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7년 4월 9일, 핀란드의 종교개혁자 ‘핀란드 문학의 아버지’ 미카엘 아그리콜라 (Mikael Agricola, 1510경 ~ 1557) 별세
미카엘 아그리콜라 (라: Mikael Agricola, 1510년경 ~ 1557년 4월 9일)는 핀란드의 종교개혁자로서, 핀란드어의 문어(文語)를 확립했고, 스웨덴-핀란드의 개신교 종교 개혁에 앞장선 인물이다.
아그리콜라는 1554년, 교황의 동의 없이 투르쿠의 주교에 임명되었고, 그 결과 그는 루터교회의 입장에 서서 핀란드 교회의 개혁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신약 성서, 기도서, 찬송가 등을 핀란드어로 번역했고, 이를 통해 근대 핀란드어 철자법의 기본이 된 정서법을 확립했다.

– 미카엘 아그리콜라 (Mikael Agricola)
.출생: 1510년, 스웨덴 토스비
.사망: 1557년 4월 9일, 러시아 Polyany
.묘지: 러시아 비보르크 Old Cathedral of Vyborg
.배우자: Birgitta Olavintytär (1550 ~ 1557년)
.자녀: 크리스찬 아그리콜라
성서의 전역이나 부분역이 2000개 이상의 언어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오랜 세월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장애물을 헤쳐 나가며 성서를 자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애를 썼기 때문이다. 그중 한 인물이 미카엘 아그리콜라였다.
학자인 아그리콜라는 성서를 핀란드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였다. 그의 저술물들은 오늘날에 알려져 있는 핀란드 문화의 부흥에 기여하였다. 그는 ‘시대의 선구자’로 불릴 만하다.

○ 생애 및 활동
아그리콜라는 1510년경 핀란드 남부의 토르스비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농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라틴어로 “농부”를 가리키는 말인 아그리콜라라는 성 (姓)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아그리콜라는 스웨덴어와 핀란드어를 함께 사용하는 지역에서 자랐기 때문에 두 가지 언어를 다 하였을 것이다. 그에 더하여 그는 비보르크라는 도시의 라틴어 학교에 다니면서 언어 능력을 키웠다. 그 후, 당시 핀란드의 행정 중심지였던 투르쿠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핀란드 가톨릭 주교인 마르티 스키테의 비서로 일하였다.
- 그 시대의 종교와 정치
아그리콜라의 생애 중 그 시기에 스칸디나비아는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스웨덴은 스칸디나비아 나라들로 결성된 칼마르 동맹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1523년에 구스타프 1세가 스웨덴 왕이 되었다. 이로 인해 핀란드는 막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당시에 핀란드는 스웨덴의 통치를 받는 속주였기 때문이다.
새 왕은 권력 강화에 힘을 쏟았다.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당시 북유럽을 휩쓸던 종교 개혁 운동도 받아들였다. 또한 국교를 가톨릭에서 루터교로 바꿈으로, 교황청과 유대를 끊고 가톨릭 주교들의 권위를 실추시켰으며 교회의 재산에 손을 대기도 하였다. 지금까지도 스웨덴과 핀란드의 인구 대다수는 루터교인이다.
개신교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라틴어가 아니라 일상어로 교회 예배를 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526년에,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즉 “신약”이 스웨덴어로 나왔다. 하지만 핀란드에서는 개신교의 영향력이 상당히 약한 편이었다. 당시는 성서를 핀란드어로 번역하는 일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던 시기였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성서 번역
주된 이유는 핀란드어로 나온 출판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1500년대 중엽이 되기 전에 핀란드어로 쓰여진 것이라고는 가톨릭 기도문 몇 가지가 고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핀란드어로 번역하려면 많은 낱말을 문자화하고 완전히 새로운 낱말과 어구를 창안하는 작업이 필요하였다. 더군다나 언어 교본도 없이 그 일을 해야 하였다. 그럼에도 아그리콜라는 성서 번역에 착수하였다.
1536년, 핀란드의 가톨릭 주교 스키테는 아그리콜라를 독일 비텐베르크로 보내 신학과 언어를 더 연구하게 하였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바로 이 도시에서 그보다 20년 전에 루터가 그 유명한 95개 조항을 성곽 교회의 문에 망치로 박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그리콜라는 비텐베르크에 있으면서 신학과 언어만 연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성서를 핀란드어로 번역하는 엄청난 작업을 시작하였다.
1537년에 스웨덴 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하나님께서 저의 연구를 인도하시는 한, 저는 앞서 시작한 대로 신약을 핀란드인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는 핀란드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해서 번역 작업을 하는 동시에 학교장직도 겸하였다.
성서를 번역하는 일은 여느 초기 성서 번역가들에게도 그러하였듯이, 아그리콜라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심지어 루터는 이렇게 한탄한 적도 있다. “히브리 필자들이 어쩔 수 없이 독일어로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힘들고 짜증 나는 일인가!” 물론 아그리콜라는 다른 사람들의 번역본도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직면해야 했던 주된 장애물은 핀란드어였다. 사실상, 핀란드어로 된 기록물이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아그리콜라에게 마치 설계도도 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빈약한 재료를 가지고 집을 짓는 것과 같았다. 그는 그 일을 어떻게 하였을까? 아그리콜라는 다양한 핀란드 방언에서 낱말들을 주워 모아 발음이 나는 대로 적어 가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아마도 “군대”, “모범”, “사본”, “서기관”, “위선자”, “정부”에 해당하는 핀란드어 낱말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아그리콜라였을 것이다. 그는 복합어도 만들고 파생어도 고안하였으며, 다른 언어들에서 특히 스웨덴어에서 낱말들을 빌려 오기도 하였다. 그런 낱말 중에는 람푸 (등), 마르티리 (순교자), 엔켈리 (천사), 팔무 (야자나무), 히스토리아 (역사) 등이 있다.

