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2년 9월 21일, 이탈리아의 도미니코회 수도사•설교가•종교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1452 ~ 1498) 출생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1452년 9월 21일 ~ 1498년 5월 23일)는 이탈리아의 도미니쿠스회 수도사, 설교가, 종교개혁가이다.
–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출생: 1452년 9월 21일, 페라라 공국 페라라
.사망: 1498년 5월 23일 (45세),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국적: 이탈리아
.가문: 메디치 가문
.부모: 니콜로 디 미켈레 달라 사보나롤라 (Niccolò di Michele dalla Savonarola), 엘레나 보나콜시 (Elena Bonacolsi)
.형제자매: 알베르토 사보나롤라, 마우렐리오 사보나롤라, 베아트리체 사보나롤라 등
.영향을 준 인물: 얀 후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
사보나롤라의 고향은 볼로냐에서 조금 떨어진 이탈리아 동부의 페라라다.
이곳에서 사보나롤라는 일곱 명의 아이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할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되려는 마음을 먹은 적도 있지만, 뛰어난 인문학적 소양 때문인지 성서연구에 몰입해 결국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되었고, 토마스 아퀴나스에 정통한 신학자로서의 길을 걷는다.
사보나롤라는 설교를 통해 피렌체 시를 개혁하고, 민주정치를 실시하려고 했다.
또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부도덕을 비난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이탈리아가 벌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 생애 및 활동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는 1452년 9월 21일, 북이탈리아 페라라 (Farrera)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소년시절부터 생각이 많고 침울한 성격을 소유하고 있었다.
22세 무렵 들은 설교에서 세상에서 창궐한 죄악의 타락상을 듣게 됐고, 이를 계기로 볼로냐의 도미니칸 수도원에 들어가 신부의 삶을 시작한다.
- 학식
1475년에 도미니코수도회에 들어가기 전에 인문주의, 철학, 의학을 공부했다.
1482년에 피렌체 산마르코 수도회에 파견되어 높은 학식과 금욕 생활로 명성을 얻었고, 그 뒤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공화주의 사상과 정치적 자유주의를 기조로 한 설교를 했다.
볼로냐에서 7년을 공부한 뒤, 그는 교단으로부터 설교사로 파송 받아 본격적인 설교 사역을 시작한다. 그러나 사역 초기 사보나롤라는 페라라 사투리 억양과 학자적 언변 때문에 대중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한다. 다만 1486년 사순절 설교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때 이미 그의 신앙고백은 ‘계시적 환상’으로 가득 차 있었고, 로마 교회의 ‘진정한 회개’에 대한 그의 요구는 도발적인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사보나롤라는 북이탈리아로의 설교여행 중 설교가로서의 진면목을 보이기 시작한다. 브레스키아 설교에서 사보나롤라는 장차 그가 할 설교의 세 가지의 핵심 메시지를 담기 시작한다. 그 세 가지는 ‘교회는 채찍을 맞게 될 것’, ‘교회는 새로워질 것’, ‘이 모든 일이 빨리 이뤄질 것’ 등이다.
장차 다가올 종교개혁에 대한 예언과도 같은 이 설교는 대중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했고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1490년에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당시 지배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를 공격하고, 교회와 속세의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1491년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으로 옮긴 후, 공화주의 사상과 정치적 자유주의를 기조로 한 설교로 당시의 피렌체 공화국의 참주 (僭主) 로렌초 데 메디치를 공격, 교회와 속세의 도덕적 부패를 맹렬히 비난하여 민중의 인심을 사로잡아가기 시작했고 로렌초 사후 그 아들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대에 이르려 더욱 메디치 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1492년 무렵에는 그의 설교를 들으려는 청중이 너무 많아서 산마르코 성당에서 산타마리아 대성당으로 자리를 옮기는 지경에 이른다. 당시 이탈리아와 피렌체의 부패를 씻기 위한 ‘신의 칼’이 곧 내려올 것이라는 그의 경고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교회로 옮기게 했다.
사보나롤라는 타락한 로마교회의 모습과 사치와 오락에 빠진 대중을 겨냥하며 교회의 도덕성 회복을 촉구했다. 특히 예술과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메디치 가문의 횡포를 비판하며 교회 개혁을 힘 있게 부르짖었다.
