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7년 1월 7일, 조선의 문신•성리학자 이이 (李珥, 1536 ~ 1584) 출생
이이 (李珥, 1537년 1월 7일 / 음력 1536년 12월 26일 ~ 1584년 2월 27일 / 음력 1월 16일)는 조선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덕수 (德水). 자는 숙헌 (叔獻), 호는 율곡 (栗谷)이다. 관직은 이조판서 (吏曹判書)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성 (文成)이다. 서인 (西人)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이언적, 이황, 송시열, 박세채, 김집과 함께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중 하나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 (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의 업적은 성리학에서의 이기일원론의 학문을 밝힌 것으로 잘알려져 있다.
15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려다가 환속한 사람’이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준경이 죽기 직전 붕당의 폐에 관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고 공격하였으며 이후 이준경의 처벌까지 상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일 당쟁이 현실화하자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동인, 서인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공납 (貢納)의 폐단 시정책인 대공수미법 (代貢收米法) 실시를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또한 그는 향약의 보급에 참여하는 한편,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혼란해진 사회를 개혁할 방법으로 다시 건국 초기와 같은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경장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붕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성혼, 송익필, 김장생 등과 함께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의 종주로 추앙된다. 그를 문묘에 종사하는 문제를 놓고 인조반정 이후 50년간 논쟁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 종사되었다.
○ 생애 및 활동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 (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 났다. 1548년 (명종 3)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1551년 16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 (侍墓)하였다. 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1555년 20세 때 하산해 다시 유학에 전심하였다.
1557년 성주목사 노경린 (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1558년 봄 예안 (禮安)의 도산 (陶山)으로 이황 (李滉)을 방문했고, 그 해 겨울의 별시 (문과 초시)에서 「천도책 (天道策)」을 지어 장원하였다.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 ‘구도장원공 (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1561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564년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1568년 (선조 1) 천추사 (千秋使)의 서장관 (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해에 19세 때부터 교분을 맺은 성혼과 ‘지선여중 (至善與中)’ 및 ‘안자격치성정지설 (顔子格致誠正之說)’ 등 주자학의 근본문제들을 논하였다. 1569년 임금에게 「동호문답 (東湖問答)」을 지어 올렸다.
1572년 파주 율곡리에서 성혼과 이기 (理氣) · 사단칠정 (四端七情) · 인심도심 (人心道心) 등을 논하였다. 1574년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재해로 인해 「만언봉사 (萬言封事)」를 올렸다. 1575년 주자학의 핵심을 간추린 『성학집요 (聖學輯要)』를 편찬했다. 1577년 아동교육서인 『격몽요결 (擊蒙要訣)』, 1580년 기자의 행적을 정리한 『기자실기 (箕子實記)』를 편찬했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어명으로 「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을 지어 올렸다. 이 해에 「김시습전 (金時習傳)」을 쓰고, 『학교모범 (學校模範)』을 지었으며, 1583년 「시무육조 (時務六條)」를 올려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1584년 서울대사동 (大寺洞)에서 영면하여,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 학문세계와 저작
1545년 을사사화가 발생해 수많은 사류 (士類)가 죽고 유배되었다. 사림은 출사 (出仕)를 포기하고 물러서서 학문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1565년 (명종 20) 문정대비 (文定大妃)의 죽음과 20년간 정사를 전횡하던 권신 윤원형 (尹元衡)의 실각으로 나라 안의 정세가 바뀌었다. 을사사화 이후 죄를 입은 사람들이 풀려나고, 사림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이이는 30세로서 출사 1년째 되는 해였다.
1567년에는 이황이 상경하였다. 그 해 6월,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면서 8월에는 을사사화 이후 피죄되었던 노수신 (盧守愼) · 유희춘 (柳希春) 등이 서용 (敍用)되었다. 선조 즉위 다음 해인 1568년에는 조광조 (趙光祖)에게 영의정을 추서하고, 이황이 일시에 대제학에 취임하고, 남곤 (南袞)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이황은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지어 올렸고, 1569년 (선조 2)에는 이이가 「동호문답」을 지어 올렸다.
