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5년 12월 30일, 독일의 은행가•자산가 야코프 푸거 / 야콥 푸거 (Jakob Fugger, 1459 ~ 1525) 별세
야코프 푸거 (독: Jakob Fugger, 1459년 3월 6일 ~ 1525년 12월 30일)는 독일의 은행가이다.
– 야코프 푸거 / 야콥 푸거 (Jakob Fugger)
.출생: 1459년 3월 6일, 신성로마제국 Augsburg
.사망: 1525년 12월 30일 (66세), 신성로마제국 Augsburg
.묘지: St. Anna’s Church
.직업: 은행가
.부모: Jakob Fugger the Elder, Barbara Bäsinger
.사촌: Anton Fugger
.배우자: Sybilla Artzt (m. 1498)
야코프 푸거 (1459~1525)는 16세기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를 기반으로 활약한 거상 (巨商)이자 르네상스 시대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나 교황을 돈으로 협상할 수 있었고 유럽 정치사의 주요 국면마다 유동성으로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놓았다.
○ 생애 및 활동
1459년 3월 6일, 독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아버지와 어머니 바바라 푸거 (Barbara Fugger)의 7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한스 푸거는 그라헨 마을의 농부였으나 아우구스부르크로 이주해 직물상인으로 성공하여 푸거 가문의 기반을 닦는다.
본래 푸거의 조상은 방직공 출신으로 야콥 푸거의 조상인 요한 푸거의 대부터 상인이 되었다.
야코프 푸거는 조상으로부터 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은행·광산 등에 손을 대어 막대한 부자가 되었다.
마침내 그의 집안은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여러 나라에도 자금을 대주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를 후원해 황제가 되는 것을 도와주는 대가로 당시 합스부르크의 소유였던 울름 백작령을 비롯한 여러 영지를 구입하고 신성로마제국의 이권을 챙겼으며 평민 출신에서 일약 제국백작의 작위에 오르게 된다.
이후 그는 유럽 최고의 부자로 이름을 떨쳤으며 막시밀리안 1세가 죽자 그의 손자인 카를 5세가 황제가 되는 것을 도왔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빈민주택단지 푸거라이 (Fuggerei)와 푸거 궁 (Fuggerplasat)을 각각 1500년대에 건설했으며, 야콥 푸거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1525년 유언장을 통해 가업을 조카 울리히에게 물려주고 1525년 12월 30일 별세한다.
○ 평가
야코프 푸거(1459 ~ 1525)는 16세기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를 기반으로 활약한 거상(巨商)이자 르네상스 시대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나 교황을 돈으로 압박할 수 있었고 유럽 정치사의 주요 국면마다 유동성으로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놓았다.
종교혁명에서도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1514년, 베를린 근방을 다스리던 알브레히트는 푸거로부터 돈을 빌린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마인츠 주교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였다. 알브레히트는 푸거에게 갚을 돈 때문에 전전긍긍하다 묘안을 떠올린다. 바로 면죄부였다.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 역시 이 아이디어를 환영하며 성베드로 대성당 건설 기금 명목으로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다.
이후 역사는 잘 알려져 있다.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며 종교개혁이 촉발되었고 유럽이 격랑에 휩쓸렸다. 권력의 힘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던 야코프 푸거의 나비효과였다. 이 밖에도 푸거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성장, 농민전쟁 등 역사적인 현장에서 늘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야코프는 현대 자본주의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상업활동을 천대시하는 중세에 그는 이윤을 내는 것 자체를 합법화하는데 공헌했다. 또 북유럽 상업을 카르텔로 독점하던 한자 (Hanza) 동맹을 격파했다.
야코프 푸거는 돈의 문제에 잔혹하고 인정사정이 없는 인물이었지만, 자선사업에는 넉넉하게 선심을 썼다. 그는 아우크스부르크의 공공주택건설에 자금을 댔다. 아직도 그가 지은 푸거라이 (Fuggerei)는 명물로 남아 아우크스부르크의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 기타
인류 역사상 최고 부자 목록에 항상 들어가는 인물이다. 당대에는 메디치 가문과 쌍벽을 이뤘다. 푸거의 후손들이 이렇다할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현재에도 독일에서 손꼽히는 부동산 재벌 가문에 속해 있다.
푸거 가문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야코프의 할아버지 한스 푸거 (Hans Fugger)부터다. 한스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라벤 (Graben) 마을의 농부였다. 한스는 단조로운 농사 일을 그만두고 장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1367년에 아우크스부르크로 이사를 했다.
아우크스부르크는 BC15년 로마제국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건설된 도시로, 황제의 이름에서 도시 이름이 정해졌다. 아우크스부르크는 중세에 주교령이었다가 1276년에 상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주교를 내쫓고 자유도시가 되었다. 자유도시는 주민 (상인)이 시정을 결정하는 자치주의를 채택해 황제 이외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았다. 아우크스부르크는 독일 쾰른과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연결하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중세에 인구 4만의 큰 도시로 성장했다. 한스가 이사를 할 무렵, 아우크스부르크는 유럽 직물생산의 본거지로 부상해 있었다.
한스는 시청에 전입신고를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푸케르 (Fucker)라고 적었다. 이 철자는 영어로 읽으면 욕이 된다. 어쨌든 아우크스부르크에 정착하면서 한스는 성을 푸거 (Fugger)로 수정한다.
한스도 직물 생산과 거래에 뛰어 들었다. 그의 사업은 잘 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직물 생산은 외주로 돌리고, 도매상에 전념했다.
한스는 정략결혼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결혼은 성공의 발판이 된다. 그는 직물조합 수장의 딸 클라라 비돌프 (Klara Widolf)와 결혼했고, 클라라가 일찍 죽자 또다른 직물조합 거물의 딸 엘리자베트 가터만 (Elizabeth Gattermann)과 결혼했다. 한스도 직물조합에 가입했다. 1936년 아우크스부르크의 납세자 명단에 한스는 상위에 랭크되었다.
한스는 엘리자베트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이 안드레아스 (Andreas Fugger), 둘째가 야코프 (Jakob Fugger the Elder)다. 푸거 가문은 여기서 두 지파로 나눠지는데, 세계 최대 부호가 된 야코프는 한스의 둘째 아들 야코프의 이름을 물려받게 된다.
안드레아스의 아들 루카스(Lukas)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로부터 황금 사슴 문장을 받아 이 집안은 ‘사슴 가문’ (Fugger of the Deer)라 부르고, 야코프의 후손은 후에 백합 문장을 받아 백합 가문 (Fuggers of the Lily)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유럽 왕가들을 상대로 사실상의 은행 역할을 하며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으나, 그의 가문은 3대 째에 영국-스페인 전쟁 (1585 ~ 1604)에서 스페인 측에 막대한 전비를 지원했다가 몰락하게 된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