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년 11월 3일,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조각가•화가•음악가 벤베누토 첼리니 (Benvenuto Cellini, 1500 ~ 1571) 출생
벤베누토 첼리니 (Benvenuto Cellini, 1500년 11월 3일 ~ 1571년 2월 13일)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조각가, 화가, 음악가 그리고 군인이다.
유명한 《자서전》에서 자칭한 바와 같이 모험가·무뢰한·호색가이기도 하였다.
– 벤베누토 첼리니 (Benvenuto Cellini)
.출생: 1500년 11월 3일, 이탈리아 피렌체
.사망: 1571년 2월 13일, 이탈리아 피렌체
.예술 사조: 이탈리아 르네상스, 르네상스, Florentine painting
.부모: Maria Lisabetta Granacci, 지오바니 첼리니
벤베누토 첼리니는 음악가, 살인자, 동성애자, 도둑, 여성 편력자, 명사수, 자서전 작가, 군인, 등 수많은 수식어를 갖이고 있는 화려한 재능을 선보인조각가 겸 금세공사 이기도 하다.
그는 마니에리즘 양식을 대표하는 예술가로서 독특한 삶을 살았기에 프랑스 작곡가 “엑트로 베를리오즈” 는 그를 소재로 <벤베누토 첼리니> 라는 오페라를 썼다.
○ 생애 및 활동
첼리니는 피렌체에서 1500년 11월 3일 태어났다.
아버지는 음악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는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 금세공을 배웠다.
지금도 피렌체인들은 첼리니를 그들의 자랑스러운 금세공의 원조로 모시고 있다.
피렌체의 오래된 다리 양쪽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금은방들이 들어선 폰테 베키오에는 첼리니를 기념하는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18세나 19세에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처음 간 후에 그는 한 곳에서 4, 5년 이상 머물지 않았다.
항상 좋은 직장을 찾아 로마로, 페라라로, 만투아로, 베네치아로 프랑스이 파리와 퐁텐블로로, 교황 크레멘테7세와 파울로 3세, 프랑스의 프랑스와 1세와 수없는 추기경들과 군주들을 찾아 57세가 되기까지 끊임없이 타향살이를 해야했다.
타향살이는 그의 출세하려는 야심과 동시에 전염병과 전쟁을 피하려는 방편이었으나 그는 가끔 자신이 효성을 다하던 아버지와 사랑하던 누이와 조카딸이 생각나서, 그리고 병으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피렌체로 돌아가곤 했다.
첼리니는 일생동안 많은 위기를 겪었다. 샤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강점했을 때 (1527) 그는 교황 클레멘테 7세가 피난해 있던 산 안젤로 성곽에서 임시 차용당한 대포의 사격수로 생명을 걸고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쟁자금이 필요했던 교황 클레멘테는 첼리니를 불러 그 성곽에서 교회의 삼중관의 보석들을 떼어내어 감추고 금들을 녹이게 할만큼 그를 신뢰했다.
1534년에 발생한 그의 경쟁자인 폼페이오 데 카프티네이의 살인사건과 로마 강점시대에 교황 클레멘테의 보물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1538년 체포되었다.
그가 무죄를 주장한 자서전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이 당시의 취조 문서가 발견되어 증명되었다. 당시의 사건들이 그의 자서전과 취조서에 너무도 생생하고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첼리니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과 모략 때문에 자기가 교황청을 방어한 비로 그 산 안젤로 성곽의 동굴에 교황 파올로 3세에 의해 감금되었다. 그는 그 높은 성곽에서 다리를 부수면서까지 대담하게 탈출했다.
그러나 다시 체포되어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석방되었다.
1540년 석방된 첼리니는 프랑스와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에서의 안전과 명성을 추구하여 이탈리아를 빠져 나갔다. 그는 파리와 퐁텐블로에서 작품을 만들어 명성을 얻는다.
