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4년 6월 23일, 일본 센고쿠 시대 무장 오다 노부나가 (Oda Nobunaga, 1534 ~ 1582) 출생
오다 노부나가 (Oda Nobunaga, 일: 織田 信長, 덴분 3년, 음력 5월 12일 / 1534년 6월 23일 ~ 덴쇼 10년, 음력 6월 2일 / 1582년 6월 21일)는 센고쿠 시대를 평정한 인물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연 다이묘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더불어 중세 일본 삼영걸로 불린다. 오와리국의 센고쿠 다이묘 오다 노부히데의 장남으로, 아버지 대부터의 숙적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격파하고 정이대장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해 교토를 수중에 넣고, 그마저 추방해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키면서 중부 일본 일대를 기반으로 중세 일본 봉건제의 정점에 섰다. 일본 각지역의 패자들을 차례차례 굴복시키면서 센고쿠 시대의 일본을 평정해, 하극상이 계속되던 전국 시대 끝에 최초의 천하인이 됐다.

– 오다 노부나가 (織田 信長)
.시대: 센고쿠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출생: 덴분 3년, 음력 5월 12일 / 1534년 6월 23일, 오와리국
.사망: 덴쇼 10년, 음력 6월 2일 / 1582년 6월 21일 (47세), 야마시로국 혼노지
.별호: 아명 – 깃보시, 별명 – 사부로 (통칭), 제육천마왕, 멍청이, 적귀
.계명: 總見院殿贈大相國一品泰嚴尊儀
.묘소: 교토부 교토시 나카교구 혼노지, 교토부 교토시 기타구 다이토쿠지, 교토부 교토시 우쿄구 묘신지 등
.관위: 가즈사노스케, 오와리노카미, 종5위하 탄정충, 정4위하 탄정대필, 종3위 참의, 우근위대장 정3위 권대납언, 종2위 내대신, 정2위 우대신, 증종1위 태정대신, 증정1위
.주군: 오다 노부토모 → 시바 요시카네 → 아시카가 요시아키
.씨족: 오다씨 (織田氏)
.부모: 부) 오다 노부히데, 모) 도타고젠 (土田御前)
.형제: 노부히로, 노부나가, 노부유키 (노부카쓰), 노부카네, 노부하루, 노부토키, 노부오키, 히데타카, 히데나리, 노부테루, 나가마스, 나가토시, 오이누노가타 (사지 노부카타의 아내→호소카와 노부요시의 아내), 오이치노가타 (아자이 나가마사의 아내→시바타 가쓰이에의 아내)
.아내: 정실 – 노히메 (사이토 도산의 딸), 측실 – 기쓰노 (이코마 이에무네의 딸), 교운인 (다카하타 겐주로의 딸)
.자녀: 노부타다, 노부카쓰, 노부타카 (1558), 노부타카 (1576), 노부타카 (하타모토), 이하 생략
그러나 1582년 (덴쇼 10년) 음력 6월 2일,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중신 (重臣)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을 막지못해 혼노지에서 자살했다. 이미 형식상으로나마 가권은 장남 오다 노부타다에게 넘긴 상태였으나 장남마저 교토의 니조 성에서 살해돼 후계자리가 또다른 중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넘어갔고, 이런 일본 통일의 기반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여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생애 내내 당시의 기득권을 부정하고 처음부터 무력으로 무너뜨렸고, 출신 성분과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했으며 정책적으로도 낙시락좌 (일: 楽市楽座; 일종의 상업진흥, 자유무역정책), 검지 (일: 検地; 토지조사), 서양에의 문호 개방 등 봉건적 일본에서 누구도 시행하지 않았던 정책결단으로 문화 경제적 발전을 이뤄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열었다. 종교 정책에 있어서도 기존 불교와 신토 세력의 권위를 부정했고, 포르투갈 선교사들로부터 전해진 천주교 포교를 허용하고 자신도 잠시 관심을 가졌으나 결국 자신을 신격화 하는 데로 나아갔다. 당시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를 “신이나 부처, 사후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교도이다. 스스로 서찰에서 제육천마왕이라고 칭했다”라고 기술한 바 있다.

○ 생애 및 활동
오다 노부나가가 태어난 1534년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센고쿠 시대 중기로, 아시카가 바쿠후의 권력이 힘을 잃어가면서 ‘하극상’의 난세로 돌입하는 시기이다.
노부나가의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 (織田信秀)는 오와리 (尾張)의 슈고 다이로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군사를 길러오다가 일족을 대표하는 20만석의 영지를 가진 세력 있는 다이묘로 성장하였다. 노부히데가 1551년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노부나가는 18살의 나이로 오다 가를 계승하지만 첫 위기를 맞이한다. 노부나가는 다이묘의 아들이면서도 관습을 깡그리 무시하는 예의 없는 소년이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이상한 차림으로 나타나 향을 쥐어들고 아버지의 영전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중신들은 이런 노부나가를 ‘천하의 멍청이’라고 부르며 동생 노부유키를 받들고 반란을 꾀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동생 노부유키를 포함한 친족들을 물리치고 오와리 일대를 평정한다. 그 이듬해 1560년 교토로 향하는 스루가 (駿河)의 이마가와 요시모토 (今川義元)를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물리치고 오다 노부나가는 전국에 이름을 떨친다. 오케하자마에서 적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와 동맹을 맺고 미노 (美濃)의 사이토 씨 (齋藤氏)를 제압한다.
