부인의 견해에 동의했다. 황희는 ‘부인 말도 옳소’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항상 사람은 상대방의 잘못은 눈여겨 보면서도 자신의 잘못은 절대 모르는 법이라’며 지적했다. 두 여종과 부인은 물론 손님들도 스스로 부끄러워했다 한다.
– 아들에 대한 교훈
유몽인 (柳夢寅)의 ‘어우야담 (於于野談)’에는 아들 황수신 (黃守身)이 기생과 절연하라는 충고를 무시하자 관복 (冠服)을 입고,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으니 앞으로 손님의 예로써 대하겠다”고 인사해 아들에게 통절한 반성과, 기생과의 절교를 끌어냈다고 전하고 있다.
황희는 아들에게 기방 출입을 끊으라고 여러 차례 엄히 꾸짖었으나 아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어느 날 아들이 밖에서 돌아오자 황 정승은 관복 차림으로 차려입고 문까지 나와 마치 큰 손님 맞이하듯 했다. 아들이 놀라 엎드리며 그 까닭을 묻자 황 정승은 말합니다. “그동안 나는 너를 아들로 대했는데 도대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이는 네가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너를 손님 맞는 예로 대하는 것이다.” 뉘우친 아들은 기방 출입을 끊기로 맹세하였다.
– 기타
그는 청렴하고 학덕이 높았으며 사리에 밝고 치밀한 사람이었다. 또 한편으로 성품이 너그럽고, 예법 및 임기응변에 뛰어났다.
○ 주요 저서
방촌집 (厖村集)
방촌선생실기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