그는 왕이 자주 찾아와 작품들을 보려고 할 정도로 높은 신망을 얻는 조각가가 되었다.
이처럼 그는 평생동안 항상 좋은 직장을 찾아 로마로, 베네치아로, 파리와 퐁텡블로로 끊임없는 타향살이를 했고, 자신을 인정하는 교황과 추기경, 군주들을 찾아 돌아다녔다.
한 전쟁에서 대포 사격수로 싸워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고, 자신의 경쟁자인 금은세공 장인 카티아니를 살인한 죄목으로 동굴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이 때에 탈출과 재수감, 사형선고, 석방으로 이어지는 고통을 겪었는데, 그는 이 자서전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고, 후에 발견된 취조문서에 의해 그의 주장이 사실로 증명된다.
1540 ~ 45년 사이, 그는 프랑스의 오아 프랑스와1세에게 초대되어 그 유명한 <소금그릇 1543>과 많은 작품들을 남기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1세의 애첩 마담 데 탕프의 질투와 갈등으로 목숨을 잃을뻔 하였고, 다시 고향 피렌체로 돌아와 말년까지 뜨거운 예술혼을 불태운다.
그런중 그의 최고 걸작인 <페르세우스와 메두사>의 거상이 제작 되는데, 이 작품은 그가 도나텔로의 <주디트>와 메켈란젤로의 <다윗>상에 경쟁한다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한다.
또한 1557년에는 남색으로 4년의 가택연금형을 받기도 했고, 이 기간(1558 ~ 1562) 동안 자서전을 집필한다.
이후 이 자서전 원고는 한동안 묻혀 있다가 1728년 한 골동품 수집가에 의해 독일에서 출판되었다.
1771년 이 원본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이것을 기초로 괴테가 독일어판을 번역하기도 했다.
이 자서전 속에선 그의 불타는 예술혼과 정직하고 개성넘치는 성격으로 말미암아 그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그의 삶 속에서 진정한 예술로의 작가의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되새겨 볼 수 있는 여유를 안겨주고 있다.
말년에 4년에 걸쳐 저술한 이 자서전은 벤베누토 첼리니라는 인물이 살아오며 이룩한 예술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모두 담고 있어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 더욱 값진 기록이다.
첼리니가 고향 피렌체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는 로마에서 일하던 미켈란젤로를 고향으로 데려오려던 그의 노력에서 볼 수 있다.
첼리니는 정직하고 개성이 확실해 그의 인생은 항상 어려움에 봉착했다.
친구들은 은헤를 원수로 갚기도 했다.
한번은 지오르지오 바자리를 자기 집에 재워준 일이 있었다.
바자리는 당시 피부병이 어찌나 심했던지 잠결에 자기 다리를 긁는다는 것이 그만 함께 자던 다른 사람의 다리를 더러운 손으로 잘못 긁어 소동이 났었다.
그런 바자리와도 급기야 사이가 나빠져 말년에는 원수지간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1571년 2월 13일 사망한 첼리니는 피렌체의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교회에서 아카데미아의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후 그 곳에 매장된다.
그의 작품과 인생을 추념하는 장례식장에는 수많은 군중과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서로 입장하려고 밀치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어느 미술가도 그와 같이 자신의 찬란한 작품과 험난한 인생살이에서 겪은 잘 잘못을 숨기지 않고 전한 예가 없다.
그런 그의 자서전을 통해 우리는 그가 산 16세기 전후반기의 르네상스를 체험하는 감동과 충격을 동시에 받게 된다.
– 활동
그의 《자서전》은 바사리의 《전기》와 더불어 당대 예술가의 특색을 전해 주며 열렬한 기백과 강한 개성을 풍긴다.
피렌체의 팔라초 베키오 전의 로지아 다 란치에 있는 〈페르세우스〉(1554)를 주조하였을 때의 기사는 그 청동상 이상으로 박력이 넘친다.