1570년에는 유관 (柳灌) · 유인숙 (柳仁淑)의 신원이 이루어지는 등 정국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면서 사림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오랜 구습이나 폐풍은 일시에 시정될 수 없었고 유림의 활동은 떨쳐 일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1575년부터는 동서의 분당으로 사림이 분열되고 정쟁이 심각해졌다. 연산군 이래의 폐법은 고쳐지지 않은 채 국가의 기강은 무너지고 민생의 곤고는 극도에 달하였으며, 군사적으로도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1565년부터 1592년 (선조 26)까지의 약 30년간은 국정을 쇄신해 민생과 국력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이는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를 ‘중쇠기 (中衰期)’로 판단해 일대 경장 (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 보았다. 이이는 「만언봉사」에서 “시의 (時宜)라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 (變通)하여 법을 만들어 백성을 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이는 조선의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 태조가 창업했고, 세종이 수성 (守成)해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비로소 제정하였다. 세조가 그 일을 계승해 『경국대전』을 제정했으니, 이것은 모두 ‘시의 (時宜)에 따라 제도를 개혁한 (因時而制宜)’ 것이요, 조종 (祖宗)의 법도를 변란 (變亂)함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대의 변천에 따른 법의 개정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이에게 성리학은 단순한 사변적 관상철학 (觀想哲學)이 아니었다. 그는 성리학의 이론을 전개함에 있어 시세 (時勢)를 알아서 옳게 처리해야 한다는 ‘실공 (實功)’과 ‘실효 (實效)’를 항상 강조하였다. 그는 「만언봉사」에서,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에는 실지의 일을 힘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정치를 하면서 시의를 알지 못하고 일에 당해 실공을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다스림의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이는 항상 위에서부터 바르게 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실효를 거두며, 시의에 맞도록 폐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이는 사화로 입은 선비들의 원을 풀어주고, 위훈 (僞勳)을 삭탈함으로써 정의를 밝히며, 붕당의 폐를 씻어서 화합할 것 등 구체적 사항을 논의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기 (國基)를 튼튼히 하고 국맥 (國脈)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이는 성현의 도는 ‘시의와 실공’을 떠나서 있지 않으므로 현실을 파악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요 (堯)· 순 (舜)· 공 (孔)· 맹 (孟)이 있더라도 시폐 (時弊)를 고침이 없이는 도리가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이는 진리란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여기서 이 (理)와 기 (氣)를 불리 (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이이 성리설의 특징을 보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이와 성혼은 평상시에 경학이나 도학과 관련해 문답하는 서한을 교환하였다. 이황이 죽은 지 2년 뒤 이이가 37세가 되던 1572년에 성리설에 대한 본격적인 논란을 벌였다. 그것은 이황과 기대승의 논변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한 것이 아니라, 단 1년 사이에 9회에 걸쳐 주고받은 것이다. 대체로 성혼이 이이에게 질의하고 이이가 회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성혼의 질의내용은 비교적 단순한 것으로, 주자학의 핵심 논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였다. 성혼은 일찍이 이황과 기대승 (奇大升) 사이에 오간 사단칠정론 (四端七情論)에 대해 기대승의 논의를 존중하다가 이황의 이기호발설 (理氣互發說)의 도덕적 고민을 이해하고 그 취지에 수긍하게 되었다. 성혼은 이 문제를 과연 어떻게 정돈해야 하느냐고 이이에게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호발설 (互發說)에 대한 성혼의 재론을 계기로 이이는 이황은 물론이요 서경덕 (徐敬德)과 나흠순 (羅欽順)에 대한 논평뿐 아니라, 경전의 본의와 송대 제유 (諸儒)의 성리설을 집약적으로 논술해 나갔다. 이 논쟁은 이이에게 성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고 심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후기의 저작인 『성학집요』 속의 성리설이나 만년작인 「인심도심설」의 내용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다.
이이는 선배인 이황의 이원적 이기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황이 이기를 그처럼 분열적 대립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이황 자신이 잇단 사화를 겪으며 당시의 사회정치적 혼란과 부조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데 연유한다. 이황은 개인과 집단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공의 (公義)와 사리 (私利)의 분별이 명확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이황이 천리와 인욕, 인심과 도심, 사단과 칠정, 그리고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대립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자각의 반영이다.
