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5년 4월 10일, 그레고리력을 시행한 교황 그레고리오 13세 (Papa Gregorio XIII, 1502 ~ 1585) 선종
그레고리오 13세 (Papa Gregorio XIII, 1502년 1월 7일 ~ 1585년 4월 10일)는 제226대 교황 (재위: 1572년 5월 13일 ~ 1585년 4월 10일)이다. 본명은 우고 본콤파니 (이: Ugo Boncompagni)이다.
기독교 역사상 널리 회자되는 인물 중 하나로, 재위기간 동안 그는 교회 내부의 개혁을 추진하여 트리엔트 공의회의 정신을 구체화시켰으며, 예수회를 적극 지원하였다.
특별히 아시아의 일본과 필리핀에 외교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1579년 2월 9일에는 필리핀 군도의 수호성인으로 원죄 없이 잉태된 성모 마리아를 지정해주었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태양력인 그레고리오력을 제정한 것이다.
그는 율리우스력을 개정하여 그레고리력 (Gregorian Calendar)을 시행해 1582년 10월 4일 다음날을 15일로 변경했다.
○ 생애 및 활동
- 유년기
우고 본콤파니는 1502년 볼로냐에서 크리스토포로 본콤파니 (1470 ~ 1548)와 그의 아내 안젤라 마레스칼치 사이에서 태어났다.
교회법과 시민법을 공부하여 1530년 28세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몇 년간 그는 교회법과 시민법을 가르쳤으며, 그로부터 공부를 배웠던 학생들로 알레산드로 파르세네, 레지널드 폴, 가롤로 보로메오와 같은 고위 인사들도 있었다.
한편 우고 본콤파니는 사제 서품을 받기 전에 자코모라는 이름의 사생아를 한 명 낳았다.
- 성직 입문
36세가 된 우고 본콤파니는 교황 바오로 3세 (1534 ~ 1549)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갔다.
교황은 그를 캄파냐의 판관부터 시작해서 문서 속기관, 부대법관 등으로 순차적으로 임명하였다.
교황 바오로 4세 (1555 ~ 1559)는 그를 카를로 카라파 추기경의 종자로 보냈으며, 교황 비오 4세 (1559 ~ 1565)는 그를 산시스토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서임하는 한편 트리엔트 공의회에 교회법 전문가로 파견하였다.
또한 그는 이단 혐의를 받은 톨레도 교구장 바르톨로메 데 카란사 추기경을 조사하기 위해서 스페인에 교황특사로 파견된 적도 있었다.
당시 그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 국왕과 지속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이 관계는 차후 그가 교황으로써의 외교정책을 펼치는데 큰 요소가 되었다.
- 교황 선출
교황 비오 5세 (1566 ~ 1572)가 선종한 후에 열린 콘클라베에서 본콤파니 추기경이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위대한 개혁가인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업적을 이어받겠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교황명으로 그레고리오 13세를 선택하였다.
새 교황을 뽑기 위해 열린 콘클라베는 개시한 지 24시간도 채 안되어서 끝이 났다.
많은 역사가는 이렇게 빨리 결론이 난 것은 본콤파니 추기경이 스페인의 지지를 강하게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본콤파니 추기경의 선출은 당시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도 적절한 선택이기도 하였다.
그는 과거의 몇몇 교황들과는 달리 흠 없는 인생을 살아왔으며, 개인적으로도 무척 검소한 삶을 살아 다른 사람의 귀감이 되었다.
이에 더해, 지식이 해박하고 지도력도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에 교회 내에 산적한 문제를 잘 처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 교황
.교회 개혁
그레고리오 13세는 베드로좌에 착좌하자마자 먼저 가톨릭교회의 개혁에 온힘을 다하였다.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법령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교구장은 반드시 자신의 교구 내에 거주해야 한다는 규정에 추기경도 예외 없이 그대로 지키도록 하였으며, 금서목록위원회를 설립하여 금서 목록을 갱신하도록 하였다. 또한, 《교회법전》 (Corpus juris canonici)의 여러 조항을 시대에 맞게 개정하였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의 순교록을 출판하였다. 한편으로 그레고리오 13세는 만사를 철저하게 단독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교황의 몇몇 측근들은 교황이 외부의 간섭을 원체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다른 사람에게 일체 조언이나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고 증언하였다. 그레고리오 13세의 치세 동안 교황권은 나날이 강화된 반면에 추기경들의 영향력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예수회와 오라토리오회 지원
그레고리오 13세가 추진한 개혁의 주요 핵심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법령들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었다. 그는 근래에 새로 결성된 예수회를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였으며, 이를 위해 많은 새로운 대학교들을 설립하도록 하였다. 예수회에서 설립한 로마 대학교는 그레고리오 13세의 후원을 받으며 나날이 성장해갔으며 유럽 학문의 최고 중심지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대학이 바로 오늘날 그레고리오 대학교의 전신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로마의 독일 기숙사를 시작으로 사제 양성을 위하여 많은 신학교와 기숙사를 세울 것을 지시하였으며, 교수로는 예수회 사제들을 등용하였다.
1575년에는 성 필립보 네리가 창립한, 오직 기도와 설교에만 매진하는 사제 공동체인 오라토리오회를 정식으로 인가하였다.
