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1년 7월 25일, 독일의 신비사상가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거룩한 삶 · 기도의 삶을 살아간 사람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à Kempis, 1380 ~ 1471) 별세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à Kempis, 1380년 ~ 1471년 7월 25일)는 독일의 신비사상가이다.
독일 라인 강 하류의 켐펜에서 태어나, 92년 동안의 일생을 거의 즈볼러에 가까운 아그네텐베르크 수도원에서 보냈다. 여기서는 네덜란드의 신비사상가 헤르트 호르테 및 제자 플로렌티우스 라데빈스가 창설한 ‘공동생활의 형제회’ (Brethren of the Common Life)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토마스 아 켐피스도 이 회에 가담하여 모범적인 경건한 생활을 보냈다. 이 회는 속세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수도적인 청빈 · 정결 · 복종의 생활을 보내도록 노력하고 재산은 공유하며, 스스로의 노동으로 그날그날의 양식을 벌었다.
일은 사본 (寫本) 및 인쇄 · 제본과 교육으로, 특히 연소자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으며, 후에 에라스무스, 니콜라우스 쿠사누스 등을 배출했다.
그들은 프란치스코회와는 달라서 자신의 양식을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신비주의의 조용한 실천활동이 강조되고 있다.
그보다 더 경건한 사람은 없다는 말까지 들은 토마스 아 켐피스는, 1425년 이후 부원장으로서 후진 지도에 진력했다. 그래서 후진 지도를 위한 지도서를 몇 가지 썼는데, 그 중 ‘준주성범’ (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기독교 세계에서 널리 애독되는 책이 되었다.
1725년에 웨슬리는 온전한 거룩을 향한 구도자적 자세로의 전환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해였다. 이 때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고 더욱 가속화 되었다.
–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à Kempis)
.본명: 토마스 헤메르켄 (Thomas Haemerken), ‘토마스 아 켐피스’는 출신지명 라틴식 호칭
.출생: 1380년, 독일 Kempen
.사망: 1471년 7월 25일 (91세), 네덜란드 Zwolle
.매장지: Basilique Notre-Dame-de-l’Assomption de Zwolle, (네덜란드 Zwolle)
.부모: Gertrude Haemerken, John Haemerken
.대표 저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준주성범)
.영향을 준 인물: 존 웨슬리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a Kempis, 1380년 ~ 1471년 7월 25일, 향년 91세)는 독일의 가톨릭 수도사제이자 신비사상가로 가톨릭뿐 아니라 개신교에도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지금의 네덜란드 빈더스헤임과 즈볼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라인 강 하류 쾰른 부근의 도시인 켐펜에서 태어났다. 1392년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났고, 1399년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 33세이던 1413년에 사제서품을 받아 신부가 되었다. 1425년에는 수도원의 부원장이 되었고, 경건한 생활로 모범이 되었다.
그는 수도회에서 주로 수련수사들을 교육하는 일을 맡았고, 설교와 저술활동에 주력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준주성범’ (Imitatio Christi,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기도와 묵상’ 등이 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 이후, 토마스 아 켐피스가 살았던 수도원은 개혁교회 (장로교회)로 개조되었다.
○ 생애 및 활동
1380년 (혹은 1379년)에 독일 뒤셀도르프 북쪽 라인강 하류에 위치한 켐펜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 켐피스’는 켐펜 출신이라는 뜻이며, 본래 성은 헤메르켄 (Hemerken)이다.
13세 되던 해에 네덜란드의 데벤터에 있는 공동생활 형제단 학교에 들어가 거기서 근대 경건 운동 (Devotio Moderna)의 핵심 인물이었던 플로렌스 라데빈스의 영향을 받으며 경건을 익혔다.
20세 때, 형 요한이 부원장으로 있던 즈볼레의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회인 성 아그네스 수도원에 입회하여 1407년에 신앙 서약을 하고 1413년경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425년에 부원장이 되었지만, 정치적 갈등에 휘말리자 그의 형과 더불어 아른헴으로 옮겨 갔다. 1432년에 그의 형이 죽기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후에 다시 아그네스 수도원으로 돌아온 그는 1448년에 다시 수도원 부원장이 되었다.
네 번이나 성경 전체를 필사했으며 여러 인물의 전기를 저술하고, 찬송가를 작사하는 등 왕성한 집필 활동을 했다. 평생을 손에서 펜을 놓지 않았다고 알려진 그는 마침내 1471년에 소천했다.
그가 1420년대에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지금까지 여러 세기를 지나며 수많은 판본과 역본을 거듭하면서 성경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있고, 표상이신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도록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큰 감화와 도전을 주며 빛나는 신앙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육신의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세상의 즐거움에서 내면의 거룩함으로, 사람의 위안에서 주님의 위로로 마음을 옮기며, 나아가 주님과의 거룩한 연합을 갈망하게 된다.
저자 토마스 아 켐피스는 성찬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을 전하며, 올바르게 집전하고 참례하도록 권면한다. 삶을 돌이키는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며 주의 몸과 피를 합당히 받을 때 읽는 이들은 영혼의 회복과 경건의 은혜를 얻으며 그리스도와의 거룩한 하나 됨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 주저 ‘그리스도를 본받아’ (준주성범)
토마스 아 켐피스의 주요저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준주성범)은, 성경 다음으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많이 읽힌 책이자 많은 영향을 끼친 서적으로 유명하다.