이황에게 이발 (理發)과 기발 (氣發), 사단과 칠정, 그리고 도심과 인심은 각기 순수한 정신적 가치와 신체적·물질적 욕구의 두 방향을 의미하였다. 이황은 이기가 왕신관계 (王臣關係)에 있으며, 인심은 항상 도심의 명령을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관계가 전도되면 개인적으로는 도덕성의 방기를,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윤리의 파멸과 정치의 타락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이황은 일체의 작위의 근원은 마음의 위미지간 (危微之間)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황은 혼탁한 정치현실을 떠나 학문을 닦음으로써 ‘입언수후 (立言垂後)’하여 도 (道)를 전해주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이에 비해 이이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1565년 이후로 사림이 다시 복귀하게 되면서 사회적 상황을 개선하고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며 국맥을 바로잡을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이이는 현실의 개선 그 자체에 진리성을 찾았다. 이이가 이기를 불상잡 (不相雜)의 대립이 아니라 불상리 (不相離)의 묘 (妙)에서 파악하는 것도 이 같은 낙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이의 사칠론이나 인심도심설에 대한 해석도 이황의 이원적인 논의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이는 칠정을 형기 (形氣)에 속한 것으로만 보지 않고 본연지성 또한 기질지성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 구별하는 것이지, 사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이에게 기란 단순히 혈기지기 (血氣之氣)로서 타락의 가능성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는 물질적인 것, 감성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 심령이나 이성까지도 포괄한다. 여기서 기는 본연지성을 엄폐 (掩蔽)하는 것일 뿐 아니라, 본연지성을 드러나게도 하고 나아가 회복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이는 “인심도심이 다 기의 발이요, 기에 있어 본연지리 (本然之理)를 순 (順)한다면 기가 본시 본연지기 (本然之氣)이다.”라고 하며, “기의 청명여부 (聽命與否)는 다 기의 소위(所爲)이니, 호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인심도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심은 ‘구체 (口體)’를 위한 것으로서 그리고 도심은 ‘도의 (道義)’를 위한 것으로서 서로 구별된다. 그러나 이이는 이황의 주장처럼 하나는 기발, 하나는 이발로 서로 다른 본질과 근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하나의 심이 “단지 발하는 곳에 있어서 이단 (二端)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인심은 성현이라도 면할 수 없으며, “먹을 때 먹고 입을 때 입는 것”은 바로 천리인 것이다. 이이는 인심이라 해도 그것이 알맞게 조절된 상태에서는 “인심 또한 도심이 된다.”고 하였다.
흔히 서경덕은 물론이요 이이까지도 ‘주기론 (主氣論)’이라 하여 학문적으로 연관시켜 보는 경향이 있다. 서경덕과 이이는 다 같이 기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기의 불멸성, 능동성을 강조해 기의 면을 전폭적으로 긍정한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이는 서경덕이 이기의 불리 (不離)에 대한 이해는 깊고 투철하지만, 그 위에 뚜렷이 극본궁원 (極本窮源)하는 이 (理)의 면이 있음을 몰랐다고 비판했다. 서경덕이나 송대의 장재 (張載)가 기에 치우치고 이기를 혼동해 성현의 뜻에 묘계 (妙契)치 못하였다고 지적했다.
이이는 서경덕의 유기론적 (唯氣論的) 입장에 대해 ‘이통기국 (理通氣局)’을 모르는 소치라 하여 ‘한 모퉁이를 본 사람 (見一隅者)’라 폄하했다. 이이 또한 이기지묘 (理氣之妙)를 말하지만 이이는 서경덕처럼 구극적 (究極的) 존재를 태허지기 (太虛之氣)로 보지 않고, 태극지리 (太極之理)로 이해한다.