당시 피렌체의 지도자 피에로 메디치의 무능이 더해지면서 사보나롤라의 설교는 더 큰 호응을 얻었고,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로 쳐들어오자 많은 시민들은 사보나롤라의 예언이 적중했다며 놀라움을 나타냈다.
그 절정은 1494년 이탈리아 전쟁 때 프랑스의 왕 샤를 8세의 군대가 승리하리라는 것을 예견했고 결국 프랑스군이 피렌체를 포위한 끝에 피렌체가 무기력하게 함락당하면서 그의 예견이 현실이 되었던 때로, 하느님의 예언자라는 그의 권위가 한층 강화된 계기가 되었고 나아가 사를 8세와 협상을 해 프랑스군이 피렌체에 무혈입성하는 것에 합의, 위기를 잘 대처하였으며 이로써 피에로 데 메디치의 망명 후에는 중산 계급을 주체로 정치적 지도자가 되어 정권을 잡았다
그의 설교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는지, 피렌체의 포르노그라피가 불타없어졌다고 한다.
- 교회의 탄압
1494년에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입해 메디치가의 통치가 무너지자, 샤를 8세의 침략을 예언했던 사보나롤라의 권위가 높아졌다.
사보나롤라는 피에로 데 메디치의 망명 후에는 중간계급을 주체로 지도자가 되어 정권을 잡아 피렌체에 귀족 정치를 배격하고 신정 정치적 민주정을 도입하고, 종교개혁을 실현하려는 법률을 제정했다.
그러나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대립하게 되었다.
1495년에 알렉산데르 6세는 사보나롤라에게 로마에 와서 그가 주장하는 예언 능력을 보이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건강이 나쁘고, 로마로 가는 도중에 폭행당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교황의 명령을 거절했다.
이에 교황은 사보나롤라에게 더 이상 설교를 하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사보나롤라는 1496년에 렌트에서 다시 설교를 시작했고, 교황은 불복종의 죄를 물어 그를 파문했다.
사보나롤라는 대 (對) 피사 전쟁의 실패, 메디치 파 (派)의 모략으로 인심을 잃었고, 그 뒤에도 계속 교황에게 도전하자 교황은 피렌체 시 당국에 사보나롤라를 로마로 보내거나 설교를 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 피렌체 시를 예배 금지시킬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런가운데 사보나롤라가 이끌던 산마르코 수도원과 경쟁관계에 있던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의 한 설교가가 사보나롤라에 대한 공개 도전장을 던졌다.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예언가인지 ‘불의 심판’을 통해 겨뤄보자는 것이었다.
장작더미에 불을 붙여 길을 만들고 그곳을 걸어서 무사히 통과하는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예언자라는 것이 ‘불의 심판’의 내용이었다.
1498년 4월 7일, ‘불의 심판’이 열린 날. 시뇨리아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 가운데 30미터의 장작더미로 이뤄진 ‘불의 길’이 마련됐다.
사보나롤라의 산마르코 수도원을 대표하는 수도사와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대표하는 수도사가 불의 제단 앞에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고,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사보나롤라 측 수도사들이 “하나님이 불의심판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외쳐댔다.
이 말을 들은 피렌체 시민들은 사보나롤라를 향해 “예언자가 아니라 사기꾼”이라며 비난을 쏟아냈고, 그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사보나롤라는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되고 1498년 5월 23일 화형을 당해 죽게 된다. 사보나롤라는 시 당국에 굴복해 교회 법정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화형당했다.