그 후 1568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받들고 교토로 들어가 쇼군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그러나 요시아키는 자신이 노부나가의 꼭두각시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노부나가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각지의 무장에게 비밀문서를 보내 노부나가의 반대 세력 (가이의 다케다, 에치젠의 아사쿠라, 오미의 아사이, 셋쓰의 혼간 사, 주고쿠의 모리, 아와의 미요시, 가와치의 하타케야마, 히에이잔의 승려들)을 조직하였다. 이때가 노부나가 최대의 위기였다. 노부나가는 많은 승병을 동원하여 저항한 히에이잔의 엔랴쿠 사를 불태워버리고, 1573년 요시아키 측에 가담한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을 아네가와 전투에서 격파한 뒤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추방하고, 무로마치 바쿠후를 무너뜨린다.
1575년 마방책 (馬防柵)과 철포대를 동시에 이용하여 승리한 것으로 유명한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의 아들 가쓰요리를 격파한다. 주고쿠의 모리와 대립이 격화되어 노부나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파견한다. 히데요시의 구원 요청에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주고쿠 출병을 명하고 자신도 직접 출진하려고 가는 도중 혼노 사에 머무는데, 미쓰히데의 뜻밖의 모반으로 49세의 나이로 죽는다.
“나는 남이 하는 대로는 절대로 하지 않소. ··· 인생의 모든 면에서 남의 의표를 찌르는 사람이 바로 나요, 알겠소? 그리고 또 하나, 마음으로 맹세한 것이 있소. 오십 년이라는 인간의 수명을 다하기는 바라지 않으나, 오로지 이 난세를 종식시킬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오.”
○ 인물
- 성격
‘울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두견새’란 시구가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전해질 만큼 과격하고 급한 데가 있는 성격이었다.
‘신장공기’에 따르면 “아자이 히사마사, 나가마사 부자와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3인의 두개골에 금칠하여 연회 때 그 일을 널리 알렸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를 잔 대신으로 사용되어 가신들이 그 잔에 든 술을 마시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것은 후세 소설가의 각색이고, 실제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해골에 하쿠다미를 한 것은 죽은 자에 대한 경의를 나타낸 것일 뿐 일반적인 이미지처럼 사자에 대한 모욕은 아니다.
예수회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는 노부나가의 인물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키가 크며, 마른 체격으로 수염이 적다. 목소리는 꽤 큰 편이며 항상 무예를 좋아해 천하고 상스럽다. 정의롭고 자비를 베푸는 행동을 즐겨 한다. 오만하고 명예를 존중한다. 결단력이 뛰어나고 전술에 치밀함이 있지만, 규율을 지키지 않으며 부하의 진언을 대부분 따르지 않는다. 사람들로부터 이상할 정도로 외경을 받고 있다. 술은 마시지 않는다.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일은 거의 없으며, 자신 이외의 다이묘 대부분을 경멸하여 마치 자신의 부하나 다름없이 낮춰 말한다. 좋은 이해력과 명석한 판단력을 가졌다. 신과 부처 등 우상을 경시하여 점은 일체 믿지 않는다. 명목상은 자신의 종교가 법화종 불교라고 말하고 있지만, 조물주, 영혼 불멸, 사후 세계 등의 존재는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사업에 만전을 기하는 한편 공명에 최선을 다한다. 사람과 대화할 때 돌려 말하거나 둘러대는 것을 싫어한다.”
세간의 평판을 중시하고, 항상 올바른 싸움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부심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은 교토 귀족 등의 일기에서 엿볼 수 있다.

- 노부나가의 잔혹성에 대한 평가
노부나가가 행한 일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옛 권위를 부정했기 때문에 당시 단행되었던 정책에 관해서 비난이 많다. 이 때문에 광기의 혁명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단, 이와 같은 비난에 관해서는 노부나가 사후에 오다 가를 계승한 히데요시, 이에야스의 정보조작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실제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오다 가문을 경계하였고, 냉대 하였지만, 그들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오다 가문의 피가 섞여 있었다 (히데요리의 어머니는 노부나가의 여동생인 오이치의 장녀로써 히데요시에게 시집갔고, 이에미쓰의 어머니는 오이치의 삼녀로써 이에야스의 아들인 히데타다에게 시집을 갔다).