이이는 이황처럼 이와 기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이가 기에 우월하다는 이우위설 (理優位說)을 주장했다. 이와 기는 결코 혼동할 수 없는 것이며, 이는 기의 추뉴 (樞紐)요 근저 (根柢)요 주재 (主宰)라는 것이다. 이의 본체는 통일적 원리이지만 그것은 사사물물에서 유행하는 것이요 만유 (萬有)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황이 이와 기가 각각 실질적 동력으로 발용한다는 호발설을 주창한 데 대해, 이이는 이기는 이합과 선후가 없다는 기발이승일도설 (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했다. 이이의 견해는 처음부터 이기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이황과 달리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현상 그 자체의 소이연으로서 이를 말하는 까닭에 이발 (理發)이 따로 있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이는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통기국설’로, 그리고 이황의 이기이원적 경향에 대해서는 ‘기발이승일도설’로 대응했다. 서경덕은 실재하는 기의 생성변화를 떠나서 별도로 묘 (妙)를 말하는 것은 진리를 모르는 자라 하였다. 그러나 이황은 이와 달리 이 (理)야말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으로서 이로 말미암아 모든 학문 도술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이황은 만유를 가능하게 하는 초월적 존재로서 이를 강조한 반면, 서경덕은 이를 기 자체와 작용상의 자율성 또는 내재율로 보아 기의 실재성과 사실성을 강조하였다. 서경덕은 유기론자로서 기를 중시하고, 이황은 이우위설을 논해 이의 구극성 (究極性)을 강조하였다. 서경덕과 이황은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면서도 이와 같이 매우 대조적인 견해를 견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이는 이의 세계와 기의 영역을 완전히 긍정하여 포괄하면서, 동시에 양면을 아울러 지양시켰다. 이이는 기의 사실성과 이의 초월성을 체인 (體認)해 양자를 불리의 관계에서 파악하면서 ‘이기지묘’를 강조했다. 이이는 이기의 묘처 (妙處)야말로 알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명하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이이는 태극과 음양, 이와 기의 관계는 일이이 (一而二)요 이이일 (二而一)이라는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그의 이론을 대략 다음과 같이 집약하였다.
“전훈(前訓)을 고찰하면 이기는 일 (一)이면서 이 (二)요, 이 (二)이면서 일 (一)이다. 이기가 혼연무간해 원래 떨어지지 않으므로 정자는 ‘기즉도 (器卽道)요 도즉기 (道卽器)’라 했고, 떨어지지 않을지라도 혼연한 가운데 섞이지 않아서 일물 (一物)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주자는 ‘이는 스스로 이요, 기는 스스로 기’라고 한 것이다. 이 두 설을 종합해 깊이 생각하면 이기지묘를 거의 알 수 있으리라. 그 대강을 말하면 이는 무형하고 기는 유형하다. 그러므로 이는 통 (通)하고 기는 국 (局)한다. 이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므로, 기는 발 (發)하고 이는 승 (乘)한다. 무형무위하면서 유형유위한 것의 주 (主)인 것은 이이며, 유형유위하면서 무형무위한 것의 기(器)인 것은 기이다 (聖學輯要).”
이이의 이통기국과 기발이승일도설은 보편적 원리와 특수한 사실을 상호관련 하에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사사물물을 관통하고 있으며, 본연지리는 스스로의 보편성을 가지는 것이지만, 변화하는 사실과 관련한 유행지리 (流行之理)를 떠나서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보편적 원리가 사사물물의 개별적 사실을 관통하고 있으며, 또한 구체적인 변화의 상을 떠나서는 추구할 수 없다는 논리로서, 성리와 실사가 혼융무간한 관계임을 통찰한 결과이다.
또한, 이이는 이른바 의 (義)와 이 (利)를 구별해 이원화하는 사고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리 (義理)와 실리 (實利)를 불가리 (不可離)의 관계에서 보고 있다. 이이는 「시무칠조책 (時務七條策)」에서 “도 (道)의 병립할 수 없는 것은 시 (是)와 비 (非)이며, 사 (事)의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이 (利)와 해 (害)이다. 한갓 이해가 급하다고 하여 시비의 소재를 불고 (不顧)한다면 제사지의(制事之宜)에서 어긋난다. 또한 시비를 생각해 이해의 소재를 살피지 않는다면 응변지권 (應變之權)에서 어긋난다. … 권 (權)에는 정규 (定規)가 없으니 중 (中)을 얻음이 귀하고, 의 (義)에는 상제 (常制)가 없나니 의 (宜)에 합함이 중하다. 중을 얻고 의에 합하면, 즉 시 (是)와 이 (利)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진실로 국가를 평안하게 하고 민중에게 이로우면 다 행할 수 있는 일이요,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고 민중을 보호하지 못하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옳고 그름을 가르는 규범의 문제와 이해관계를 따지는 현실 문제가 ‘득중 (得中)’, ‘합의 (合宜)’함으로써, 보국과 안민이라는 차원에서 시 (是)와 이 (利)의 조화라는 하나의 사실로 지향됨을 볼 수 있다. 이이는 시대에 따라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 각기 다르다고 보았다. 이이는 시대를 ‘창업 (創業)’과 ‘수성 (守成)’ 그리고 ‘경장 (更張)’의 과정으로 나누어 논했으며, 당시를 경장기라고 보았다.