1498년 5월23일 아침, 수도사 사보나롤라와 그를 따르던 두 명의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이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이들의 죽음과 함께, 지난 4년 동안 피렌체를 사로잡았던 ‘새로운 예루살렘’ (Nuova Gierusalemme)이라는 꿈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미 4월19일 사보나롤라의 재판이 있었던 날, 루카 란두치 (Luca Landucci)는 자신의 일기에 ‘그토록 고생해서 쌓아올린 구조물이 무너져 내린 비통한 날’이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어떻게 새로운 예루살렘과 같은 피렌체인의 꿈이 한갓 거짓말 (una sola bugia) 위에 세워질 수 있었느냐’고 한탄했다. 아마도 사보나롤라가 화형장의 재가 되어버린 날, 피렌체 시민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되물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가 등장한 시점부터 몰락까지 그의 예언을 거짓말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다만 <강론> 1권 11장에서 보듯, 마키아벨리는 애당초 사보나롤라가 “신과 이야기를 했다는 것” (che parlava con Dio)에 대해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로마의 종교를 만든 누마 (Numa)처럼 요정과 이야기를 했다고 거짓말하는 것 따위는 필요하다면 할 수 있는 기만에 불과했던 것이다. 대신 그가 주목한 것들은 정치적인 문제들이었다. 시민들의 정의감을 ‘시민적 자유’와 ‘공동체 존속’과는 전혀 상관없는 불필요한 목적에 분출시켜 완전히 소진해버린 것, 그리고 스스로가 제정한 법을 위반함으로써 자기의 통치를 ‘정치적 권위’의 행사가 아니라 ‘물리적 힘’의 행사로 인식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마키아벨리는 단 한 번도 사보나롤라의 예언을 믿은 피렌체 시민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무식하다거나 천박하다는 비난도, 이렇듯 한심할 수 있느냐는 한탄도 하지 않았다. ‘허영의 소각’ (Falo delle Vanita)과 같은 불필요한 집단행동, 그리고 방향도 없이 휘둘러대던 증오의 주먹질은 전적으로 사보나롤라와 그를 따르던 정치 지도자들의 잘못이다. 정치는 결국 ‘파당적’ 이익의 관철일 뿐이라는 편견을 심어주고, ‘법’이 아니라 ‘힘’이 해결책이라는 인식을 시민들에게 각인시킨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어쩌면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를 무장했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예언자로 간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를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선구자라고 하는 사람, 또 로마 가톨릭 교회 정통 복귀 운동자라고 하는 사람 등 일치하지 않으나, 16세기 르네상스의 미술, 문학, 사상 (思想)에 미친 영향은 크다.
○ 평가
- 힘이 없으면 개혁할 수 없다
기업인 김경준은 <지금 마흔이라면 군주론> (위즈덤하우스, p.231-236)에서 마키아벨리의 저서 군주론을 인용하여 사보나롤라를 ‘힘이 없으면 개혁할 수 없는 예’라고 비판한다.
사보나롤라는 부패한 교회와 정치를 비판한 예언자였지만, 그의 정치는 무능했고 경제가 위축되어 피렌체 시민들은 더이상 사보나롤라를 지지하지 않았다.
4년만에 실각하여 1498년 화형으로 처형되었다. 이를 피렌체 시청 서기관이 되어 출근한 날에 본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렇게 비판했다.
“시민의 천성이 변덕스럽기 때문에, 이들에게 어떠한 일을 설득하기는 쉬우나 설득된 상태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말로 되지 않으면 힘으로 믿게 하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파라오를 굴복시키는 실력이 있었던) 모세, 키루스, 테세우스, 로물루스 역시 무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그들의 율법이 오랫동안 지켜지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수도사 사보나롤라의 예가 있다.” (군주론 6장)
- 종교개혁 가능성 연 선구자
사보나롤라의 정치개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오늘날 교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적지 않다.
특히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던 명 설교가로서의 면모는 오늘날의 목회자들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그의 설교가 담고 있던 ‘성경중심’, ‘본질에 대한 강조’, ‘교권주의에 대한 날선 비판’은 오늘날 세상으로부터 질타를 받는 교회의 상황 속에서 다시금 그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존 위클리프 얀 후스와 더불어 루터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힌다. 타락한 로마교회를 소재로 한 간결하고도 쉬운 언어의 설교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가 설교를 하는 곳마다 대중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고, 이같은 대중적 인기는 당시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설교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교회와 세상의 부패에 관한 비판은 타락한 성직자들로부터 증오와 미움을 샀고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위클리프와 후스를 비롯해 종교개혁의 여명기에 생명을 걸고 성경을 전한 선구자들이 있었기에 종교개혁이 도래할 수 있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아이굿뉴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