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3년 3월 27일, 신대륙에서 ‘젊음의 샘’을 찾던 스페인의 탐험가 ‘후안 폰세 데 레온’ (Juan Ponce de León, 1474 ~ 1521)이 플로리다 발견
후안 폰세 데 레온 (스: Juan Ponce de León, 1474년 ~ 1521년 7월), 스페인의 탐험가이자 콩키스타도르로 푸에르토리코의 초대 총독이 되었고, 오늘날 미국의 본토에 도달한 것으로 알려진 첫 유럽인으로 플로리다에 그 이름을 주었다.

– 후안 폰세 데 레온 (Juan Ponce de)
.출생: 1474년 경, 카스티야 연합왕국 산테르바스 데 캄포스
.사망: 1521년 7월 경 (46세 혹은 47세), 쿠바 아바나
.국적: 스페인
.탐험지역: 이스파니올라, 푸에르토리코, 플로리다
이스파니올라, 푸에르토리코와 플로리다를 여행한 폰세 데 레온은 푸에르토리코에 첫 유럽인 정착지를 설립하고 플로리다에 도달한 첫 유럽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증거는 없지만 후안 폰세 데 레온이 ‘젊음의 샘’을 찾는 중에 플로리다를 발견했다고 전한다.

○ 생애 및 활동
– 초기
카스티야 연합왕국 산테르바스 데 캄포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루이스 폰세 데 레온과 모친 레오노르 데 피게로아는 귀족이었다. 소년으로서 그는 돈 페드로 누녜스 데 구스만에게 기사의 종자를 지냈다. 구스만은 왕실에서 중요한 직위인 기사사령관이었다. 기사의 종자로서 어린 폰세 데 레온은 구스만의 말을 돌보고, 그가 옷을 입도로 도와주며 다른 임무들을그의 요청에 응하였다. 이에 그는 사회적 예의, 사냥과 무거운 군사 훈련 등을 받았다. 그의 군사적 실력은 무슬림 무어인들과 싸우러 1487년 그라나다 왕국으로 갔을 때 시험대에 놓였으나 승리했다. 전쟁은 1492년에 끝났다. 1년 후, 1493년 9월 폰세 데 레온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두번째 신세계로의 항해에 함께 했다. 그 항해로 그는 이스파니올라 (오늘날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에 정착하였다. 1502년 그는 모친과 동명의 여성과 결혼하여 4명의 자녀들 (3명의 딸 후아나, 이사벨과 마리아, 그리고 아들 루이스)을 두었다.
이스파니올라에서 군인인 폰세 데 레온은 원주민들을 상대로 싸웠다. 당시 유럽인들은 원주민들과 싸워 많은 원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이스파니올라 총독 니콜라스 데 오반도는 원주민 반란이 있을때 폰세 데 레온의 진압으로 그에게 보상하였다. 폰세 데 레온은 동부 이스파니올라의 한 지방 총독이 되었다. 그에게 토지의 대략 200에이커와 타이노족 노예들이 주어졌다. 이 당시 그는 농부로서 부유했다. 농사로 성공한 폰세 데 레온은 금을 찾기 원했다. 그는 오늘날 푸에르토리코의 고유한 이름인 보리켄의 풍부한 대지와 금에 관한 이야기를 항해자와 원주민들로부터 들었다. 이에 폰세 데 레온은 풍부한 금 이야기가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1506년 찾아나섰다. 그는 금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믿고 나섰으나 공식 허가 없이 비밀리에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금과 함께 다른 귀중한 자원들을 발견한다.