이이는 「동호문답」에서 가장 큰 폐법으로 다섯 가지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것은 모두 민생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① 일가절린 (一家切隣)의 폐, ② 진상번중 (進上煩重)의 폐, ③ 공물방납 (貢物防納)의 폐, ④ 역사불균 (役事不均)의 폐, ⑤ 이서주구 (吏胥誅求)의 폐를 꼽았다. 이러한 이이의 지적은 당시의 시대상과 민중의 질고 (疾苦)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다.
또한, 이이는 국세조사와 같은 전국적인 규모의 조사를 실시해 실정에 알맞게 폐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밖에도 이이는 「만언봉사」· 『성학집요』 및 수많은 상소문을 통해 정치· 경제· 문교· 국방 등에 가장 필요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더 나아가 이이는 국정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개인이나 일부 지도층으로부터 하향식으로 수행될 것이 아니라, 언로를 개방해 국민 모두가 말할 수 있게 하고, 위정자는 아래로부터의 중지 (衆智)를 모아야 한다고 보았다. 조광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이에게 언로의 개색 (開塞)은 국가 흥망에 관계된 중대한 일로서 강조되었다. 공론 (公論)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국민의 정당한 일반 의사가 곧 국시 (國是)가 된다고 지적하면서, 언로의 개방성과 여론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또한, 이이는 경제사 (經濟司)의 창설을 제의하면서 단지 기성 관료가 아니라, 시무를 밝게 알고 국사를 염려하는 사류로서 윤리성과 합리성을 겸비한 최고의 지성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듯 의리와 실리, 이념과 현실의 통합적 구상은 후기에 한국의 의리학과 실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도 조선 중기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전개에서 이이의 성리설이 끼친 영향을 깊이 관찰해야 한다. 이이의 성리사상은 오늘날에도 유심과 유물, 주체와 상황, 그리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부터 양자의 조화와 발전을 도모하는 데에 새로운 방향을 던져주고 있다.
- 상훈과 추모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사에 추증 (追贈)되었다. 1591년 (선조 24) 광국원종공신 (光國原從功臣) 일등 (一登)에 추록되었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 (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 (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 (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 (白鹿洞書院) 등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 이이의 사상
이이의 사상과 학문은 사계 김장생 (金長生)을 거쳐 김집, 안방준, 우암 송시열-수암 권상하-한원진 (韓元震) 등 서인 노론으로도 이어졌고, 우계 성혼의 문인들과 결속한 사계 김장생 (金長生)과 김집의 또다른 문하생 일부, 윤황과 윤선거 등을 통해 서인 소론에게도 계승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정묘호란으로 도망노비 발생 및 신분제도 해체가 가속화되자 이이의 문하생들은 봉건사회 해체 양상에 반발, 신진관료·지주 중심의 사회 운영을 합리화하며 송익필 계열의 예학을 내세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이를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임을 재선언했고, 이이의 사상이 주자학을 정통으로 계승했음을 강조했다. 이이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서인은 계속 이이의 성균관 문묘 종사운동을 벌였고, 이이는 스님일 뿐이라는 근기남인계 허목, 윤휴, 윤선도 등의 정면반박을 받게 된다. 당초 집권세력의 견제를 위해서는 반대세력이 소수나마 존재해야 한다, 붕당에 관계없이 어느 당에도 소인과 군자는 있다는 이이의 견해를 고수하던 서인, 노론은 1623년 인조반정 때까지만 해도 남인과 연립정권 구성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송을 계기로 이이의 견해를 버리고 남인 및 반대파에 대한 탄압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 학문관
그의 학문 즉 성리설의 특징은 논리적이다. 반면에 이황은 체험을 중시한 것이었다. 그는 학문에 대하여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학문을 참된 학문이라고 규정하였다. 아무리 훌륭하고 고결한 이론이라고 해도 현실에 적용이 불가능하다면 이는 헛된 공리공담이라는 것이 그의 사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후배인 서인은 그의 실용사상을 사장시키고 관념적이고 교조적으로 나아가 당쟁을 격화시키게 된다.