당시부터 엔랴쿠지 (히에이 산)를 불태운 등 불교 세력과 대립각을 세우고 잔인하게 탄압한 일 때문에 노부나가를 악인으로 모는 견해가 존재했다. 그러나 당시의 불교 세력은 반란을 선동하는 등 하나의 정치/무장 세력이었고 여러 사람에게 부정부패/불교 계율의 위배 등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타락한 세속적 세력이었고, 종교 세력이 속세의 권력과 하나가 되어 종교 본연의 의의를 망각한 일과 승려들의 부패 등을 감안해 볼 때 노부나가의 불교 탄압을 정교분리의 시초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에도 시대 중기의 학자 아라이 하쿠세키 (新井白石)는 “그 수법이 잔인했다고 말할 수 있어도,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승려의 폐단을 없앴으니, 이 또한 천하에 큰 공을 세운 일의 하나라고 봐야한다.”라고 평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자보즈 (茶坊主)의 일처리에 무언가 문제가 있어 이에 노부나가가 격노하였고, 자보즈는 자신에 미칠 화를 두려워하여 선반에 숨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선반째로 칼을 내려쳐 자보즈를 베어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자보즈를 벨 때 베는 맛이 좋아 사용된 칼에는 헤시키리 (圧し切り) 하세베 (長谷部)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겐키 원년 (1570년) 음력 5월 6일 스기타니 젠주보 (杉谷善住坊)라는 이가 출신 조총의 명수가 노부나가를 암살하려 했지만, 미수에 그쳤다. 덴쇼 원년 (1573년) 젠주보를 잡혀 왔다. 노부나가는 젠주보를 머리만 나오게 흙에 묻어 생매장 하고 무딘 대나무 톱으로 그의 목을 썰어 고통 속에 서서히 죽였다.
덴쇼 3년 (1575년) 음력 11월 미노 이와무라 성을 함락한 후, 항복조건으로 내건 장수들의 구명을 무시한 채 적장 아키야마 노부토모와 오쓰야노 가타를 비롯 5 명을 나가라 강변에서 거꾸로 매달아 찔러 죽였다. 오쓰야노가타는 이와무라 성을 적에게 바치고 함락했다고는 하나, 오다 노부나가의 친 숙모에 해당했다.
덴쇼 6년 (1578년) 기나이의 고야 산의 문도 (고야히지리) 1383 명을 포박해 살해하였다. 이는 고야 산의 문도들이 밀정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나, 노부나가의 잔혹한 성격 / 반 불교적 성향을 나타내는 일화로도 소개된다.
덴쇼 6년 (1578년) 음력 12월 13일 아마가사키 부근에서 아라키 무라시게 일족 부녀자 122 명을 십자가에 매단 후 찔러 죽였다. 더욱이 남자 124 명, 여자 388 명을 4 동의 가옥에 몰아 넣은 후, 불을 질러 죽였다.
덴쇼 10년 (1582년) 음력 4월 10일 노부나가는 비와 호의 지쿠부 섬 (竹生島)의 참배를 위해 아즈치 성을 출발하였다. 아즈치 성과 지쿠부 섬 사이는 좀 멀었기 때문에 당일로는 돌아가기 어려운 거리였다. 이 때문에 시녀들은 노부나가가 자리를 비운 것을 기화로 직무를 이탈해 구와노미데라 (桑実寺)에 참배가거나, 마을에서 장을 보거나 하여 아즈치 성을 비웠다. 그러나 일정과 달리 노부나가는 그날 돌아왔으며, 시녀의 외출을 안 노부나가는 격노하여 시녀들을 참살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때, 시녀들의 구명을 탄원한 구와노미데라의 주지 역시도 살해하였다. 단, 구와노미데라에는 이때 살해되었다는 주지의 기록이 혼노지의 변이 일어난 이후에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되며, 문헌의 기술은 세이바이 (成敗)되었다고 적혀 있으나 이는 죄를 물어 주살한다는 의미 외에도 단순히 엄하게 벌을 받는다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참살당했다는 일반의 이해는 오해로 생각된다.
노부나가의 적대세력에 대해 행한 행동은 대부분은 당시 시대상황상 학살이라기보다 오히려 보통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센고쿠 시대를 조기에 끝을 맺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라는 의견도 있다. 실제 노부나가가 행한 처형 방법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 여러 다이묘도 했었다.
덴쇼 5년 (1577년) 하시바 히데요시는 모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비젠, 미마사카, 하리마 국경 부근에서 여자, 어린아이 200 명 이상을 꼬챙이에 꽂아 죽이거나,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지금도 이 부근은 지옥골짜기라고 불리고 있다.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 등도 인신매매를 하는 등, 노부나가가 한 행동 역시 특별히 보기 드문 일은 아니었다. 이와 같이 당시 상황과 도덕 기준을 생각해 그의 행동을 평가해야 하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 상대주의로 문제의 소지가 크다.

- 초상화
아이치현 도요타시의 조코지 (長興寺)에 노부나가를 그린 그림이 있으며, 그 외에도 유럽의 화가가 실사한 초상화라고 전해지는 그림이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공습으로 소실되어 현재는 사진만이 전해진다.
현존하는 사진을 보면 진한 눈썹에 날카로운 큰 눈, 높은 코, 다물어진 입, 긴 얼굴 윤곽과 수염 등이 특징이다.
단, 이 초상화에 관해서는 사료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아, 메이지 시대 행해진 현창사업 때 작성된 것이라고도 한다.