– 주요 항해
폰세 데 레온은 푸에르토리코로 여행을 위해 페르난도 2세에게 청원해 허락을 얻는다. 1508년 8월 폰세 데 레온은 선원들을 모아 항해를 시작했다.
1508년 ~ 1509년사이 그는 섬을 탐험하여 산후안 근처에 카파라의 가장 오래된 정착지를 건설해다.
1510년 스페인 국왕은 폰세 데 레온을 푸에르토리코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1511년 디에고 콜론으로 교체되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았을 때 콜럼버스에게 그 땅을 다스리는 권리가 주어졌다. 콜럼버스가 1506년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 디에고가 그 권리들을 물려받으려 했으나 스페인 왕실은 소유권 상속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스페인 왕실은 폰세 데 레온이 새로운 땅들을 찾길 원했다.
레온은 오늘날 바하마에 있는 비미니로 불린 섬에 ‘젊음의 샘’과 많은 금에 관하여 원주민들로부터 이야기들을 들었다. 1513년 3월 그는 이 샘을 찾으러 푸에르토리코를 떠났다.
1513년 3월 3일, 폰세 데 레온과 그의 부하들은 오늘날 산헤르만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원정은 세척의 함선들 – 산티아고 (Santiago)호, 산타 마리아 데 라 콘솔라시온 (Santa Maria de la Consolacion)호와 산 크리스토발 (San Cristobal) 호로 이루어졌다.
1513년 4월 3일, 그들은 오늘날 세인트오거스틴의 외곽에 상륙하였다. 폰세 데 레온은 그곳이 비미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았다. 그는 자신이 섬인줄 알았던 곳이 광활한 초목으로 채워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스페인어로 “꽃이 만발한 곳”을 의미하는 “La Florida” (라 플로리다)로 이름 지었다. 그 일은 한 스페인에서 Pasqua florida (파스카 플로리다) 혹은 “꽃의 축제”로 알려진 부활절 시즌이 있던 1주 후였다.
폰세 데 레온은 플로리다의 해안을 따라 남부로 항해하여 지역들을 탐험하였다. 폰세 데 레온과 그의 선원들은 길을 따라가다 어떤 원주민들과 마주쳤다. 칼루사 인디언들은 스페인 선원들을 공격하며 그들이 물러날 것을 강요했다.
이에 레온은 플로리다키스, 키웨스트에 도달하고 플로리다의 서해안 샬럿하버 근처에서 자신의 항해 원정을 마쳤다.
1514년 그는 플로리다를 떠나 잠시 푸에르토리코로 돌아왔고, 그러고나서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 그 후의 항해
그가 ‘젊음의 샘’을 찾진 못했지만 스페인 국왕은 폰세 데 레온의 발견에 행복해 했다.
레온에게는 기사직이 수여되고, 문장이 주어졌으며, 플로리다와 비미니의 총독으로 임명됐다.
폰세 데 레온은 이후 여러해 동안 푸에르토리코와 스페인 사이를 오가며 여러 항해를 실시했다.
1516년 스페인으로 여행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두번째 부인인 세비야의 후아나 데 피네다와 결혼했다.
그의 첫 부인은 그가 푸에르토리코를 떠나기 전에 죽었다. 그와 그의 새부인은 1518년 푸에르토리코로 돌아왔다.
폰세 데 레온에게는 자신이 탐험한 플로리다에 식민지를 개척하도톡 허락받았으나, 불행하게 그는 자신의 식민지가 번영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 이후의 세월과 사망
폰세 데 레온은 1521년 다시 플로리다를 향하여 항해해 샬럿하버 근처에 상륙하였다. 상륙한지 얼마되지 않아 원주민들과 치명적인 교전이 있었다. 이때 원주민들의 공격에 폰세 데 레온은 화살에 맞고 상처를 입었다. 스페인인들은 쿠바 아바나로 후퇴하였다.
그해 7월 사건이 있던 며칠 후에 폰세 데 레온은 아바나에서 사망했다. 그는 쿠바에 안장되었으나 후에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의 바우티스타 성당으로 옮겨졌다.
○ 유산
후안 폰세 데 레온은 오늘날 미국 플로리다를 방문한 첫 유럽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또한 푸에르토리코의 초대 총독이었다. 플로리다에 식민지를 설립할 수 없었지만 그의 플로리다 발견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스페인인들의 탐험을 지속하도록 이끌었다.
그의 사후, 더 많은 스페인의 탐험가들이 플로리다를 탐험하기 위해 서쪽으로의 항해를 원하였다.
푸에르토리코에서 그가 세운 많은 식민지의 흔적들은 그가 사망한지 오랫동안 존재하였고, 그의 영향력은 아직도 그 지역에 잘 알려져 있다. 푸에르토리코의 3번째로 큰 도시 ‘폰세’는 그의 이름을 땄다.

○ 부록 : 젊음의 샘 (Fountain of Youth)
젊음의 샘 (Fountain of Youth)은 샘물을 마시거나 물에 몸에 담근 이들에게 젊음을 되찾아준다고 하는 전설 속의 샘이다.
이런 샘에 관한 전설들은 헤로도토스의 기록들 (기원전 5세기), 알렉산더 로맨스 (서기 3세기), 프레스터 존의 이야기 (십자군 시대 초기, 11/12세기) 등에 등장하며, 수 천 년 동안 전 세계 곳곳에 있었다.
또한 유사한 물에 대한 이야기로 ‘비미니섬의 신비의 땅에 몸을 고쳐주는 물에 대해 이야기’는 대항해시대 (16세기 초) 기간 카리브해 지역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이런 많은 전설들을 바탕으로, 탐험가들과 모험가들이 젊음의 샘을 독점하기 위해, 혹은 어떤 이들은 이 신비로운 물과 연관된 노화를 치료하기 위해 찾아나섰다.
이 신비로운 물은 ‘물을 마시거나 물에 몸을 담그면 노화 과정을 되돌리고 병을 치료한다고 전해지는 강, 샘 혹은 또다른 수원’일 수도 있다.
이 전설은 초대 푸에르토리코 총독이자 스페인 탐험가 후안 폰세 데 레온의 관심을 사게 된 16세기 말에 특히나 유명해졌다.
폰세 데 레온은 1513년 플로리다에 갔을 때, 젊음의 샘을 찾고 있던 중이라고 한다. 폰세 데 레온이 원주민들에게 젊음의 샘이 비미니섬에 있었다는 걸 들었다는 전설이 있기도 하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