- 경장론
당시 성리학이나 다른 학문에서는 사물, 어느 국가나 사회에 생성기, 창업기와 수성기가 있고, 그 다음으로 멸망, 소멸의 단계가 있다고 보았는데, 이이는 수성기와 멸망 사이에 경장 (更張)이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시작, 창업기를 거쳐서 창업에서 멀지 않은 시점에 위기를 겪고 이를 잘 극복하는 것을 수성이라 하였다. 수성기의 단계를 거친 뒤에 어느정도 시간이 잡히고 정착된 뒤에는 다시 관료주의에 빠지거나 무사안일, 퇴폐에 빠진다고 보았다. 이때 그는 다시 국가와 사회를 다시 다잡을 필요성을 역설하고 그러한 중쇠나 관료주의, 고착화를 극복할 대안으로 다시 팽팽하게 조인다, 다시 긴장시킨다는 뜻의 경장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경장론 (更張論)이라 하였다. 그리고 경장의 방법으로 변통 (變通), 전면 개정이 아닌 일부 수정, 재정비를 경장의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자신이 살던 사회를 조선이 건국한 뒤 어느정도 체제는 안정되었지만 정비된 각종 제도가 무너져가는 중쇠기 (中衰期)의 단계라고 보고, 일종의 국가 재건, 조직 재건과 비슷하게 시급한 국가의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보고 이를 경장 (更張)이라 하였다. 그는 당시 시대가 바로 경장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전통이나 구질서에 집착하지 말고, 기존의 것을 현실에 맞게 수정, 고치는 변통(變通)을 통한 일대 경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저서 《동호문답》, 《만언봉사》 등에서 경장의 방법, 사회를 다시 개혁하는 안, 안민 (安民)을 위한 국정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만언봉사》에서 그는 “때에 알맞게 한다”(時宜)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정치에 있어서는 때를 아는 것이 소중하고 일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것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고, “때에 알맞게 한다” (時宜)는 것은 시대의 변화, 환경의 변화에 따라 때에 따라 변통을 하고, 각종 제도와 법을 마련하거나 기존의 법, 제도를 정비해서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인습에 안주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변화된 시대나 생활에 맞춰서 현실에 맞도록 고치고 개정하는 것이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라 보았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면 제도나 법이 맞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현실에 맞지 않다면 그 시대 분위기, 환경에 맞게 제도를 개혁, 정비해야 되고 이러한 변통을 통해 경장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시대의 문제와 사회의 부조리, 백성들의 불편함을 해소, 구제할 수 있다고 제시하였다.
그는 자신이 살던 조선 중기를 중쇠기로 지적한 이유로, 각종 민생 범죄, 유랑민 증가, 왜구나 여진족의 수시 약탈, 양반 관료층의 기강 해이 등을 들고 이를 백성들의 경제적 파탄현상으로 진단했다. 그는 이러한 백성들의 생활 파탄의 원인으로 각종 오래된 제도와 인습의 폐단, 현실을 대변하지 못하는 이상론, 관념론에 대한 집착으로 규정했다. 따라서 경장의 방법으로 국가의 통치체제 정비, 공안 (貢案)과 군정 (軍政)등 부세 (賦稅)제도의 개혁, 노인과 아이에게까지 거둬가는 세금과 각종 지방관과 향리들에 의한 가렴주구 개선, 세금 납부 항목과 국가 조세 등에 대한 일원화 및 세금액수 균등화 등을 제시했다. 그는 국가와 사회의 재정비가 필요하고, 그 재정비의 방법으로 그는 큰 틀은 유지하되 법률 개혁, 제도 개선 등을 통해 당시 현실, 시대상을 반영하게 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백성들의 사회교화 역시 경장의 하나라고 보고 서원향약 (西原鄕約), 해주향약 (海州鄕約), 사창계약속 (社倉契約束) 등을 만들어 향약과 사창법을 실시하고 지방에 서원, 향교, 서당의 건립을 보급, 적극 장려하여 지방 인심 습속의 교화를 역설했다.
- 일도설
그는 이와 기는 하나라고 판단했다. 그의 사상은 기발이승일도설 (氣發理乘一途說)로 대표되며 퇴계의 사단칠정 (四端七情)설로서 이기호발설을 배격하였다. 그가 23세 때 지은 《천도책 (天道策)》에 이미 그 바탕이 드러나 있다. 즉 율곡은 이황이 기 (氣)와 이 (理)는 서로 독립되어 있다는 데 이설 (異說)을 제기하여 우주의 본체는 이기이원 (理氣二元)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인정하나 이와 기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분리되거나 선후 (先後)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와 기는 최초부터 동시에 존재하며 영원무궁하게 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이는 조리 (條理), 즉 당연의 법칙으로 우주의 체 (體)요 기는 그 조리를 구체화하는 활동이니 우주의 용(用)이라 주장하였다.