노부나가의 청년 무렵에는 여자로 잘못 볼 정도로 미소년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 관계
신분에 관계없이 서민들과 허물없이 지냈다고 한다. 실제 서민들과 함께 춤을 추거나 노동요를 부를 때에는 모습을 서민들 앞에 드러냈다. 오봉 때에는 마을 주민을 즐겁게 해주었고, 마쓰리를 즐겼던 것 같다.
상경 이후 조정 등의 귀족계급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등 구게와도 친교가 깊었다. 특히 고노에 마에히사 (近衛前久)와는 애당초 적대 관계였지만, 취미 등이 같아 잘 어울였다고 한다.
당시 다른 센고쿠 무장과 같이 남색 (슈도衆道)을 즐겼다. 고쇼인 마에다 도시이에, 호리 히데마사, 모리 란마루 등과 관계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또,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측실을 조금밖에 두지 않고 대신 많은 아이를 가졌다고 한다.
- 서양문물의 관심
서양문물에 관심이 깊어, 교토에서 열린 관병식 때 벨벳으로된 외투에 서양 모자를 쓰고 참가하였다. 만년에 전장에 나갈 때면 서양식 갑옷을 입었다고 한다. 또, 알레산드로 발리그니아누 (Alessandro Valignano)의 노예였던 흑인에 흥미를 나타냈고, 그를 양도 받아 야스케 (彌介)라고 부르며 측근으로 삼았다.
예수회에서 받은 지구의, 시계, 지도 등을 잘 이해했다고 하며, 예수회 선도사에게 지동설과 둥근 지구의 모양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는 “과연 그 이론이 타당하다”라고 흥미를 나타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호기심이 강해 조총이 일반적이지 않을 무렵부터 화승총 (火縄銃)을 주 전력으로 사용하였다. 기발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지만,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상생활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본 것 같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게 아즈치 성을 그린 병풍도를 선물했고 노부나가가 죽은 후인 1585년에 도착했다고 한다. 현재 이 병풍도는 분실되었다.
- 문화에서의 관심
바둑, 고와카마이를 좋아하고, 사루가쿠 (猿楽)를 싫어하였다. 고와카마이의 ‘아쓰모리’ 중
인간세상 오십년 하천에 비한다면 덧없는 꿈과 같구나, 한 번 태어나 죽지 않을 자 그 누구인가, 죽지 않을 자 그 누구인가
(人間五十年 下天のうちをくらぶれば 夢幻の如くなり ひとたび生を享け 滅せぬもののあるべきか)
이란 대목을 특히 좋아해서 자주 춤을 추었다고 한다. 여기서 하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계의 가장 아래로, 이곳의 하루는 인간계의 50년이라고 한다. 노부나가는 16 세기의 인물이므로 “인간”을 “인간 세상”의 의미로 사용했으므로, 인간세상의 50년이라고 해봐야 하천에서는 하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세의 부질없음을 표현하는 대목이다.
스모 (相撲)를 매우 좋아해서, 아즈치 성 등에서 대규모 스모 대회를 자주 열었다. 또, 스모 대회는 신분과 관계없이 노부나가의 측근과 서민들이 섞여 스모를 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수영, 매사냥, 말타기, 활쏘기 등 신체와 무예를 닦았다. 바둑에도 취미가 있어, 바둑에서 사용되는 명인 (名人)이란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미요시 가문을 제압한 뒤, 쓰보우치 (坪内)라는 이름을 가진 미요시 가문의 요리사를 포로로 잡았다. 이때, 노부나가는 쓰보우치에게 “요리를 잘하면, 죄를 사하고 요리사로 고용하겠다.”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쓰보우치가 만든 요리를 노부나가가 먹었지만, “음식이 싱겁다.”라며 쓰보우치를 처형하려 하였다. 그러나, 쓰보우치는 1 번만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리고, 나온 2 번째 요리의 맛을 본 노부나가는 “매우 맛있다.”라며 수긍하고, 고용하였다. 그 후, 쓰보우치는 “애초에 2번째 요리를 내왔으면 좋았잖아.”라는 물음에 “처음 요리는 교토의 고급 요리였고, 나중 것은 맛이 강한 시골 요리였을 뿐이다. 결국 노부나가님도 시골 사람이란 말이겠지요.”라고 대답하였다. 후일 이 이야기를 들은 노부나가는 “나의 요리사로 고용된 이상은 나의 취향에 맞는 요리를 할 수 있도록 먼저 노력하는 것이 가신 된 자의 본분이다. 그것을 게을리했다는 것은 단순히 무능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정책
- 천하포무
천하포무 (天下布武)를 훈독으로 읽으면 “하늘아래 무를 펼친다” (天の下、武を布く)로 읽힌다. 무력을 통해 천하를 취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근년에 들어서는 무가정권으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다. 상기의 서술대로 노부나가는 미노를 공략한 후에 거처를 이노구치로 옮긴 후, 이노구치의 지명을 기후로 개명하였고, 이 무렵에 천하포무라는 직인을 사용하였다.