상 (像)은 상하 두 부분으로 나누어 하나는 메두사 (그리스 신화의 세 자매 괴물 고르곤의 하나)의 동부 (胴部)이고, 나머지 하나는 칼로 베어낸 머리를 들어올리는 영웅상이다.
주제가 가진 극적 내용은 남성의 근육 표현에서 볼 수 있는 미켈란젤로적인 과장과 주금가 (鑄金家)로서의 기술을 과시하는 첼리니의, 너무나 사소한 데 집착을 하는 버릇으로 인하여 그것을 잃고 있다.
두 육체의 수직선과 수평선이 군상(群像)을 정시(正視)하는 것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받침이 되고 있는 메두사의 발을 페르세우스의 왼발로 끌어들인다고 하는 기묘한 착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식성을 주로 하였기 때문에 극적인 박력을 희생한 점은 목에서 떨어지는 피의 표현에서도 볼 수 있다.
《자서전》 중에 조금사 (彫金師)로서 철저한 자기 주장은 페르세우스의 어깨로부터 비스듬히 걸린 끈에서 표현되고 있다. 그는 그에 대한 그 시대 사람의 비난을 예기하여 페르세우스의 투구 천변 (天邊)에 자각상 (自刻像)을 붙였다.
이 작품에 앞서서 그는 1540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에 가서 황금으로 〈식탁의 소금 단지〉(1543)를 제작하였는데 대지의 여신과 해신 (海神)의 나상을 위쪽에 두고, 그 주위에 소금 넣는 데 (海産)와 후추 넣는 데 (陸産)를 나란히 두었으며, 동부(胴部)에 인체와 짐승과 고기 등을 부조로 장식하였다.
○ 평가
벤베누토 첼리니 (Benvenuto Cellini, 1500 ~ 1571)는 피렌체인들이 ‘금세공의 원조’로 여기는 인물로, 미켈란젤로 다음가는 르네상스의 위대한 조각가이다.
이탈리아의 피렌체가 낳은 16세기의 세계적인 금세공이며 조각가로 교황 크레멘테 7세와 파울로스 3세와 수많은 추기경들과 귀부인들이 그에게 보석과 기념화폐와 메달을 만들게했다.
첼리니는 조각가로서는 미켈란젤로와 경쟁해도 이길 자신이 있다고 자만할만큼 자존심과 실력이 있었다.
그는 1540 ~ 45년까지 프랑스의 왕 프랑스와 1세한테 초대되어 유명한 ‘황금 소금그릇 (1543)’과 많은 조각작품들을 만들었다.
이후 프렌체로 돌아와서 메디치가의 공작 코시모 일세를 위해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1554)’를 만들었다.
이 조각은 미켈란젤로의 ‘다윗’과 도나텔로의 ‘주디트’와 함께 피렌체의 3대 걸작으로 유명하다.
○ 주요 작품
Fontainebleau Nymph
Perseus with the Head of Medusa
Cellini Salt Cellar
– Drawings and sketches
Cellini, Benvenuto. Bearded Man. Recto. 28.3 x 18.5 cm. Paper, graphite. (1540–1543) (?) Royal Library, Turin.
Cellini, Benvenuto. Study of a man, body and profile. Verso. 28.3 x18.5 cm. Paper, graphite (1540–1543) (?) Royal Library, Turin.
Cellini, Benvenuto. Paint Self-Portrait. 1558–1560. Oil, paper glued to canvas. 61 cm by 48 cm. Private collection
Benvenuto. Juno. Drawing on paper. Cabinet of Drawings, Louvre Museum, Paris
Cellini, Benvenuto. Satyr. 41 x 20.2 cm. Pen, ink.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from the Ian Woodner Collection, New York)
Cellini, Benvenuto. A Study for the Seal of the Accademia del Disegno. 30 x 12.5 cm. Pen, brown ink. Louvre, Paris
Cellini, Benvenuto. Mourning Woman. 30 x 12.5 cm. Pen, brown ink. Louvre Museum, Paris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