즉 이황의 설은 호발설이고 이이는 일도설이었다. 하지만 이황의 칠정설인 기발이승설만을 취한 것이다. 반면에 그의 사단설인 이발기수 (理發氣隨)설을 비판하였다. 또한 그것은 이황과 사단칠정설논쟁을 벌인 기대승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한 서경덕에 대해서도 기중심의 설로서 독창적이지만 문제가 있다며 비판한다. 그의 설은 기가 운동하고 이는 그 원인이 된다는 설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자기의 주장을 발전시키면서 이 주장이 주자의 뜻과 어긋나면 주자가 잘못 된 것이라고까지 하는 자신을 얻게 된 것이다. 이같이 그는 학문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경세가 (經世家)로서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훗날 영남의 유직이 효종원년에 올린 상소문에서 이이의 설을 불교와 육왕 (육구연과 왕수인)과 같은 주기설로서 이단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는 이황이야말로 주리설로서 정학이라는 사상에 근거하여 이이를 비판했던 것이다. 그후 주리설은 정학이고 주기설은 이단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 상소로 인하여 유직은 조정으로부터 처벌받아 과거시험을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하지만 이이 역시 기의 뿌리가 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주리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황과 이이 모두 기의 뿌리가 리라고 했기 때문에 모두 이일원론 또는 이기일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작인 《동호문답 (東湖問答)》, 《성학집요 (聖學輯要)》, 《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 《시무육조소 (時務六條疏)》 등은 모두 임금의 도리와 시무를 논한 명저로 그의 정치에 대한 태도는 유학자의 이상인 요순시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 향약과 규례
이 밖에 정치적 부패의 타개와 백성의 구제에 대한 방책에 관해서는 한층 구체적인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만언봉사 (萬言封事)》에서 율곡은 부패의 시정책 7개항을 제시하였는데 특히 그 중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여 임진왜란을 예언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 밖에도 대동법의 실시와 사창의 설치 등을 제의한 일은 조선 사회 정책에 획기적인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일반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서원향약 (西原鄕約)》, 《해주향약 (海州鄕藥)》, 《사창계약속 (社倉契約束)》, 《동거계사 (同居戒辭)》, 《학교모범 (學敎模範)》, 《해주은병정사학규 (海州隱屛精舍學規)》, 《약속 (約束)》, 《문헌서원학규 (文獻書院學規)》 등의 규례를 많이 만들었다.
- 정당관
그는 기존의 성리학의 사상처럼 정당을 군자의 정당과 소인의 정당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조선 명종 때까지만 해도 붕당을 형성하는 것은 죄악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는데, 그는 붕당을 부정할 것만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이의 붕당관은 기존의 성리학적 붕당관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나, 소인의 정당을 완전히 배척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다만 군자의 정당을 상대적으로 많이 등용함으로써 문제를 줄여가는 것으로 해결해야 된다고 판단하였다.
- 여성 교육관
그는 기존의 유교나 성리학의 남녀 차별에 반대하였다. 여성 역시 하나의 인간이자 인격체로 간주하였고, 여성에게도 유교와 성리학을 가르쳐 인의예지와 도덕적 소양을 가르쳐야 된다고 확신했다. 그의 이런 사상은 집안의 여성들에게 사서삼경을 직접 가르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또한 그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딸들에게도 유교와 성리학을 가르쳤던 외할아버지 신명화의 영향력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 명의 첩을 거느리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 독서관
이이는 그의 저작 자경문 (自警文)에서 독서에 대한 생각을 규정하였다.
“새벽에 일어나면 아침나절 할 일을 생각하고, 아침밥을 먹고 나면 낮 동안 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 때면 내일 할 일을 생각한다. 아무 일이 없으면 마음을 내려놓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을 하여 일 처리에 마땅한 방도를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 독서를 한다. 독서란 옳고 그름을 분변 (分辨)하여 일을 행하는 데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일을 살피지 않고 오뚝 앉아 독서만 한다면, 무용한 학문이 된다.”