- 종교정책
노부나가의 종교는 명목상 불교의 법화종이지만, 불교도에 대한 탄압정책과 아즈치 성의 토대에 석불과 묘석을 파내다 사용한 일, 예수회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가 남긴 기록 등은 오다 노부나가가 무신론내지는 유물론적 사고를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오다 노부나가는 승려의 횡포를 비판하고, 기독교 선교사를 칭찬하였으며, 기독교도와 불교 신자들이 주장하는 하느님과 부처의 존재와 영혼 불멸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단, 오다 노부나가가 불교세력에 대해 엄한 정책을 폈다는 사료 대부분은 불교세력과 대립하고 있던 예수회의 기록임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노부나가가 일향종 등의 불교도를 없애버리려고 했다는 사관은 에도 시대 혼간지 교단에 의해 유포된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
오다 노부나가는 아즈치 성 천수각내의 천정과 벽화에 불교, 도교, 유교를 제재로 한 그림을 그리거나, 정토진종과 엔랴쿠지의 종교활동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예수회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따르면, 아즈치 성내에는 노부나가를 대신하여 범산 (梵山)이라는 큰 돌을 두어 신성시하였고, 가신과 영민에게 예배를 강요하였다고 한다. 이 자기 신격화에 관해서는 조정과의 관계, 대륙 진출의 구상 등 긍정적으로 보는 학설과 부정적으로 보는 학설이 있다. 또, 프로이스가 이 일을 기록한 때는 노부나가 사후의 일이고, 그 밖의 사료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신빙성에 의문을 품은 학자도 있다.
- 조정과의 관계
노부나가와 조정의 관계에 관해서는 조정과 마찰을 빗었다는 대립설과 조정과 원만한 관계를 가졌다는 융화설로 양분되어 있다. 조정의 대표인 오기마치 천황과 노부나가의 관계와 오다 정권의 성격에 결부시켜 1970년대부터 활발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 이마다니 아키라 (今谷明)가 오기마치 천황을 노부나가의 최대 정적으로 본 ‘노부나가와 천황’을 출간하였고, 기리노 사쿠진 (桐野作人), 다치바나 교코 (立花京子)가 실증연구를 토대로 혼노지의 변에서의 조정흑막설을 제시하는 등 논쟁이 활발하였다.
단, 남아 있는 사료가 불완전하고, 노부나가와 조정간에서 벌어진 일을 둘러싸고, 상반된 견해로 해석할 가능성도 있다.
- 상업정책
상공업자에 장을 세울 수 있는 허가서를 주었고, 불필요한 관문은 철폐해 경제와 유통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것과 함께 검지를 철저히 하여 영국지배를 확립하였고, 가신들을 성 밑에 주거시켜 상비군을 편성했다. 단, 기존의 시장을 모두 없애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장이 설수 있는 곳에는 장을 설수 있게 주변을 조성하였고, 교토와 같은 대도시에는 기존의 시장을 이용했다.
- 인사정책
인재의 능력을 중시하여 신분의 귀천없이 인재를 등용하였다. 농민 출신인 하시바 히데요시, 출신이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다키가와 가즈마스, 낭인이던 아케치 미쓰히데 등을 등용하는 한편, 기존 가신이었던 사쿠마 노부모리와 하야시 히데사다 등을 추방하였다. 중신으로 오다 가문 내에 입지를 굳혔지만, 활약 이상으로 이권을 주장하는 사쿠마나 하야시에 대해서, 징벌적 숙청을 단행했다. 그러나, 사쿠마 노부모리에게는 19개 조의 절함장 (折檻状)을 내려 공을 세우던가 은퇴하던가 하는 선택권을 주었는데도 공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처벌되었을 뿐, 마에다 도시이에가 다시금 노부나가를 섬긴 일 등을 보면 단순히 아랫사람에게 가혹했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사쿠마 노부모리와 하야시 히데사다의 후다이 가신 및 안도 모리나리의 숙청에 관해서는 가신의 소령을 정리해 오다 가문의 직할령을 늘리는 목적도 있다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유행하던 다도 (茶道)로 가신단 장악의 수단으로 활용해 당시 한 지역의 가치를 가졌던 다기 (茶器)를 영지와 금전 대신 상으로 내렸다. 가이 공략에 전공을 세운 다키가와 가즈마스에게 어떤 상을 바라느냐고 묻자 가즈마스가 엄청난 가치를 지닌 한 차 항아리 (茶壺)를 달라 했는데, 이를 거절하고 단지 간토칸레이 (関東管領)라는 칭호와 고즈케 국을 내리자 실망했다는 일화가 있다.
선교사와 함께 온 외국인 용병을 받아들여 국적을 불문하고 자신의 병사로 활용했다.
인사에 있어서 엄한 일면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하시바 히데요시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네네에 대해 차갑게 대한 것을 알자, 히데요시를 불러 엄하게 질책하고 네네에 대해서는 격려의 편지를 보내는 등, 인정미 넘치는 행동도 하였다. 한 예로 히데요시의 바람기 때문에 네네가 많이 힘들어 하자 노부나가는 편지로 ‘저 머리까진 생쥐 녀석 (노부나가가 히데요시에게 붙여준 별명)이 자네와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면서도 다른 여자를 탐하다니 언어도단이로다.’라는 말로 위로를 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추방한 사쿠마 노부모리, 노부히데에게는 노부모리가 죽자, 노부히데의 복직을 허락하는 등의 이면도 보였다.