<준주성범>은 그리스도교 신앙적 교훈에 따라 주제를 나누어 총 4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 ‘정신생활에 유익한 훈계’, ‘내적 생활로 인도하는 훈계’, ‘내적 위로에 대하여’, ‘존엄한 성체성사에 대하여’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정신생활에 유익한 훈계’에는 수도자의 순명과 수도생활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마지막 장인 ‘존엄한 성체성사에 대하여’ 부분을 빼거나, ‘성체성사’를 ‘성찬례’로 바꾸어서 번역하였다. 가톨릭에서는 사제만이 성체성사를 집전할 수 있고, 사제의 축성으로 밀떡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 (성체와 성혈)로 성변화 (聖變化)한다고 믿고, 죄를 지었으면 고해성사를 본 후에 영성체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개신교에서는 사제 (성직자) 직분을 인정하지 않으며 (만인사제설), 성변화와 성사 (聖事)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 De Imitatione Christi) 개관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 De Imitatione Christi, 또는 ‘준주성범’, 遵主聖範)은 기독교, 특히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표적인 신앙 서적으로 토마스 아 켐피스가 쓴 책이다. 최초의 책은 1418년 ~ 1427년경에 라틴어로 간행되었다. 이 책은 토마스 아 켐피스가 동참하였던 데보티오 모데르나 운동에 근거한 신앙생활을 위한 영성 서적이다. 혹자는 이 책을 성경과 비교할 수 있는 고전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준주성범은 종교적 교훈에 따라 주제를 나누어 총 네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 ‘정신 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내적 생활로 인도하는 훈계’, ‘내적 위로에 대하여’, ‘존엄한 성체성사에 대하여’ 등이 그것이다.
– 배경과 역사
.배경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다는 것은 기독교의 신학, 윤리학, 영성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개념과 실천 행위에 대한 언급은 바오로 서간을 비롯한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 볼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근본적인 목적이자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에 대한 치유책으로 여겼다. 내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외적인 부분에서도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였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마구간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옷이 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처럼 자신 역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은 비잔틴 신학의 주요 주제였으며, 14세기의 책인 ‘그리스도의 삶’을 보면 니콜라스 카바실라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의 근본적인 덕망으로 보았다.
유럽 중세 말기에 들면서 네덜란드의 가톨릭 사제 헤르트 호르테는 당시 교회가 수도원의 전통을 점차 잃어가고 있고 성직자들의 도덕적 가치가 떨어져가고 있다고 인식하고 데보티오 모데르나 운동을 전개하였다. 데보티오 모데르나 운동이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초대 교회의 복음적 생활을 지향하는 신앙 쇄신으로서, 신학적 사변 (思辨)이나 외면적 신심 형식보다는 영적 (靈的) 내면성의 충실 및 수도원 개혁, 믿음이 약화된 성직자들의 재교육이었다. 준주성범은 바로 이 데보티오 모데르나 공동체 안에서 쓰여진 것이다. 데보티오 모데르나 운동은 당시 북유럽에서 크게 성행하였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운동이 추구하던 본래의 정신이 발전하여 종교개혁을 꽃피웠다.
.역사
최초의 준주성범 책은 1418 ~ 1427년경에 네덜란드에서 라틴어로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토마스 아 켐피스를 이 책의 저자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개신교 목회자들에 의해서 1913년도부터 부분이 번역 소개되다가, 1923년 장로교의 조선야소교서회에서 이원모 장로에 의해서 ‘긔독셩범’이란 제목으로 1-4권이 최초 완역되었다. 이후 1924년 조선성공회 (현 대한성공회)에서 허세실 (Cecil Hedges) 선교사에 의해서 ‘遵主聖範’이란 제목으로 전권이 출판되었으며, 라틴어 원문에 한자본, 일본어본, 영어본을 대조하여 번역되었다. 천주교에서는 해방 후, 1954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윤을수 (尹乙洙) 라우렌시오 신부에 의해 완역되었다.
– 기타
.영향
이 책은 존 웨슬리의 성화에 영향을 끼친 책 중에 첫 번째로 꼽힌다. 이 책은 그가 소위 ‘종교적 회심’을 하는 사건을 경험토록 하였다.
.명언
The following quotes are attributed to him:
“Without the Way, there is no going,
Without the Truth, there is no knowing,
Without the Life, there is no living.”
“If thou wilt receive profit, read with humility, simplicity, and faith, and seek not at any time the fame of being learned.”
“At the Day of Judgement we shall not be asked what we have read, but what we have done.” — The Imitation of Christ, Book I, ch. 3
“For man proposes, but God disposes” — The Imitation of Christ, Book I, ch. 19
“If, however, you seek Jesus in all things, you will surely find Him. ” — The Imitation of Christ, Book II, ch. 7
“In angello cum libello” (with slight variations), “In a little corner with a little book”
— Shortened form of a motto often ascribed to, or associated with, Thomas a Kempis. The complete saying as reported by an early biographer is a mixture of Latin and Dutch and runs as follows: “In omnibus requiem quaesivi, sed non inveni, nisi in hoexkens ende boexkens”, “I have sought everywhere for peace, but I have found it not, save in nooks and in books.”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