- 동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
마침내 1548년에 아그리콜라의 번역물 중 첫 번째 부분이 「신약」(Se Wsi Testamenti)이라는 명칭으로 발행되었다. 이 번역본이 그보다 5년 전에 완성되었지만, 자금이 부족한 탓에 늦게 출판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짐작건대, 인쇄 비용의 상당 부분을 아그리콜라 자신이 부담하였을 것이다.
3년 뒤에 「시편」(Dauidin Psaltari)이 나왔는데, 이것은 아그리콜라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번역하였을 것이다. 또한 그는 모세가 기록한 책들과 예언서 중 일부를 번역하는 일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그리콜라는 자신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면서 이렇게 솔직하게 기술하였다.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든 이 성서를 읽는 어떤 독자이든, 무경험자가 발행한 이 번역본에서 잘못되거나 어색한 표현, 거북하거나 생소한 표현을 보게 되더라도 언짢게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그리콜라의 번역판들에 어떤 결함이 있을지라도, 성서를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는 일에 그가 보인 끈질긴 열심은 더없이 칭찬받을 만하다.

- 아그리콜라의 사망과 그가 남긴 유산
1557년 초에, 당시 루터교인으로서 투르쿠의 주교였던 아그리콜라는 스웨덴과 러시아 간의 국경 분쟁을 중재할 대표자로 선출되어 모스크바로 파견되었고,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런데 돌아오는 여정이 고되다 보니 뜻밖에도 병에 걸리고 말았다. 오는 도중에 그는 약 4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비교적 짧은 생애 동안 아그리콜라가 핀란드어로 남긴 출판물은 열 권 정도에 지나지 않는데, 대략 총 2400쪽에 달힌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은 그가 핀란드의 문화 발전을 촉진시킨 “시대의 선구자”라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핀란드어와 핀란드인은 예술과 학문 분야에서 큰 진전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으로, 미카엘 아그리콜라는 또 다른 분야의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즉 핀란드어 사용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더 밝게 비추어 주는 역할도 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 그를 추모하는 라틴어 시에 이렇게 요약되어 있는 바와 같다. “고인이 남긴 평범한 유산은 없으되, 유산 대신 유작을, 손수 핀란드어로 번역한 성경을 남겼으니, 이야말로 극찬할 만한 유산이로다.”

○ 평가
최초의 핀란드어 책을 쓰고 신약성서를 핀란드어로 번역한 투르쿠의 주교 미카엘 아그리콜라 (1510 ~ 1557년경)는 ‘핀란드 문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라틴 문자로 표기되는 언어인 핀란드어의 문어(文語), 철자법의 기본을 세운 인물이다.
19세기에 엘리아스 뢴로트가 집필한 핀란드의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는 핀란드 전통 문화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소설가 프란스 에밀 실란패는 1939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소설가 미카 발타리도 전 세계에 알려져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