노부나가의 측근 중 군사, 참모적 인물은 좀처럼 두지 않고, 호리 히데마사, 모리 란마루라는 명령을 대행을 위한 비서관만 등용했다. 성공한 인물 중 이와 같은 경우는 많지 않다. 노부나가 자신이 타인의 의견을 따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주위 인물들은 노부나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끌려가기 일쑤였다. 단, 센고쿠 시대 같은 난세에서 이런 천재형의 인물이 과감한 개혁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견해도 있다.
센고쿠 시대 배반과 이반은 일상다반사였음에도 관계없이, 노부나가를 배반한 자들 대부분은 노부나가가 상경할 때까지는 가신이었다. 오와리, 미노를 다스리던 무렵의 가신들은 거의 배신을 하지 않았다.
덴쇼 8년 (1580년) 노부나가는 하야시 히데사다를 과거에 모반했다는 이유로 추방하지만, 같은 죄를 지은 시바타 가쓰이에는 죄를 묻지 않았다. 게다가 가쓰이에에게는 에치젠 8개군 75만 석이라는 오다 가신단 수일 (随一)의 영지와 필두 가로의 지위를 주었다. 또, 마쓰나가 히사히데에게도 그의 실력을 평가해 두 번의 항복을 허락했다. 이와 같이 능력이 있다면, 그 죄를 묻지 않고 중용했다.
- 전략
전략으로는 철저한 준비를 하여 상대의 힘을 무력화하고, 그 위에 상대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전투에 임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오케하자마 전투로 대표되는 적은 병력으로 적의 의표를 공격하여 대군을 격파하는 책략은 본래 잘 쓰지 않았다. 특히 노부나가가 그 존재를 경계한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과는 적극적으로 대적하지 않고 항상 신중히 대응했다. 신겐과 겐신도 노부나가와 단독으로 싸우지 않고, 주위와 협력하여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뒤에 서술한 것과 같이 적은 병력으로 전투를 행했으며, 시기를 놓친 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전투에 임하는 등 임기응변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대량 살상을 명했다고 볼 수 있지만, 실제 상대의 항복도 허락지 않고 섬멸한 것은 광신적인 사원세력과의 전투 정도밖에 없다. 다케다 정벌이나, 제2차 덴쇼 이가의 난 등의 전투에서는 일부 상대의 항복을 받아 들였다. 사원세력과의 전투에서도 먼저 무력행사를 하지 않고 화친 혹은 정전/중립 엄수를 요구하는 등의 입장을 취했지만, 광신도 무리인 상대가 이를 거절하거나 파기하였기 때문에 강경한 수단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나가시마, 에치젠의 일향종 신도와의 전투에서는 신도들을 용서 없이 학살했지만, 그들의 구심점으로 있는 혼간지 겐뇨의 혼간지에 대해서는 몇 번인가 화의를 맺었다. 또, 다카덴진 성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적을 계략으로 위압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무용이 뛰어나 오케하자마 전투를 비롯 도네자카 전투, 덴노지 성채 전투에서는 최전선에서 활약한다. 다이묘가 최전선에 나가 전투를 벌이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군의 기동력이 우수하여 로쿠조 전투에서는 3일 걸릴 거리를 2일에 주파해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이 교토로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 내정
적 다이묘와 일향종 세력의 잇키, 부하들에게는 가혹한 데가 있던 노부나가였지만, 영지인 오와리, 미노엔 선정을 베풀었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서도 노부나가가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은 영민의 지지가 있어서였다. 연이어 발생한 전란으로 황폐해진 교토의 상공업자들도 엄정한 노부나가의 통치를 반겼다고 한다. 오다 군의 아시가루 (足軽)가 길을 가고 있는 여성을 희롱하는 것을 본 노부나가가 교토의 치안을 해치는 행위로 보아 스스로의 손으로 즉결처형한 삽화도 있다. 또, 혼노지의 변 후, 아케치 미쓰히데를 따르는 호족층이 적었던 점도 이를 반영한다. 혼노지의 변 이후 미쓰히데가 자신을 무왕, 노부나가를 주왕에 비교하자 노부나가의 통치를 환영하던 교토에서는 이를 어린아이들까지 비웃었다고 전해진다.
라쿠이치라쿠자 (樂市樂座)는 노부나가가 가장 먼저 행한 정책이라는 통념이 있지만, 실제는 오미 남부의 센고쿠 다이묘 롯카쿠 사다요리 (六角定頼)가 행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라쿠이치라쿠자를 대규모로 시행하여 비와 호 등을 중심으로 한 유통에 따른 상업 발전에 눈을 돌리고 당시 전란으로 전시호황을 누리고 있던 자유무역항인 사카이를 점령하여 이익을 독점하는 등, 한발 앞선 내정을 펼쳤다(유통에 따른 상업정책은 에도 시대 후기에 와서 중시되기 시작한 것으로 그 전까지는 연공 [쌀[이 중시되었다).