또한 격몽요결의 4장에서 율곡은 독서에 대해 상세히 논하고 있다. ‘배우는 사람은 늘 이 마음을 보존하여 사물의 유혹에 져서는 안 된다. 반드시 이치를 따져보고 (窮理), 선 (善)을 밝힌 뒤에야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가 눈앞에 드러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道)로 드러내는 데는 이치를 따지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이치를 따지는 데는 독서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성현 (聖賢)들이 마음을 쓴 자취와 본받거나 경계해야 할 선과 악이 모두 책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독서를 세상, 사물의 이치와 진리를 깨우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로 해석하였다.
- 학맥
이이는 학문적으로는 김종직 학파의 직계로서, 친구인 성혼과 함께 백인걸의 문하생이었다. 성혼은 백인걸 외에도 성수침에게도 사사했는데, 백인걸과 성수침은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이들의 친구였던 노수신 역시 이연경의 문인으로, 이연경 역시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그는 관료생활 중에도 스승인 백인걸을 자주 찾았는데, 이이가 백인걸과 함께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의 인물평을 논하면서 정암과 퇴계의 우열을 놓고 평을 했는데, 이때 이이는 스승인 백인걸에게 조광조에 대해 타고난 성품은 훌륭하였지만 학문이 성숙하지 못한 채 관직에 나가서 일을 그르쳤다고 소신을 피력했다. 백인걸은 조광조의 문하생이었다.
조광조는 다시 김종직의 문하생의 한사람인 김굉필의 문하생이기도 하다. 이이와 성혼의 문하생들 중의 한명인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송시열과 송준길 등이 배출되었고, 이이와 성혼은 후일 서인의 종주로서 추앙되었다.
○ 가족 관계
강평공 (康平公) 이명신 (李明晨)의 5대손이며, 중종 때의 재상 이기, 이행 형제의 재종손이자 통덕랑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사후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이원수 (李元秀)와 정경부인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었다.
할아버지 : 이천
아버지 : 이원수 (1501-1561) – 통덕랑 사헌부감찰 수운판관 역임, 좌찬성에 추증
외할아버지 : 신명화
어머니 : 신사임당 (申師任堂, 1504년~1551년)
누이 : 이매창
형 : 이번, 이선
동생 : 이우
부인 : 곡산 노씨 (谷山盧氏, ? – 1592년), 목사 노경린의 딸
副室 : 경주 이씨 (慶州李氏) 절충장군행호분위부호군 (折衝將軍行虎賁衛副護軍) 이양 (李崵)의 딸 [이양 (李崵)은 동악(東岳)이안눌 (李安訥)의 장인이기도 함]
율곡선생과 같은 문중 친척인 이안눌 (李安訥)의 문집에 보면 이안눌의 어머니 동생인 이안눌의 이모가 율곡선생의 부실 (副室) 이었다. 관련 내용이 동악 (東岳) 이안눌 (李安訥)의 문집에 있다.
東岳先生集卷之二十六 亡舅李通政文 내용중에서 일부 [저자: 동악 (東岳) 이안눌 (李安訥)]
율곡이선생 (栗谷李先生)의 慶州李氏 부실 (副室)은 2남 1녀를 두었다.
율곡이선생 (栗谷李先生)의 딸 : 율곡 이이의 경주이씨 (慶州李氏) 부실 (副室)에게서 난 딸이 김집의 부실 (副室)이 되었다.
사위 : 김집 (사계 김장생의 아들)
이모 : 신씨
이종사촌 : 권처균 (權處均)
친척 : 이의무의 다섯 아들 이권, 이기, 이행, 이영, 이봉 형제가 율곡이이의 재종조부임, 이안눌의 증조가 이행이고, 고조가 이의무임, 이안눌의 할아버지 이원정과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같은 항렬임
○ 저서 및 작품
- 저서
《성학집요》(聖學輯要)
《격몽요결》(擊蒙要訣)
《동호문답》(東湖問答)
《소학집주》
《만언봉사》
《기자실기》
《경연일기》(經筵日記)
《석담일기》(石潭日記) – 경연일기의 일부였으나, 조선 숙종조 이후 따로 석담일기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보급되었다.
《순언》(醇言)
〈인심도심설〉
〈김시습전〉
〈천도책〉
- 작품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藥)》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동거계사(同居戒辭)》
《학교모범(學敎模範)》
《해주은병정사학규(海州隱屛精舍學規)》
《약속(約束)》
《문헌서원학규(文獻書院學規)》
《자경문》
참고 =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