.그레고리력 시행
기원전 45년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집트의 태양력을 차용해 만든 율리우스력을 시행했다. 한 해의 길이를 365.25일로 계산한 율리우스력은 1년을 365일로 하고 4년마다 하루를 추가한 윤년을 두었다. 실제 1년의 길이가 365.2422일임을 감안하면 율리우스력은 매년 11분 14초씩 빨라진다. 처음 이 차이는 미미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격차가 벌어졌다.
1천600년이 지난 16세기에 이르러 실제 날짜보다 10일이나 오차가 났다. 즉 춘분의 날짜가 3월 21일보다 열흘 앞선 3월 11일이 된 것이다. 춘분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뜬 다음 일요일을 부활절로 정한 기독교 세계에서 부정확한 부활절 날짜는 심각한 문제였다. 달력을 개정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시도되어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 때에 결실을 보았다. 새 달력은 4년마다 윤년을 두되 100으로 나누어지는 해는 평년으로 하고, 다시 400으로 나누어지는 해는 윤년으로 정했다. 1년을 365.2425일로 계산해 3천333년에 하루 꼴로 오차가 생긴다. 교황의 이름을 따 그레고리력이라 불리는 이 달력은 1582년 2월 발표된 칙령에 따라 10월 4일 목요일 다음날을 10월 15일 금요일로 바꾸고 시행되었다. 오차가 난 10일은 아예 없애 버렸다.
그러나 그레고리력의 보급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관습과 종교의 차이로 20세기에 와서야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었다. 개신교 국가인 영국은 1752년에, 정교 국가인 러시아는 1919년에야 새 달력을 도입했다. 한국은 1896년 1월 1일부터 그레고리력을 사용했다. 물론 율리우스력을 쓰던 국가들은 새 역법을 시행하면서 10~13일 정도의 날수를 역사에서 지워야 했다.
.외교와 정치
그레고리오 13세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항상 걱정하는 한편 프로테스탄티즘의 위협에 대해서도 크게 우려하였다. 또한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를 폐위시키려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계획에 찬동하게 되면서, 잉글랜드의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은 가톨릭교도들을 나라의 잠재적인 반역자로 간주하게 되었다.
1578년 그레고리오 13세는 니콜라스 샌더즈, 윌리엄 알렌, 제임스 피츠모리스 피츠제럴드 등 추방당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의 반란 계획을 돕기 위하여 토머스 스터클리를 아일랜드로 보내 가톨릭계 지도자이면서 제1차 데스몬드 반란 세력의 주동자인 피츠모리스를 도와 배 한 척과 800명의 군사를 준비시켜 엘리자베스 1세 정부를 전복시키고자 계획하였다. 하지만 스터클리가 모로코의 압둘말릭 황제에 대항하려는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 국왕에 합류하면서 교황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1579년 그레고리오 13세는 다시 피츠모리스를 군 지휘관으로, 샌더즈는 교황 특사로 임명한 다음 50명의 군사를 아일랜드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제2차 데스몬스 반란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레고리오 13세가 이룬 가장 큰 성공은 무엇보다도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재복음화를 위해 유럽 대륙에 신학교 및 대학교를 세운 것이었다.
1580년 잉글랜드의 예수회원들이 교황을 찾아와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한 비오 5세의 칙서 《천상의 통치》(Regnans in Excelsis)의 내용을 완화시키거나 일시 중단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가톨릭교도들은 최소한 법적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표면상으로나마 여왕의 뜻에 복종하게 되었다.
1582년 기스 공작 앙리와 그의 동생 마옌 공작 샤를이 엘리자베스 1세를 시해하려고 시도한 일이 있었는데, 그레고리오 13세는 이 음모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1572년 프랑스에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일어나 수많은 위그노가 학살당하자 그레고리오 13세는 테 데움 미사를 봉헌하고 기념 메달을 주조하고 로마에서 3일간 축하연을 벌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당시 음모에 대해 교황이 전혀 사실을 몰랐으며, 단지 위그노파가 반역을 도모하다가 진압당해 실패한 것으로 오해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바티칸의 살라 레지아 궁전에는 조르조 바사리의 당시 사건을 묘사한 세 점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으며, 그레고리오 13세 때에 발행된 기념 메달의 앞면에는 교황의 초상이 있고, 뒷면에는 천사가 손에 든 칼로 꾸짖는 장면과 함께 라틴어로 ‘위그노 학살’ (UGONOTTORUM STRAGES)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예술 후원
그레고리오 13세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안에 웅장한 그레고리오 경당을 짓도록 명하였으며, 1580년에 퀴리날레 궁전을 확충하였다.
또한 1575년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욕장을 곡물 창고로 개조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레고리오 13세는 자신의 사생아인 자코모를 산탄젤로 성의 성주와 교회의 기수 (旗手)로 임명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교황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코모에게 귀족의 지위를 주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 국왕은 그를 자기 군대의 장군으로 등용하였다.
그레고리오 13세는 또한 소라 공국령을 획득하여 그곳의 영주로 자코모를 임명하여 교황령과 나폴리 왕국 사이를 지키도록 하였다.
이밖에도 각종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그레고리오 13세는 여기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권세가들의 토지나 재산을 압수하는 방법을 동원하였다.
이러한 조치로 한동안 재정 상태는 양호해졌지만, 미처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초래하였다.
수많은 귀족이 자신들의 이권을 침범당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교황과 귀족들 간의 해묵은 반목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그레고리오 13세는 1585년 4월 10일에 선종하였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