공공사업에서도 손을 뻗쳐, 길을 정비해 1리 마다 나무를 심어 표석으로 삼았다. 이는 자군의 행군 속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주변의 관문도 폐지하여 주변과의 왕래를 쉽게 해 상업을 활성화하였다. 타 지역에서는 적군의 진군 속도를 고려해 그 같은 일은 하지 않았다.
노부나가는 도량형의 통일에도 힘써 되에 각각의 소인과 도장을 찍어 단위를 통일하였다. 또, 질 나쁜 화폐는 못 쓰게 하고, 질 좋은 화폐를 사용하도록 선전령 (選銭令)을 반포했다.

○ 평가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 大名 (봉건 영주)들은 한 치의 땅을 놓고 끝없는 싸움으로 자신들의 영지를 키워나갔다. 하지만 자신의 땅을 초월하여 천하를 평정하려던 유일한 센고쿠 다이묘, 틀에 얽매여서는 살아남을 수 없음을 깨닫고 중세적 질서를 철저하게 파괴한 풍운아가 바로 오다 노부나가다.
전쟁의 천재이면서 상공업자에게 다른 지역과는 달리 자유로운 영업 활동을 보장하였으며 죽을 때 전 일본 영토의 약 3분의 1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해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 후계자들의 통일정권을 위한 제도적 틀도 마련해놓았기에 에도시대 개막의 씨앗을 뿌린 사람은 바로 오다 노부나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부나가의 대단한 점은 조직, 재정, 인사, 그리고 전략 전술상의 신기구를 일관성 있게 만들어낸 데에 있다. 노부나가는 그런 작업을 통해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노부나가의 정책이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는데 조직적, 재정적, 경제적, 군사적인 모든 면에서 체계로서의 근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구세력은 있는 힘을 다해 반발하였고, 반란과 암살 계획이 끊이지 않았지만 결국 노부나가는 ‘천하포무’의 기치 아래 일본 전국의 통일을 반 이상 실현했다. 그런 노부나가가 있었기에 히데요시나 이에야스가 등장하여 일본을 통일할 수 있었다. 노부나가야말로 현대의 중앙 집권형 일본을 만들어낸 구심점이라 할 수 있다.
- 전투의 천재
.근대적 군사 조직의 확립
16세기 센고쿠 다이묘의 군사조직은 병농 일치였다. 농민들은 자신의 땅에 대한 애착이 강하기에 전투 의지 또한 상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군대조직은 농번기에는 동원이 불가능하고 무리하게 동원을 강행하면 그해 농사를 망치게 된다. 노부나가는 ‘전업 병사 (專業兵士)’를 창설함으로써 이 단점을 극복하였다. 다시 말하면 급료를 지불하는 ‘용병’을 조직화한 것이다. 책임감이 강한 농민병에 비해 조금만 위험해도 도망쳐버리는 용병은 확실히 불리하지만 잦은 전쟁으로 인해 농민들은 지치게 된다. 노부나가는 용병이 약하다는 점을 알면서도 언제든지 전투에 임할 수 있다는 장점을 살려 천하를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전투의 양상을 바꾼 ‘철포’
노부나가의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도 확실히 남다른 인물이었다. ‘오와리의 멍청이’라 불리는 아들을 주위의 압력에도 폐적시키지 않고, 당시의 총포 기술자 하시모토 잇파를 노부나가의 스승으로 삼게 해 총포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배려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총과는 달리 당시의 철포는 결정적인 결점이 있는 무기였다. 총소리와 시커먼 연기 때문에 지휘자의 신호를 듣거나 볼 수가 없을 뿐더러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날씨의 영향을 받으며 발사 순간 화약 찌꺼기가 튀어 화상의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포르투갈에서 일본으로 전래된 총포는 당시 무장들에게 ‘비굴한 무기’라는 인식이 팽배하였기에 대부분 하급 무사인 아시가루 (足輕)가 총포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위험을 알고서도 총포를 실전의 주무기로 삼은 것은 대단한 결단력이 아닐 수 없다. 후에 이 철포를 배워둔 지식으로 나가시노 전투에서 삼단 철포부대를 만들어 전통적인 다케다의 기마부대를 여지없이 박살내버렸다. 철포를 전투에 사용한 것은 별로 특이한 점은 아니지만 기마 부대를 쓰러뜨릴 수 있는 마방책 (馬房柵)과 같이 사용한 예는 노부나가가 처음이다. 노부나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무기를, 생각의 전환을 통하여 가공할 만한 무기로 바꾼 것이다.
.개방적인 경제 정책
노부나가의 중요 경제 정책으로 성읍 상권의 독점권 폐지 (라쿠이치 [樂市] • 라쿠자 [樂座])와 검문소 폐지를 들 수 있다. 가마쿠라 무로마치 시대에는 귀족이나 사원, 신사의 보호로 특권을 인정받는 자 (座) 조직에 속해야만 상업이나 공업을 경영할 수 있었다. 상인들에게는 업종별 자 (座) 조직이 있어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 유명한 사원이나 교토의 귀족들에게 바쳤다. 그런데 노부나가는 그 자 (座)를 폐지해버렸다. 세금이 들어오지 않아 수입이 줄어들게 되는 사실을 알면서도 노부나가는 과감히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사원 세력과 교토의 귀족들은 자신의 이득이 사라지자 노부나가에게 반발한다. 노부나가가 라쿠이치로 지정한 장소에서는 누구나 자유로이 장사를 할 수 있으며 면세 혜택까지 주었기 때문에 얼마 후 급속하게 번창하였다. 센고쿠 시대에는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저마다 검문소를 세우고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검문소를 폐지하여 일본 전국의 유능한 인재들이 모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 가계
- 역대 단조노조 가
오다 스케노부 (織田良信) [- 오다 도시사다 (織田敏定)] – 오다 노부사다 (織田信定) – 오다 노부히데 (織田信秀) –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
- 형제
오다 노부히로 (織田信広)
오다 노부유키 (織田信行)
오다 노부카네 (織田信包)
오다 노부하루 (織田信治)
오다 노부토키 (織田信時)
오다 노부오키 (織田信興)
오다 히데타카 (織田秀孝)
오다 히데나리 (織田秀成)
오다 노부테루 (織田信照)
오다 나가마스 / 우라쿠사이 (織田長益/有楽斎)
오다 나가토시 (織田長利)
- 가신
.오다 사천왕
시바타 가쓰이에 (柴田勝家), 니와 나가히데 (丹羽長秀), 아케치 미쓰히데 (明智光秀), 다키가와 가즈마스 (滝川一益)
.필두 가신
시바타 가쓰이에 (柴田勝家), 니와 나가히데 (丹羽長秀), 아케치 미쓰히데 (明智光秀), 다키가와 가즈마스 (滝川一益), 하시바 히데요시 (羽柴秀吉), 이케다 쓰네오키 (池田恒興), 하야시 히데사다 (林秀貞), 사쿠마 노부모리 (佐久間信盛)
.교토 쇼시다이 (京都所司代)
무라이 사다카쓰 (村井貞勝)
.교토 부교 (京都奉行)
무라이 사다카쓰 (村井貞勝), 니와 나가히데 (丹羽長秀), 하시바 히데요시 (羽柴秀吉), 아케치 미쓰히데 (明智光秀), 마쓰이 유칸 (松井友閑)
.사위
가모 우지사토 (蒲生氏郷), 쓰쓰이 사다쓰구 (筒井定次), 니와 나가시게 (丹羽長重), 마에다 도시나가 (前田利長), 마쓰다이라 노부야스 (松平信康), 미즈노 다다타네 (水野忠胤), 사지 가즈나리 (佐治一成), 니조 아키자네 (二条昭実), 마데노코지 아쓰후사 (万里小路充房), 도쿠다이지 사네히사 (徳大寺実久)
.측근
스가야 나가노리 (菅屋長頼), 야베 이에사다 (矢部家定), 호리 히데마사 (堀秀政), 하세가와 히데카즈 (長谷川秀一), 오오쓰 나가마사 (大津長昌), 만미 시게모토 (万見重元)
.고쇼
모리 란마루 (森蘭丸=森成利), 모리 보마루 (森坊丸), 모리 리키마루 (森力丸), 다카하시 도라마쓰 (高橋虎松), 이토 란마루 (伊藤蘭丸祐道)
구로 호로 (黒母衣)
삿사 나리마사 (佐々成政), 모리 신스케 (毛利新助), 가와지리 히데타카 (河尻秀隆), 이코마 가쓰스케 (生駒勝助), 쓰다 모리쓰키 (津田盛月), 하치야 요리타카 (蜂屋頼隆), 나카가와 시게마사 (中川重政), 히라이 규에몬 (平井久右衛門) 등
아카 호로 (赤母衣)
마에다 도시이에 (前田利家), 이노 히사키요 (飯尾尚清), 후쿠즈미 히데카쓰 (福富秀勝), 반 나오마사 (塙直政), 모리 히데요리 (毛利秀頼), 노노무라 마사시게 (野々村正成), 이노코 가즈토키 (猪子一時), 아자이 마사사다 (浅井政貞), 이토 나가히사 (伊東長久), 이와무로 나가토노카미 (岩室長門守), 사와키 요시유키 (佐脇良之), 가나모리 나가치카 (金森長近) 등
- 그 밖의 유력 중신
구키 요시타카 (九鬼嘉隆), 호소카와 후지타카 (細川藤孝), 아라키 무라시게 (荒木村重), 이케다 가쓰마사 (池田勝正), 마쓰나가 히사히데 (松永久秀), 쓰쓰이 준케이 (筒井順慶), 다케이 유안 (武井夕庵), 모리 나가요시 (森長可), 이나바 잇테쓰 (稲葉一鉄), 안도 모리나리 (安藤守就), 우지이에 나오모토 (氏家直元) 등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